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9 | 매일성경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4절)
11장에서 예배의 질서를 다룬 바울은, 12장부터 14장까지 은사를 다룹니다. 그 유명한 사랑장인 13장이 바로 이 은사 이야기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은사를 길게 다룬다는 것은 곧 고린도 교회가 은사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의 중심에는 방언이 있었습니다.
1절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여기 ‘신령한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은사에 대해 바르게 알기를 원합니다. 먼저 성도들의 이전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2절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우상을 숭배했다고 하면 될 텐데, 굳이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이방 신전에서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 신비한 말과 행동을 쏟아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예수 믿기 전에는 그렇게 우상에 휘둘려 끌려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른 일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람의 특징은 신비한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율법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 내 생명과 시간과 소유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주로 인정하던 시대에, “내 주는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때론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면, 그것 자체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4-6절을 보면 바울이 같은 내용을 세 번에 걸쳐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4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절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은사가 원어로 ‘카리스마’입니다. 이 단어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에서 나왔습니다. 곧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은사를 ‘은사’, ‘직분’, ‘사역’으로 부르며, 그 주체를 각각 성령, 주(예수님),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곧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굳이 삼위 하나님을 다 언급할까요? 삼위 하나님은 서로 경쟁하지 않으십니다. 완전한 신뢰 가운데 하나를 이루십니다. 그런 삼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면, 그 은사는 마땅히 교회의 하나 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사 때문에 경쟁과 분쟁이 생긴다면 그것은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11절)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유익은 내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입니다. 이것이 은사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은사는 내 자랑이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자기 자랑과 영광을 구하느라 은사가 분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11절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받고 싶은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주권대로 각 사람에게 알맞게 나누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는 반드시 은사가 있습니다. 다만 자기 은사를 스스로 잘 모를 때가 있는데, 오히려 곁에 있는 이들이 정확히 알아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나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8-10절에서 바울은 은사의 종류를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입니다.
몇 가지는 오해를 풀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는 세상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다 혼란에 빠졌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은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겸손히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도 특별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확신을 뜻합니다. 보통 사람은 작은 문제에도 흔들리는데, 강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가장 많이 오해받습니다. 흔히 미래를 내다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예언자라고 하고, 이들이 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들을 말하며 바울이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7절 “성령을 나타내심”, 8절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9절 “같은 성령으로”,“한 성령으로”, 그리고 11절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입니다. 다양한 은사가 있어도 그것을 주시는 분은 한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은사를 두고 누가 낫고 못하다며 경쟁하고 다투는 것은,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본래 뜻을 놓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받으면 특별히 은혜받은 것이라 여겨 절제 없이 예배를 어지럽힌 것이 잘못된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공동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으니, 내 은사가 무엇인지 기도하며 찾고, 모르겠다면 주변에 물어 발견하여, 그것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 섬길 때, 다른 사람은 힘들어하는 일도 기쁨과 감사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알맞게 선물로 주셨으니, 그것을 두고 자랑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본래 하나 됨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2026.06.18 | 매일성경
●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22절)
11장 앞부분에서 예배의 질서를 다룬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성찬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며 그 십자가를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칭찬했습니다(2절). 그러나 오늘은 정반대입니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22절 끝에서도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거듭 말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심각했을까요? 17절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성도들의 모임이 유익이 아니라 해로움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일 때마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 차라리 모이지 않는 편이 나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모임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배도 소그룹도 함께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런 모임이 은혜와 기쁨, 격려와 위로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상처와 갈등이 된다면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우리 자신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속한 모임이 유익이 되고 있는가, 해로움이 되고 있는가. 나는 유익이 되는 모임을 이루고 있는가?”
18절에서 바울은 다시 분쟁을 언급합니다. 1장부터 다룬 분쟁이 성찬 자리에서도 드러난 것입니다. 20-21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이 내용은 당시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예배당 건물이 없어, 큰 집을 가진 부유한 성도의 집에 모였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시간이 여유로워 일찍 와서 주인과 친한 이들끼리 안쪽의 좋은 자리에 앉아, 다른 성도들이 오기도 전에 떡을 배불리 먹고 잔을 마음껏 마셨습니다. 심지어 취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취하도록 마신 것입니다.
반면 가난한 성도, 노예 신분의 성도는 늦게까지 일하다가 뒤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음식이 없어, 주님의 떡과 잔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이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가요? 당시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세상에서 함께할 수 없던 주인과 노예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한 식탁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의 벽이 복음으로 깨진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는 먼저 먹고 취하고, 없는 자는 소외되어 굶주린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이라고 책망합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성찬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때, 마음으로 차별하고 소외시킨다면 역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를 일입니다. 오히려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삶이 회복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방향입니다.
●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절)
바울은 성찬이 무엇인지 다시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찬을 시행하신 시점이 중요합니다. 23절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24-25절에서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고,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새 언약’이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통해, 죄로 깨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세로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했다면, 가로로는 성도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성도가 지체를 이루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성찬식을 하면서 빵 한 덩어리를 함께 떼어 먹었는데, 이는 “우리가 한 몸”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찬을 나누면서 차별하고 분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찬식이 죄를 짓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를 살피라”는 말을 “내가 죄지은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바울이 말하는 ‘자기 살핌’은 내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성도를 소외시키거나 차별하지 않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온전히 실현하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29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서 ‘주의 몸’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하나 된 몸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분쟁을 일으키며 참여하면,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30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으니라” 여기서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로 약해지고 병들고 죽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심판이 아니라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함을 일깨우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권면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잠깐을 기다리지 못해 늦게 온 성도를 소외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나의 권리와 자유를 조금 내려놓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계속되는 문제의 밑바탕에는 자유와 권리의 남용이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바울은 자유와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내려놓고 절제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 모임이 유익이 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임 공동체입니다. 그 모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도록 세워가는 것, 때로 힘들어도 소그룹에 참여해 함께 나누며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찬에 참여할 때 공동체의 하나 됨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지체들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지,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2026.06.17 | 매일성경
●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3절)
8장부터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룬 바울은, 11:2절부터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예배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여자가 머리를 가리느냐 마느냐, 남자가 무엇을 쓰느냐는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알면 바울이 진짜 다루는 문제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본문을 풀어가는 열쇠는 13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곧 고린도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그것도 조용히가 아니라 과격하게 기도하고 예언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의 도시였고, 이방 신전에서 여자 사제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광적으로 예언하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예배 중에 누군가 갑자기 일어나 머리를 풀고 소리치며 기도한다면 예배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를 괴롭혀온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배 중에도 “나는 은혜받아서 하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은혜받았다 해도 다른 사람의 신앙에 걸림돌이 된다면 옳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전제 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2절에서 바울은 모처럼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문제가 많은 교회였지만, 잘하는 부분은 분명히 칭찬합니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책망할 것은 책망하는 균형은 우리도 배울 점입니다.
그러나 3절에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예배의 혼란을 질서와 권위의 문제로 정리해 갑니다. 여기서 ‘머리’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서가 3절 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동등하지만 질서 안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남성과 여성을 똑같이 존귀하게 지으셨지만, 가정과 예배의 질서 안에서는 권위의 자리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질서를 가정에 적용해 설명합니다. 아내에게는 복종을, 남편에게는 사랑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 같은 사랑입니다. 생명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복종이 어려워 보이지만,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이야말로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질서는 한쪽의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책임 위에 세워집니다.
이 질서 위에서 바울은 머리 문제를 다룹니다. 4-5절,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고, 여자는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방 신전에서 남자 제사장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예배를 집례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교회 남자들이 그것을 따라 한다면 우상숭배와 교회 예배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둘째, 여자 사제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예언하던 모습이 교회 여성들에게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오히려 영광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5절의 표현은 충격적입니다. 머리를 가리지 않고 예언하는 것은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당시 머리를 미는 것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강제로 가하던 수치의 표시였습니다. 바울은 그만큼 강한 표현으로 이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6절에서 바울이 권하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예배드릴 때 단정하게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13절)
14절의 ‘본성’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본성’은 당시 사회가 남녀를 구별하던 보편적 관습을 가리킵니다. 그 시대 문화에서 남성은 머리에 무언가를 쓰지 않고 여성은 단정히 가리는 것이 통념이었는데, 고린도 교회 여성들이 이를 거부하며 “우리는 자유롭다”고 한 것이 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울의 설명을 듣다 보면 여성에게 불리하게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균형을 잡아줍니다. 11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처음 창조 때는 아담에게서 하와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모든 남자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속해 있고,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핵심은 분명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주 안에서 똑같이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가정과 예배에는 질서와 권위가 있고,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6절 “그러나 누구든지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누가 따지고 논쟁하려 해도, 바울은 담대하게 교회의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본문대로 여성이 머리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핵심은 머리를 가리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두 가지 원리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복장이나 태도, 예배에서의 자세가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한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둘째는 성도의 유익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새로 온 사람이 우리 모습을 보고 은혜받을 수도,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내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보편적인 관습을 존중하며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절제하고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 그것이 복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2026.06.16 | 매일성경
●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절)
8장부터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며 우상의 신전에까지 들어가 담대하게 그 음식을 먹었고,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9장에서 바울은 사도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자신을 예로 들었고, 10장에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거울 삼아 우상숭배를 경고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 제물에 대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바울의 권면이 강하고 거칠수록, 그 밑바닥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고 부릅니다. 여기서 ‘피하라’는 의미는 ‘도망치듯 달아나라’입니다. 음행을 피하듯 우상숭배도 피해 달아나야합니다. 15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늘 지혜를 자부하던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 지혜로 분별해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작정 “하지 말라” 하지 않고, 왜 안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풀어갑니다. 그 출발이 성찬입니다. 16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성찬에서 잔을 마시고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여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코이노니아’로, 단순한 동참을 넘어 깊은 사귐과 연합을 뜻합니다. 또한 17절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이 구절에 ‘하나’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곧 성찬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참여한 성도들끼리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18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제사를 예로 듭니다.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의식과 하나가 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냥 몸만 참여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참여하다’가 많이 반복됩니다(16,17,18,21). 그런데 바울은 ‘참여’를 뜻하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를 의도적으로 함께 씁니다. 16, 18, 20절의 ‘참여’는 깊은 내적 연합을 뜻하는 ‘코이노니아’이고, 17절과 21절의 ‘참여’는 겉으로 함께하는 동참을 뜻하는 ‘메테코’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저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메테코) 이미 깊은 연합인 ‘코이노니아’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으로 동참하는 것조차 금합니다. 그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식탁과 하나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바울은 앞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꺼냅니다. 20절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우상 자체는 헛것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우상으로 향하게 하고 그 숭배를 조종하는 영적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이 귀신의 일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배후에서 일하는 어둠의 세력은 실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신전의 자리에 참여해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어둠을 주관하는 귀신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21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예수님과 하나 된 성도가 귀신의 자리와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보았듯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합이 되기에,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을 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권면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자유를 내세워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4절)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6장에도 나왔던 것처럼 “모든 것이 가하다”는 고린도 성도들의 구호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두 가지 잣대를 댑니다. 이것이 유익한가,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이어 본문의 핵심이 나옵니다.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신앙생활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다 말하고 다 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실제 상황에 적용해서 우상 제물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25-26절,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라 해도,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이 초대해 음식을 차려주면 그것도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은 제물입니다”라고 알려주면 그때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 말을 꺼낸 사람의 마음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먹어도 죄가 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입니다.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이 말씀이 바로 이 긴 이갸기의 결론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를 두고, 결국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32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다른 성도가 시험에 들고 흔들린다면 옳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보고 은혜받고 도전받아 더 신실하게 살고 싶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섬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분을 본받아, 바울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것은 곧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 참여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인지, 아닌지를 잘 살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것이 지혜롭고 성숙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성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가 하나로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2026.06.15 | 매일성경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25절)
8장에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루며, 자유가 있더라도 연약한 성도를 위해 절제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9장 앞부분은 바울 자신이 사도로서 마땅히 누릴 권리를 어떻게 절제했는지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절제의 이야기를 운동 경기에 빗대어 이어갑니다. 이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울 삼아 고린도 성도들에게 경고를 전합니다.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바울은 신앙생활을 달리기에 비유합니다. 고린도에는 유명한 운동 경기가 있었기에, 성도들은 이 비유를 곧바로 알아들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절제’입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는 4년 만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피땀 흘려 절제하고 훈련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신앙이 성장하는 일은 없습니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운동 경기의 우승자가 쓰는 월계관은 곧 시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사라질 관을 위해서도 사람들은 그토록 절제하는데, 우리에게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더더욱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저마다 하고 싶은 대로, 절제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있어야 개인 신앙도 공동체도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26절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아무리 잘 달려도 결승점과 반대로 달리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신앙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듯, 우리 신앙의 초점은 주님이어야 합니다. 만일 신앙의 목표가 나 자신, 내 영광, 내 성공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향방 없이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그 밑바닥의 동기가 무엇인지 살피고, 오직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7절에서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만큼 헌신한 사람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정작 자신이 절제하지 못해 버림받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깨어 있음입니다. 앞장서서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특히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6절)
10장에서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져와서 고린도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1-2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구약 백성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홍해를 통과한 사건을 세례로 본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먹고 마셨다고 하는데, 신령한 음식은 만나, 신령한 음료는 반석에서 난 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광야의 은혜를 성찬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구약 백성도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고린도 성도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5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 큰 은혜를 받고도 광야에서 멸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고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삼아 네 가지를 경고합니다.
첫째, 우상숭배입니다. 7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사이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뛰고 놀았던 사건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첫 번째로 지적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다룬 우상의 제물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전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도시 유력자들이 모이는 사교의 중심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신분이나 이익을 지키는 길이 되기도 했기에, 성도들이 “나는 괜찮다”며 참석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둘째, 음행입니다. 광야에서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은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셋째,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입니다. 넷째, 원망입니다.
11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이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신전에 들어가 우상을 섬기지는 않지만,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우상인 줄도 모르고 붙들고 사는 것들이 많습니다. 돈, 자녀,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살피는 일이 필요합니다.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 성도들은 자기들이 잘 서있 다고 자랑하며 아무 문제 없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러다 넘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깨어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시험에 대해 말합니다.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앞의 경고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시험하고 원망한 것은, 대부분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것을 시험거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험과 문제를 만날 때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만나면 이것이 우리를 삼키고 끝장낼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십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이건 못 이기겠다” 싶던 문제들이 결국 지나갔습니다. 이 말씀이 이미 우리 삶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절제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내 삶에서 절제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살피며, 신앙의 경주를 잘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서 있다고 교만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늘 깨어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시험을 만나도 감당할 길과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