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8:39-19:16절/죄를 찾지 못하였노라(26.04.01)

●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40절)

​평소에는 좋아 보이던 관계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위기가 닥치면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진짜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특히 자기 뜻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움켜쥔 것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이유는, 결국 그 마음 깊은 곳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강한 욕망과 이기적인 본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기적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섭게 소리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세상의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타협하는 빌라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롱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유대인들의 압박 속에 예수님을 심문해 본 빌라도는 38절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합니다. 그러면 풀어주면 되는데 종교 지도자들의 반반을 생각해서 하나의 방법을 찾아냅니다. 당시 큰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특별 사면하는 전례가 있었기에 39절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제안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비교 대상으로 ‘바라바’라는 흉악한 죄수를 내세웠습니다. 바라바를 ‘강도’라고 하는데 의미가 로마 제국에 대항해 무력 폭동을 일으켰던 테러리스트에 가까운 위험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입니다. 빌라도는 당연히 흉악범 바라바보다는 죄 없는 예수님을 풀어달라고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인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응은 빌라도의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그들은 무죄하신 예수님 대신, 흉악범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마 바라바보다 더 흉악한 죄인이 등장해도 그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제거해야 한다는 분노가 강했기에, 진리나 정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군중의 반응에 당황한 빌라도는 이제 예수님을 데려다가 잔인하게 채찍질을 가합니다. 당시 로마의 채찍은 끝에 동물의 뼛조각이나 쇠붙이가 달려 있어,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무서운 형벌 도구였습니다.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푹 씌우고,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힌 뒤 3절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며 손으로 때리고 조롱했습니다.

빌라도는 이토록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이런 비참하고 초라한 자가 어떻게 너희를 위협할 왕이겠느냐”라며 군중을 만족시키고 풀어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과 아랫사람들의 본심이 드디어 폭발합니다. 그들은 더 큰 목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들은 왜 대화나 타협도 없이 이렇게까지 맹렬히 소리를 질렀을까요? 바로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발했고,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더욱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빌라도의 아내가 꿈에 예수님 때문에 애를 태웠으니 그 옳은 사람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경고했기에 빌라도는 두려움을 느낍니다(마27:19절).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주저하는 빌라도의 가장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을 찌릅니다. 12절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라며 로마 황제에게 총독을 반역자에게 동조한 자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15절 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겨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채워주는 세상의 권력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11절)

​예수님의 침묵에 답답함을 느낀 빌라도는 10절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사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맞는 말 같지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11절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라고 하시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것을 아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본문 14절은 이날이 “유월절 준비일”임을 명확히 밝혀줍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바로 그날에, 예수님은 친히 ‘흠 없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주님은 수치와 조롱을 피하실 무한한 능력이 있으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의 길을 잠잠히 걸어가셨습니다. 인간의 악한 계획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처럼 위대하게 성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 우리를 돌아봅니다. 생명이 없는 종교, 예수님이 빠진 신앙의 끝은 결국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소리치게 됩니다. 또한 빌라도처럼 진실 앞에서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아가려는 교만과 욕망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인생의 유일한 왕으로 모시고, 때로는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사랑과 용서의 방식을 선택하는 삶이 됩시다. 우리를 위해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주신 주님의 그 크신 십자가 사랑을 가슴에 깊이 품고, 오늘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생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시다.

요한복음18:28-38절/진리가 무엇이냐(26.03.31)

●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28절)

​어제 본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붙잡히신 예수님은 먼저 실세인 안나스에게로 가셨고, 다음으로는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손을 떠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로마 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게 되십니다.

그런데 28절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 새벽부터 로마 총독의 지휘 본부인 ‘관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정해서는 안되기에 이방인이 머무는 로마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무서운 모순입니다. 겉으로는 율법의 의식과 정결 규례는 철저하게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월절의 완성이신 어린양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제거하려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신앙의 참된 본질인 생명과 사랑, 공의는 철저히 내다 버린 채, 종교적인 형식과 의식에만 집착하는 타락한 종교인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혹시 우리도 겉모양은 그럴듯하게 갖추고 있지만, 내 삶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껍데기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이들의 문제가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31절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죄인을 죽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할 권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종교범이 아닌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신21:23절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식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음모를 모든 사람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이 성취되는 사건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33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이 죄목으로 유대인들이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35절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라고 하면서 “네 나라”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예수님은 이 땅의 나라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을 이야기하시는데 ‘싸워’입니다. 세상 나라는 로마 제국처럼 힘과 무력으로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미움과 경쟁의 나라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상 나라 방식으로 이들과 싸우신다면 이들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속한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다른 의와 평강의 나라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나라입니다. 나의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진정한 소속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 두 나라의 싸움이 치열합니다. 세상이 자기 이익을 위해 시기하며 싸우고 칼을 휘두를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사랑으로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빌라도는 37절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당당히 선언하시며,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대해 증언하러 오셨고, 진리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지금 빌라도는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빌라도는 38절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진지한 질문이 아닙니다. 회의주의자들의 비웃는 듯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질문만 하고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도 돌아서버립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지만(38절), 자신의 정치적 안위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진리이신 예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결국 불의한 군중과 타협하는 길을 택하고 맙니다.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뼈아픈 비극입니다.

신앙의 형식에 치우쳐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일에 집중해서 예수님을 외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속이려 들지만,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의 경쟁과 이기심에 동화되지 말고,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힘과 능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겨냅시다.

요한복음18:12-27절/예수님의 대답과 베드로의 부인(26.03.30)

●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7절)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신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뜰로 끌려가 심문받으시는 장면과 바깥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의 비극적인 장면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12절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라고 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들이 잡아서 끌고 가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갑니다. 이 사람이 이 모든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자, 원래 대제사장이었던 인물로 당시 유대 종교 사회의 실세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14절은 가야바가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11:50절에 나왔던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 사람들이 예수님께 열광하자, 예수님 한 사람을 죽여서 로마로부터 유대민족을 보호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속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가야바의 말이 실제로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주님이 가시는 길이 바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타가운 것은 대제사장들이 이런 일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하나님께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앞장서서 제거하려 합니다. 자기 욕심과 기득권에 눈이 멀 때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실 때,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사도 요한)이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하고 없습니다.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뜰로 들어서는 베드로에게 문을 지키는 여종이 묻습니다. 17절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이때가 13:37절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했던 다짐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위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피워 놓은 불 주위에서 불을 쬐었습니다.

“나는 아니라”는 대답이 25절에도 반복됩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예수님의 답변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무장 군대 앞에서도 세 번이나 당당하게 “내가 그니라”며 자신을 밝히셨습니다(18:5,6,8).

●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20절)

​저자인 요한은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부인 사건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는 장면을 샌드위치처럼 배치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베드로가 아닌 당당하신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안나스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 심문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0-21절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내가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이 당당한 말씀에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예수님을 손으로 칩니다. 폭력으로 입을 막으려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23절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만왕의 왕으로서의 거룩한 위엄을 잃지 않으시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당시 요한 공동체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과 같은 혹은 베드로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그니라”하며 신앙을 인정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할지, 아니면 베드로처럼 “나는 아니라”하며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결정해야 할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영광의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어떤 대답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기득권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베드로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과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우리의 믿음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위기와 손해 앞에서도 고난의 잔을 마시며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당당함을 본받읍시다. 삶의 현장에서 “내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하며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한 날이 됩시다.

요한복음17:1-16절/예수님의 기도(26.03.27)

●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절)

​요한복음 13-16장까지 예수님의 긴 ‘고별 설교’가 끝이 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불과 몇 시간 뒤면 사람들에게 끌려가 밤새 고문을 당하시고, 이튿날 아침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17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 사역을 앞두고 하나님께 직접 올려드린 ‘대제사장적 중보기도’이자 유일하고도 긴 실제 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과연 어떤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5절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6-19절은 남겨질 제자들을 위한 기도, 20-26절은 미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1절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 ‘때’는 바로 십자가를 지실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곧 ‘영화’라고 말씀하십니다. 1-5절에 ‘영화’라는 단어가 5번이나 반복됩니다(1,4,5). ‘영화’는 인간적인 출세나 성공이 아니라 철저한 희생과 순종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는 수치와 실패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기에, 그 죽음의 자리가 곧 아들의 영광이요 아버지의 영광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이 영광입니다.

십자가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은 이 영생의 본질을 명확히 정의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원래 어떤 존재였으며, 죄로 인한 결과가 무엇이고,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들을 알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의 영생은 죽어서 누리는 영생이 아닌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지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즉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얼마를 주면 살 수 있을까요? 천하의 그 어떤 재물과 가치로도 결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로 아파하고 낙심할 때가 많지만, 이 구원의 은혜 한 가지만 기억해도 우리는 평생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 “내가 비옵는 것은 …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9절)

​예수님은 이제 시선을 돌려,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보다, 거친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 대한 마음이 훨씬 더 애타고 안타까우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는 제자들을 비롯한 이 시대 성도들이 꼭 기억해야 할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것’, ‘아버지의 말씀’이 핵심입니다. 제자들은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이며,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고,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으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구원자이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9절에서 파격적인 기도를 올리십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우리 주님의 관심과 중보는 오직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즉 주님의 제자요 성도인 바로 ‘우리’를 향해 집중되어 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나를 ‘아버지의 소유’로 지명하여 불러주시고, 세상 한가운데서 나를 눈동자처럼 주목하시며 기도해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와 감격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처한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악한 세상 한가운데 남겨져야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기에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제자들도 더 이상 어둠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14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정직하게, 희생하며 살려고 몸부림칠 때 세상은 우리를 환영하기보다 오히려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차라리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빨리 벗어나 주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고 싶다는 도피적인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핍박받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이 치열하고 적대적인 세상 한복판에 서서, 그곳에서 악한 사탄의 권세에 타협하거나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는, 즉 보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처럼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환난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믿음의 공동체로 생명의 빛을 발하는 것, 그것이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생을 선물로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세상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현실의 문제들이 우리를 흔들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입니다. 험한 세상 한가운데서 도피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 안에 굳게 서서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되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거룩한 승리의 삶을 살아갑시다.

요한복음16:25-33절/담대하라(26.03.26)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7절)

​요한복음 13장부터 시작된 긴 고별 설교가 이제 막을 내립니다. 오늘 본문은 고별 설교의 결론부로서, 다가올 환난 앞에서도 제자들이 결코 무너지지 않도록 가장 강력한 확신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수많은 염려와 불안이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을 위해 여러 비유와 상징을 섞어 말씀하셨습니다. 어제 말씀의 해산하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가 이르면”, 즉 십자가의 대속이 완성되고 성령이 오시는 그 날에는 모든 영적 진리가 명백하게 깨달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의 가장 큰 변화는 26-27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구약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감히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희생 제물을 드리며 제사장을 통해 두려움 속에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이고 영광인지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어떤 대단한 권력자나 대통령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만왕의 왕이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사랑해 주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과 기도에도 귀 기울여 응답해 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음이 특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함이 특권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할 때, 세상이 주는 어떠한 근심과 염려도 이겨낼 수 있는 참된 평안이 시작됩니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33절)

​예수님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난 제자들은 29-30절에서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며 벅찬 확신을 쏟아냅니다. 제자들 스스로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고, 자신들의 믿음이 굳건히 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제자들이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장담 앞에서 냉정한 현실을 예고하십니다. 31-32절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제자들은 당장 몇 시간 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병들을 피해 뿔뿔이 도망치고, 예수님을 철저히 배신하며 홀로 버려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목적은 그들의 연약함을 책망하거나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과 제자들의 배신이라는 위기 앞에서도, 제자들이 당황하여 완전히 실족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배려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32절 하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제자들이 떠난 자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신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피하도록 건져주시지 않고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 곁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도 큰 아픔과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고별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결론을 선포하십니다.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요즘 뉴스만 보아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는 혼돈의 세상입니다. 경제도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안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세상 앞에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미 주님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임금인 사탄의 권세를 십자가로 깨뜨리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도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처럼 이미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에, 세상이 흔들 수 없는 굳건한 ‘평안’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종종 눈앞의 고난과 삶의 무게 앞에서 제자들처럼 쉽게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기억합시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친히 돌보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이미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루 삶의 자리, 때론 버겁지만 주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