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8 | 매일성경
●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4절)
사사기에는 열두 사사가 등장하는데, 넷째 사사가 오늘 나오는 드보라입니다. 사사들이 대개 전쟁으로 나라를 구한 남성이었던 것과 달리, 드보라는 여성입니다. 남성 중심의 시대에 하나님이 여성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1절 “에훗이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야사프)가 되풀이됩니다. 사사기에서 모든 문제의 시작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렇게 고통당하고도 깨닫지 못해 이 악이 계속 반복되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솔에서 다스리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십니다(2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대적의 손에 넘기신다는 것이 가혹해 보이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죄악 가운데 오래 머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를 회초리로 사용하여 백성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런데 넘기신 대적이 ‘가나안 왕’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진멸했어야 할 가나안 족속인데 편의를 위해 남겨 둔 결과가 이제 그들을 짓누르는 압제자가 된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이 “남겨 둔 자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리라”하신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가나안 왕 야빈에게는 철병거 구백 대가 있었습니다(3절).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알려면 그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철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던 때입니다. 셋째 사사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훗날 삼손은 나귀 턱뼈로 싸웠습니다. 그것이 용맹해서가 아니라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유다 지파도 골짜기 주민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가 철병거 때문이었습니다(1:19절). 그런데 야빈은 그 철병거를 무려 구백 대나 가졌으니, 이스라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군사력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이십 년 동안 ‘심히’ 학대했다고 합니다.
이 고통에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3절). 사사기의 악순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문제의 원인이 되는 죄악 때문에 부르짖는 회개아 아니라, 대적의 공격이 힘들어서 부르짖습니다. 참된 회개 없이 고통의 해결만 구하는 부르짖음은, 그 고통을 되풀이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하나님 백성답게 바로 살고 있는가’를 먼저 돌아보는 부르짖음이 있을 때, 고통 때문에 부르짖는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에 응답해 드보라를 세우십니다. 4절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드보라는 여러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여선지자요, 사사요, 그리고 5절에서는 종려나무 아래 앉아 백성의 재판을 맡은 재판자입니다. 곧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백성을 이끌며, 분쟁을 판결하는 세 역할을 함께 감당했습니다.
특히 드보라를 ‘랍비돗의 아내’라고 소개하는데, 랍비돗은 히브리어로 ‘횃불’ 또는 ‘번개’를 뜻합니다. 이를 남편의 이름으로 보기도 하지만, 드보라 자신을 가리키는 ‘불의 여인’, ‘횃불 같은 여인’으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이름은 드보라가 어떤 여인인지를 알려 줍니다. 백성 대다수가 악을 행하고 말씀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어두운 시대, 그 어둠 한복판에서 드보라는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 백성에게 전하며 살았습니다. 곧 그는 어두운 시대에 횃불을 든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백성이 어둠에 잠긴 그때에도, 말씀을 붙든 한 여인을 빛으로 세워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9절)
드보라는 전쟁에 나설 장군으로 바락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다볼산에 병사 만 명을 모으면, 하나님이 시스라와 그 병거들을 기손강으로 이끌어 바락의 손에 넘기시겠다는 것입니다(6-7절). 이는 탁월한 작전입니다. 철병거의 위력은 마른 평지에서 발휘되는데, 강가로 유인하면 병거는 달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작전만 아니라 결과까지 미리 일러 주십니다. 7절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 승리가 보장된 명령이니, 바락은 그저 순종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락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8절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용맹한 장군일 것 같은 바락이, 드보라가 함께 가야만 나서겠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셨어도 그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앞에는 눈에 보이는 철병거 구백 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사 드보라를 더 의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락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던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8절부터 ‘함께’라는 말이 4번 반복됩니다. 바락이 “당신이 함께 가면”, 드보라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게데스로 올라갑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와 함께 가고 있는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참된 승리인데, 보이는 사람을 의지해 사람과 함께 가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바락의 불신앙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9절, 드보라는 함께 가겠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가는 이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다면 승리의 영광이 바락에게 돌아갔을 텐데, 그가 머뭇거렸기에 전쟁은 이겨도 그 영광은 다른 한 여인에게 돌아가리라는 것입니다. 드보라도 여인인데, 시스라를 죽일 그 여인은 누구일까? 그 답은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집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용맹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그 영광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무엇을 위해 부르짖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고통이 힘겨워 부르짖었지만, 죄를 돌이키는 회개가 없어 그 고통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우리도 문제의 해결만 구하며 부르짖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나는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 있는가’를 말씀에 비추어 돌아보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그 삶을 회복시키십니다.
다른 하나는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바락은 승리를 약속받고도 보이는 사사를 의지해 머뭇거리다 영광을 잃었습니다. 우리도 인생길에서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분과 함께 걷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2026.09.07 | 매일성경
●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15절)
사사기에는 열두 사사가 등장하는데, 오늘은 둘째 에훗과 셋째 삼갈 이야기입니다. 에훗의 이야기는 길게, 삼갈은 단 한 절로 나옵니다.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여기 ‘또’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선을 행했다는 ‘또’가 아니라, 악을 행했다는 ‘또’입니다. 죄가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이라고, 12절이 두 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모르게 무언가를 한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 결과 12절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강성하게 하셔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인데 도리어 그 대적을 강성하게 하십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한 것은 본래 더 풍요롭고 강성해지려는 욕망 때문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들보다 대적을 더 강하게 하셔서 도리어 그 대적에게 눌리게 하십니다. 삶의 초점을 세상의 풍요와 강성에 맞추면, 하나님이 다른 이를 더 강하게 하셔서 우리를 짓누르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성해진 에글론은 암몬과 아말렉을 규합해 이스라엘을 치고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합니다(13절).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무너뜨린 성입니다. 그 여리고를 도리어 대적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큰 위기에 직면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모압을 십팔 년간 섬깁니다(14절).
이스라엘이 섬긴 모압왕의 이름이 에글론인데 히브리어로 ‘송아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7절은 그를 “심히 비둔한 자”라 소개합니다. 곧 살진 송아지 같은 왕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는 제단에 바쳐질 희생제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참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자, 살진 송아지 같은 자에게 십팔 년간 지배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면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실은 이런 자에게 휘둘리게 된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십팔 년의 고통을 당하자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십니다(15절). 여기서 사사기의 순환이 다시 이루어집니다. 불순종 → 압제 → 부르짖음 → 구원자. 다만 이 부르짖음이 참된 회개였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고, 그저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저버려도 부르짖으면 다시 구원자를 세워주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우신 구원자는 에훗인데, 15절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소개합니다. ‘베냐민’은 히브리어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오른손의 아들 지파에서 난 에훗이 왼손잡이입니다. 원문은 이를 ‘오른손이 묶인 자’로 표현해, ‘오른손의 아들’과 ‘오른손을 못 쓰는 자’라는 대조를 이룹니다. 왼손잡이를 오른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도 보지만, 오른손보다 왼손을 잘 사용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기에 오른쪽 허벅지에 칼을 숨길 수 있었고, 아무도 그쪽을 경계하지 않았습니다(16절).
●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21절)
에훗은 공물을 바친 뒤 일행을 돌려보내고, 홀로 왕에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돌이킨 지점을 19절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 ‘돌 뜨는 곳’은 원어로 ‘새긴 형상’, 곧 우상을 가리키는 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이 26절 에훗의 도주 장면에서 다시 나와, 암살 이야기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주목할 것은 이 우상의 자리가 ‘길갈 근처’라는 점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켜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한, 잊을 수 없는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자리 곁에 이제 우상이 서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언약 맺던 자리 옆에 우상을 세운 것, 그 우상숭배의 결과가 바로 십팔 년의 압제였습니다. 에훗이 그 우상의 자리를 지나며 돌이켜 구원을 향해 나아간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에훗은 “은밀한 일”, “하나님의 명령”을 아뢴다며 왕과 단둘이 마주합니다(19-20절). 이방 왕은 신의 계시라면 귀를 기울였기에, 신하를 다 물리고 에훗을 맞습니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에훗은 왼손으로 오른쪽 허벅지의 칼을 빼어 그 몸을 찌릅니다(21절). 22절은 칼자루까지 들어가고 기름이 엉겼다고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이는 에훗이 이 위험한 일을 얼마나 단호하고 확실하게 해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실패하면 자기 목숨이 달아나는 일을,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담대히 감행한 것입니다. 신하들이 왕이 ‘발을 가리운다'(용변을 본다)고 여겨 지체하는 사이, 에훗은 빠져나가 도망합니다(24-26절). 그러고는 에브라임에서 백성을 모아 요단 나루를 막고 모압 사람 만 명을 쳐서, 마침내 모압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27-29절).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을 누립니다(30절).
31절은 이야기가 삼갈에게로 넘어가는데, 단 한 절입니다. 이 짧은 한 절에 두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아낫의 아들 삼갈’이라고 하는데 ‘아낫’은 이방 신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삼갈이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이방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조차 들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가 쓴 무기가 ‘소 모는 막대기’입니다. 칼이 아니라 소를 몰던 농기구 하나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쳤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뒤처져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그 초라한 막대기로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한 절짜리 이 이야기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 어떤 도구로든,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삶의 초점을 강성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풍요와 강성을 좇아 악을 행했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대적을 강성케 하셔서 그들을 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풍요에 삶의 방향을 맞추면 도리어 그것에 짓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 왕으로 섬기며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안정과 평안으로 책임지십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사람도 어떤 도구도 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왼손잡이 에훗을 사용하시고, 이방인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낙심할 때에도, 하나님은 어떤 형편의 사람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하루가 됩시다.
2026.09.04 | 매일성경
●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1절)
사사기 1장 내내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온전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남쪽 유다부터 북쪽 지파들까지, 하나님이 이미 넘겨주신 땅을 다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가나안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의 위기로 접어든 백성에게, 오늘 하나님은 징계 대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1절은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말했다고 합니다. 길갈은 여호수아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진을 친 곳이자 정복의 전진 기지였고, 무엇보다 거기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켜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한 자리였습니다. 할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유월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새기는 예식입니다. 곧 길갈은 언약이 갱신된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실제로 여호수아서는 길갈이라는 이름을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사백 년 노예살이의 수치가 그곳에서 굴러 떠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그 길갈을 떠나 이른 곳이 ‘보김’입니다. 보김은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수치가 굴러간 은혜의 자리에서 통곡의 자리로 온 것입니다. 이 지명의 이동 자체가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언약을 새롭게 한 길갈의 은혜를 잊고, 이제 눈물의 자리 보김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의 원인은 하나님이 힘들게 하셔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해 보면, 1장의 실패를 생각할 때 곧바로 책망이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사자가 먼저 꺼낸 것은 책망이 아니라 은혜의 회고입니다. 1절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한 줄로 요약되어 있지만,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 그리고 광야 사십 년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는 결코 이룰 수 없던 일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따라 신실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이어 사자는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과 언약을 맺어 ‘너희는 내 백성,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온 열방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과만 맺으신 이 언약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리고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2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니 다른 신과 손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억압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가나안의 제단을 헐지 않으면 반드시 그 영향을 받아, 그들이 멸망한 것처럼 이스라엘도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절 중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입이 닳도록 경고하신 그 말씀을, 이스라엘이 흘려들은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나안 사람들이 누리는 부귀와 영화를 얻고 싶은 욕망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는 탄식합니다. 2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 결과가 3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지금까지는 “내가 넘겨주었으니 나아가라” 하셨는데, 이제는 “쫓아내지 않겠다” 하십니다. 어제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노예로 부리며 ‘함께 사는 것이 유익’이라 여겼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것이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리라 하십니다. 세상과 손잡는 것이 편하고 풍요로워 보여도, 그 편함이 끝내 우리를 옭아매는 덫이 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 말을 마치자, 4절에서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 뒤 그곳을 보김이라 이름하고 제사를 드립니다(5절). 겉으로는 뉘우침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이었을까요? 참된 회개였다면 삶이 변했어야 하는데, 이어지는 사사기 내용은 갈수록 더 깊은 타락으로 빠집니다.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제 쫓아내지 않겠다, 가시와 올무가 되리라” 하시니, 백성은 다가올 미래가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자기 죄가 아파서가 아니라, 그 죄의 결과가 무서워서 운 것입니다. 회개는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죄 자체를 아파하며 돌이켜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아파하는 눈물,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변화된 삶입니다.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10절)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할까요. 6-10절이 그 신학적 뿌리를 밝힙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그가 행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직접 본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백성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7절).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고 구원하셨는지를 두 눈으로 본 세대라,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대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절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두 번 반복되는 단어가 ‘알지 못한다’입니다. 성경에서 ‘안다(야다)’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 경험하여 아는 것을 뜻합니다. 새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산 경험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알지 못하니, 그분이 원하시는 것도 모르고 세상을 닮아 함부로 살았습니다. 사사기의 끝없는 악순환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슬픈 것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노예살이하던 백성에게 이보다 큰 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땅에서 그들이 겪는 것은 징계와 침략의 반복, 곧 평안(샬롬)이 없는 삶입니다. 어떤 이는 사사기를 ‘샬롬이 없는(엔-샬롬) 이야기’라 부릅니다. 축복의 땅에 들어왔으나 정작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땅의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앎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길갈의 은혜를 기억하는 겁니다. 언약의 은혜를 새긴 길갈의 자리가 통곡의 자리인 보김으로 바뀌면 안됩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맺은 은혜의 언약을 잊고 세상과 손잡을 때, 그 편함이 도리어 가시와 올무가 됩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언약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앎을 다음 세대로 이어 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세대가 끊긴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앎은 지식으로 물려줄 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때, 자녀와 다음 세대가 그 삶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앎 안에서 복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2026.09.03 | 매일성경
●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24절)
어제까지는 남쪽 지파인 유다, 시므온, 베냐민의 정복 이야기였습니다. 오늘은 북쪽 지파들의 이야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쫓아내지 못하였다’와 ‘함께 거주하였다’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마찬가지로 정복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북쪽 지파의 중심은 요셉 가문,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입니다. 이들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는데, 22절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전제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남쪽 유다에게 하셨던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약속으로 주신 땅이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요셉지파는 정복을 위해 정탐을 보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치기 전 정탐꾼을 보냈던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정탐꾼을 만난 가나안 사람은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라합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수2:9절) 이방 여인이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먼저 언약맺기를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었으며, 훗날 메시아의 족보에까지 이름을 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벧엘의 정탐은 정반대입니다. 요셉 가문의 정탐꾼들은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에게 24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선대하리라”고 제안합니다. 그 사람은 아무런 신앙 고백 없이, 그저 목숨을 부지하려고 자기 성읍의 입구를 팔아넘깁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지 말고 진멸하라 하셨는데, 요셉 가문은 먼저 한 사람과 거래를 맺어 그를 살려 주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라합의 경우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왔기에 살아남았지만, 이 사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편의를 선택했기에 살아남았습니다. 같은 정탐 장면이 한쪽에서는 믿음의 이야기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타협의 이야기가 됩니다.
요셉 가문이 이런 방식으로 성읍을 공격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어떤 방법으로든 이기게 하셨을 텐데, 바른 길은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드니 빠른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입구를 알려 주자 성읍을 함락하고, 약속대로 그와 가족은 살려 보냅니다. 사람과 맺은 약속은 지켰으나,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입니다.
이런 선택의 결과가 무엇일까요? 26절, 그가 헷 사람의 땅으로 옮겨 가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했습니다. 루스는 이스라엘이 진멸한 벧엘의 옛 이름입니다. 없앤 줄 알았던 가나안 성읍이, 이 사람에 의해서 다른 땅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없애야 할 것을 온전히 바치지 않으면, 그 남겨진 것이 반드시 되살아나 다시 세력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사람쯤이야’ 했던 작은 타협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32절)
27절부터 므낫세를 시작으로 북쪽 지파들의 목록이 이어지는데, 그 문장의 결론은 한결같습니다. 므낫세가 벧스안과 다아낙과 돌과 이블르암과 므깃도의 주민을 열거하는데, 마땅히 ‘쫓아냈다’로 끝나야 할 문장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로 끝납니다. 이 결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28절, 29절 에브라임, 30절 스불론, 31절 아셀, 33절 납달리가 모두 ‘쫓아내지 못하였다’와 ‘함께 거주하였다’로 이어집니다. 가나안과의 공존이 예외가 아니라 북쪽 전체의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반복 속에서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본문을 강조합니다. 처음엔 이스라엘이 주도권을 쥔 모습입니다. 28절은 이스라엘이 강성한 뒤에는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다고 합니다. ‘강성한 뒤’라는 말은 이제 쫓아낼 힘이 있었다는 뜻인데,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쫓아내기는 힘드니 종으로 부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순종보다 편리를 택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주객이 바뀝니다. 31-32절의 아셀은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라고 표현됩니다. 앞서 ‘가나안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했다’던 순서가 바뀌어, 이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가운데 더부살이하는’ 모양이 된 것입니다. 33절 납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34절에서 그 역전이 절정에 이릅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단 지파는 가나안을 쫓아내기는커녕, 도리어 가나안에게 산지로 쫓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지 못한 이 단 지파는, 뒷날 사사기 18장에서 자기 기업을 아예 버리고 북쪽으로 옮겨 가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됩니다. 오늘 34절은 그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 하강의 흐름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시작은 ‘한 사람쯤’이라는 작은 타협, ‘철병거 때문에’라는 작은 실패였는데, 그것들이 쌓여 ‘함께 거주함’이 되고, 마침내 ‘가나안이 이스라엘을 쫓아냄’에까지 이릅니다. 진멸하지 못하고 남겨 둔 것이 되살아나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을 몰아내는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작은 타협과 작은 불순종에서 시작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편의를 앞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 가문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두고도 빠른 길을 택해, 사람과의 거래를 위해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우리도 바른 길이 더디고 힘들 때 빠른 길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외면한 빠른 길이 아닌 말씀 안에서 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작은 타협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멸하지 못하고 남긴 한 사람, 쫓아내지 못한 소수는 처음엔 사소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것은 되살아나고, 함께 거주하던 것이 마침내 주인을 몰아냅니다. 죄는 대개 단번에 우리를 휘어잡기보다 조금씩 스며들어 자리를 넓히다, 어느새 하나님까지 밀어냅니다. 사사기의 혼란이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작은 한 부분부터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켜 가야 합니다.
2026.09.02 | 매일성경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13절)
어제에 이어 유다 지파의 정복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가나안 땅 앞에서 보이는 태도가 대조를 이룹니다. 담대히 도전하여 땅을 차지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에도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사기가 시작되는 이 첫 장에서,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이 보여 줍니다.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갈렙입니다. 그는 옛날 열두 정탐꾼 가운데, “그 땅은 우리의 밥이라 하나님이 주셨으니 올라가자”고 외친 두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났고, 그 믿음의 세대에서 갈렙만 노년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이라 부릅니다(수14:6절). 그나스는 본래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이방 계열입니다. 곧 갈렙은 이방인 출신이면서도, 어느 이스라엘 사람보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혈통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것이 이것입니다.
갈렙이 12절 “기럇 세벨을 쳐서 점령하는 자에게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옷니엘이 나서서 그곳을 점령합니다. 이 옷니엘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첫 번째 사사가 바로 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점령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보면 유다도 철병거 앞에서 물러서고 베냐민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땅을 옷니엘은 믿음으로 취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것 같은데, 14절을 보면 뜻밖에 갈렙의 딸 악사에게로 이어집니다. 성경이 여인의 이름을 이렇게 분명히 기록하는 일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악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출가하며 남편 옷니엘에게 아버지께 밭을 구하자고 청하고,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에게 직접 나아가 담대히 구합니다.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남방은 메마른 사막 지역이라, 땅이 있어도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악사는 그것을 알고 윗샘과 아랫샘을 구했고, 갈렙은 그대로 내어 줍니다. 악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땅과 물을 구한 것은 성품이 억척스러워서가 아니라, 이 땅이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마땅히 차지해야 한다는 신뢰가, 주저앉지 않고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에 이어 16절은 또 한 이방인을 소개합니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 곧 이방인이었는데,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광야로 올라가 그 백성 가운데 거주합니다. 갈렙도, 겐 사람도 이방 출신입니다. 성경이 거듭 이방인을 세우는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느냐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길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19절)
17절은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스밧의 가나안 족속을 친 이야기인데, 여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진멸’은 히브리어로 ‘헤렘’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구별하여 없앤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에 붙은 이름 ‘호르마’가, 바로 이 ‘헤렘’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곧 ‘진멸된 곳’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성읍이 헤렘으로 하나님께 바쳐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을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 명하신 것은 잔인함 때문이 아닙니다. 가나안의 죄악이 너무 관영하여, 그들과 공존하면 이스라엘이 반드시 그 삶에 물들어 함께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타협하거나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제거해야 하는 것임을, 하나님은 이 진멸 명령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스밧을 헤렘으로 바쳐 ‘호르마’라 이름한 것은,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자리였습니다.
문제는 그 순종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유다는 계속 나아가 여러 성읍을 점령하는데, 19절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이 한 절 안에 안타까운 대조가 있습니다. 앞부분은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다”이고, 뒷부분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쫓아내지 못하였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데도, 철병거라는 무기 앞에서 물러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내가 그 땅을 넘겨주었다” 하셨고 산지 주민을 실제로 쫓아내게 하셨다면, 그 하나님이 철병거를 이기게 못 하실 분이겠습니까. 유다가 물러선 것은 무기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21절의 베냐민은 더합니다.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철병거 같은 이유조차 없습니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은 것이고 의도적으로 함께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이미 많은 땅을 차지했으니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됩니다. 결국 이것이 장차 심각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한 나라의 무너짐은 작은 부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은 이 두 실패의 사이에, 갈렙의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20절, 갈렙이 헤브론에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이 아낙 자손은 어제 본 그 거인 족속,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게 만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어쩌면 철병거보다 더 두려운 그 거인들을 갈렙이 물리쳤습니다. 이런 대조가 의미하는 것은, 유다가 “철병거 때문에” 물러섰다지만, 정작 철병거보다 무서운 거인을 믿음의 사람 갈렙은 이겼다는 것입니다. 곧 문제는 철병거가 아니라, 그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믿음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도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갈렙과 옷니엘과 악사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믿음으로 주저앉지 않고 나아가 그 땅과 샘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떻게 되겠지” 하며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붙들고 현실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앞서 달리는 것도,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지 하며 뒤에 머무는 것도 아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내가 해야 할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작은 타협을 남겨 두지 않는 것입니다. 유다와 베냐민이 쫓아내지 못한 것은 전체로 보면 일부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남겨 둔 조금이 훗날 이스라엘을 가나안 문화에 물들게 하고 혼란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 불순종한 것은 결국 불순종입니다. 우리를 흔드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 작은 타협과 합리화일 때가 많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철병거 같은 핑계 앞에 주저앉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