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1 | 매일성경
●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절)
오늘부터 사사기를 묵상합니다. 사사기는 사사들의 활동을 기록한 책인데, 이 책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시대에 왕이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지도자가 없어, 하나님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람을 세우셨는데 그들이 사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둡고 혼란했던 시대가 바로 이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기를 이해하려면 창세기부터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며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땅과 민족입니다.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 민족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은 야곱의 70식구를 애굽으로 옮기셨고, 400년의 노예 생활 동안 이스라엘은 번성하여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민족은 이루어졌으나 노예였던 그들을, 하나님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워 출애굽시키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의 불순종으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어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를 정복하는 일은 단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가나안을 차지했으나, 구석구석은 아직 다 점령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사기가 시작됩니다. 1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강력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백성을 이끌던 지도자의 죽음은 큰 충격입니다. 이제 남은 정복 전쟁을 지도자 없이 치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웠는데, 왜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떠났을까요. 이것을 여호수아의 문제라고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왕을 세우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좋은 지도자가 세워지면 나라가 평안하지만, 악한 지도자가 세워지면 그 한 사람 때문에 온 백성이 신음합니다. 처음에는 선하게 시작한 왕도 권력이 생기면 교만해지고 변질되는 일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왕이 없어도 하나님이 참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를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주변 나라는 다 왕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왕 없는 이스라엘이 왕 있는 나라보다 더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올 때까지는 인간 지도자를 세우셨지만, 들어온 뒤로는 각 지파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흩어져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지도자가 없는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보인 첫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지도자를 급히 세우거나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지 않고,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묻습니다. 1절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정복 전쟁을 앞두고 어느 지파가 먼저 나갈지를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하나님이 여러 지파 가운데 유다를 먼저 세우신 것은, 숫자도 가장 많지만 앞으로 유다 지파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끄실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다윗과, 그 계보에서 나실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서 열심히 싸워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2절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그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구약 백성의 삶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됩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고 하셨는데, 백성이 가서 보니 가나안 족속은 크고 성은 견고하여 “우리 힘으로 못 하겠다”며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전쟁하기 전에 이미 “내가 넘겨주었다” 하시며, 군사력이 많든 적든 무기가 좋든 아니든 신경 쓰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라 하십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시고 그 약속에 우리가 순종함으로 열매를 누리는 것입니다.
유다는 시므온지파와 함께 기기를 원합니다. 3절에 ‘함께’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이런 유다의 선택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혼자 가라고 했는데 함께 갔고,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데 한 지파만 데리고 간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분배된 지도를 보면 시므온은 유다지파 안에 거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묵상하다보면 이렇게 해석이 모호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이때 우리 기준으로 너무 많이 나가지 않고 성경이 어디까지 말씀하시는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4절은 전쟁 결과를 단순하게 전합니다.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 그들의 손에 넘기시니”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초점은 ‘유다가 잘 싸워 이겼다’가 아니라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넘기셨다’는 데 있습니다. 앞서 넘겨주시겠다 약속하셨고, 유다가 순종하여 올라가니 하나님이 그 약속대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7절)
그런데 이 승리의 이야기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이어집니다. 유다가 베섹에서 아도니베섹이라는 왕을 사로잡았는데, 6절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른 이유는 다시는 전쟁하지 못하도록 무력화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에서 이기면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라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상대를 굴복시킬 때 쓰던 풍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승리한 뒤에 가나안 사람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죄악이 가득한 땅이라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진멸하는 대신 가나안식으로 손가락을 잘라 살려 둠으로써, 자기 아래 굴복시키며 그들의 풍습을 닮아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백성에게 가장 엄히 경계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풍습을 따라 하면 큰일 난다, 그들이 그 죄 때문에 쫓겨나는데 너희가 그들을 닮으면 너희도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이 경고가 아도니베섹의 입을 통해 주어집니다. 7절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그가 옛날에 일흔 왕에게 잔인하게 행한 그대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갚으셨다고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원리는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을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사사기는 시작에서부터 강조합니다.
8절 이후는 유다의 정복이 계속 이어집니다.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합니다. 10절에는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입니다. 이 세 사람은 아낙 자손, 곧 거인 족속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를 두려워하게 만든 공포의 대상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의 대상이 마침내 무너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먼저 약속하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 형편을 보고 결과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순종함으로 그 열매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며 나아갑시다.
다른 하나는 세상을 닮아가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종하는 모습과 함께, 사사기의 시작부터 가나안의 풍습을 닮아 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 결국 이스라엘을 혼란으로 몰아갑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 살되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026.08.31 | 매일성경
●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2절)
오늘 39장은 이사야 전반부의 마지막입니다. 이사야는 크게 두 부분, 1-39장까지와 40-66장까지로 나뉩니다. 오늘은 전반부의 마지막 장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36-38장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을 이기고, 죽을 병에서 생명을 15년 연장받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좋은 결말이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전반부의 마지막 39장은 정반대의 실패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왜 하필 이 실패의 이야기로 전반부가 닫히는지,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은 것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당시 최강대국은 여전히 앗수르였고, 바벨론은 아직 힘을 키워 가던 신흥 세력이었습니다. 그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의 쾌유를 축하한다며 글과 예물을 보내왔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오가는 예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선물은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함께 손잡고 강대국 앗수르에 맞서자는 정치적 제안이 담긴 것입니다. 이전의 히스기야였다면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반응이 문제입니다. 2절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병에서 나은 자기를 축하해 주니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보물 창고를 다 열어 보여주고, 심지어 무기고까지 전부 보여 주었습니다. 작은 나라 유다가 이 모든 것을 열어 보인 이유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약소국이지만 아직 너희와 손잡을 만한 쓸모가 있다”는 것을 과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유다는 히스기야가 무기고까지 열어 보인 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히스기야가 무너진 시점입니다. 그는 앗수르가 쳐들어와 그토록 조롱하고 위협했을 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위기에서 성전으로 나아가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을 때에도 벽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여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엄청난 위기 속에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무너진 때는, 누군가가 자기를 인정해 주고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였습니다. 평안할 때였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위기가 아니라 형통과 인정 앞에서 무너지는 존재입니다. 연약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아셨고, 이사야 선지자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십니다. 3절 이사야가 두 가지를 묻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어디서 왔는지만 대답합니다.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그리고 첫 번째 질문인 ‘무슨 말을 하였느냐’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나라가 은밀히 나눈 것은 “손잡고 앗수르에 맞서자”는 정치적 밀약이었고, 그 대가로 예물이 오간 것입니다. 이어 4절에서 이사야가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묻자, 히스기야는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답합니다.
●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6절)
이제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5-6절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히스기야가 자랑삼아 보여 준 그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벨론으로 옮겨진다’는 것은 전시하러 간다는 말이 아니라,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고 재물은 약탈당한다는 뜻입니다.
7절은 더 충격입니다.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히스기야에게서 날 자손은 왕이 될 왕족들입니다. 그 왕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환관이 된다는 것은, 다윗 왕조의 왕위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앗수르에서 구원받고 생명까지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그 은혜를 자랑하는 대신 자기 영광을 드러내다가 이런 심판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바벨론 사절 앞에서 자랑했어야 할 것은 자기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민족의 위기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내 생명을 연장하셨다”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당황하게 하는 구절은 8절입니다. 이런 심판을 들었다면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처럼 다시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며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으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자기의 잘못으로 미래 세대와 후손에게 이토록 심각한 재앙이 예고되었는데, 히스기야는 “그것은 내 생전의 일이 아니니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후손이 겪을 일이니 나는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한때는 그토록 경건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때 경건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다른 이의 아픔이나 미래 세대는 안중에 없이 “나만 평안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스기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사야 전반부가 이 실패의 이야기로 끝날까요? 39장 앞까지만 보면 히스기야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을 등졌던 아버지 아하스와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39장에 이르러 보니, 그 히스기야마저 무너집니다. 결국 인간은,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사야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40장부터는 인간 왕이 아니라 참된 통치자, 곧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히스기야의 실패가 전반부의 마지막에 놓인 것은, 가장 훌륭한 인간 왕조차 실패하기에 우리에게 참된 왕이 필요함을 드러내어, 40장의 메시아를 향해 길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은 흔들리고 변하지만 하나님은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으시며,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는, 무너지는 인간 왕과 달리 영원히 견고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잘될 때, 인정받을 때 더욱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무너진 자리는 위기가 아니라 형통과 자랑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때도 종종 힘들 때가 아니라, 잘되고 누군가 인정하고 칭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람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며, 형통할 때일수록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나를 넘어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보다 앞세웠고, 자기 생전의 평안만 생각하며 후손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사람과의 연결은 소중하지만, 사람이 하나님보다 앞선 의지의 대상이 되면 위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세우고, 나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미래 세대까지 생각하며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6.08.28 | 매일성경
●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2절)
어제 36장에서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벽에서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조롱했습니다. 그 말을 온 백성이 들었습니다. 왕은 이방 장군 앞에서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를 어찌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 절망적인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가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우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설 때가 있는데, 히스기야의 모습에서 길을 찾아봅시다.
1절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는 것은 애통과 슬픔의 표시이자 회개와 겸비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 가운데 히스기야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이 ‘여호와의 전’입니다. 이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는 표현이 14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두 번 모두 그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았고, 군사력이 강한 다른 나라에 도움을 구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누구를 찾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누구를 찾습니까?
어제 본문에서도 설명했듯, 36장의 위기는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가 겪은 7장의 위기와 대조를 이룹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그에게 직접 보내셨음에도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반대입니다. 그는 왕궁 맡은 자와 서기관과 제사장의 어른들에게 굵은 베 옷을 입혀 선지자 이사야에게 먼저 보냅니다. 선지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왕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 함께 기도하기를 구한 것입니다. 같은 위협 앞에서 아버지 아하스는 하나님을 외면했고, 아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시합니다. 3절,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새 생명이 태어나야 할 순간에 해산할 힘이 없어 산모와 아이가 함께 위기에 빠진 것, 그것이 지금 유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4절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2번이나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선지자의 직무를 담당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가장 마음 아파한 것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단지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가 아니었습니다. 대적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함부로 조롱하고 모욕했다는 사실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멸망시킨 이방 나라의 신들과 똑같이 취급했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은 그런 신들과 전혀 다른 살아 계신 분이시니, 그들의 모욕에 능력으로 역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신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자, 하나님은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6절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 조롱을 다 듣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7절 “보라 내가 그의 마음을 움직여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고국에서 그를 칼에 죽게 하리라” 기세등등한 산헤립이 소문 하나를 듣고 물러가며, 결국 자기 땅에서 칼에 맞아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강대국을 이룬 최고의 왕이지만 정작 자기 앞날 한 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16절)
이렇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면, 상황이 나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현실은 더 심각해집니다. 8절부터 보면, 산헤립은 물러가기는커녕 다시 사신을 보내 더 강하게 위협합니다. 10절 “너희는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네가 신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이번에는 말에 그치지 않고 편지까지 써서 왕을 직접 협박합니다. 기도하기 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일이 곧 풀리리라 기대하는데, 도리어 상황이 더 복잡하고 심각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시나,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응답하셨어도, 그 응답이 이루어지기까지 시련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절, 이 위협 앞에서 히스기야는 다시 그 편지를 들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펴 놓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가 어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했는가입니다. 16절입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이 한 절에 히스기야가 붙든 하나님이 세 부분으로 담겨 있습니다. 첫째, ‘그룹 사이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성전 언약궤 위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는데, 그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상황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그때에도,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며 함께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둘째,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앗수르는 열방의 신들을 다 멸했으니 하나님도 마찬가지라 했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임을 확신했습니다. 다른 신들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우상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홀로 살아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셋째,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라면 저 앗수르의 대적들조차 그분의 손안에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기도의 핵심이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임재하시고 유일하시며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신뢰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기도의 절정은 20절입니다. 그의 기도는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 홀로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구원을 구하되, 그 구원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조롱하던 저들의 눈앞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의 유일하신 살아 계신 분이심을 이 일을 통해 드러내 달라는 것입니다. 곧 히스기야는 자기 문제의 해결을 넘어,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높임과 영광을 받으시고 온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기를 구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문제를 만날 때 가장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수치와 절망의 위기에서 사람이나 강대국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위협이 거듭될 때마다 다시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펴 놓았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다른 데로 가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 뒤에 상황이 더 어려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룹 사이에 임재하시고,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분이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목적을 자기 문제의 해결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확신하고, 그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만이 높임 받으시기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8.27 | 매일성경
●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2절)
이사야를 읽다 보면 심판과 회복의 이야기가 반복되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36장부터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일어난 앗수르의 침략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사야가 여러 역사 가운데 이 사건을 택해 자세히 기록한 것은, 이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절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쳐서 취하니라.” 남유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앗수르가 마침내 쳐들어온 것입니다. ‘모든 견고한 성읍을 취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나머지 지역이 이미 앗수르의 손에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하나만 남은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굴복시키려 랍사게라는 장군을 보냅니다. 그가 라기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와 2절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길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이사야서에 이미 나왔던 장소입니다. 오래전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만났던 곳입니다(7:3). 이사야는 여기서 아하스에게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권면했습니다. 그러면서 7:9절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굳게 설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끝내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같은 장소에서 이번에는 앗수르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 같은 위협 앞에서 아버지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무너졌는데, 과연 아들 히스기야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것이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대부분은 랍사게의 말입니다. 그의 조롱의 중심에는 ‘믿음’과 ‘신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믿고 신뢰할 것인가? 4절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5절 “네가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무엇을 붙들고 버티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신뢰의 대상을 공격합니다.
먼저 애굽입니다. 6절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부러진 갈대를 지팡이 삼아 짚으면 도리어 손을 찌르듯, 애굽을 의지하면 해만 입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30-31장에서 하나님이 유다에게 하셨던 경고를, 아이러니하게도 적인 랍사게가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입니다. 7절에서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마저 조롱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여 버리고 예루살렘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했는데, 그 하나님을 어찌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랍사게의 무지가 드러납니다. 히스기야가 산당을 없앤 것은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예배받기를 명하셨는데, 유다 백성은 여기저기 산당을 두고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며 신앙을 병들게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헐어 예배를 바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의 눈으로 보는 랍사게에게는, 여러 곳에서 제사하던 것을 한 곳으로 줄인 히스기야가 신을 노엽게 한 어리석은 왕으로 보인 것입니다. 여기에 참 신앙과 우상 숭배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우상 숭배는 아무 데서나 정성만 바치면 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이 정하신 자리에서 정하신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랍사게의 조롱은 더 노골적으로 이어집니다. 8절에서 그는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고 비웃습니다. 싸울 사람조차 없는 유다의 처지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이 땅을 멸하러 올라온 것이 여호와의 뜻 없이 된 줄 아느냐, 여호와께서 나더러 치라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끌어다, 이 침공마저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합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서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21절)
이런 상황에서 유다의 신하들이 요청합니다. 11절, 아람 방언으로 말하고, 성벽 위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백성이 이 조롱을 다 들으면 사기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랍사게는 바로 그것을 노렸습니다. 그는 도리어 더 크게 유다 방언으로 외치며, 항복하지 않으면 성이 포위되어 백성이 제 배설물을 먹고 마시게 되리라 위협합니다. 이 심리전의 표적은 처음부터 왕이 아니라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고 합니다. 14절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15절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말을 따르지 말라”, 18절 “여호와께서 건지시리라 해도 속지 말라” 왕과 백성 사이를, 그리고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대신 16-17절에서는 항복하면 각자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평안히 살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행복한 일상을 살게 해준다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열방의 신들을 열거하며 “어느 신이 앗수르 손에서 자기 나라를 건졌느냐, 하물며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건지겠느냐”(18-20절)고, 하나님을 이방의 무력한 신들과 나란히 놓고 모독합니다.
이 정도면 유다는 무너져 항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21절이 뜻밖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히스기야가 백성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말라 명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잠잠함’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이 명령은 30:15절에서 이어진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으리라”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이 모든 것을 듣고 계시며 반드시 앗수르 문제를 해결하시리라 믿고,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조롱에 말로 맞서는 대신, 인간적인 방법을 찾는 대신에 하나님께 이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아하스는 위협 앞에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택했지만, 히스기야는 더 극심한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잠잠히 신뢰했습니다. 같은 문제를 만나도 어떤 이는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사야는 이 두 왕의 대조를 통해, 참된 신뢰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리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랍사게는 유다가 신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지 말라, 그가 너를 건지겠느냐”고 외쳤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믿어 봐야 소용없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라”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립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도 그런 의심과 회의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아무리 크고 그럴듯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흔들려는 조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면초가의 위기에서 말로 맞서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께 그 일을 맡겼습니다. 우리는 작은 문제 하나에도 불안과 두려움에 흔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며 신뢰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일하십니다.
2026.08.21 | 매일성경
●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18절)
어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에게 “화 있을진저”라 책망하시며, 애굽을 의지한 결과가 무너지는 담과 깨진 토기 같으리라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살 길을 일러 주셨습니다.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고, 잠잠히 신뢰해야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배은망덕한 자식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인데, 놀랍게도 반전이 일어납니다.
18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유다가 하나님을 저버렸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를 기다리십니다. 벌하려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려 기다리시고, 긍휼히 여기려 일어나십니다.
어제 하나님이 유다를 ‘패역한 자식’이라 부르셨습니다(1절).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제멋대로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아버지는 패역한 자식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며 일어나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8절 하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여기 ‘정의의 하나님’은 상황이나 문제에 따라 흔들리거나 변하는 분이 아니라,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유다가 아무리 하나님을 저버려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래서 18절은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로 맺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니, 우리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 ‘은혜’가 18절과 19절에 반복됩니다. 18절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라 했고, 19절 뒤에서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라 합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며,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이 다시는 통곡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회복은 어떤 모습입니까요? 20절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회복이라 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을 떠올리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앗수르의 위협과 포위 같은 고난이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없으면 진정한 돌이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 속에 은혜가 있습니다. 20절 중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보리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스승을 거두지 않으시고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스승은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래서 21절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스승이 함께하시며 “그 길이 아니다, 이 길이 바른 길이다” 하고 뒤에서 인도합니다.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해 헤매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친히 스승 되어 그 길을 일러 주십니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유다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가볍게 여기며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은 말씀으로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이 스승이 22절에서는 우상을 제거합니다. 은을 입힌 조각한 우상과 금을 올린 부어 만든 우상을, 백성이 이제 부정한 물건처럼 던지며 “나가라” 합니다. 유다가 그토록 우상을 섬긴 이유는 풍요를 위해서였습니다. 주변 나라가 다 우상을 섬기며 잘되는 듯 보이니, 우리도 그러면 잘되리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버리면 도리어 풍요를 잃을까요. 정반대입니다. 우상이 풍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26절)
그 풍요가 23-2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씨 뿌린 땅에 비를 주시니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며, 가축은 광활한 목장에서 먹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까지 풍요를 누립니다. 이 모습은 에덴동산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람과 짐승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풍요와 안식을 누렸습니다. 이처럼 에덴은 죽음이 없고 완전한 풍요와 행복을 누리던 곳인데, 에덴을 잃은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에덴의 풍요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은, 그 풍요의 뿌리인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이 회복은 단순히 물질이 넉넉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 잃어버린 창조의 질서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문제가 신약에서 해결되었습니다. 18절에서 기다리시고 일어나 일하시는 그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으로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풍요를 다 누리지 못할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 사함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회복, 곧 신령한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26절이 그 회복의 절정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 달빛이 햇빛 같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임합니다. 완전한 회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회복하시는 그 손으로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유다가 얼마나 앗수르를 두려워했으면 벌벌 떨며 애굽을 의지하려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앗수르를 친히, 그것도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의 그림을 통해 하나님은 유다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 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나만 의지하면 앗수르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7-28절이 그 심판을 하나님의 임재로 그립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먼 곳에서 오는데 그 진노가 불붙듯 하고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며, 입술에는 분노가, 혀는 맹렬한 불 같습니다. 불과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앗수르 가운데 임하셔서 순식간에 무너뜨리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심판받는 그 밤에, 유다는 29절에서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처럼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마음으로 즐거워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백성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시니 기쁨으로 바뀝니다. 30절은 하나님이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치신다고 합니다. 자기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향해 이토록 무섭게 싸우시는 것은,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승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의 절정이 33절입니다. “대저 도벳은 이미 세워졌고.” 도벳은 시체를 태우는 곳입니다. 전쟁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태우는 그곳이, 이미 앗수르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완전한 패배가 곧 유다의 구원과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18절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해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이 오면 하나님보다 먼저 다른 것을 의지해 달려가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머물러 기다릴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을 이루십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다리시고, 일어나 일하시며, 그 백성을 공격하는 앗수르를 친히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일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지, 내 기도를 들으시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그 때가 되면 대적을 물리치고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이 사실을 붙들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