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6 | 매일성경
●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 넘겨주셨느니라”(15절)
어제 본문에서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미디안 적진에 들어가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15절에서 기드온은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합니다. 진영으로 돌아와 이렇게 외칩니다.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드디어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기드온이 누구의 말에 확신을 얻었느냐입니다. 미디안 군사들의 꿈과 해몽이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9절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여러번 승리에 대한 말씀으로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미디안 병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일어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말에 의해 움직인 것입니다. 앞서 바락 장군도 그랬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드보라가 함께 가야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움직였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으로 분명히 하셨지만 확신으로 행동하지 않다가, 누군가 곁에서 한마디 해 주면 그제야 움직이지 않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함에도 사람의 말 때문에 흔들리기도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그만한 무게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때 우리 삶은 흔들리게 됩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16절에서 기드온은 작전을 세웁니다.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사람의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라면 칼과 창과 방패를 들어야 하는데, 이들이 든 것은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입니다. 이는 전쟁의 승리가 사람의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케 하십니다.
17절에서 기드온이 삼백 명에게 지시합니다.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작전이 특이하니 자신을 따라서 함께 행동하자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기드온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놓습니다. 18절을 보면 외칠 구호를 정해 주는데 이렇습니다.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이 전쟁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치르시는 전쟁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위하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 곁에 나란히 붙여 놓았습니다. 당시 가나안 비문에 보면 바알신과 왕을 같은 위치에 놓고 “바알을 위하라, 왕을 위하라”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자신을 왕처럼,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위치로 놓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2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사들이 외친 말이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라”입니다. 이런 말이 두 번이나 되풀이된다는 것은 기드온의 마음 깊은 곳에 그런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승리 속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집니다.
기드온은 두려움에 떨며 두 번이나 양털 표적을 구하며 확인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승리가 눈 앞에 다가오자 자기 이름을 하나님과 함께 놓습니다. 결국 기드온은 뒤로 가면서 왕처럼 행세하게 됩니다. 승리가 좋은 것이지만 그를 교만하게 하고 무너지게 했습니다.
●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22절)
19절 전쟁이 시작된 때는 이경 초입니다. 우리 시간으로는 밤 10시경입니다. 밤이 깊은 때이고 파수꾼들이 막 교대한 때입니다. 기드온과 함께한 백 명이 진영 근처에 이르러 나팔을 불고 손에 든 항아리를 부숩니다. 세 대가 같은 순간 그렇게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방에서 나팔이 울리고 곳곳에서 불이 솟아오릅니다. 21절에서 삼백 명은 각기 제자리에 섰습니다.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진영을 에워싼 채 서 있기만 했는데 온 미디안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했습니다.
상상이 갑니다. 잠에서 깬 미디안 병사들의 눈에 보인 것은 사방을 두른 불빛이고 귀에 들린 것은 사방에서 울리는 나팔이었습니다. 나팔 하나에 병사 하나가 아니라 나팔 하나에 부대 하나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저들은 자기를 에워싼 군대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22절이 그 까닭을 말합니다.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미디안 사람들이 서로를 쳤습니다. 어둠 속에서 곁에 있는 자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들 안에 이미 두려움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 두려움이 밤중의 나팔 소리와 횃불에 극대화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살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려고 그곳을 향해 도망합니다.
승리의 요인을 살펴보면 작전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삼백 명이 한 일은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고 제자리에 선 것뿐입니다. 칼을 휘두른 것은 미디안 자신이었고, 그렇게 되게 하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22절은 분명하게 “여호와께서”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했을 때 이스라엘을 덮었던 것이 두려움이었습니다. 굴에 숨고 밤에만 움직이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시자 이제 그 두려움이 대적에게로 옮겨 갔습니다. 두려움은 상황과 형편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아닌 담대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 사람들이 소집되어 미디안을 추격합니다. 앞서 집으로 돌려보냈던 이들입니다. 승기가 완전히 잡은 후 이들이 다시 부름을 받습니다. 삼백 명이 13만을 다 감당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24절에서 기드온은 에브라임 온 산지에도 사자들을 보내어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게 합니다. 도망하는 자들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게 막은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내용은 25절에서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이 사로잡힙니다. 오렙은 갈가마귀라는 뜻이고 스엡은 늑대라는 뜻입니다.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 이스라엘의 곡식을 짓밟다가 이제 붙잡힙니다. 오렙은 어느 바위에서 죽었고 스엡은 어느 포도주 틀에서 죽었는데, 그 뒤로 사람들이 그 바위를 오렙 바위라 부르고 그 포도주 틀을 스엡 포도주 틀이라 불렀습니다. 그 땅에 승리의 표가 남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움직여야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두 번 세 번 말씀하셨는데도 확신으로 행동하지 못하다가 대적의 한마디에 일어섰습니다. 우리도 말씀은 가볍게 듣고 사람의 말에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셨는지를 먼저 묻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 곁에 나를 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기드온은 승리가 보이자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 곁에 붙였습니다. 그 교만이 훗날 그를 무너뜨립니다. 인정받고 싶고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높이는 자를 하나님이 낮추시고, 자기를 낮추는 자를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하나님만 높이는 자리에 섭시다.
2026.09.15 | 매일성경
●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2절)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고, 두 번의 양털 표적을 통해 하나님 약속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됩니다. 본문 1절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으로 소개합니다. 바알과 다툰 자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으로 기드온을 소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현재 위기가 무엇 때문이며, 승리를 위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 앞서 바알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진을 친 곳은 하롯 샘 곁이었습니다. 하롯이라는 이름은 떤다는 의미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이 돌려보내라고 하신 “두려워 떠는 자”가 하롯과 같은 의미입니다. 떨림이라는 이름의 샘 곁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떨고 있었고, 그런 자들은 돌려보냅니다. 샘 이름이 이스라엘의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2절에서 하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군대가 너무 많아서 승리를 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금 군대 숫자를 보면, 기드온이 모은 군대는 3절을 보면 3만 2000명입니다. 미디안 군대는 12절에서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다고 했고, 8장에 가면 13만 5000명이었다고 나옵니다. 네 배가 넘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이미 절망적인 숫자인데, 하나님은 그것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2절이 말씀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만2000으로 13만5000을 이겼다 해도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백성은 자기가 해냈다고 말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그만큼 깊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군대의 숫자를 줄이십니다. 3절,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러자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가고 만 명이 남았습니다. 소집된 군대에서 셋 중 둘이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그만큼 두려웠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뜻입니다. 남은 만 명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삼만 이천으로도 떨었는데 이제 만 명입니다. 담대해진 것이 아니라 더 두려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4절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만 명도 많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으로서는 한 사람도 놓치고 싶지 않은 상황인데 하나님은 더 줄이십니다. 물가에서 사람들이 두 모습으로 나뉩니다. 6절을 그대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은 자가 삼백 명이고,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하나님은 그 삼백 명으로 미디안을 넘겨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묻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마신 사람 300명을 고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이유를 한 줄도 말하지 않습니다. 더 경계하는 자세였다거나 더 훈련된 사람이었다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앞뒤 흐름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태도가 아니라 숫자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많다”고만 하셨습니다. 만일 무릎을 꿇고 마신 사람이 삼백 명이었다면 그 삼백 명을 고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삼백 용사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지만, 본문은 이들이 용사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수를 줄이시려고 고르신 소수일 뿐입니다. 승리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시려는 겁니다.
● “네 손이 강하여져서”(11절)
8절에서 남은 백성을 돌려보내고 삼백 명만 남습니다.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골짜기가 메뚜기 떼로 덮여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때 기드온의 심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삼만 이천이 있을 때에도 양털을 두 번이나 놓고 확인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 곁에 이제 삼백 명이 남았습니다. 두렵고 복잡합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 9절에서 “그 밤에” 다시 찾아오셔서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두려워할 것을 미리 아시고 동행할 사람까지 허락하십니다. 11절이 그 목적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내려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꾸짖어 몰아세우지 않으시고, 손이 강해질 수 있는 자리로 데려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두려움으로 머뭇거리는 기드온에게 적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셔서 확신을 주십니다.
12절에서 기드온이 본 것은 메뚜기 떼 같은 군대와 해변의 모래 같은 낙타였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한 병사가 친구에게 꿈 이야기를 합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장막을 쳐서 무너뜨리고 위쪽으로 엎었다는 것입니다. 이 꿈에 쓰인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보리는 값싼 곡식이고 농사짓는 사람들의 양식입니다. 장막은 미디안 같은 유목민의 거처입니다. 앞에서 미디안은 몰려와 이스라엘 땅의 소산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짓밟히던 농부들의 떡 한 덩어리가 굴러와 약탈자의 장막을 엎는 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 갚으시고 구원하십니다.
14절에서는 다른 친구가 그 꿈을 풀이합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넘겨주셨다는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입이 아니라 대적의 입에서 나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두 번이나 표적을 구하며 확인하려던 그 말을, 미디안 병사가 먼저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거기서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저들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저들이 자기를 더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을 누가 그들 안에 심어 놓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적진 안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기드온이 내려가기 전에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내 상황을 더 크게 볼 때가 있습니다. 기드온은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불안해졌습니다. 우리도 눈에 보이는 형편을 바라 보다가 이미 받은 약속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계산이나 상식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삼백 명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알면서도 머뭇거리는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아야 합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넘겨주셨다고 하셨는데도 계속 확인하고 망설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시고 단계마다 이끌어 주셨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인도받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한 걸음 내디딜 때입니다.
2026.09.14 | 매일성경
●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25절)
25절은 “그 날 밤에”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또한 바위에서 불을 내어 표적을 보인 그날 밤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처음으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미디안을 치기 전에 자기 집 마당부터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이 한 절이 기드온의 형편을 알려 줍니다.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이 아버지의 집에 있었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섬기고 있었으니, 기드온의 집이 그 지역 우상 숭배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집의 아들에게 그 제단을 헐라고 하십니다.
제물도 지정하십니다.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칠 년은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손에 고통당한 햇수와 같습니다. 미디안이 쳐들어온 그해에 난 수소입니다. 그 칠 년의 고난이 이제 끝난다는 뜻을 담은 제물입니다. 둘째라는 말은 순서보다 뛰어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은 헐어 낸 그 자리 곧 산성 꼭대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제단을 쌓고, 찍어 낸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우상을 부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상이 서 있던 자리에 하나님의 제단을 세우고, 그 우상의 나무가 번제의 땔감이 됩니다. 우상의 자리를 헐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세워야 합니다.
27절에서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성읍 사람들이 그를 죽이라고 나서는 것을 보면(30절),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7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가문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했습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담겨있습니다. 마땅히 부끄러워하고 숨어야 할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이 두려워서 밤에 행동합니다. 뒤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그 시대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떳떳하지 못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28절을 보면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제단이 헐린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그것을 아침에 곧바로 알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주 그곳에 드나들었다는 뜻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 그들의 열심이 그 정도였습니다. 놀란 마을 주민들은 범인을 캐어물어 기드온을 찾아내고, 30절에서 요아스에게 아들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31절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옵니다. 그동안 우상 제단으로 이득을 보았을 요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한마디로 바알이 신이니 스스로 해결하도록 놓아두라는 겁니다. 아들을 살리려고 꺼낸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우상인 바알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합니다. 밤새 제단이 헐리는 동안 바알은 자기 제단 하나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알은 끝내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기드온은 살았습니다. 그래서 32절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34절)
33절에서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을 건너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칩니다. 앞에서 이들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 땅의 소산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시 왔습니다.
34절에서 마침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라고 합니다. 여기 임하셨다는 말은 옷을 입힌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영이 기드온을 옷처럼 감싸셨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이 영은 사사에게 전쟁을 감당할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나팔을 붑니다. 아비에셀이 따르는데, 아비에셀은 기드온 자신의 집안입니다. 우상의 제단이 있던 그 집안이 이제 전쟁의 선봉에 섭니다. 35절에서 므낫세 온 지파와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가 올라와 그를 영접합니다. 하나님이 다 갖추어 주셨습니다. 말씀도 주셨고, 표적도 보이셨고, 영도 입히셨고, 군사도 모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36절에서 기드온이 멈칫합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이 부분을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기드온 스스로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7절에서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두 번이나 인정하면서, 그 말씀을 확인할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이슬이 양털에만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하십니다. 이튿날 아침 양털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39절에서 기드온이 또 구합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지나쳤는지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라고 먼저 말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땅에는 이슬이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40절에서 하나님이 그 밤에 그대로 하십니다.
사사기가 이 장면을 칭찬으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셨는데도 표적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말씀 위에 서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표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보다 표적을 앞세우는 것은 그 말씀을 주신 분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표시입니다. 기드온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 이스라엘의 형편이 그러했습니다. 기드온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요구를 두 번 다 들어주셨습니다. 의심하는 기드온에게 표적을 통해 확신을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봅니다. 연약하고 더딘 사람을 꾸짖고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십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여러 번 확인하고 망설이며 여기까지 왔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참아 주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뒤바뀌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기드온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이 밤에 몰래 움직여야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더 붙들고 사랑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복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헐어 낼 것은 헐어 내고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표적보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구하면 우리 신앙은 계속 흔들립니다. 하루에 한 절이라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함께 나누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2026.09.10 | 매일성경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3절)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5장이 시작됩니다. 4-5장은 같은 사건을 두 번 들려줍니다. 한 번은 사건으로, 다른 한 번은 노래로 전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4장이 홍해 사건을 이야기한 뒤 15장이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로 다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도 여선지자가 노래를 이끌었고, 여기서도 여선지자가 노래를 이끕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물로 병거를 잠그셨고,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드보라의 노래는 새로운 세대가 부르는 홍해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래의 주제는 2-3절에서 반복됩니다. 2절 하 “여호와를 찬송하라”, 3절 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입니다. 승리했으니 승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주신 분을 노래합니다. 2절은 영솔자들이 앞장서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했다고 하면서도 찬송은 여호와께 돌립니다. 사람이 헌신하였지만 승리는 결국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래는 처음 부분에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이야기합니다. 4절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세일과 에돔은 출애굽 세대가 지나온 광야 길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불과 구름기둥으로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드보라는 지금 시내 산의 하나님이 다시 진군해 오시는 것으로 이 전쟁을 봅니다. 기손 강가에서 벌어진 일은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 하시던 일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자 땅이 진동합니다. 진동이라는 말이 두 절 안에 3번이나 반복됩니다. 산들이 흔들리고 시내 산조차 흔들립니다.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주의 영광을 감당하지 못해 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부르고 쉽게 다루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그 앞에서 산이 떨리는 분입니다.
그리고 4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4장에서 전쟁 승리의 이유를 여기서 말해 줍니다. 시스라는 철 병거를 끌고 기손 강가로 갔습니다. 그 땅이 말라 있음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병거를 몰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비를 내리셨습니다. 마른 평지가 진창이 되었고, 구백 대의 병거는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21절이 그래서 기손 강이 그들을 표류시켰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새 무기를 쥐여 주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구름을 움직이셨습니다.
6절부터는 승리 이전의 형편을 설명합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큰길이 비었다는 것은 상인이 다니지 못하고 소식이 끊겼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몸을 숨기며 좁은 길로 돌아다녔습니다. 나라의 혈관이 막힌 상태입니다. 7절은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고, 그래서 지킬 사람도 이끌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좀처럼 쓰이지 않는 칭호입니다. 사사기가 사사를 부르는 말은 대개 구원자이거나 재판자인데, 이 노래는 어머니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드보라가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키고 보호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요? 8절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새로운 신들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늘 새 얼굴로 옵니다. 오래된 것은 식상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섭니다. 관광지의 점집 거리든 손안의 사주 앱이든, 모양은 바뀌어도 같습니다. 재미로 한번 보는 것이라 여기지만, 성경은 그것이 새 신을 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절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사만 명에게 방패도 창도 없었습니다. 앞 장의 철 병거 구백 대와 나란히 놓고 보면 그 격차가 선명합니다.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를 들고 야엘이 장막 말뚝을 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백성의 손은 비어 갑니다. 새 신을 택한 대가는 성문까지 밀려온 전쟁이었습니다.
●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18절)
9절에서 노래는 다시 사람들에게로 돌아옵니다. 방백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했습니다. 강제로 끌려 나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드린 것입니다. 10절은 흰 나귀 탄 자와 양탄자에 앉은 자와 길에 행하는 자를 나란히 부릅니다. 지배층과 상인과 평범한 백성, 곧 모두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할 내용은 1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여기 쓰인 말은 하나님이 행하신 의로운 일들이라는 복수형입니다. 전쟁에 나간 것도 사람이고 이긴 것도 사람인데, 노래는 드러내고 찬양할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강조합니다. 일이 잘되고 나면 내가 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내가 해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12절에서 “깰지어다”가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시가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할 때는 다급함을 담습니다.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드보라를 깨우고 바락을 일으켜 세우는 이 외침이 곧이어 지파들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14절부터 명단이 나옵니다. 에브라임과 베냐민이 내려왔고, 므낫세를 가리키는 마길에서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으며, 스불론에서 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습니다. 15절에서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했고 바락을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18절은 그중에서도 두 지파를 따로 세웁니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그런데 노래는 오지 않은 지파들도 이야기합니다. 15절 끝과 16절 끝이 같은 말로 두 번 마무리되는데,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입니다. 여기 큰 결심은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혹은 끝도 없이 토론을 벌인다”는 뜻입니다. 고민만하고 말만하다가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구절은 칭찬이 아니라 조롱입니다.
16절은 그들이 무엇을 듣고 있었는지도 알려 줍니다.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르우벤은 가축이 심히 많았기에 요단 동편 땅을 구했던 지파입니다. 1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머물렀고 단은 배에 머물렀으며 아셀은 해변에 앉아 항만에 거주했습니다. 가진 것이 있으니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이 목숨을 걸었고, 잃을 것이 있는 이들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만 붙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임하시면 산이 진동하고, 때를 따라 하늘의 구름이 움직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그런 분을 두고 새 신을 기웃거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함께 서십시오. 드보라의 노래는 전쟁에 참여한 지파와 앉아 있던 지파를 나란히 기록했습니다. 시냇가에서 재고 따지는 사이에 전쟁은 다른 이들의 손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일도, 소그룹에서 함께 나누는 일도 그렇습니다. 마음을 모아 함께 할 때 하나님은 그 공동체를 통해 일하십니다.
2026.09.09 | 매일성경
●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14절)
어제 본문에서 바락은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드보라의 동행을 요구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때 드보라는 승리는 주어지겠으나 그 영광은 한 여인의 손에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야기는 엉뚱해 보이는 한 절로 시작합니다. 11절은 갑자기 겐 사람 헤벨을 소개합니다. 겐 족속은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으로, 사사기 1장은 이들이 유다 자손과 함께 남방에 거주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헤벨은 “자기 족속을 떠나” 북쪽 게데스 가까이로 장막을 옮겼습니다. 언약 백성의 곁을 떠난 것입니다. 17절은 그 결과를 알려 주는데, 하솔 왕 야빈과 헤벨의 집 사이에 화평이 있었습니다. 그런 헤벨 가정의 한 사람이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합니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됩니다. 12-13절에서 시스라가 움직입니다. 바락이 다볼 산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철 병거 구백 대와 모든 백성을 모아 기손 강으로 나아갑니다.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자신감으로 최신 무기를 앞세웁니다. 모든 병거와 모든 백성이 나왔다고 강조합니다. 상식적으로 이스라엘이 승리하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선택해서 나간 기손 강은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소입니다. 어제 본문 7절에서 하나님은 바락에게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을 기손 강으로 이끌어 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시스라는 자기 작전대로 움직였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하나님이 정해 두신 자리였습니다. 사람의 결정과 판단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드보라가 명령합니다. 14절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넘겨주시겠다는 미래형이 아니라 넘겨주신 날이라는 완료형입니다. 아직 칼 한 번 부딪히지 않았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함께 가시는 정도가 아니라 앞서 나가십니다. 바락이 할 일은 산에서 내려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주십니다.
15절이 전쟁의 상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혼란에 빠지게 하다’로 옮겨진 히브리어 동사는, 홍해에서 하나님이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을 때, 그리고 여호수아 때 하나님이 아모리 연합군을 치셨을 때 쓰인 말입니다. 성경이 여호와의 전쟁을 말할 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앞서 싸우셨습니다.
이어지는 5:4,21절은 이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알려 줍니다. 기손 강이 그들을 표류시켰다고 노래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고, 구백 대의 병거는 진흙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떨게 한 최강의 무기를 완전히 무력화시키셨습니다.
16절은 바락이 하로셋 학고임까지 추격했고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져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스라는 바락이 추격하는 반대방향으로 도망합니다. 적의 머리인 시스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21절)
도망하는 시스라의 발이 향한 곳이 헤벨의 장막입니다. 화평 조약이 있으니 안전하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를 맞은 것은 헤벨의 아내 야엘이었습니다. 야엘은 시스라를 환대합니다. 18절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시스라가 야엘에게 해야 할 말은 야엘이 담대하게 합니다. 야엘은 그를 이불로 덮었습니다. 물을 청하자 우유를 주었습니다. 5장은 이 장면을 더 자세히 노래합니다. 물을 구했는데 엉긴 젖을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다고 합니다. 청한 것보다 후하게 대접한 것입니다. 이 후한 대접으로 시스라는 깊은 잠에 빠집니다.
시스라가 잠들자 야엘이 든 것은 21절, 장막 말뚝과 방망이입니다. 유목민의 장막을 치고 걷는 일은 여인의 몫이었습니다. 특별한 무기가 아니라 매일 쓰던 연장입니다. 사사기는 이런 도구를 여러 번 보여 줍니다.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가 그랬고, 훗날 삼손의 나귀 턱뼈가 그랬습니다. 무기가 없어서 잡은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무기가 됩니다.
야엘은 담대하고 거침없이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대고 박습니다. 그러자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혔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에훗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에훗이 에글론을 찌를 때 칼자루까지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사기는 이 여인의 행동을 사사의 행동과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마땅히 바락이 해야 할 일을, 하나님이 세우신 장군이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지 못한 그 자리에서, 한 여인이 대신 감당했습니다.
22절,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해 도착했을 때, 야엘이 나가 맞으며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합니다. 들어가 보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드보라의 말대로 영광은 그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사사기는 훗날 아비멜렉이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고 죽는 장면에서도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 시대에 여인의 손에 죽는 것은 용사에게 가장 큰 수치였습니다.
여기서 사사기가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보고 사람을 쓰지 않으십니다. 야엘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고, 장군도 아니었으며, 남편이 대적과 조약을 맺은 집의 여인이었습니다. 그 손에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습니다.
23절과 24절이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다.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삿 1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1장은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손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여호수아가 무너뜨렸다가 다시 일어섰던 하솔의 세력을 이제야 끝납니다. 순종이 있을 때 대적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은 앞서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시고 혼자 가게 두지 않으십니다.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앞서 행하십니다. 이 전쟁에서 바락이 한 일은 산에서 내려간 것뿐이고, 병거를 무너뜨린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일이 감당할 수 없어 보일 때, 우리가 붙들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쓰십니다. 조건이 갖춰진 사람에게만 일을 맡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방 여인의 손과 장막 말뚝 하나로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