2025.10.15 | 매일성경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14절)
아마샤는 모세의 율법을 기준으로 행동했던 왕입니다(4절). 또한 전쟁을 앞두고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능기 돕기도 하시고 능기 패하게도 하시는 하나님, 내려 놓은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런 아마샤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승리 이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14절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고 합니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승리한 왕은 패전국의 신상을 전리품으로 가져오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요소를 없애기 위해 신상을 가져오지 말고 깨뜨리고 불사르라고 하셨습니다(신7:5절). 그런데 아마샤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상을 가져와 자기 신으로 경배하며 섬깁니다.
아마샤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 결정을 했는지 이유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에돔 사람들의 우상이 보기만 해도 아름답고 탐스러웠으며, 복을 줄 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은 전쟁에서는 승리는 주시는 분이지만,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는 다른 신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나라의 부강과 풍요를 위해서 우상을 가져와 섬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이유든 심각한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십니다. 곧바로 징계하지 않으시고 바른 길을 알려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선지자의 설명은 극히 상식적입니다. 이방의 신이 그들의 백성을 아마샤의 손에서 구원하지도 못한 무능한 신인데, 그런 신을 섬기며 우상에게 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맞아 죽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라고 협박합니다. 얼마 전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에 순종했던 아마샤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왜 아마샤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19절은 이스라엘 왕인 요아스의 입을 통해 알려줍니다. “네가 에돔 사람들을 쳤다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교만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잘 될 때가 더 위험합니다. 교만한 자들의 특징은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16절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20절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도 듣지 않고, 이스라엘 왕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조언도 듣지 않습니다.
아마샤의 아버지 요아스도 그랬습니다. 대제사장인 여호야다가 죽고 나서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은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감동시켜 생명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요아스는 듣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죽입니다. 그런 요아스를 하나님은 감찰하시고 신원하셔서 반역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마샤도 동일한 길을 걷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생명의 길, 형통의 길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복된 일입니다. 잘 듣고 순종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19절)
교만한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요아스 왕에게 사람을 보내 전쟁을 선포합니다. 아마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서, 신하들하고는 상의해서 전쟁을 결정했습니다. 어제 본문에 나왔듯 북이스라엘 용병들이 돌아가면서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한 것에 대한 보복 전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북이스라엘이 훨씬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결과가 뻔한 싸움입니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예화를 들어 전쟁을 만류합니다. 남유다를 가시나무에, 북이스라엘을 백향목에 비유하면서 가시나무가 백향목에서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레바논 들짐승들이 가시나무를 짓밟을 것이라고 합니다. 말도 안 되고, 상대도 안 되는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만한 아마샤는 듣지 않고 전쟁을 실행합니다. 그 이유를 20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들이 에돔 신들에게 구하였으므로 그 대적의 손에 넘기려 하심이더라”고 합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아마샤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상을 숭배하는 아마샤를 대적의 손에 넘기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마샤는 8절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유다는 패배하여 도망하고 아마샤는 사로잡힙니다. 북이스라엘 군대는 예루살렘까지 진격해서 성벽 400규빗을 헐어버립니다. 200m의 성벽이 사라진 것은 안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가 사라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물과 왕궁의 재물을 빼앗기고 사람들로 포로로 끌려갑니다. 교만한 왕이 벌인 무모한 전쟁의 결과입니다.
25-28절은 아마샤의 마지막을 기록합니다. 특이한 내용은 북이스라엘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아마샤는 15년을 생존합니다. 이것은 은혜이며 하나님이 주신 회복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샤로 돌이켰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 아마샤는 27절 “아마샤가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였으므로” 아버지처럼 반역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반역이 일어난 시점을 “아마샤로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라고 합니다. 24:20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마샤는 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고 유다 성읍에 묻힙니다. 그의 죽음이 영광스럽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끝이 납니다.
잘 될 때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안 될 때도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의 조언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특히 매일 묵상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2025.10.14 | 매일성경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2절)
요아스에 이어 아마샤가 왕이 됩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29년간을 통치합니다. 아마샤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2절입니다.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긍정적인 평가는 정직하게 행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샤가 시작은 좋았지만 지속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일 본문인 14절부터 보면 우상을 숭배하고 아버지 요아스처럼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 않습니다.
여러 왕들의 모습에서 시작은 하나님과 함께 했지만, 지속하지 못하므로 문제가 됩니다. 바른 시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변함없는 꾸준한 신앙입니다. 이 말씀이 역대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방의 포로가 되었는가? 한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흔들리는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온전케 하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걸었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이전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신실하게!’입니다.
아마샤가 정직하게 행하였을 때 하나님은 나라를 굳건하게 해주셨습니다. 아마샤는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을 처리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4절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반역자들은 7족을 멸한다고 합니다. 다시 반역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반역자들만 죽이고 자녀들은 죽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24:16절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까지 연좌제라는 제도가 있어서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잘못된 일에 연루되었다면 자녀들이 공직에 오르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래 전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녀가, 자녀의 죄 때문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에게서 끝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아마샤는 모세의 율법책대로 행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과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씀대로 조언하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말씀보다 분노와 감정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알지만 말씀과 상관없는 결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샤는 관습이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이것이 견고한 나라, 견고한 인생의 길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시다.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9절)
아마샤는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집합니다. 남유다에서 20세 이상으로 전장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니 30만 명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돈을 주고 용병을 사들입니다. 은 100달란트를 주고 북이스라엘에서 큰 용사 10만 명을 고용합니다. 은 100달란트는 지금으로하면 약 40-50억의 거액에 해당합니다. 그만큼 전쟁에서의 승리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용병들과 함께 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도모하는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용병 데리고 전쟁에 나가면 아무리 힘써 싸워도 패배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8절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작은 군대로도 승리하지만,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아무리 큰 군대일지라도 패배합니다. 어제 본문은 요아스가 순종하지 않을 때 아람의 적은 군대를 유다의 심히 큰 군대가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였다고 합니다(24:24절). 그러니 용병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왕인 아마샤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이미 100달란트를 지불했는데 그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돈도 잃고, 전쟁 능력도 잃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손해가 뻔합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이때 다시 하나님의 사람이 말합니다. 9절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마샤가 포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아마샤는 용병들을 돌려보냅니다. 눈에 보이는 용병보다 보이지 않지만 도우시는 하나님, 더 많은 것으로 채우실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용병들은 심히 분노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한 13절을 보면 돌아가면서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백성 3000명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합니다. 아마샤의 결정으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용병들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전쟁에 참가해서 얻을 전리품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로 보입니다. 이런 문제가 예상되었지만 아마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 아마샤에게 하나님은 적은 숫자로도 완전한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 신앙도 변함없이 신실합시다. 문제를 만나고 시험에 드는 일들을 만나지만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합시다. 때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손해인 것처럼 보이지만 도우시는 하나님, 더 많은 것으로 채우실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2025.10.13 | 매일성경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17절)
요아스 왕에게 대제사장인 여호야다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어린 요아스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냈으며 6년 동안 성전에서 안전하게 성장하게 했습니다. 요아스가 7살이 되던 해, 아달랴의 통치에 반역을 일으켜 요아스를 왕의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어린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지도 아래 바알 산당을 타파하고 성전 제사를 회복합니다. 특히 요아스는 오늘 본문 27절에서도 언급하는 것과 같이 성전을 보수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24:2절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라고 합니다. 14절도 그렇습니다.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에는 바른 길을 걸었는데, 죽은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17절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로 시작합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유다 방백들이 왕을 유혹해서 자신들의 말을 듣게 합니다. 그 내용이 18절인데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우상을 숭배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전 아달랴의 통치 아래서 우상 숭배하며 정치권력을 잡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요아스가 왕이 되고 여호야다가 실권을 행사하자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이제 여호야다가 죽자 세력을 모아 이전의 영광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전에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요아스가 우상숭배가 하나님 앞에 죄악인 줄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쉽게 방백들의 유혹에 넘어갔을까입니다. 어렸던 요아스는 당연히 여호야다의 지도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6절은 여호야다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이런 여호야다를 따라 요아스는 하나님과 성전을 사랑하는 통치를 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자신이 실권을 행사하기를 원했을 것이고, 실권을 잡았던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들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아스의 신앙은 스스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바른 기준을 세우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될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전에는 여호야다를 따르는 것이 유익이었고, 이제는 우상 숭배하는 방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누군가의 말을 통해서만 신앙 생활하는 것의 위험성이 여기 있습니다.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지 못하고, 내 이익과 편리를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이것은 심각한 죄로 이어집니다.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22절)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해 유다에 진노를 쏟으십니다. 또한 선지자를 보내사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이들은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중 하나가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입니다. 스가랴가 전한 말씀은 이렇습니다. 20절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유다가 형통하지 못한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다를 하나님도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버리심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이어지는 요아스의 죽음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가랴를 이들은 죽입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허락한 사람이 요아스 왕입니다. 스가랴를 죽은 장소가 21절 “여호와의 전 뜰 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여호야다의 아들을 죽인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입니다. 요아스는 함께 해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고,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또한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결과가 실패입니다. 스가랴는 죽으면서 22절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감찰하시고 신원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우상숭배의 결과 아람 군대가 유다를 쳐들어옵니다. 가장 먼저 23절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라고 하는데, 17절은 요아스를 우상숭배로 이끈 자들이 유다의 방백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합니다. 24절은 전쟁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라고 합니다. 아람 군대는 적고, 유다 군대는 심히 큰 군대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에 부강함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야다의 종교개혁에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아람의 적은 무리에게 패배를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넘기신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아무리 이스라엘 군대가 적어도 수많은 적군들을 하나님과 함께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수많은 군사로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전쟁에서 요아스는 크게 부상을 당합니다. 그런 요아스를 신하들이 반역하여 죽입니다. 그 이유를 25절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 스가랴를 죽였는데, 그 대가로 죽임을 당합니다. 또한 25절 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왕이지만 왕들의 묘실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16절에서 여호야다를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라는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신실했던 여호야다는 왕이 아니었지만 왕의 묘실에 묻히고, 요아스는 왕이지만 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합니다. 요아스의 신실하지 않음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아스의 시작과 끝이 다릅니다. 스스로 말씀을 통해 신앙의 기준을 바르게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요아스와 유다를 실패로 이끈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형통하지 못한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한 변하지 않는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2025.10.03 | 매일성경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2절)
하나님을 찾고 평안을 누리며 견고한 나라를 만들었던 아사 왕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계속 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사 36년에 북이스라엘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합니다. 이유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로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5:9절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에서 나와서 저희 중에 머물러 사는 자들을 모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신앙을 찾아서 남유다 아사에게로 온 사람들입니다. 바아사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유다를 공격하면서 라마를 건축합니다.
이것은 남유다 아사 왕에게는 위기입니다. 위기 속에 이전의 아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14장에서 구스 사람 세라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아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14:11절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그런 아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아사는 위기를 만나자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합니다. 아람 왕 벤하닷에게 곳간에 있는 은금을 다 주면서 북이스라엘과 맺은 약조를 깨뜨리고 남유다와 약조를 맺어 북이스라엘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는 공격하는 것은 아람 왕 벤하닷과의 약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사가 건넨 은금이 많았는지 아람 왕은 아사의 말대로 북이스라엘과의 약조를 깨고 오히려 공격을 합니다. 북이스라엘 성읍이 공격을 받자 바아사는 라마건축하는 일을 중단하고 돌아갑니다. 이때 아사는 유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라마로 가서 남겨진 건축자재들을 운반하여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사가 새로운 성읍은 건축하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무너졌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기초가되시는데 이 기초가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9절)
이런 아사의 무너진 신앙에 대해 하나님은 선견자 하나니를 보내 책망하십니다. 7절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남유다를 아람 군대보다 강하게 하셔서 유다의 영향력 아래 있게 하길 원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관계가 유지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은금을 바치고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이제 아람이 강성해집니다. 유다의 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하나님이 아닌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므로 당장 눈 앞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더 심각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9절 하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할 때 우리는 생각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 구스 사람의 많은 군대 공격에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를 주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능력을 베푸십니다. 이 말씀을 어제 본문 15:12,15절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온전한 마음, 나뉘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마음을 나뉘게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함을 빼앗아 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 신앙에 머물러 있지만 능력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견자를 보내신 것은 아사를 사랑하셔서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선견자의 말이 끝나자 아사가 회개 대신 분노하고 하나니를 옥에 가둡니다. 듣기 싫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 중 몇 사람을 학대했다고 하는데, 아마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지적하자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아사가 이전과 달리 교만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만할 때 누군가의 권면과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아사는 안타깝게도 좋은 변화, 성숙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유지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견고해지자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힘으로, 외교 수단으로 살아가려 한 것입니다.
아사의 마지막은 슬픈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아사 39년에 발에 병이 들어 위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더 아사에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12절 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문은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좋은 변화가 있고 좋지 않은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는 이유는 변화와 성숙을 위함입니다. 그리고 성숙할수록 우리 안에 능력과 기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반면 신앙의 변질은 위험합니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를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나뉘었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삶이 됩시다.
2025.10.02 | 매일성경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2절)
아비야의 이야기는 13장 한 장이라면, 아사에 대한 이야기는 14-16장까지 3장에 이어집니다. 저자가 아사의 삶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것이지요. 아사는 어제 말씀에서 하나님을 찾고 평안을 누리며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스 사람 세라와의 전쟁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승리 이후 하나님은 아사에게 오뎃의 아들 아사랴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절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핵심은 다시 “여호와를 찾으라”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말씀이 반복됩니다(2,4,12,15).
질문이 생깁니다. 다른 어떤 왕보다 하나님을 찾아서 평안을 누린 아사에게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고 선지자까지 보내셔셔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기준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12절과 15절을 보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남유다는 솔로몬 시대부터 우상숭배로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다보니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행히 아사가 왕이 되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사의 마음에 이 정도 하나님을 찾았으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강력하게 종교개혁을 추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잘못하는 사람에게도 경고하시지만, 잘 하고 있는 아사에게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는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에 참 신도 없고 제사장도 율법도 없은지 오래된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사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평안이 사라집니다. 서로 치는 전쟁이 일어나고 피차 상한 바가 되어 고통의 삶입니다. 이런 환난을 만나서야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찾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7절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강하게 하라는 것이냐면? 하나님을 찾고 우상을 제거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고 강하게 실행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다양하지만 어제 본문을 중심으로 본다면 고난이 아닌 평안이요, 평안을 통한 견고함입니다.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15절)
아사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실행에 옮깁니다. 아사의 순종이 귀합니다. 먼저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가증한 물건들을 제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 빼앗은 성읍에서도 우상을 없앱니다. 8절 하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고”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제단도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9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고 합니다.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아사와 함게 하심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아사가 풍요를 누리고 성공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돌아옵니다.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이 회복해야 할 모습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이용한 부와 성공이 아닌 세상과 다르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아사는 전리품 중 소 700마리와 양 7000마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언약을 맺습니다. 내용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13절을 보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선포합니다. 과한 결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면 무엇이 이스라엘을 전쟁의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 넣었는가? 바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아사를 중심으로 남유다가 하나님을 찾을 때 15절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고 합니다.
본문은 마지막으로 우상 척결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16절은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상을 만들어 숭배했다고 합니다. ‘마아가’는 아비야의 어머니로 아사의 할머니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상숭배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4장에서도 우상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할머니의 우상숭배는 손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우상을 불사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 제거는 멀리서부터가 아닌 가까운 곳에서부터, 다른 사람부터가 아닌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와 가정과 교회의 우상들은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또한 한국교회 회복의 길입니다.
적당주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내 안의 우상부터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