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1-8절/ 나의 목소리로(26.07.03)

●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1절)

우리는 시편을 시작하면서 1편과 2편을 묵상했습니다. 1편은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고, 2편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오만한 자들과 그 가운데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시를 읽다 보면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했던 사람,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 바로 다윗입니다.

그런데 오늘 3편은 다윗이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말씀을 붙든 사람도 고난과 위기를 만납니다. 이때 무엇을 붙들고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이 시에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이 목숨을 지키려 아들을 피해 도망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반역보다 다윗을 더 괴롭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1-2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다윗이 왕으로 다스릴 때 그에게 순종하던 사람들이, 반역이 일어나자 하루아침에 등을 돌려 대적이 되었습니다.

배신만큼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배신했을 때 그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더 아픈 것은 그들이 다윗을 향해 했던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입니다. 이 말은 이제 하나님도 다윗을 도울 수 없는 상황, 하나님마저 다윗을 버린 것 같다는 말입니다. 대적의 칼보다 이 말이 더 다윗을 절망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다윗은 절망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습니다. 3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모두가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을 것”이라 말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가 되신다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또한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선포합니다. 지금 다윗은 아들의 반역으로 왕위를 잃고 고개를 떨군 채 도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반드시 그 영광을 회복시키시고, 떨군 머리를 다시 들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대적이 되어 비난을 쏟아내도, 하나님 한 분만은 여전히 자신을 지키시고 회복시키실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4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다윗은 끝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 세상의 목소리를 이긴 것이 바로 다윗의 기도의 목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의 소리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기쁘게 살다가도 누군가의 한마디에 갑자기 낙심과 불안이 찾아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밤새 뒤척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이기는 길이 바로 나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도의 목소리로 이겨내는 것, 이것이 다윗이 회복한 비결이었습니다. 가시적인 응답이 눈 앞에 펼쳐지지 않지만, 기도는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확신합니다. 여기서 ‘성산’은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이 있는 곳으로, 다윗이 그 자리에서 멀리 도망 중이었음에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4절 끝에 ‘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2절과 8절에도 나옵니다. 셀라는 시편에 74번, 하박국에 3번 나오는 단어인데, 노래를 잠시 멈추고 악기가 연주되는 음악적 간주로 보거나, 방금 부른 진리를 잠시 멈추어 마음에 깊이 새기라는 표시로 봅니다. 시편에서 ‘셀라’가 처음 등장하는 시가 3편인데, 그 세 번의 셀라가 절망(2절), 하나님을 향한 신뢰(4절), 구원의 확신(8절)이라는 지점에 놓여 있습니다. 마치 다윗의 마음이 절망에서 확신으로 옮겨가는 과정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그 진리를 새기게 합니다.

● “여호와여 일어나소서”(7절)

기도하며 하나님을 신뢰한 다윗에게 찾아온 것이 무엇일까요? 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자고 일어나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다윗의 상황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반역이 일어나 대적들이 득실거리고, 언제 칼이 목을 겨눌지 모르는 상황, 자칫 분노로 밤을 지새울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고 깼다고 합니다. 위급하고 두려운 현실에서 마음의 평안을 누렸습니다. 세상이, 사람이 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어디서 왔을까요?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이 붙드시니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 편히 자고 일어나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신뢰 속에서 다윗은 확신 가운데 선포합니다. 6절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많은 대적으로 인해 두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자, 이제는 대적보다 훨씬 많은 천만인이 에워싸도 두렵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그를 붙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7-8절에서 다윗은 1-2절과 정반대되는 고백으로 시를 맺습니다. 이 대조를 나란히 보면 기도가 어떻게 상황을 뒤집는지 보입니다. 1절에서 대적들이 다윗을 치려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십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제 하나님이 일어나셔서 저 대적들을 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대적들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하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7절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1절에서 다윗을 ‘치는 자’가 많았는데, 이제 하나님이 원수의 뺨을 치신다고 합니다. 또한 ‘악인의 이를 꺾으셨다’고 하는데, 2절에서 대적들이 입으로 부정적인 말을 쏟아 냈는데 이를 꺾으심으로 조롱하는 입을 막으십니다. 그리고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다윗은 기도 끝에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온 백성을 위한 복을 구하며 시를 맺습니다.

시편에는 이런 구조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과 수많은 대적으로 시작하는데, 끝에 가면 찬양과 확신, 구원의 소망으로 마칩니다. 그 사이에는 대부분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부르짖음이 절망을 소망으로 바꿉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사람의 소리를 기도의 소리로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를 흔드는 세상의 소리, 사람들의 소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기에 침몰하기 쉬운 우리이지만, 나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함께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대적들 한복판에서도 누워 자고 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어떤 환난과 문제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시편 2:1-12절 /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26.07.02)

●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4절)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며 의인과 악인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악인은 나쁜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심에도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사는 사람, 곧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2편은 바로 그 오만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꾸미며,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시편 1편과 2편은 나란히 놓여 시편 전체의 문을 여는 한 쌍입니다.

1절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첫 단어 ‘어찌하여’는 탄식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왜 저렇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와 민족이 끊임없이 헛된 일을 꾸미고, 2절에서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함께 모여 악한 꾀를 냅니다.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들은 정반대로 계속 악을 꾀하고 있습니다.

또한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고 할 때, 그 원어가 ‘하가’였습니다. 입으로 말씀을 되뇌고 곱씹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런데 2:1절에서 이방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민다’고 할 때, 같은 단어인 ‘하가’가 쓰였습니다. 즉 이 악한 사람들도 무언가를 종일 곱씹고 되뇌며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곱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헛된 일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묵상하며 삽니다. 문제는 무엇을 묵상하느냐입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곱씹고, 어떤 이는 헛된 일과 문제를 곱씹습니다. 나는 무엇을 묵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묵상하는지가 결국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결정합니다.

3절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이들의 묵상 결론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세우신 통치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을 벗어던지고 싶은 결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들이 이렇게 힘을 모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4절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왕들이 땅에서 아무리 힘을 모아 소리쳐도,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르실 거라 여기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 반역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비웃으십니다.

5절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하나님이 한번 진노하시면 감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선언하십니다. 6절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세상 왕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살려 할 때, 하나님은 도리어 그 한가운데 자신의 왕을 굳게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7절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내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그 왕을 아들로 삼아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시고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왕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고,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십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 최고이고 다른 나라는 마음대로 짓밟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 곧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왕 되어 살려는 사람들의 끝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제 1편에서 악인의 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결국 망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 이야기를 2편이 이어가는 것입니다.

●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절)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질 때 지어 불렀던 시입니다. ‘왕위 즉위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생각할 것은, 과연 이스라엘이 본문처럼 온 세상을 다스렸는가입니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잠시 강성했을 뿐,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왕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편 2편은 신약에서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본문입니다. 본문이 그리스도를 세 가지로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첫째, 2절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이 단어가 원어로 ‘마시아흐’, 곧 ‘메시아’이고, 헬라어로 옮기면 ‘그리스도’입니다. 둘째, 6절 “내가 나의 왕을 시온에 세웠다”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 되심을 가리킵니다. 셋째, 7절 “너는 내 아들이라”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가리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한자리에 나오는 곳이 시편 2편입니다. 본문은 장차 오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삶을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왕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10-12절이 답입니다. 10절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헛된 일을 곱씹으며 반역을 꾀하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인정하고 그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왕이 선포한 말씀을 숙고해야 합니다.

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내가 주인 되어 사는 것은 결코 복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그 앞에 떨며,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반역하려는 왕들을 하나님이 도리어 은혜 안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2절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여기서 ‘입 맞추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충성과 복종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입 맞추어 그를 왕으로 세웠고(삼상10장), 바알에게 입 맞춘다는 것은 곧 그 신에게 충성한다는 뜻이었습니다(왕상19장). 그러니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은 그분 앞에 철저히 엎드려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12절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그러나 마지막 한마디는 위협이 아니라 초청으로 끝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어제 1편이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했는데, 2편은 “복이 있도다”로 끝나, 두 시편이 복이라는 말로 서로를 감싸 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무엇을 묵상하며 사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곱씹으며 삽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사는가, 아니면 헛된 일과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살까”를 묵상하며 사는가. 그 묵상이 결국 우리를 만들어갑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른 하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주인 되어 살려 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히 인정하고 그분께 복종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그 왕께 피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참된 복을 베푸십니다.

시편 1:1-6절 / 복 있는 사람은(26.07.01)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2절)

7월을 시작하며 시편을 묵상합니다. 시편은 성경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150편으로 이루어진 가장 긴 책입니다. 그중 맨 처음에 놓인 1편은 시편을 여는 서문이자, 시편 전체를 꿰뚫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 첫마디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사람이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1절의 첫 단어 ‘복 있는’은 원어로 ‘아쉬레’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깊은 행복을 뜻합니다. 그러니 시편의 첫머리는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면 “참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입니다. 세상도 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복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복이 어디서 오는지 몰라 엉뚱한 곳에서 찾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편을 여는 이 첫 노래에서 참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중요한 점은, 1절과 2절을 보면 행복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그 복은 우리의 삶을 통해 흘러옵니다. 그리고 그 삶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먼저는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다음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우리는 복을 받으려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시인은 먼저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말합니다. “아니하며, 아니하며, 아니하고”가 거듭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인이 악의 길을 단순히 ‘악하다’고 하지 않고, 세 단계로 묘사합니다.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동사도 ‘따르다(걷다)’, ‘서다’, ‘앉다’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죄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지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악인들의 꾀를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이익을 좇아 작은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두 번 하다 보면 그것이 걸어가는 인생길이 됩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자리에 아예 주저앉아, 그런 삶이 자기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걷다가, 서다가, 앉는 것입니다.

죄는 한 번 행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꾀가 길이 되고, 길이 자리가 되어 우리를 집어삼킵니다. 누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으면 악 자체가 우리를 멸망의 자리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참된 복의 첫걸음은, 무언가를 하기 이전에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첫 단어인 ‘오직’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행복의 길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이 많고 가르치는 사람도 많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한 곳, 여호와의 말씀을 붙듭니다.

이 구절에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은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표현입니다. 말씀을 의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즐거워할까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이 즐거워지고, 즐거우니 자연스럽게 주야로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묵상하다’는 원어로 ‘하가’인데, 본래 “중얼거리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입니다. 말씀을 입에 담고 하루 종일 곱씹으며 되뇌는 것입니다. 사자가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듯, 입속에 말씀을 놓고 중얼중얼 곱씹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러니 오늘 들은 말씀을 일터에서도, 길에서도 입으로 되뇌는 것, 그것이 묵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3절)

이렇게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에게 어떤 복이 주어질까요.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 복은 보통 ‘형통’입니다. 그런데 그 형통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형통을 돈, 건강, 성공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진정한 복의 열매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이 참된 행복이라고 합니다.

왜 돈과 건강과 성공이 참된 복이 아닐까요. 4절이 답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세상이 약속하는 그 복은 겉보기에 화려해도, 바람 한 번 불면 겨처럼 순식간에 흩어져 버립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여기서 ‘심은’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옮겨 심으셨음을 뜻합니다. 그 복은 아무 문제가 없는 복이 아닙니다. 바람도 불고 폭풍도 치지만, 뿌리가 시냇물에 깊이 닿아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맺게 하시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또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가득하여 늘 은혜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형통과는 다른,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형통입니다.

4절은 복있는 사람과 반대되는 악인에 대해 말하는데,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악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흔히 나쁜 죄를 짓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시인은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단계를 그리며, 그 정점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을 둡니다.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제멋대로 사는 사람, 그가 악인 중의 악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중에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삶에서는 자기가 주인 되어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교회 안에 있다 해도, 그런 삶의 열매는 결국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견고하지 못한, 가벼운 인생입니다.

5절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자기가 주인 되어 산 삶은 무언가를 이룬 것 같아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며,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이 결론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서 의인은 곧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인정하신다’는 것은, 그와 동행하시고 늘 함께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반면 악인의 길이 ‘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징계를 내려 멸하신다기보다, 하나님 없는 선택을 거듭하며 스스로 점점 소멸해 간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순간순간 두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착한 일과 나쁜 일 사이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받아 그분을 따라 걸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주인 되어 세상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이것이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복이 우리의 삶을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복 받기를 원하지만, 그 복은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를 통해 흘러옵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해야 할 그 한 가지가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입에 담아 곱씹는 삶, 그런 성도에게 하나님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견고하고, 철을 따라 열매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복을 베푸십니다. 그 복된 삶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6:13-24절 / 깨어 믿음에 굳게 서라(26.06.30)

●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절)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끝맺음이 아닌, 짧고 강한 권면, 동역자를 향한 감사, 그리고 무거운 경고와 따뜻한 사랑이 한데 어우러져, 바울이 이 편지 전체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짧고 굵은 권면을 연달아 던집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마치 한 편의 짧은 설교 같습니다.

첫째,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어 있음이 없으면 자칫 흘러가 버리기 쉽습니다. 둘째, ‘믿음에 굳게 서라’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무엇 위에 서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오직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셋째, ‘남자답게 강건하라’입니다. 이 표현은 ‘용감하게 행하라, 담대하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신31장)고 격려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바울은 영적 싸움이 치열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그 담대함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용감하게 나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14절에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3장에서 바울은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결국 은사는 자랑하면서 사랑이 없었던 데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 전체를 마무리하는 한마디는 결국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도, 굳게 섬도, 담대함도, 그 모든 것이 사랑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15절부터 바울은 동역자들에 대한 감사를 표합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스데바나의 가정은 고린도가 속한 아가야 지역의 첫 회심자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황량한 땅의 첫 믿음의 사람이니, 그 자체로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더 귀한 것은 이 첫 회심자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첫 번째로 믿은 그가 자기 사명을 ‘성도 섬기는 일’로 삼은 것입니다. 회심한 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이 땅에 복음의 기초를 세우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 결심하고,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한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권합니다. “이 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고린도 교회에는 교만하고 자랑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교회를 섬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뭔가를 드러내고 눈에 띄는 일을 하는 사람을 통해 교회가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사명을 알고 묵묵히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 교회는 세워져 갑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라고 권합니다. 그 말에는 이런 성도들을 하나님이 반드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리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17-18절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이 세 사람이 고린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채운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직접 개척했기에 그들을 향한 사랑이 컸지만, 동시에 그 교회로 인한 상처도 컸습니다. 지도자를 두고 파가 갈리고, 일부는 바울을 두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 아픈 상황에서, 이 세 사람이 먼 길을 와 바울과 함께하고 격려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부족함을 채웠습니다.

또한 이들은 18절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바울의 마음도,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도 시원하게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미숙한 신앙도 많았지만, 누군가의 부족을 채우고 자기가 섬길 자리를 아는 성숙한 성도들이 있었기에 교회가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서로에게 걱정과 근심을 안기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만 해도 기쁘고 감사하여 함께하고 싶은, 서로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22절)

19절부터는 문안 인사입니다. 특히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눈에 띕니다.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으로 쫓겨나 고린도로 갔다가 거기서 바울을 만나 함께 교회를 섬긴 이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부부를 그리스도 안의 동역자라 부르며,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롬16:3-4). “그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에서, 당시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 예배드렸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문안과 은혜로 따뜻하게 끝날 것 같던 편지에, 갑작스러운 경고가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보았듯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바울의 말을 흘려듣고, 교만과 자랑으로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편지의 내용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말고 무겁게 받아 마음에 새기라고 강하게 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곧 그분의 사랑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바울은 외칩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가 잘 아는 ‘마라나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깨어 담대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이 곧 오시기 때문입니다. 15장에서 본 부활의 영광을 입을 성도라면, 그 오심을 기다리는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23-24절이 마지막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할지어다”

편지를 마칠 때 흔히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하기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4절이 특이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이 편지는 책망이 강했습니다. 바울은 염려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편지를 읽으며 “바울이 우리를 공격하는구나” 하고 마음 문을 닫아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점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분명히 합니다. 이 모든 권면은 개인적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눈물의 기도 속에서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라고. 그러니 ‘나의 사랑’이 너희와 함께한다는 이 마지막 한마디는, 강한 책망 뒤에 그 모든 말의 진짜 뿌리가 사랑이었음을 전하는 고백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담대히,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사람에게도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분별하여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서로의 부족을 채워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도 사람에게도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적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채워주는 사람, 그가 곧 누군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그렇게 서로를 세우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6:1-12절/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26.06.29)

●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1절)

고린도전서 마지막인 16장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기근과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앞으로의 선교 계획입니다. 이 안에 은혜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연보’는 쉽게 말해 구제 헌금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같은 지도자들이 기근으로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아달라고 부탁했고(갈 2장), 바울은 그 일을 여러 교회에 알리며 고린도 교회에도 동참을 권한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줍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매주 첫날’은 주일을 가리킵니다. 부활 이후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습니다. ‘각 사람’은 몇몇이 아니라 모두가 빠짐없이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수입에 따라’는 더 정확히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신 대로”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인색하지 말고 그에 합당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모아 두라’고 한 것은, 미리 기억하여 준비하라는 권면입니다.

돈에 대한 이야기는 민감한 문제인데, 바울은 놀랍도록 당당합니다. 그 이유가 3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여기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헌금인데, 바울은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곧 영적인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손에 잡히는 은혜, 만질 수 있는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흘러 나가 다른 형제의 필요를 채우는 것, 그것이 헌금입니다.

바울이 이 헌금을 부르는 방식은 그 외에도 풍성합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같은 헌금을 ‘코이노니아’(나눔, 사귐)라 부르기도 하고, ‘디아코니아’(섬김, 봉사)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의 ‘연보’는 원어로 ‘로기아’인데, 이는 강제로 내야 하는 세금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더 드리는 헌금을 뜻합니다. 의무로 떠밀려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쳐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 헌금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것을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은혜받은 성도의 마땅한 반응으로 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은혜를 누리려는 사람,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물질로, 헌신과 봉사로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물질이 우리 시대의 주인이자 우상이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는 은혜가 과연 참된 은혜일까요. 물질로, 섬김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참된 은혜이며, 그 은혜는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풍성한 은혜로 우리 삶을 채웁니다. 바울은 그 확신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이 당당함은 6절에서도 드러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과 겨울을 함께 지내며 머물기를 원하면서,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당시 바울은 에베소에 있었고, 고린도에 들렀다가 다음 선교지로 떠나려 했습니다. 선교지로 가려면 물질과 후원이 필요한데, 그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담대히 요청합니다. 누군가의 복음 전파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 그들도 누군가를 보내어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받은 성도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7절)

5절부터 바울은 앞으로의 계획을 밝힙니다. 에베소에서 출발해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가려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나름의 계획이 있었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 오래 머물기를 원한 것은, 교회의 많은 문제가 하루 이틀에 해결될 수 없어 직접 가르치고 바로잡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 머무는 이유를 말합니다.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에베소는 복음 전파의 전초 기지와 같은 곳이어서, 여기서 복음이 힘 있게 퍼지면 놀랍게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적하는 자도 많았습니다.

지금 바울은 두 가지를 동시에 보고 있습니다. 복음이 확산될 ‘광대한 문’과, 그것을 막는 ‘많은 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게 세워질 때는 반드시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가 중요합니다. 대적에 초점을 맞추면 멈출 수밖에 없지만, 열린 문에 초점을 맞추면 그 대적을 이기고 나아가게 됩니다. 바울은 대적이 아니라 복음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늘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문제와 어려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상황이 반드시 있습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통해 이루실 그분의 놀라운 계획에 초점을 맞출 때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10-12절에서 바울은 두 동역자를 언급합니다. 먼저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앞서 4:17절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일깨우도록 디모데를 보낸다고 했는데, 여기서 그를 보내며 마음에 걱정이 많아 보입니다. 10-11절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라”

디모데는 젊은 사역자였습니다. 교만과 자랑이 밑바닥에 깔려 자기 기준으로 지도자를 평가하고 줄 세우던 고린도 성도들이라면, 젊은 디모데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교만이 아볼로파, 바울파, 베드로파 같은 분쟁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존중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당부합니다.

12절은 아볼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가라고 여러 번 권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교회가 파당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자신이 가면 오히려 갈등을 키울 수 있다고 여겨,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역자들의 성숙한 분별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헌금이 받은 은혜의 가시적 표현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제 헌금을 ‘은혜’라 불렀습니다. 우리의 헌금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 은혜가 물질로 흘러나오는 것인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늘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방해하는 문제가 함께 있습니다. 방해하는 사람이나 걸림돌이 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