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9 | 매일성경
●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23절)
어제 본문에서 레위 사람과 첩은 해가 진 뒤 베냐민 지파의 성읍 기브아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그들을 맞아 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에브라임 산지 출신의 한 노인이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고, 그들은 발을 씻고 먹고 마셨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땅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납니다.
22절에서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쌉니다. ‘불량배‘라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벨리알의 자식들, 곧 쓸모없고 무가치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집을 에워쌀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문을 두들기며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 ‘관계하리라’는 성관계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사람은 레위인 남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동성애를 하겠다는 겁니다.
나그네가 거리에 앉아 있을 때는 아무도 맞아 주지 않으며 냉정했지만, 그가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지는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나그네에게 악을 행하려고 몰려온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이때 처음이었을까 싶을 만큼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성읍에서 성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집주인 노인이 나와서 그들을 막습니다. 23절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들의 행동을 ‘악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23절 뒤에는 ‘망령된 일'(네발라)이라고 합니다. 망령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4절 끝에서도 한 번 더 반복합니다. 노인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런데 24절에 이어지는 노인의 제안이 충격적입니다.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끌어낼 테니 그들에게는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이 사람에게만은 이런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딸을 지켜야 할 사람은 아버지이고, 손님으로 맞은 사람을 지키는 것이 환대입니다. 그런데 노인은 남자 손님 하나를 지키기 위해 딸과 첩을 내어 주겠다고 합니다. 남자 중심의 시대였다 해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어제 우리는 기브아에서 홀로 나그네를 맞아들인 노인을 좋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위급한 상황이 오자 그의 밑바닥이 드러났습니다. 평소에는 신앙의 밑바닥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해를 보고 갈등이 생기고 위기를 만나면 그때 드러납니다. 문제없을 때 괜찮아 보이는 신앙이 문제를 만났을 때 괜찮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이 그런 순간에 우리를 지켜 줍니다.
불량배들의 요구도 충격적이지만, 그것을 막겠다는 노인의 말도 충격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땅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겉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말씀의 기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사람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끝이 없습니다. 사사기는 그 끝을 숨기지 않고 보여 줍니다.
●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27절)
무리는 노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죄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말도 사람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레위인이 충격적인 행동을 합니다. 25절, 레위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밖으로 끌어냅니다. 무리가 지목한 사람은 레위 사람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지키려고 첩을 강압적으로 붙잡아 끌어내어 문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그 여자를 욕보이다가 새벽 동틀 때에 놓아주었습니다. 자기 첩을 지켜야 할 남편이 오히려 자기 대신 첩을 내어 준 것입니다.
동이 틀 때 여인은 자기 주인이 있는 그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집니다. 밤새 당한 일의 절망과 두려움을 안고 남편이 있는 집까지 겨우 왔지만 문을 두드릴 힘도 없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기다리다 문을 열어 맞아 주기를 얼마나 바랐을까요. 그러나 날이 밝을 때까지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 문 앞에서 여인이 겪었을 두려움과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27절은 그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했다고 합니다. 첩을 밖으로 내보낸 사람이라면 밤새 그를 걱정하고 찾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첩이 없어도 자기 길을 가려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다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봅니다.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 낼 힘조차 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안타깝고 처절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여인을 향해 레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여인을 일으켜 살피지도 않고 떠나자고만 합니다. 여인이 살아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구호조치도 하지 않습니다. 대답이 없자 그는 여인을 나귀에 싣고 자기 곳으로 돌아갑니다. 개역개정은 ‘그의 시체’를 실었다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때 여인이 죽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레위 사람은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을 돌보지 않고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이르러 칼을 가지고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냅니다. 그 시대에는 전쟁에 군대를 불러 모을 때 짐승을 나누어 보내기도 했습니다. 레위 사람은 자기에게 이 일을 한 기브아 사람들을 이스라엘이 공격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인을 문 밖으로 내보낸 사람은 자기였습니다. 그는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기브아사람들만 정죄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 무너진 증거입니다. 둘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내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레위인이 이렇게 잔혹하고 비정합니다. 레위인이 이런 모습이라면 그 시대 이스라엘 전체가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30절에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고 합니다. 다음 장에서 이 일은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지파와 싸우는 동족 간의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이방 대적과 싸울 때는 잘 모이지 않던 이스라엘이 동족을 치기 위해서는 함께 모입니다. 싸워야 할 상대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 내내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었고, 정작 이스라엘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지 않으면 서서히 내려갈 수 있습니다. 힘들어도 말씀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를 붙잡읍시다. 그것이 나와 가정과 공동체를 지킵니다.
또한 위기 속에서 드러나는 신앙이 진짜 신앙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노인도 레위 사람도 위급한 순간에 그 밑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평소에 쌓아 둔 말씀이 위기의 순간에 나를 붙듭니다. 그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말씀 안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 갑시다.
2026.10.08 | 매일성경
●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12절)
어제 본문에서 레위 사람은 친정에 간 첩을 데리러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일찍 일어나 떠나려 할 때마다 장인이 붙잡았고, 결국 다섯째 날 해가 기울 무렵에야 길을 떠났습니다.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못한 것이 큰 사건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11절에서 그들이 여부스 가까이 갔을 때 해가 지려 합니다. 여부스는 예루살렘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지만, 그때는 아직 정복하지 못해 이방 사람들이 살던 성읍이었습니다. 해가 지는데 더 가는 것은 위험하니, 종이 주인에게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들어가 하룻밤 묵자고 청합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2절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이런 의미로 읽힙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니 이방 사람의 성읍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구별된 삶을 통해 신앙을 지키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 사람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습니까? 레위인이면서 첩을 두었고, 넉 달 동안 첩을 찾지 않았으며, 처가에서 닷새를 먹고 마셨습니다. 레위인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방 사람의 성읍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배에 나오고 직분을 맡고 신앙의 언어로 말하지만, 삶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물으시는 것은 우리 중심에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있느냐입니다. 겉과 속이 같은 신앙이어야 합니다.
레위인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유숙하자고 합니다. 동족이 사는 곳이니 이방 사람보다 따뜻하게 맞아 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기브아는 여부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었습니다.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이르자 해가 집니다. 그들은 기브아에 들어가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습니다. 넓은 거리는 성읍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입니다. 머물 곳이 필요한 나그네라는 것을 사람들이 보도록 거기 앉은 것입니다. 누군가 다가와 영접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5절 끝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오늘 우리 문화로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느 넓은 광장에 낯선 나그네가 앉아 있다고 그를 집으로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나그네가 머물 곳이 따로 없었습니다. 누군가 맞아들이지 않으면 거리에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집으로 맞아 먹이고 재우는 것은 특별한 선행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리에 앉은 나그네를 누구 한 사람 집으로 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브아의 형편을 보여 줍니다. 자기 편리와 이익만 생각하고 약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니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개인과 가정에서 시작된 무너짐이 이제 한 성읍 전체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방 사람의 성읍을 피해 동족의 성읍으로 왔는데, 동족의 성읍이 이방 사람의 성읍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20절)
그런데 16절에서 저녁 때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 돌아옵니다. 본문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맞아들인 사람은 기브아 사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와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이 그곳 사람들이 베냐민 자손이라는 것을 계속 밝히는 것은, 이 성읍의 주인들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노인은 거리의 나그네를 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레위 사람이 대답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는데, 자기는 그곳 사람이며 18절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 사람이 돌아가려던 곳은 자기 집이었습니다(9절).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데 마음이 있었다면 처가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그는 상황이 어려워지자 ‘여호와의 집’을 말합니다. 평소에는 내 마음대로 살다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레위인이 이렇게 산다면 백성들의 모습은 어떻겠습니까? 지도자든 성도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내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19절에서 레위 사람은 나귀에게 먹일 짚과 여물도 있고 우리가 먹을 양식과 포도주도 있어 부족한 것이 없다고 덧붙입니다. 잠자리만 내어 주면 된다는 말입니다. 20절에서 노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쓸 것이 있다는 나그네에게 그것까지 내가 담당하겠다고 합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브아에서 그렇게 한 사람은 이 노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고 한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기브아는 나그네를 맞아들이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거리에서 밤을 보내기에는 심히 위험한 성읍이었습니다. 21절에서 노인은 그들을 자기 집에 데려가 나귀를 먹이고, 그들은 발을 씻고 먹고 마십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편안하게 끝날 것 같지만, 내일 본문에서 노인의 집에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겉모양의 경건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워야 합니다. 레위 사람은 이방 사람의 성읍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고 여호와의 집으로 간다고 말했지만, 그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믿는 사람 같은데 삶에서 믿는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가장 위험한 신앙입니다. 말씀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갑시다.
또한 사람을 대하는 모습으로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브아의 신앙이 무너졌다는 것은 나그네를 대하는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로 나타납니다. 기브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렸지만 나그네 한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 특별히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고 섬깁시다. 그것이 바른 신앙으로 세워져 가는 길입니다.
2026.10.07 | 매일성경
●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절)
사사기는 21장까지 있는데, 19-21장까지가 마지막 사건입니다. 지금까지도 사사 시대가 이렇게 어둡고 혼란스러웠나 싶었지만, 19장부터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적이고 슬픈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의 시작입니다. 겉으로는 한 가정의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이미 무너져버린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사사기는 이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합니다. 왕이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신데 내가 왕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다 보니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사기에서 모든 문제의 출발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의 출발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등장합니다. 17,18장 이야기도 에브라임 산지에서 일어났고, 그 중심에 떠도는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준다는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다가 더 나은 자리를 준다는 단 지파를 따라간 사람입니다. 그 레위 청년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이었는데(17:7절), 오늘 레위 사람도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합니다. 사사기는 마지막 두 이야기가 이렇게 연결되며 중심에 레위인이 있습니다.
레위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이스라엘 곳곳에 흩어져 살게 하시고,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며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도록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런 레위 사람이 첩을 맞이했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 일을 잘했다 잘못했다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맡은 레위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이 좋은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말씀으로 백성을 세워야 할 사람이 자기 사명보다 자기 욕망과 세상 정신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2절에서 그 첩은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넉 달 동안 지냅니다. 행음이 간음을 뜻한다면 그 시대 율법으로는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화를 내다, 다투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두 사람이 다투고 첩이 화가 나서 친정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은 넉 달 동안 첩을 데리러 가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베들레헴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길(48km)을 넉 달 동안 가지 않은 것입니다. 넉 달이 지나서야 그는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첩에게로 가서 다정하게 말하며 데려오려 합니다. 첩이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고, 그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보고 기뻐합니다.
부부 사이에 다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흐름 안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다투고 친정으로 가버린 아내, 넉 달이 되도록 가만히 있는 남편, 이것이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무너지기 전에 먼저 개인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라는 말은 교회에서 봉사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개인의 삶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 레위인처럼 가지 말아야 할 길, 욕망과 탐욕의 길을 걷다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됩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를 묵상하며 내 삶의 왕이 누구인지, 내가 왕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5절)
4-10절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길게 이어집니다. 정리해보면, 장인이 레위 사람을 머물게 하자 그는 삼 일 동안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합니다. 5절에서 넷째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떠나려 하자 장인이 떡을 조금 먹고 기력을 돋운 후에 가라고 합니다. 6절에서 두 사람이 앉아 함께 먹고 마시자 장인이 청합니다.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7절에서 그 사람은 일어나 가려 했지만 장인의 간청으로 다시 유숙합니다.
8절에서 다섯째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떠나려 하자 장인은 또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고 하고, 두 사람은 함께 먹습니다. 9절에서 그가 첩과 하인과 함께 일어나 떠나려 하자 장인이 다시 붙잡습니다.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10절에서 그 사람은 다시 밤을 지내려 하지 않고 일어나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릅니다.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입니다. 그 시대에는 길이 안전하지 않아 해 질 무렵에 길을 떠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떠났어야 할 길을 해가 기울어 떠난 것이 다음 본문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못한 것이 결국 큰 비극의 출발점이 됩니다.
4-10절까지 같은 말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유숙하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4,6,7,9), “먹고 마셨다, 기력을 돋우라,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말이 반복됩니다(5,6,8,9). 그 사이사이에 레위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했다”는 말도 나옵니다(5,7,8,9). 장인이 사위를 이렇게 붙잡은 데에는 넉 달 만에 찾아온 사위를 잘 대접해서 딸과 잘 지내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극진한 대접은 뒤에 이들이 머물게 될 기브아 사람들의 냉대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사사기 저자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레위 사람은 이렇게 머물며 먹고 마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데 시간을 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9절의 장인의 말대로 그에게는 가야 할 그의 길이 있었고, 돌아가야 할 그의 집이 있었습니다.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어둔 시대 레위인의 사명은 막중합니다. 그는 일어나 떠나야 했는데 머뭇거리며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명을 잊고 죄악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습니다. 세상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일어나 떠나야 하는데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내 삶의 왕이 누구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사기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 사람과 한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이 아침에 내가 정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 점검합시다.
또한 지금의 자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인지, 일어나 떠나야 할 자리인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과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머뭇거리고 있다면 일어나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집과 말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머뭇거림을 떨치고 과감하게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2026.10.06 | 매일성경
●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24절)
17, 18장의 중심에는 미가가 있습니다. 미가는 하나님을 섬긴다며 자기 집에 신상을 만들고 신당을 세웠습니다. 떠돌던 레위 청년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어제 본문에서는 단 지파가 자기 기업의 땅을 차지하지 못해 새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기를 든 600명이 북쪽으로 가는 길에 미가의 집에 들러 신상들을 가져갔고, 한 집의 제사장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낫지 않느냐는 말에 그 제사장도 기뻐하며 따라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단 자손은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세우고 길을 떠납니다. 군사들은 뒤에 섰습니다. 미가가 사람들을 데리고 쫓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났을 때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 단 자손을 추격합니다. 600명이 무기를 들고 있을 때는 가만히 있던 미가가 그들이 떠나자 이웃을 모아 뒤쫓은 것입니다. 단 자손이 얼굴을 돌려 미가에게 말합니다. 23절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뻔뻔합니다. 남의 것을 가져가 놓고 사과는커녕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왜 왔는지 알면서 힘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미가가 대답합니다. 24절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신상과 제사장 내놓으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지금 우상을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말씀을 가까이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빼앗고 되찾으려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가는 “내가 만든 신들”이라고 말합니다. 27절도 “미가가 만든 것”이라고 하고, 31절도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라고 합니다. 만들었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미가는 여호와를 위해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은 내 필요와 내 유익을 위해 내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상은 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오히려 빼앗깁니다. 우상이 없었다면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 이런 일을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우상 때문에 미가는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악한 본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시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강할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잊어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문제가 생기면 왜 안 해 주시느냐고 항변하는 것도 그런 모습입니다.
미가에게 단 자손이 말합니다. 25절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입 다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백성에게 공의롭게 살고 약한 사람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26절에서 미가는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갑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고 위협합니다. 세상과 다르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지 않으시면 우리 개인의 삶도, 가정도, 교회 공동체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31절)
27절에서 단 자손은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데리고 라이스에 이릅니다. 우상과 제사장이 함께 있으니 하나님도 우리 편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치고 그 성읍을 불살랐습니다. 라이스 사람들을 두고 염려 없이 거주하는 백성(7절), 평화로운 백성(10절),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27절)이라는 말이 되풀이됩니다. 서로 믿고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칼로 쳐서는 안 됩니다. 칼날로 치고 성읍을 불사르는 것은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의 죄악을 심판하실 때 하라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라이스는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단 지파가 정말 싸워야 할 상대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고 있던 아모리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싸우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단 지파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강해 보이는 아모리 족속과 싸우기를 피했습니다. 대신 힘없고 평화로운 라이스를 쳤습니다. 싸워야 할 상대와는 싸우지 않고, 싸우지 말아야 할 상대와 싸웠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일은 싸울 대상을 잘못 찾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을 짓밟아서도 안 되고, 같은 하나님의 백성끼리 싸워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어둠의 세력입니다. 세상 정신입니다.
라이스는 구원할 자가 없었습니다.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 자손은 그곳에 성읍을 세우고 거주합니다.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성읍 이름을 단이라 했습니다.
30절에서 단 자손은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습니다. 새 땅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신상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지금 함께 한 제사장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 가나안 앞까지 인도한 모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모세의 후손이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그만큼 무너졌습니다. 30절은 요나단과 그의 자손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단 지파의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사로잡혀 간 때로 봅니다. 우상을 숭배하다 결국 멸망한 것입니다.
31절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하나님의 집은 성막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뒤 성막은 실로에 있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실로의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하나님의 집이 있는데도 사람이 만든 신상을 따로 세워 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무엇에 열심을 내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미가도 단 지파도 열심이 있었지만, 그 열심은 우상을 향한 열심이었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과 말씀과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는지, 헛된 것을 향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보다 무엇을 향해 열심히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삶은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한 약육강식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삽시다.
2026.10.05 | 매일성경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1절)
사사기는 삼손 이야기로 사사들의 이야기를 마치고, 17장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중심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가의 집에서 신상이 만들어지고 신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미가는 떠돌아다니던 레위 청년을 데려다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해도 되나 싶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한 사람이 아닌 한 지파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단 지파가 미가의 집을 찾아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어제 본문 17:6절에서도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왕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왕이신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일들도 그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1절은 단 지파가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때까지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단 지파도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분배받지 못했다는 말은 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삿1:34절은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으니 믿음으로 나가 그 땅을 차지해야 했는데, 단 지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땅을 포기하고 살 만한 다른 땅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쉬운 길을 찾은 것입니다.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단 자손은 용맹스러운 다섯 사람을 보내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단 지파가 머물던 소라와 에스다올은 이스라엘의 남서쪽에 있었고, 그들이 찾아간 땅은 북쪽 끝이었습니다. 그 길 중간에 에브라임 산지가 있습니다. 다섯 사람은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합니다.
3절에서 그들은 미가의 집에 있을 때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에브라임 사람의 말투와 다른 말투를 알아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레위 청년에게 묻습니다.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4절에서 레위 청년은 미가가 자기를 고용하여 자기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머물러야 할 곳을 떠나 떠돌다가 여기까지 온 사정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합니다.
그러자 단 지파 정탐들이 부탁합니다. 5절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지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레위 청년은 신상을 만들어 둔 집의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신상이 있는 곳에 가서 기도를 부탁한 것과 같습니다. 6절에서 그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묻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업을 차지하지 못해 떠도는 지파가 떠돌다 한 집의 제사장이 된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그 사람은 듣기 좋은 말로 대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신앙 형편이었습니다.
다섯 사람은 라이스에 이릅니다. 거기 있는 백성은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처럼 평온하고 안전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고,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롭고 풍요롭고, 주변에서 함부로 침입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정탐을 마치고 다섯 사람이 돌아가자 형제들이 어떠하더냐고 묻습니다. 9절에서 그들은 일어나 올라가자, 그 땅이 매우 좋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을 단 지파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라 하신 데에는 그 땅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뜻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분배해주신 땅을 믿음으로 차지해야 했습니다. 라이스는 그런 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자기 눈에 좋게 보이니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분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 “어느 것이 낫겠느냐”(19절)
단 지파의 가족 중 600명이 무기를 지니고 라이스를 점령하기 위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합니다.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13절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집에 이릅니다. 정탐꾼들이 들렀던 바로 그 집입니다. 다섯 사람이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14절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리고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끝까지 이 우상들의 이름이 여러 번 되풀이됩니다(14,17,18,20). 정탐꾼들이 미가의 집에서 눈여겨본 것이 이것입니다.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전쟁을 앞두고 이것을 가져가면 싸움에서 이기고, 새 땅에 자리 잡아 풍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풍요와 안전은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상과 아무렇게나 세운 제사장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섯 사람은 미가의 집에 이르러 문안하고, 600명은 무기를 지니고 문 입구에 섭니다. 다섯 사람이 들어가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갑니다. 그러자 미가의 집 제사장이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19절에서 그들이 대답합니다.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고 하면서 묻습니다.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제사장의 자리는 조건이 더 좋은 쪽으로 옮겨 다니는 자리가 아닙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바르게 예배하도록 이끄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20절에서 그 제사장은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슬퍼하고 애통해야 할 일 앞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혼돈과 어둠속으로 계속 들어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단 지파는 받은 땅을 지키지 못하고 떠돌았고, 레위 청년은 자기 자리를 떠나 더 나은 조건을 따라 옮겨 다녔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다른 것을 쫓아다니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두신 자리를 수고롭더라도 지켜 가는 것이 복된 인생의 출발점입니다.
또한 무엇을 의지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단 지파의 관심은 하나님과 말씀이 아니라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무엇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이라 여기며 붙들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들은 헛것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시간이 갈수록 견고하게 세워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