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6 | 매일성경
●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1절)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은 이삭 가정에 갑자기 흉년이 찾아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약속의 땅에 왔는데,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이 흉년이었습니다. 이삭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짧게 말합니다. 1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질 것 같은 기대를 품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삶을 살다 보면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기도 하고, 기도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입니다.
흉년 앞에 선 이삭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한 탈출을 생각했습니다. 풍요로운 애굽 땅을 향해 길을 나선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도 흉년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삭도 같은 선택을 하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2절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너에게 지시한 땅에 거주하라” 하나님은 이삭에게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내 눈에 풍요로워 보이는 땅, 내가 생각하기에 안전한 피난처로 가지 말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약속의 땅에 그대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들려옵니다. 신앙생활이 힘들어지면 이런 생각이 찾아옵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그냥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상처를 받고, 기대했던 것과 현실이 달라 실망할 때, 교회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답을 찾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가지 말고 머물러라. 그 어려움의 과정이 사실은 우리 믿음이 자라는 시간이고, 우리를 더 깊이 하나님께로 이끄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3절)
머물라는 명령과 함께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3절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흉년이 든 땅, 위기의 땅이지만, 그 땅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하십니다.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번성하게 하고, 이 땅을 주시고, 천하 만민이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먼저 주어진 것이었고, 이제 이삭을 통해서도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것은 사람이 힘써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믿고,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 이것이 약속을 이루는 길입니다.
●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9절)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곧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리브가에 대해 물어오자, 이삭은 “그는 내 누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두 번이나 저질렀던 그 실수를, 이삭이 똑같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왜 그랬을까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리브가가 아름다우니 그곳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갈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려워하였다’는 말이 두 번반복됩니다(7절, 9절). 이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리브가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뻔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이어져야 할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 그 약속 자체가 끊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삭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선택이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 전체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미 언약의 후손인 야곱이 태어났다고 해도 언약 계보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를 알아채고는 이삭을 불러 꾸짖습니다. 9절 “그가 분명히 네 아내인데 어찌 누이라 하였느냐?” 그리고 자기 백성에게 명령합니다. 11절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 왕이 이삭 부부를 보호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삭이 실수를 했어도,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며 약속을 지켜 가셨습니다. 세상 왕의 입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삭의 연약함을 봅니다. 위기 앞에서 약속의 땅을 떠나려 했고, 두려움 앞에서 아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삭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보호하시고, 약속을 이어가셨습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고, 사람이 두려워서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은 어떤 사람보다, 어떤 환경보다 크십니다. 그분이 함께하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2026.04.15 | 매일성경
아브라함의 생애가 저물고,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을 거쳐 새로운 세대인 야곱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앞선 긴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훈련하시고 빚어가셨는지를 묵상해 왔습니다. 이제 이삭이 유일한 상속자로서 복을 누리며 평탄한 길만 걸어갈 것 같지만, 성경은 곧바로 이삭의 가정에 찾아온 깊은 시련과, 그 속에서 태어난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23절)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지만, 무려 20년 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60세가 되어서야 쌍둥이를 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자녀가 없는 이들을 선택하시고 또한 곧바로 약속을 이루어 주시지 않고 이토록 긴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은 종종 하나님의 약속조차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이 완전히 멈춘 그곳에서, 약속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성취됨을 알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자녀가 없을 때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했지만, 이삭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20년이 지난 60세에 이루어집니다. 오랜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기도했던 20년은 결코 응답 없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이삭은 “왜 약속의 자녀를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동안, 그의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은혜입니다. 기도가 즉각 응답되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되는 가장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오랜 기도 끝에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하지만, 두 생명은 태중에서부터 격렬하게 다툽니다. 불안해하는 리브가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눈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작은 두 생명이지만, 하나님은 ‘두 국민’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그 연약한 생명을 통해 이루어가실 거대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어지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향해 23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당연히 장자인 큰 자가 모든 축복과 권리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크고 강함의 논리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큰 자를 환호하지만, 하나님은 연약하고 작은 자를 은혜로 택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큰 자이거나 남들보다 탁월해서 선택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격 없는 작은 자인 우리를 일방적인 은혜로 부르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크고 강한 자들이 아닌 소외되고 아픈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절)
드디어 출산의 때가 되어 붉고 털이 많은 형 에서가 먼저 나오고, 동생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꽉 쥔 채 태어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태중에서부터 어떻게든 먼저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차지하려 했던 야곱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합니까? 어떻게든 내 힘으로 타인의 발꿈치라도 딛고 올라서 성공하고, 복을 쟁취해 보려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잔머리가 비상했던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 축복을 차지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사냥에서 돌아와 지친 형 에서의 허기를 이용합니다. 팥죽 한 그릇을 내밀며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장자의 명분’을 요구한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겠다는 야곱의 생각이 기발합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에서의 반응입니다. 32절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며 서슴없이 그 귀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맞바꿔 버립니다.
단 한 끼를 굶었을 뿐인데, 지금 당장의 육신의 배고픔을 참지 못해 하나님이 주신 영적 장자의 권리를 헐값에 넘겨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에서는 참 가벼운 사람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훗날 이런 에서를 향해 히12:16절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며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신분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때로는 목적을 위해 인간적인 잔머리를 굴리는 야곱 같기도 하고, 때로는 당장의 허기를 채우려 귀한 것을 내팽개치는 에서 같기도 합니다. 혹 우리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 값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영광스러운 신분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지금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예배가 무슨 소용이고 믿음이 무슨 소용인가?”라며 세상의 팥죽 한 그릇을 얻기 위해 우리의 거룩한 신분과 은혜를 바꾸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자녀 됨의 특권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오늘 하루, 내 손에 당장 쥐어질 팥죽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잡는 성숙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2026.04.14 | 매일성경
오늘 본문에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죽음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사람은 떠나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약속을 이어가십니다.
●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5절)
아브라함에게는 사라 외에도 ‘그두라’라는 후처가 있었고, 그녀를 통해 여러 자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수많은 자녀들 사이에서 누가 아브라함의 진짜 후계자가 될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두라의 자식들은 숫자도 많고 세력도 강해보입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의 후처 이야기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성경의 흐름으로 보면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를 얻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은 때 이미 그는 생산능력이 없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그두라’와 자녀들은 아마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죽음을 앞두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을 앞두고 아주 단호한 결단을 내립니다. 5절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많은 재산이 아니라, 오직 이삭이 유일한 상속자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이삭이 아브라함을 이을 ‘언약의 유일한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른 자녀들에게 재물을 나눠주고 이삭을 떠나 동쪽으로 가게 합니다. 이삭을 다른 자녀들과 분리시키는 아브라함의 지혜로운 조치입니다.
창세기의 역사는 ‘분리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세상 나라 백성이 섞여버릴 때 어김없이 타락이 찾아왔고,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 같은 심판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훗날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의 싹을 지혜롭게 자르고, 약속의 자손이 세상과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하는 부모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 속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과 행동,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분리’입니다.
●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9절)
175세의 나이로 아브라함은 기운이 다하여 조상에게로 돌아갑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아 무려 100년의 세월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돌아보면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두려움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함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흠 많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빚으시고 연단하셔서, 마침내 독자 이삭마저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거장으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이나, 가나안 땅 전체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에서 소유한 땅이라고는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 헷 족속에게 돈을 주고 산 작은 무덤, ‘막벨라 굴’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억울해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평안히 눈을 감습니다. 비록 내 눈앞에서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보지 못했어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것을 굳게 믿고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당장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약속 너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1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거대한 믿음의 조상이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고 이삭에게로 흘러갑니다. 사람은 죽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은 계속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영생’은 단순히 나 혼자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가고, 그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 내 자녀에게,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에게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가는 것, 이 역시 언약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생의 한 단면입니다.
12절부터 이어지는 이스마엘의 족보를 보면 하나님의 또 다른 신실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은 언약의 중심부에서 밀려났지만, 하나님은 과거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셨던 “열두 두령을 낳고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창17:20)는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정확하게 성취하셨습니다(16절). 이삭과 같은 택함 받은 자뿐만 아니라, 언약 밖에 있는 자에게도 약속하신 말씀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넓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때 평생의 붙잡을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고 있습니까? 나의 무심한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 일상의 가치관이 켜켜이 쌓여 내 가족과 공동체에 깊은 흔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 나의 삶은 세상의 가치관과 얼마나 선명하게 ‘분리’되어 있습니까?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세속의 욕망에 물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십자가의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영적인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처음에는 연약하고 실수투성이일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며 묵묵히 걸어갈 때 끝내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내 당대에 모든 기도의 응답과 열매를 보지 못할지라도, 나를 넘어 다음 세대까지 힘차게 이어질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굳게 신뢰하며 오늘 하루도 묵묵히 믿음의 씨앗을 심는 복된 삶이 됩시다.
2026.04.13 | 매일성경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머나먼 고향 땅으로 간 후, 우물가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믿음의 계보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종은 리브가의 집으로 초대받아 자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리브가를 만나게 하셨는지 그 모든 과정을 가족들에게 상세히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종의 설명을 들은 가족들의 반응과, 마침내 정든 고향을 떠나 이삭에게로 향하는 리브가의 위대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이 아름다운 여정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에 반응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50절)
종의 설명을 들은 가족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50절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51절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허락합니다. 이들의 입술에서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와 “여호와의 명령대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깊이 알고 잘 믿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원래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을 숭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리브가의 가족들 역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 종의 확신에 찬 고백 때문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종은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35절과 40절 “여호와께서”, 42절과 48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반복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세상 문화 속에 살던 가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지식과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상에서 만난 하나님, 내 삶을 세심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언어로 담담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그분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결혼에 대한 가족들의 허락이 떨어진 후 종의 반응이 특이합니다. 52절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결혼을 허락해준 가족들에게 엎드려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종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진짜 주권자가 누구이신지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누군가의 호의나 환경의 변화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있습니다. 모든 상황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가장 먼저 감사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 “가겠나이다”(58절)
가족들의 허락 후, 종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나려 합니다. 가족들은 당황스럽습니다. 작별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흘만이라도 함께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형통함의 결과를 빨리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제 선택권은 당사자인 리브가에게 주어집니다.
58절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리브가는 놀랍게도 망설임 없이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리브가의 짧은 대답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12:1절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떠나 …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창12: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이것을 히11:8절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합니다.
리브가의 “가겠나이다”라는 고백은 바로 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순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리브가는 남편 될 이삭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굳게 믿었기에, 익숙하고 안전한 고향을 떠나 700km가 넘는 미지의 땅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현재의 안락함을 기꺼이 떠나는 결단입니다.
떠나는 리브가를 향해 가족들은 60절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축복합니다. 이 축복은 창22장에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과 동일합니다(22:17절).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은 시대가 지나도, 언제나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멀고 고된 여정 끝에 마침내 리브가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이삭을 만납니다. 67절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본문은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리브가를 인도했다고 합니다. 사라는 창17:16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사라의 장막에 들임으로써,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셨던 그 언약이 이제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사람의 죽음이나 환경의 한계로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섭리는 한 사람의 헌신과 믿음을 통해 세대를 넘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맙니다.
우리의 입술은 내가 만난 하나님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담담하고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통해 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할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됩시다.
또한, 익숙하고 편안한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믿음의 발걸음을 요구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 앞에서도 리브가처럼 “예, 가겠나이다”라고 결단하며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읍시다.
2026.04.10 | 매일성경
창22장에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엄청난 시험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언약을 재확인했습니다. 창22: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바로 백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두 가지 약속을 하셨는데, 바로 ‘땅과 백성’입니다. 22장에서 백성에 대한 약속을 다시 확증하셨다면, 땅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성취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본문은 사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은 1-2절로 아주 짧고, 이어지는 내용이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매장지를 사는 내용으로 길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의 행동을 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4절)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 속에서 아브라함은 일어나 헷 족속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아내를 매장할 땅을 구하며 자신을 가리켜 4절“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고대 근동의 관습상 나그네에게는 땅을 소유할 법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붙들고 가나안 땅을 밟았지만, 막상 아내를 묻을 무덤 한 평조차 갖지 못한 철저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용한 이 단어 “나그네와 거류자”라는 고백 속에는 우리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역시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그네는 가야 할 본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본향에 도착하기까지 계속 이동하는 삶을 삽니다. 나그네는 그곳에 영원히 머물 것이 아니기에 짐을 가볍게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간소하게 삽니다. 이 땅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높고 견고한 성을 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 순례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내 생명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연장할 수 없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부르시면 언제든지 훌훌 털고 떠나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을 이 땅에 두지 않고 하늘 소망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16절)
매장지를 구하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의 헷 족속은 6절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 칭송하며 묘실을 거저 주겠다고 호의를 베풉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대신 그는 당시 모든 공적 재판과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던 ‘성문’ 앞으로 나아가, 수많은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합법적인 거래를 맺습니다.
아브라함이 소유하고자 했던 땅이 막벨라 굴입니다. 에브론이 주인입니다. 에브론 역시 아브라함에게 거져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땅의 금액을 15절 “은 사백 세겔”이라고 합니다. 막대한 금액입니다. 지금 액수로 환산하면 약 10억 정도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제시한 금액을 정당하게 지불하여 막벨라 굴과 그 주위의 밭을 완벽한 자신의 소유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큰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무덤을 샀던 이유와 그 내용을 이렇게 길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거래는 단순히 죽은 아내를 묻기 위한 장례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가나안 온 땅을 자신과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선포였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합법적인 소유권을 얻어냄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장소를 미리 확보한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나그네의 신분으로 무덤 하나 크기의 작은 땅을 얻었을 뿐이지만, 이 작은 땅은 훗날 이스라엘 전체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대한 소망의 씨앗이자 믿음의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이 곳에 사라을 비롯해서 아브라함과 이삭, 리브가 그리고 야곱이 매장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을 떠나 애굽에서 생활하면서도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약 450년 뒤에나 이루어질,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후손에게 주실 것을 신뢰하며 오늘 한 알의 믿음의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 않고 본향의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 하나만 매 순간 기억해도 삶에서 평안과 안정을 누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존재로서 믿음의 작은 씨앗을 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