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29:21–35절/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26.04.23)

●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25절)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외삼촌 라반을 위해 일한 7년을 며칠처럼 여겼습니다. 드디어 7년의 기한이 차서 외삼촌 라반에게 말합니다. 21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라반은 잔치를 베풀었고, 야곱은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야곱이 눈을 떠보니, 자기 곁에 누운 사람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분노하며 외삼촌에게 따집니다. 25절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그런데 이 모습은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라반이 레아를 야곱에게 데려간 시간이 ‘저녁’이었다고 합니다(23절). 어두울 때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것도 바로 그 아버지의 눈이 어두웠을 때였습니다(27:1절). 어두움을 이용해 속였던 자가, 이제 어두움 속에서 속임을 당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일 때 형의 옷을 입고 염소 가죽을 몸에 붙여 자신을 위장했듯이, 레아도 어쩌면 면사포를 쓰고 어둠 속에서 라헬인 척 야곱에게 들어갔을 것입니다. 방식이 너무 닮아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연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심은 것을 야곱이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라반은 말합니다. 26절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형이 먼저라는 말, 순서가 있다는 말이 야곱의 가슴에 어떻게 들렸을까요. 야곱은 형 에서의 순서를 빼앗았던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차지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이 한마디가 지난 모든 것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27절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야곱은 결국 라헬을 위해 다시 7년을 섬깁니다. 처음 7년에 속은 7년, 도합 14년의 세월입니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은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14년이라는 긴 시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14년 동안 야곱은 자신이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몸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은 이렇게 찾아옵니다. 우리가 뿌린 것의 무게를 우리가 직접 느끼게 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첫 번째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야곱이 속임을 심었더니 속임을 거뒀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이기도 하지만, 뒤집으면 소망의 말이기도 합니다. 진실을 심으면 진실을 거두고,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고, 섬김을 심으면 섬김을 거둡니다. 오늘 하루 내가 무엇을 심는지가 중요합니다.

●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32절)

야곱의 가정은 이제 온전하지 않습니다. 두 아내가 있는데,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31절 “사랑받지 못함”이라고 표현하는데, 원래 뜻은 ‘미워함’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레아를 볼때마다 자신의 인생이 레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레아도 억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해서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닌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도 온전하지 않았는데 야곱이 이루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연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변함없이 이루어가십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는 라헬이 행복할 것 같은데 31절은 의외의 문장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야곱이 레아를 외면했지만, 하나님은 레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이름을 지으며 그 마음을 드러냅니다. 첫아들 르우벤을 낳고는 32절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둘째 시므온을 낳고는 33절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시므온은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내 아픔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고백입니다. 셋째 레위를 낳고는 34절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며 여전히 남편을 향한 소망을 붙잡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런데 넷째 유다를 낳을 때 레아의 고백이 달라집니다. 35절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더 이상 남편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구하던 레아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이 변화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한 신앙의 성장입니다.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레아는 환경이 바뀌어서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상황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시다는 것, 들으신다는 것, 돌보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고백이 사람을 향한 갈망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뀐 것입니다. 물론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시 동생과 자녀 낳기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레아에게서 유다가 태어납니다. 사랑받지 못했던 레아, 그러나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한 레아의 아들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이 태어나고, 그 계보를 따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사람이 외면하는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경고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무슨 말을 심는지, 어떤 마음을 품는지가 결국 내게 돌아옵니다.

다른 하나는 위로입니다. 사람이 나를 외면해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레아처럼 억울하고 답답한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이 그 자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 고통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진실을 심고, 사랑을 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창세기29:1–20절/하나님이 함께하시면(26.04.22)

●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6절)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고향인 브엘세바에서 출발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돌을 베개 삼아 누운 그 외진 곳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창28: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29장은 그 만남 이후 야곱의 발걸음으로 시작됩니다.

1절 보면 “야곱이 길을 떠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길을 떠났다’는 표현이 원어로 ‘두 발을 들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어제까지 두렵고 무거웠던 발이, 이제는 가볍게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힘입어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과 후, 같은 길이지만 발걸음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인생의 발걸음이 무겁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신뢰해야 할 때입니다.

야곱은 하란이 속한 동방 사람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는 외삼촌 라반의 집이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넓은 서울, 어느 곳에 사는 외삼촌을 내비게이션 없이 찾아가는 상황입니다.

마침 우물가에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어디서 왔는지 묻습니다. 놀랍게도 야곱의 목적지인 하란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라반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당연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놀라운 일입니다. 동방이라는 넓고 넓은 낯선 땅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외삼촌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목자들은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6절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이 외삼촌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습니다. 외삼촌의 딸이 먼저 야곱에게로 오고 있었습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내가 애써 찾아 헤매야 할 것들이 때로 내게로 걸어오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찾는 일은 며칠 걸려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하나님은 순간에 해결하시기도 하십니다. 오랫동안 막혔던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손대시면 순식간에 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붙잡고 씨름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맡길 때, 하나님이 하시면 문제가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11절)

구약에서 우물은 자주 결혼 이야기의 무대가 됩니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갔던 아브라함의 종도 우물에서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오늘도 우물가에서 야곱이 자신의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납니다. 본문에는 우물이 큰 돌로 덮여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 지역에서 물은 생명과 같았고, 그 귀한 우물을 아무나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여러 목자들이 힘을 합쳐야만 옮길 수 있는 큰 돌로 막아두었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라헬이 양떼를 몰고 오는 것을 본 야곱이 혼자서 그 돌을 옮겼습니다. 본문은 담담하게 기록하지만,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기쁨,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야곱에게 없던 힘을 솟아나게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야곱이 첫눈에 라헬에게 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라헬 앞에서 야곱은 생각지도 못한 힘을 냅니다. 야곱의 인생에 새로운 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라헬을 만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한 달을 함께 지내며 지켜본 라반이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15절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야곱은 열정적이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라반은 그것을 알아봤고 야곱이 자신과 함께 머무는 것이 유익이라고 생각하여 이런 제안을 합니다.

야곱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18절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그 당시 신부를 맞이할 때 지참금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당시 노동자 1년 임금이 5-10세겔이었고, 보통 신부 지참금은 30-50세겔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제시한 7년은 상당히 후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만큼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0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7년을 며칠처럼. 사랑이 있으면 긴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야곱이 얼마나 소망을 붙들고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기다리는 것이 있는 사람은 다르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복선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품삯을 받는 순간, 가족 관계가 고용 관계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외삼촌 라반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라반에 의해 야곱은 혹독한 훈련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보다 훨씬 더 강한 사기꾼 외삼촌 라반을 통해 야곱을 훈련시키십니다. 앞으로 야곱이 라반에게 당하는 과정에서 야곱은 자신이 가족들에게 주었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때로 내가 했던 일의 무게를 직접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힘들지만, 그 과정이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치 못함을 같은 방식으로 다듬어가십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면, 더 강한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지요.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쉽지 않지만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갈 때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겪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발걸음이 벧엘 이전과 이후에 달라진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 하루를 바꿉니다. 오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찾아야 할 신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올 때 야곱처럼 무거운 돌도 옮기고, 긴 시간도 며칠처럼 지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내 힘으로 안 된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내가 찾아 헤맬 것들이 때로 나에게 걸어오기도 합니다.

창세기28:1–22절/내가 너와 함께 있어(26.04.21)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4절)

혼자가 된다는 것은 두렵습니다. 익숙한 모든 것을 떠나 낯선 길을 가야 할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마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낍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이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자신의 계획과 다르게 야곱이 축복받은 것을 보며, 반드시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을 이을 축복의 자녀가 야곱임을 인정합니다. 야곱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에게 가서 아내를 맞이하도록 보냅니다. 이제 야곱은 집을 떠나 먼길을 가야 합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기 전, 본문은 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이 자신의 축복을 빼앗아 갔다는 것을 알게 된 에서는 분노했고, 동생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에서는 자신이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를 생각합니다. 8절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그가 내린 결론은 자기 아내인 가나안 여인들을 부모님이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런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서가 선택한 것은 아내를 한 명 더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새로운 아내로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의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에서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팔아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아내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에서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문제를 보지 않으니, 아무리 변화를 시도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에서의 모습이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자주 바깥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환경이 문제이고, 다른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먼저 내 안에서 변화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회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

야곱은 이제 혼자입니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걷습니다. 약 900km의 먼 거리입니다. 한 달 이상을 걸어야 합니다. 야곱은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해가 지자 더 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길가에서 돌 하나를 베개 삼아 눕습니다. 이 장면이 야곱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해가 저 어두운 것처럼 미래가 어둡습니다. 혼자라는 현실이 불안합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막막합니다. 그런데 그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사닥다리가 보였습니다. 땅에 서 있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끝에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야곱의 마음속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면 하나님도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내 상황을 알고 계실까? 내 절박한 기도가 하늘까지 닿을 수 있을까?” 이 모든 불안에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사닥다리를 통해 답하셨습니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3절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아브라함과 함께했고, 이삭과 함께했던 그 하나님이, 이제 야곱과 함께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지켜주겠다!”,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하나님은 야곱의 마음을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혼자라는 두려움, 위험에 처할까 하는 두려움, 돌아오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하나님은 그 두려움 하나하나를 안심시켜 주십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16절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고백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돌을 베개 삼아 누운 그 외진 곳에도 계셨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그 밤에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이 깨달음에 놀라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그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이름 붙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20-22절입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오.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그의 서원을 살펴보면 아직 미숙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시면 나도 이렇게 하겠다는, 조건이 달린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지만, 아직 하나님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야곱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에서 나가면 하나님도 멀어지시는 것처럼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요? 어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내 상황을 모르실 것 같아 혼자 끙끙 앓고 있지는 않은가요? 벧엘에서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머무는 자리, 불안한 그 자리에도 함께 하십니다. 땅과 하늘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닿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 이 말씀 붙잡고 오늘 하루도 승리합시다.

창세기27:30-46절/혼돈의 가정, 신실하신 하나님(26.04.20)

●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34절)

​성경에서 가장 솔직한 가정 이야기 중 하나가 창27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 그 이삭의 가정 이야기인데, 읽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큰아들을 편애하고, 어머니는 작은아들을 위해 남편을 속이고, 형제는 서로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뒤죽박죽인 가정 이야기 속에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긴장감 있게 시작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막 나가자마자,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온 것입니다.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모든 것이 드러났을 텐데, 딱 그 간격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서는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별미를 들고 들어와 말합니다. 31절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아버지 이삭은 당황하여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아들이 맏아들 에서라는 사실에 이삭이 크게 떨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축복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쏟아부으면 되돌릴 수 없는, 신적 권위가 담긴 선언이었습니다. 이삭은 모든 축복을 야곱에게 쏟아부었고, 에서를 위한 자리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해주었다는 아버지의 말에 에서가 소리를 높여 웁니다. 34절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사냥도 잘하고 남자답기로 유명한 에서가 복을 받지 못해 엉엉 웁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복’, ‘축복’입니다. 12번 정도 나옵니다. 야곱도 에서도 복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자신을 두 번이나 속였다고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한 번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고, 이번엔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야곱이 속임수를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가져가려 했을 때, 에서는 스스로 그것을 팔았습니다. 당장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제 와서 눈물을 흘리지만, 그 소중한 것을 처음부터 소중히 여기지 않은 사람은 에서 자신이었습니다.

오늘 이 장면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것,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특권을 우리는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세상의 급한 요구 앞에 우리가 매일 내어주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42절)

​자신이 받아야 할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곱은 죽게되고 에서는 살인자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45절 하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계획할 때 등장하는 사람이 리브가입니다. 리브가는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합니다. 야곱을 불러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에게 가게 합니다. 형의 화가 풀리면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다고 합니다.

리브가는 44절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이라고 말하며 ‘몇 날’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몇 날’이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다시는 야곱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것을 내 방법으로 이루려 서두르는 것은 다릅니다. 리브가의 앞서가는 마음이 아들에게 20년의 긴 타향살이를 안겨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내 방법으로 빨리 이루려는 마음, 우리 안에도 그런 마음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실수투성이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리브가는 속임수를 택했고, 야곱은 탐욕스러웠으며, 에서는 소중한 것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이야기를 가감 없이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믿음의 가정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공동체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가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뒤죽박죽인 이 가정을 통해,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속임수로 복을 차지하려 했던 야곱이 20년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가정의 혼란이, 형의 위협이, 타향에서의 고된 세월이 모두 그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가정이 온전치 못하고, 내 인생이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을 때, 우리가 집중해야 할 곳은 우리의 연약함이 아닙니다. 그 연약한 우리를 붙드시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신실한 하나님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기억합시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에서처럼 당장의 필요 앞에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하나님의 뜻을 내 방법으로 앞서가려 하지는 않는가? 리브가처럼 좋은 의도라도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는 것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의 뒤죽박죽인 오늘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창세기 26:12-33절/이삭의 우물(26.04.17)

●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12절)

흉년이 든 땅에서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삭이 그런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26장이 이삭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장입니다. 그런데 이 한 장 안에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걸었던 길을 이삭이 그대로 걷는 이야기, 그리고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복을 받으면 삶이 편해질까요? 12절에서 이삭은 ‘백 배의 수확’을 얻습니다. 13절은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창대함, 왕성함, 거부. 이 세 단어 중 하나만 주어져도 감사할 일인데, 이삭에게는 세 가지가 동시에 주어졌습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습니다.

그런데 복을 받으니까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기하여 아버지 아브라함 때 종들이 파놓은 우물들을 흙으로 막아버립니다. 그 지역에서 우물은 생명과 같습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우물을 막는다는 건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합니다. 16절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어제는 이삭을 혼내던 왕이, 이삭이 강해지자 이번엔 두려워하며 쫓아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요? 지금 이삭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싸울 수 있는 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떠납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팝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파자 ‘샘 근원’이 나왔습니다. 물이 펑펑 쏟아지는 수원이 발견된 것입니다. 건조한 땅에서 우물을 파도 물을 못 만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삭의 종들이 파면 물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다툽니다. 블레셋 목자들이 이삭의 종들이 판 우물을 빼앗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에섹’(다툼)이라 부르고 또 떠납니다. 다음 우물도 빼앗겼습니다. 이름을 ‘싯나’(적대)라 부르고 또 떠납니다. 포기하고 떠나고, 또 포기하고 떠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참 바보같고 답답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우물을 팠을 때 드디어 다툼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넓음)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22절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다투지 않고 피하고 또 피하면 점점 좁아질 것 같은데, 하나님은 오히려 더 넓은 지경으로 이삭을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십니다.

●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28절)

브엘세바로 이동한 이삭에게 하나님이 밤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24절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이삭이 사람들의 공격 가운데 불안하고 두려웠을 그 시점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이삭이 다투지 않고 계속 이동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 그 확신이 이삭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포기한다 해도, 내가 이 우물을 내어준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괜찮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삭은 그 자리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종들은 또 우물을 팠습니다. 또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삭을 쫓아냈던 아비멜렉 왕이 이삭을 찾아옵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27절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아비멜렉의 대답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28절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이방인이 알아봤습니다. 이삭이 포기하고, 떠나고, 또 파고, 또 물을 얻는 과정을 지켜본 그들이 고백한 것입니다. 이삭처럼 살아서는 세상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고,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세상의 방향과 반대되는 삶을 살았는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복된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때 세상이 인정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다” 그리고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라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맹세를 맺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맹세를 맺고 돌아간 그날, 이삭의 종들이 또 우물을 팠고 또 물을 얻었습니다. 이삭은 그 이름을 ‘세바’(맹세)라 불렀고, 그곳이 오늘날까지 브엘세바라 불립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시기와 다툼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삭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시기 당하고 빼앗기면 싸워서 되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 같고 좁아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결국 더 넓은 지경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움켜쥐려 할수록 우리의 지경은 좁아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르호봇의 삶으로 이끄십니다. 넓어지는 삶, 그 넓어짐은 단지 물질적 풍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구나”를 알아보게 되고, 그들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르호봇의 은혜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며 믿음과 순종으로 우리의 우물을 파는 한 날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