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06 | 매일성경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2절)
예수님은 2장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정결 예식 중심의 죽은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새로워져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전 중심 신앙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1절 보면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10절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도 합니다. 바리새인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로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도자는 그냥 지도자가 아니라 로마가 인정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의미합니다. 70명으로 구성된 유대교 최고 의결 기구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인물입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밤에 찾아온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엎은 위험한 인물이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찾아온 것은 그의 마음에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숙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밤’은 그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니고네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을 듣기도 전에 답을 하십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어제 말씀 2:24-25절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아신다고 반복했는데 니고데모의 문제를 정확하게 아시고 답을 주십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을 15절은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절은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니고데모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지만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십니다. ‘거듭난다’는 헬라어로 ‘아노덴’인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새로 태어남”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태어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두 번째입니다. 즉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잘 알고 있는 구약의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전에는 물은 무엇을 의미하고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누었는데 매일성경은 ‘물과 성령’이 ‘물 곧 성령’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에스겔36:25-2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합니다. 에스겔 말씀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물로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새 영을 주어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즉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14절)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바람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람이 불면 느낄 수는 있지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에게도 느낌과 감동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여전히 믿지 못하는 니고네모에게 예수님은 11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증언’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증언은 알고 본 것입니다. 너무 확실합니다. 그런데 왜 믿지 못하는가? 예수님을 땅의 일만이 아닌 하늘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게 이 땅으로 오셨기에 하늘 일도 알고 보셨고 땅의 일도 아십니다. 그러나 땅의 일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늘 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시면서 거듭남의 핵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민수기 21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다가 험한 길로 인하여 불평을 합니다. 하나의 문제에서 시작된 불평이 시간이 흐르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집니다. 음식도, 물도 모든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오래 참으셨던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십니다. 죽은 자들이 많아집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말씀하십니다. 민21: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장대에 불뱀 모양을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 산다고 합니다. 참 상식적이지 않는 방법입니다. 해독제를 맞든지 해야지… 그런데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 것이라 하셨고 민21:9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서 바라볼 때, 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하는 겁니다.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 놋뱀을 장대에 달았듯,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십니다. 이 말씀이 전제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불뱀에 물려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의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기 은혜 감사하며 여전히 죄와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6.02.05 | 매일성경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15절)
예수님은 갈리리 가나에서 첫 표적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의미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종교였습니다. 의미와 생명은 사라지고 습관과 형식만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가나 혼인잔치 기적을 행하신 진정한 의미가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즈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우리는 1장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1: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양이 유월절 어린양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일이 한번 기록되었지만, 요한복음에는 세 번 올라가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신 예수님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합니다. 14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성전 안”이라고 했는데 건물 안이 아니라 이방인의 뜰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성전 경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장사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이 이런 모습으로 변질되었는가? 성전에 올 때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드리는 제물의 기준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레22:20-22).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상인들과 결탁해서 상인들이 파는 제물만을 흠이 없는 제물로 인정을 해준 겁니다. 그리고 상인들이 주는 이익을 챙깁니다. 그러니 제물을 사는 사람들은 상인들이 가격을 높여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 년에 한 번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통되던 로마 화폐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상이 없는 두로 화폐로 환전해서 성전세를 냅니다 그래서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이익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가?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고 돈을 쏟고 상을 엎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6절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도전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시지만 타락한 성전의 모습에 분노하십니다.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와 반대로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눈치 보고 사람 중심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열심이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할 것은 구약 다윗이 이야기를 통해 설명합니다(시69:9절).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예수님의 행동에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18절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표적으로 입증하라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주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19절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십니다. 아마 듣는 모든 사람이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합니다. 20절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오래 전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지었던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증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46년 동안 진행 중이었고, 약 80년 만에 완공이 됩니다. 그런 성전을 3일 만에 일으킨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아마 함께 있던 제자들 역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21-22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깨달은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고,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성전을 헐라),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임을 깨달은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요 앞부분인 가나 혼인 잔치 기적을 행하신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성전이십니다. 구약시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므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완전한 제물이 되셔서 단 한 번의 십자가의 죽으심(제사)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성전이 되시고, 성전되신 예수님이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 또한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에게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24절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인기를 구하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2:4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때, 목적 즉 십자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과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한 신앙을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의 인기를 얻는 신앙이 아닌 오직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6.02.04 | 매일성경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1절)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장소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라고 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참석합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 문제가 생깁니다. 3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결혼풍습은 7일간 진행이 되었고, 결혼식의 기쁨으로 유지하는데 포도주가 중요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신랑과 신부뿐만 아니라 가족의 불명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창세기와 연결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은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 됨을 깨뜨리고 이후 사람에게는 슬픔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3장부터는 그런 사람의 예를 하나씩 들어 설명합니다. 당시 최고의 석학인 니고데모, 4장은 당시 가장 낮은 지위의 여인인 수가성 우물가여인, 5장은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슬픔의 장소가 된 곳을 기쁨으로 바꿔주십니다. 죄로 인해 절망에 빠진 모든 인생에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기쁨, 생명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표적이 혼인 잔치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3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 문제는 주최측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부탁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탁은 기적을 행하라는 요청이라기 보다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요구입니다. 어머니로서 자연스러운 부탁일 수 있지만, 마리아의 요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먹고사는 문제, 정치적인 억압 등을 해결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절처럼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중에 기적을 행하시지만 분명하게 자신이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 때”를 위해 왔고, 그때는 인간의 일상적인 문제가 아닌 근본적인 문제,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그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을 선명하게 아시고 그때를 향해 나가십니다.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부르는데 헬라어로는 존칭으로 부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잉태하고 태어날 때 천사들이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데 방법이 6절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두세 통은 약 100리터의 양입니다. 이런 돌항아리가 여섯 개가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돌항아리의 용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정결 예식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돌항아리가 비어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이스라엘 종교가 내용과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겁니다. 그런 신앙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짐을 지우는 신앙일 뿐입니다. 그곳을 예수님은 물로 채우시고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식만 남은 죽음의 종교를 생명과 기쁨의 종교로 바꾸실 것입니다.
하인들에게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하니 아귀까지 채웁니다. 그리고 8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물을 채우는 것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물을 떠서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는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는 것은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연회장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자칫 모욕과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인들은 순종해서 가져다줍니다. 그 결과 9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물로 된 포도주”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연회장이 놀랍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첫 표적의 목적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을 ‘영광의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부분인 1-12장까지는 이런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고, 13-21장까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영광스럽게 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집중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표적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알고 따르고 있지만 점점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합니다. 정결예식 돌항아리처럼 습관화 형식화되어 있지는 않는지 생각합니다. 물로 채워지고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듯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쁨과 생명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끊이지 않는 우리 삶의 문제들을 변화시키고 해결하시는 주님께 맡깁시다.
2026.02.03 | 매일성경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38절)
예수님을 소개했던 세례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그러자 36절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합니다. 어제 본문 29절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세례요한은 인생의 문제가 ‘죄’라는 사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당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왜곡된 기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안드레라고 40절이 소개합니다. 다른 한 제자의 이름을 성경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정확한 설명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낸 겁니다. 이제 따르고 섬겨야 할 분은 예수님이라는 거지요. 세례요한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삶을 삽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38절 “무엇을 구하느냐” 바꿔 이야기하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무엇을 원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들은 예수님을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어디 계신지를 묻습니다. 그곳에 함께 머물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함이 이 제자들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9절 “와서 보라”고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이 말이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46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와서 보라”고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 계신 곳으로 가서 함께 거합니다. 시간이 10시쯤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시간으로 오후 4시입니다. 아마 하루를 함께 보내고 이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이후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가 변화된 모습을 보면, 예수님과 교제하며 많은 대화를 나눈듯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이 지금까지 이들이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안드레가 찾아간 사람은 형제인 시몬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41절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안드레의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랍비(선생님)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메시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곧바로 자기 형제 시몬에게 전한다는 것은 먼저 안드레의 마음에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그런 기쁨과 확신을 주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 가운데 시몬이 생각났다는 것은 시몬 역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을 알아보시고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그런데 본문 47절부터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도 예수님께 오는데 그 역시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알아보십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정확하게 아신다는 겁니다. 아실 뿐만 아니라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게바’입니다. 헬라식으로 하면 ‘베드로’인데, 의미가 ‘반석’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그는 처음에 반석이 아닙니다. 좌충우돌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가면 반석이됩니다. 초대교회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시고 그렇게 만들어가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베드로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부족함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 나라 향한 꿈도 주시고 이루게하시는 분이십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6절)
다음 날에는 예수님께서 빌립이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두 제자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랐다면, 빌립은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제자를 삼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 역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합니다. 나다나엘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46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말은 구약을 잘 알고 있는 나다나엘이 메시야와 나사렛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빌립이 46절 “와서 보라”고 합니다. 빌립이 지혜롭습니다.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합니다. 우리도 전도하다 보면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요즘같은 시대 교회를 공격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논쟁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과 빌립처럼 “와서 보라”, “와서 말씀 들어봐라”, “와서 예배드려보라”고 초대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빌립의 전도로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오자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아십니다. 47절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놀란 나다나엘이 자신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묻자 48절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에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49절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즉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맞습니다”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만 했는데 나다나엘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요?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아마 그 아래에서 나다나엘이 간절히 메시야를 고대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런 그가 메시야를 만났고 자신이 기도했던 것을 아시는 것을 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놀라는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50절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일”이 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창세기에서 야곱이 한 곳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었는데 사닥다리가 보이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의미가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사역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된 관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연결하시고 회복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매일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됩시다. 또한 주님을 만난 기쁨을 “와서 보라”고 전하는 삶이 됩시다.
2026.02.02 | 매일성경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20절)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반복해서 ‘말씀’을 강조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천지 만물 창조사역에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좋은데,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요, 이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잠언 8장에 나오는 ‘지혜’였고 더 나아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한 이방인인 헬라인들은 철학적 사고를 하면서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로고스’라는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당신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이분이다!”라는 선언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당신들은 신이 존재하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분이 바로 로고스이신 예수님이다!”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탁월한 단어 선택입니다.
요한은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곧바로 4절에서 생명과 빛으로 연결합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죽음이요 어둠입니다. 9절 보면 예수님은 참 빛으로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외면합니다. 자신들의 기대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합니다. 창조주를 피조물이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이 특권과 권세 누리고 있음이 감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예수님이 아닌 자를 소개합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 이야기가 1장에서 많이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주목하고 기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저자 요한은 6-8절까지 세례요한은 ‘사람’이고 그의 사명은 ‘증언’이라는 것을 반복 강조합니다.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으며,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소개합니다. 세례요한에게 특사단이 파견되어 19절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드러내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답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인기가 있어지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인기가 더 치솟을 겁니다. 영광과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고 단호하게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마17:12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먼저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세례요한이 그 엘리야입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세례요한은 자신을 그런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의 대답에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냐?” 요한의 답은 23절 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 사40:3절을 인용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왕이 등장할 때 그 길을 미리 준비하는 역할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는 소리는 사라지고 말씀만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드러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만 흥하고 자신은 쇠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또한 자신은 27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3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런 소개에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을 겁니다. 당시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의 강한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해줄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29절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나오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세상 영광 지고 가는 하나님의 숫 사자”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여기 어린양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양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집문에 바르므로 장자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의 문제가 정치, 경제적인데 있지 않다는 말해줍니다. 그것이 해결된다고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는 오직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주님께만 영광돌립시다. 세상 죄를 지고 자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