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5 | 매일성경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15절)
오늘 본문은 일곱 대접 재앙 가운데 여섯째와 일곱째입니다.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습니다. “유브라데”는 9:14절 여섯째 나팔 재앙 때도 등장했던 강입니다. 이곳은 로마와 로마가 두려워한 파르티아 군대의 경계선입니다. 여섯째 나팔 재앙은 파르티아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와 공격하는 전쟁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고 합니다.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전쟁이 아니라 이들이 연합군을 형성합니다. 말라버린 유브라데 강은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쉽게 건너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연합군을 형성하는 이유는 13절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여기 개구리가 등장합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중 두 번째 재앙이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세 더러운 영”을 개구리에 비유합니다. 이 더러운 영들이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14절은 다시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고 하면서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이 귀신, 즉 사탄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내어 용과 짐승, 거짓 선지자로 활동하면서 그들의 입으로, 또는 이적으로 왕들을 모아 하나님과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14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합니다. 사탄의 나라가 연합군을 형성하여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날을 “하나님의 큰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날입니다. 세상 군대가 아무리 많고 거대해도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미 승부는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의 승리요 세상 나라의 패배입니다. 이들이 모이는 곳이 16절 “아마겟돈”입니다. 원어로 ‘하르므깃도’로 “므깃도의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왕들이 패배한 곳이며(삿4-5장) 거짓 선지자들이 패망한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은 영적 전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핵심은 용과 짐승, 거짓 선지자가 패배하는 장소입니다.
이런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런데 도둑같이 갑자기 오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삶은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삶입니다. 이것은 3장에서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권면한 말씀과 비슷합니다. 사데교회는 안타깝게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3:3절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이어 3:4절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도둑같이 오십니다. 그러니 옷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미지근한 상태였고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3:18절은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십니다. 이처럼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 권면 속에 당시 성도들의 고민과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연합합니다. 거대합니다. 세상이 이길 것 같습니다. 세상이 영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세상 편에 서야 하고, 그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들의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 주님께서 반드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승리는 주실 것이니 항상 깨어 거룩한 옷을 입고 세상 앞에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19절)
마지막 일곱째 대접은 공중에 쏟아집니다. 공중은 사탄이 권세를 잡은 곳입니다. 이곳에 진노의 대접이 쏟아지자 성전 보좌에서 음성이 들리는데 “되었다”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큰 지진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집니다. 세상의 모든 성이 무너집니다.
특히 19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받습니다. 이미 14:8절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신 바 되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죄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시고 그에 합당한 보응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수고와 눈물과 인내도 빠짐없이 기억하시고 복으로 갚아주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기억하시고 갚으십니다. 큰 성 바벨론은 창11장에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거룩함이 아닌 거대함을 추구하였습니다. 스스로가 신이 되어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런 바벨론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게 됩니다.
21절부터는 다시 한번 바벨론과 그를 따르는 세상에 임하는 심판을 설명합니다. 무게가 한 달란트(26-41kg)되는 우박이 떨어집니다. 이 재앙을 피해 살아날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입술은 어떤 도구인가를 생각합니다. 전쟁을 위해 사람을 모으는 입술이 아닌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이루는 입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언제 오실지 모르는 마지막 때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구별된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거대한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거룩한 성도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2025.07.24 | 매일성경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2절)
일곱 대접 재앙이 시작됩니다. 성전에서 큰 음성이 들립니다. 1절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진행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곳이 “땅”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용과 짐승이 왕 노릇하며 자신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했던 장소입니다. 하나님 흉내를 내던 곳입니다. 그런데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2절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은 다섯 번째 천사까지 대접을 쏟는데 그 장소가 다릅니다. 첫 번째는 “땅”이고 두 번째는 “바다”이며, 세 번째는 강과 물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해이고, 다섯 번째는 짐승의 왕좌입니다. 세상 모든 곳에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2절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입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잊어서는 안되는 내용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소수의 성도들이 아닌, 짐승의 세상에서 짐승을 따르고 짐승을 우상처럼 경배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안에서 부와 안전을 누렸습니다. 성공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세상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그 사람들에게 진노의 대접이 쏟아집니다. 독한 종기가 나서 고통을 당합니다.
둘째 천사는 대접을 바다에 쏟습니다. 그러자 3절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피”가 네 번 반복됩니다(3,4,6). 3절과 4절의 “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바다와 강물이 피로 변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6절에 두 번 반복되는 “피”는 성도들과 선지자들이 흘린 피입니다. 그 결과로 바다와 물이 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조롱했습니다.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선지자들의 외침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이 피를 경험하게 됩니다.
3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단어는 “모든”입니다. 대접 재앙으로 모든 생물이 죽게 됩니다. 이것은 8:8-9절과 비교됩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고 합니다. 계속 강조했듯 나팔 재앙은 삼분의 일이 피해를 당합니다. 나팔 재앙 앞에 일어난 인 재앙은 사분의 일이 피해를 입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죽게 됩니다. 최종적인 심판입니다.
세 번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은 후 이렇게 선포합니다. 5절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7절도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어제 본문인 15:3,4절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대접 재앙을 비롯한 모든 재앙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의롭지 않은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과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9절)
넷째 천사가 대접을 해에 쏟자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사람들에게 온기를 주고 에너지의 원천인 해가 심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사실 해는 위험한 것입니다. 해가 우리와 조금만 가까워도 우리는 태워집니다. 반대로 조금만 멀어져도 얼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따뜻한 햇볕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서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해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계가 이렇게 하나님의 완벽한 손길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로 문제가 생기니 해가 사람들 태우는 도구가 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9절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1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섯째 대접이 짐승의 왕에게 쏟아지니 사람들이 아파서 고통하며 심지어 혀를 깨물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11절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9:20-21절에도 나왔습니다. 나팔 재앙이 임했는데 그 결과 “회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소속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짐승에게 속한 자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계시록은 심판에 대한 내용이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재앙의 목적도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회개하지 않습니다. 고집을 피우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회개하지 않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비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의로우심”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기준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진짜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길을 알려주심에도 돌이키지 않고 고집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회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5.07.23 | 매일성경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3절)
12-14장은 용과 짐승들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인내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승리가 무엇이며, 마지막 때에 어떻게 구원과 심판의 추수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5장은 계시록에 나오는 세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설명합니다.
1절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라고 시작합니다. 요한이 새로운 이적을 보는데 “이적”을 수식하는 단어가 “크고, 이상한, 다른”입니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새롭고 놀라운 이적입니다. 그것이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것인데, 1절 하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고 합니다. 마지막 재앙이며, 하나님의 진노라 끝난다고 하니 이제 더 이상의 재앙은 없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하지만 바꿔 이야기하면 이 재앙은 최종적이고 철저한 심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한 것은 더 이상 회개의 시간은 없습니다. 일곱 인 재앙은 1/4이 심판을 받았다고 했고, 일곱 나팔 재앙은 1/3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심판의 강도가 점점 세지지만 완전한 심판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회개의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0:11절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이 있었고, 14:6절은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 기회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구조는 앞부분인 1절과 뒷부분인 5-8절이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한 내용이라면 그 사이에 들어있는 2-4절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이 재앙이 누를 향한 것인가? 성도들이 아닌 짐승과 그를 경배하고 추종하던 자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2절 보면 “유리 바다”가 나오고, 이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들이 누구인가? 짐승과 그의 우상과 짐승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하고, 신앙을 박해하는 가운데 인내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14:12).
그런데 이들이 서 있는 유리 바다는 마치 출애굽기에서 바닷가에 서서 찬양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아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나 출애굽을 하는데 홍해가 가로 막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은 건너고 뒤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그대로 물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때 홍해 바닷가에서 구원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 내용이 출15장입니다. 출15:1-2절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이렇게 모세와 이스라엘이 노래한 것처럼 구원받은 신약의 성도들이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내용이 3-4절입니다. 강조하는 내용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만국의 왕이십니다. 의롭고 참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이 나올 때마다 강조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 성도들은 비록 현실은 고난이지만 이런 영광의 날을 소망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고 반드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날을 주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일하시고 믿음의 성도들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십니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6절)
일곱 대접 재앙은 5절 “증거 장막 성전”에서 시작됩니다. 이 용어를 한 이단이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구원의 길을 증거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증거 장막 성전에서 구원의 길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붓는 일곱 대접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이 아닌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셩전”이라고 하지 않고 “증거 장막 성전”이라고 하는가? 장막은 우리가 아는 “성막”입니다. 성막 안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이 언약궤이고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사람과의 약속도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언약은 대단히 엄중합니다. 언약을 지킨 자들에게는 은혜와 복은 주시지만, 언약을 어긴 자들에게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심판이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짐승과 우상에게 드리며 짐승의 정신을 따라 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준으로. 그래서 “증거 장막 성전”입니다.
재앙을 가진 천사의 모습이 6절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라고 하는데 1:13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의 권위로 심판을 대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7절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입니다. 어쩌면 이 대접은 성도들의 탄원의 기도를 담은 것이기도 합니다. 8장에서 일곱 나팔이 시작될 때도 성도들의 기도가 금 향로의 향연과 함께 하나님께 올라갔고 거기에 천사가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으므로 재앙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던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8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완공되었을 때도 출40:34-35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재앙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며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반드시 승리케 하십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면서 오늘 하루도 믿음의 경주를 이어갑시다.
2025.07.22 | 매일성경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15절)
14:1-13절까지는 두 가지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144,00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들은 승리하신 어린양과 함께 하늘 시온산에 서서 새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을 따르지 않고 큰 성 바벨론을 따르며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12-13장의 성도들이 경험하고 있는 어두운 현실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용과 짐승의 주도하는 세상에서 고통 속에서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내용을 더 선명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도구가 “예리한 낫”입니다.
요한이 새로운 환상을 봅니다. 14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인자와 같은 이”는 다니엘서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구름 위에 앉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금 면류관을 쓰고 계신다는 것은 왕권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이런 간단한 예수님의 소개가 당시 성도들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로마 황제가 왕좌에 앉아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성도들을 박해합니다. 그 기세가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에 대한 소개는 진정한 왕은 예수님이시고, 그러니 황제들의 권세는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할 분은 세상 임금이 아닌 하늘 임금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의 손에 예리한 낫이 들려져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만 예수님께서 낫을 가지고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15절의 다른 천사가 말해줍니다.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낫의 용도는 추수를 위함입니다. 곡식이 익어 거둘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12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난 속에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구원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에게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십니다(1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둘 때”가 분명히 온다는 겁니다. 용과 짐승이 다스리는 세상이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19절)
그렇다면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예리한 낫으로 추수 하신다면, 반대로 큰 성 바벨론에 살면서 짐승을 경배하고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의 결과는 어떠할까요? 그것이 17-20절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아닌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천사의 손에 예리한 낫이 들려있습니다. 이 천사에게 다른 천사가 큰 음성으로 말을 합니다.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고 합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등장하는데 10절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이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고 했는데 그것이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즉 그것을 담당하는 천사가 심판을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가 어디로부터 나왔다고 하냐면 “제단으로부터 나와”입니다. 계시록에서 제단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 제단 아래는 6:9-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서 탄식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6:10절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진노의 심판도 성도들의 탄식의 기도가 응답되는 과정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포도송이를 거두라 하는데, 앞에서 나왔던 진노의 포도주와 연결하면 그냥 포도 수확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가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둡니다. 그리고 19절 하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집니다. 여기서도 “큰”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냥 포도주 틀이 아닌 큰 포도주 틀이라는 것은 그렇게 짐승을 경배하고, 큰 성 바벨론에 속해서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간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소수의 성도들이 살아가기가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런 자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집니다.
20절은 포도주 틀을 밟았는데 거기서 나오는 것이 포도주가 아니고 “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피가 어느 정도 흘렀다고 하냐면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고 하는데, 280-320km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혹독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계시록 등장하는 숫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1600은 4×4×10×10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는 사방 즉 온 세상을 의미하고, 10은 세상 왕들과 관련된 숫자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숫자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짐승을 따른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이 땅의 왕으로 하나님께 도전하고 성도들을 박해했던 황제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이런 날이 옵니다. 땅의 삶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매일의 삶이 그 날을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땅에 속해 살므로 잠깐 기쁨은 누리지만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지키다 죽음에 이를수도 있지만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인가?
2025.07.21 | 매일성경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1절)
12-13장까지를 읽으면 성도들의 현실이 절망적입니다. 큰 용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13장에서는 용의 하수인인 두 짐승이 권세를 가지고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성도들을 사로잡아가고 칼로 죽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경배하고 추종합니다. 이들의 이마에 짐승의 이름의 숫자인 육백육십육을 받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온통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4장으로 넘어오면 완전히 분위기가 바뀝니다.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온산에 서 계십니다. 이는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고(12:17), 짐승들이 하나는 바다에서 올라오고, 다른 하나는 땅에서 올라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세상은 이처럼 용과 짐승들이 활개를 치는 것 같지만 시선을 돌려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바라보니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땅에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4장에서 요한이 땅의 어두운 현실에서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의 만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렇습니다. 계시록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열린 문으로 올라가 하늘 보좌를 보아야 하고, 땅에서 눈을 들어 시온산에 서 계신 어린양을 바라봐야 합니다.
어린양 곁에는 144,000명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짐승의 이름이 아닌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어린양과 성도들이 함께 시온산에 서 있는 이유는 큰 소리로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함입니다. 이 새 노래는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이어서 땅에서 속량받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4-5절이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자와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계시록에서 여자는 음녀로 표현되며(17장), 본문 8절에 나오는 “큰 성 바벨론” 즉 세상을 상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짐승에게 경배하고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순결한 자들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길을 따른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승리자들입니다. 고난 뒤에 승리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그 대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신 믿음을 지킨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계시록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통해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0:11절에서도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본문 6절도 “땅에 거주하는 자들 … 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요, 당시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도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영원한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7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지만 거부하는 자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심판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12절)
하나님의 심판이 누구에게 어떻게 임하는가? 8절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세상을 상징하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집니다. 이유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로 하여금 음행을 하게 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에 앞장서고 세상을 그 길로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런 바벨론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아닌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10절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섞인 것이 없다”는 것은 긍휼이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합니다. 불과 유황입니다.
이것을 11절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짐승을 경배하고 따랐습니다. 그 결과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 잠깐 기쁨을 맛보지만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 당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지배하는 큰 성 바벨론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성도들은 인내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합니다. 11절과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잠깐의 기쁨을 위해 믿음을 저버린 자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지만, 말씀과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잠깐 고난을 받지만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영광의 하나님과 함께 하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의 안식입니다.
‘암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 친일파를 암살합니다. 그런데 독립군 중에 일제 첩자가 있었습니다. 염석진이라는 인물입니다.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염석진은 경찰 고위간부가 됩니다. 법이 이 사람을 벌하지 않자 독립군 저격수인 안윤옥이라는 여인이 염석진을 처단합니다. 총을 쏘기 전 안윤옥이 묻습니다. “왜 동지를 배반하고 반역자 노릇을 했습니까?” 염석진이 대답합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지,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그리고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본문은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성도들의 현실이 힘들어도 승리의 그 날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그 날을 믿음으로 준비하는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