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2 | 매일성경
●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절)
계속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질문에 답을 합니다. 앞부분이 부부 관계에 대한 답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특히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그 권면의 바탕에는 세상을 보는 바울의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25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바울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7장 내내 그는 자신의 권면과 주님의 명령을 신중하게 구분합니다. 앞서 이혼 문제는 “주의 명령”(10절)이라 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며 자신의 의견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귀한 자세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에 정답이 일일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성경이 말하는 큰 원리를 붙들되, 그 원리 위에서 자신이 판단한 것은 ‘내 의견’이라고 정직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40절 끝에서도 그는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한 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자기 의견조차 성령의 인도 안에서 신중하게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당시에는 “내가 하나님께 특별한 영을 받았으니 내 말이 곧 정답이다”라며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입니다. 성경에 분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정답인 양 단정하는 가르침은 편할 수는 있어도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며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기준이 분명해야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 바울이 자꾸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라고 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창조 질서로 세우셨는데, 왜 바울은 독신을 권할까요? 그 이유가 26절에 있습니다.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바울은 머지않아 닥칠 고난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환난인지 본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초대교회가 겪은 박해와 재난의 배경을 떠올리면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나 큰 어려움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자녀의 결혼을 서두르라고 권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겠지요. 바울의 마음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27절은 환난을 앞두고 굳이 환경을 바꾸지 말라고 합니다. 결혼했으면 그대로, 혼자면 그대로,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28절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의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결혼이 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다만 환난의 때에 새로 가정을 이루면 챙겨야 할 사람이 늘고 고난이 더해질 수 있기에,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권면한 것입니다. 바울의 모든 권면 밑바닥에는 “나는 너희를 아낀다”(28절),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32절)는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32절)
29절부터 바울의 시야가 결혼을 넘어 인생 전체로 확장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여기서 ‘그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늘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마음으로 깨어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29-31절에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없는 자 같이 하라”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같이,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자같이, 사고파는 자는 가진 것 없는 자같이, 세상 물건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 합니다. 가정도, 감정도, 소유도 그 자체가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31절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여기서 ‘외형’으로 번역된 단어는 ‘스케마’로, 무대 위의 한 장면이나 겉으로 드러난 형체를 뜻합니다. 연극의 한 장면이 막이 내리면 사라지듯, 우리가 보고 붙드는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는 장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가정도 감정도 소유도 언젠가 지나가고,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눈길을 자기에게 붙들어 두려 합니다. 광고는 “이것이 없으면 당신은 행복할 수 없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이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주님 앞에 설 그날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32절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세상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면 염려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결혼한 자와 결혼하지 않은 자를 비교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는 “어찌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까”하며 주의 일에 집중할 수 있지만, 결혼한 자는 “어찌하여 아내를(남편을) 기쁘게 할까”하며 마음이 나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내나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성도의 궁극적 목적임을 말하는 겁니다.
이 권면에는 바울 자신의 삶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고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위험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그런 삶에서는 자유로운 몸으로 오직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합당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35절 “내가 이것을 말함은 …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결국 바울의 모든 권면이 향하는 곳은 하나,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는 삶’입니다.
36-38절에서 바울은 약혼한 이들에게 답합니다. 약혼했으니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결혼하기를 원하고 그것이 합당하다면 결혼하라,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37절은 마음을 굳게 정하고 결혼하지 않기로 했어도 잘하는 것이라 합니다. 둘 다 선한 길이되, 임박한 환난과 주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바울의 배경에서는 독신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을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독신을 권한 것은 임박한 환난과 복음 사역의 위험이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나온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모든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결혼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다만 바울이 분명히 말했듯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독신으로 산다면, 그 핵심은 ‘나를 위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혼자 사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가정도 감정도 소유도 모두 지나가는 한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속에서 영원한 것을 붙잡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결혼했든 독신이든,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환경과 물질을 나의 유익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만족을 누릴까”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하나님이 그 삶에 풍성한 은혜를 더하실 줄 믿습니다.
2026.06.11 | 매일성경
●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10절)
1-6장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분열, 음행, 소송 문제를 강하게 지적했습니다. 7장부터는 분위기가 바뀝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신앙생활 중에 궁금했던 것들을 바울에게 물었고, 바울이 그 질문에 하나씩 답합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이 가정과 부부 관계입니다.
1절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이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하던 말입니다. 부부 관계가 영적인 삶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답은 달랐습니다. 2절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부부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핵심은 서로에게 신실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4절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여성은 남성의 도구처럼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남편도 아내에게 속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부부는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자기 욕심만 채우지 않고 함께 아름답게 가정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얼마 동안은 분방할 수 있지만 다시 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제하지 못함으로 사탄이 공격하여 넘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잘 알았습니다. 자칫 사탄이 우리의 약점을 공격할 수 있기에, 서로 배려하며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신앙의 문제는 이처럼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정과 부부 관계를 성경적으로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7절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바울은 독신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독신을 권한 이유는 결혼이 귀찮고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창조 원리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독신의 은사가 있습니다. 혼자 살아도 정욕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집중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런 은사가 있는 사람은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젊은 사람들에게 결혼에 대해 조언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내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고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조언해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니 가정을 이루도록 권면하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가정에는 갈등과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마다 이 사람과 살아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바울은 여기에 답합니다. 10-11절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이번에는 자신의 권면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결혼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믿는 배우자와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사는 경우는 어떨까요? 12-13절에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어떤 믿는 성도들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살면 자신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14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오히려 믿는 배우자의 영향으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예수를 믿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믿는 부모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됩니다. 힘들지만 인내하며 가정을 이끌어온 결과입니다.
다만 예외가 있습니다. 15절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특히 함께 사는 것이 위협과 고통이 되는 상황이라면 갈라서는 것도 허용됩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화평을 이루며 인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인내를 통해 배우자를 구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절)
17-24절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17절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20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4절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겁니다.
바울은 두 가지 예를 듭니다. 첫째는 할례입니다(18-19절), 할례자로 부름받았으면 그대로, 무할례자로 부름받았으면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할례였고, 일부는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신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19절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중요한 것은 육신의 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종과 자유인입니다. 21절에서 종으로 부름받았어도 염려하지 말고, 자유롭게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놀랍습니다. 22절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이와 같이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외적인 신분이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이고, 자유인이라도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세상의 신분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예수님이 십자가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기에, 우리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 받은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놀라운 것은 주인과 노예가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말씀의 원리를 따라 가정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말씀이 이 시대 흐름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원리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정을 잘 세워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르심의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현재의 자리를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값으로 사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부르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가기를 원합니다.
2026.06.10 | 매일성경
●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13절)
4장까지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다룬 바울은, 5장에서 음행한 자를 교회가 처리하지 않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6장 앞부분에서 소송 문제를 다루었고, 오늘 다시 음행 문제로 돌아옵니다. 왜 갑자기 소송 문제에서 음행 문제로 이어지는가? 6장의 소송 문제와 음행 문제는 뿌리가 비슷합니다. 힘있는 자들의 욕망의 문제입니다. 돈과 힘이 있다고 약한 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육신의 욕망도 제어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모든 것이 가하다”는 말은 고린도 성도들이 자주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합리화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가 주어진 것은 맞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내 마음대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어떤 욕망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가면 안 됩니다. 자유를 핑계 삼아 다시 죄의 종노릇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며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3절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이 말도 고린도 성도들이 자주 하던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육신으로 끝나는 것처럼, 몸으로 하는 일도 죽으면 다 끝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영적인 것만 중요하고 몸으로 나타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호히 반박합니다. 13절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오늘 본문에 ‘몸’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많이 등장합니다(13,15,16,18,19,20). 신앙은 영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몸으로 그 신앙이 어떻게 드러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우리 몸으로 사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의 영향 때문입니다.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영적인 것만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생각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스며들어 몸으로 짓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바울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부활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몸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으로 죄를 짓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20절)
● “너희 몸은 …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9절)
15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우리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의 연합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창녀와 몸을 섞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무역으로 부유했고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을 일상적으로 행했고, 그 영향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몸으로 하는 게 무슨 죄냐, 죽으면 다 없어질 텐데”라는 생각이 이런 행동을 합리화했습니다.
바울은 심각하게 지적합니다. 15절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절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성도들은 그것을 순간의 쾌락으로 끝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한 몸이 되는 것, 새로운 실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합한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그렇습니다. 강력접착제로 붙이는 것, 용접으로 금속을 연결하여 절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몸을 섞어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육체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 안에서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입니다. 그것을 떠나 육신의 쾌락을 위해 행하는 음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여기서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라는 말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로 보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단호히 아니라고 합니다. “음행은 자기 몸에 짓는 죄”라고 합니다. 음행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다른 죄와는 차원이 다른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한 신학자의 표현처럼, 두 사람이 연합하는 순간 하나가 되어 새로운 실체가 됩니다. 결코 “몸 밖의 일”로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앞서 3장에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면(3:16절), 오늘은 우리 각 사람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전에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가,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인지, 공동체와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인지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나는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존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할 때,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해지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거룩함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함에서 시작됩니다.
2026.06.09 | 매일성경
●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절)
어제 바울은 교회 안의 음행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런 사람 “내쫓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절을 위함이 아닌 회복을 위한 조치입니다. 오늘은 또 다른 문제인 교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세상 법정으로 가져간 문제를 지적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1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구태여’라는 표현 속에 바울의 답답함이 담겨 있습니다. 굳이 왜 그곳으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 재판관들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1절 “불의한 자들”, 4절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 6절 “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 당시 세상 법정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이들을 불의하다고 부른 것은 그 당시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정작 지적하는 것은 세상 법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신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알지 못하느냐”는 표현을 반복합니다(2,3,9). 이런 바울의 지적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책망입니다.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교만하고 자랑하면서도 교회 안의 작은 다툼 하나 해결할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며,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세상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세상을 분별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반대로 세상의 판단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더 놀라운 말이 이어집니다. 3절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천사가 높아 보이지만, 성경은 천사를 ‘섬기는 영’이라고 말합니다(히1:14절).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천사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성도들이 천사보다 훨씬 더 존귀한 존재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존재인 성도들이 교회 안의 작은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 바울은 이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5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라고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바울은 5-8절에서 ‘형제’라는 단어를 반복합니다. 5절 “그 형제 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 6절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뿐더러”, 8절 “그는 너희의 형제로다” 지금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함께 구원받은 형제입니다. 같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형제를 세상 법정에 세우고 이익을 얻으려는 것,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다보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툼이 생기자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윽박질러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간 것 같습니다. 위협하고 있습니다.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태도,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7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내가 조금 손해 보고, 내가 좀 양보하면 교회 안의 작은 갈등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 양보하지 않고 절대 손해 보려 하지 않다 보니 이것이 세상 법정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교회 안의 문제는 대부분 큰 문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작은 갈등이 억울함으로 쌓이고, 그것이 점점 커져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됩니다. 그 뿌리에는 십자가가 없는 것, 내가 먼저 손해 보려 하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9절)
바울은 여기서 강한 경고를 합니다. 9-10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구체적인 목록을 나열합니다.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이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한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통해 영광스런 구원을 경험한 성도로서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려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형제를 억울하게 만들고 불의를 행하는 삶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자의 모습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바울은 경고 다음에 소망의 말을 합니다.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과거에 고린도 성도들도 그런 죄악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아닌, 십자가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 내가 손해 보고, 내가 양보하고, 주님이 걸으셨던 그 길을 함께 걷는 것. 이것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분쟁이 잦아듭니다. 내가 먼저 손해 보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 갈등이 해결됩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갑니다. 그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판단할 성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을 다스리게 될 존재.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십자가의 정신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손해 보고, 내가 먼저 양보하고, 형제를 대할 때 주님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작은 갈등을 큰 상처로 만들지 않는 길입니다.
2026.06.08 | 매일성경
●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2절)
4장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교회 안에 들어와 그 기준으로 지도자들을 평가하였습니다. 바울은 해결책으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해답으로 제시합니다. 오늘 5장부터 새로운 주제가 등장합니다. 교회 안의 음행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핵심은 그 음행 자체보다는 그 문제를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입니다.
1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일, 아버지의 아내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새어머니와 음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인들이 이 심각한 죄를 보고도 아무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이 교회 안에서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위상을 가진 인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2절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라고 하며 ‘교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영적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6절도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자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4:6-7절에서도 반복되던 고린도 교회의 문제, 교만과 자랑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나는 이 정도면 괜찮아, 나는 이미 영적으로 성숙해, 이런 교만이 명백한 죄도 그냥 넘기게 만든 것입니다. “저런 죄 하나가 무슨 심각한 영향을 미칠까?” 등등.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교만한 줄 모릅니다. 자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랑하는 줄 모릅니다. 그것이 교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도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 단호합니다. 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공동체 밖으로 내보내라고 했습니다. 5절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는 교회 공동체 밖으로 내보내는 출교를 의미합니다. 단절을 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의 거룩함을 지켜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런 징계의 목적이 “그가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수용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출교라는 징계를 내린다면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의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돌이키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도 권징조례가 있습니다.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성도에게 일정 기간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수찬 정지와 같은 징계를 내리는 규정입니다. 이는 수치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가 성찬에 참여할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징계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거룩함과 질서를 잃고 혼란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8절)
왜 이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는가? 6절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6-8절에는 ‘누룩’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누룩은 특성이 있습니다. 조금만 넣어도 전체를 부풀립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죄를 용납하면 그것이 순식간에 퍼집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해도 괜찮구나, 나도 괜찮겠지. 이렇게 기준이 무너지고 더 큰 죄가 들어옵니다. 공동체 전체가 오염됩니다.
그래서 7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해방된 거룩한 존재입니다. 이미 누룩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묵은 누룩에 오염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유월절을 통해 설명합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누룩 없는 떡을 먹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죄에서 해방된 우리가 다시 죄의 누룩에 물드는 것은 유월절의 의미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8절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9-13절에서 바울은 가르침에 대한 오해를 수정합니다. 바울이 이전에 쓴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했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이 말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고 그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11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 형제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사귀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모순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에는 분노하고 비난하면서, 정작 교회 안에 있는 명백한 죄는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방향이 완전히 거꾸로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뒤집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교제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 안의 명백한 죄는 분명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13절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세상 사람들의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교회 안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남깁니다. 하나는 교만과 자랑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문제의 뿌리는 교만이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고, 나도 모르게 교만하고 자랑하는 마음이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누룩보다 내 안의 누룩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잘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내 안에 있는 누룩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제거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