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4:24-15:9절 / 내가 반드시 이루리라(26.08.03)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27절)

12장까지 하나님은 아하스 왕 시대를 배경으로 남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3장부터는 세상 여러 나라를 향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남유다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앗수르와 블레셋과 모압을 향한 심판을 통해, 그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2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사람들은 강대국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남유다의 왕들도 그랬습니다. 어떤 강대국을 의지해야 우리가 안전하고 미래가 보장될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강대국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경영하고 계획하며, 하나님 뜻대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말이 거듭 강조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은 반드시 되고, 경영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6절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27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것을 꺾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강한 나라를, 힘 있는 사람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26절과 27절 끝에 같은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향해 손을 펴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온 열방 위에 펴신 그 손이, 우리 교회 위에도 있습니까. 우리 가정 위에도, 우리 자녀 위에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의 편 손이 지금 우리 위에도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생각과 다르게 어떤 일이 이루어질 때 요동하거나 흔들릴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며 여전히 우리 위에 손을 펴고 계신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25절 “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나의 땅’은 하나님의 땅, 곧 이스라엘입니다. 앗수르가 그 땅을 짓밟고 지배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 앗수르를 몰아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때입니다. 앗수르 때문에 지고 있던 멍에와 짐을 하나님이 벗기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십니다.

●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32절)

28절부터는 블레셋을 향한 경고입니다. 28절에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이 경고가 임하니라” 블레셋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29절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블레셋을 치던 막대기는 앗수르의 강한 왕입니다. 그 왕이 부러졌다, 곧 죽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저 왕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는 평안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뻐하지 말라 하십니다.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고, 그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왕이 죽었으니 해방이라 여겼는데, 더 악독한 왕이 나타나 블레셋을 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어떤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계속되는 평안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환경에 기대어 문제 하나가 해결되어도,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옵니다. 사람 때문에 내 삶이 좌우되면, 결국 또 다른 사람과 문제 때문에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2절이 그 결론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블레셋 사신들에게 무엇이라 답하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세우셨고, 그 백성이 그 안에서 피난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던 성읍이 멸망했으니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바벨론은 성전 기구를 가져가며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강대한 나라들을 하나하나 심판하시니, 그토록 강하던 나라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온이 견고히 세워지고, 그곳에 많은 사람이 피난합니다. 이를 통해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15장은 모압을 향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모압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슬퍼한다, 부르짖는다, 운다’입니다. 산당에 올라가 울고, 애통하여 심히 울며, 크게 부르짖고, 울부짖습니다. 8절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렀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모압 전체가 통곡으로 뒤덮입니다.

이 가운데 5절은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이 ‘내 마음’은 선지자의 마음이고,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금 애통하며 부르짖는 것은 심판받는 모압만이 아니라, 그 모압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며 “하나님은 무자비하신 분이다, 한 나라를 이렇게 쉽게 멸망시키시다니”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압은 교만 때문에 무너지는데, 하나님도 애통하는 마음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통해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세우시고, 교만한 세상이 겸손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이끄십니다.

1절에 반복단어는 ‘하룻밤에’입니다.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알과 기르는 모압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들이 하룻밤 사이에 황폐해집니다. 한 도시를 세우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과 수고가 듭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손대시면 하룻밤 사이에 다 무너집니다.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쌓아 올리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모든 것이 하룻밤 사이에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함으로 우리 인생을 채워 주십니다. 하룻밤에 무너진 모압 사람들은 2절에서 산당에 올라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살려 달라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 외에 세상의 모든 것은 우상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그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세상은 거대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것 같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한순간도 놓지 않고 주목하시며,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우리 위에 펴신 그 손을 기억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하나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그것을 피난처로 삼으십니다. 하룻밤에 무너진 모압이 아무리 다른 곳에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듯, 우상과 사람과 환경은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합니다. 우리 삶은 결국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야 하고, 하나님이 견고케 하셔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견고한 삶을 살아갑시다.

이사야 12:1-6절 / 하나님은 구원이시라(26.07.31)

●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1절)

이사야 7-11장까지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남유다를 향해 거듭 심판을 경고하시고 회복에 대한 메시지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2장에 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회복입니다. 그러나 죄를 그대로 둔 채 복을 주는 것은 참된 회복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백성을 정화하시고 그다음에 이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 구원의 날에 부를 노래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날에’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절 “그날에 네가 말하기를”, 4절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입니다. 그날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한숨과 탄식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날’은 하나님이 구원을 행하시는 날입니다. 어두운 심판의 과정이 지나고 구원의 빛이 임합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 언제까지 이 어려움을 견뎌야 합니까, 이것이 끝나기는 합니까”하고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과정이 끝나야 진정한 구원과 회복이 있다 하십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 때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과 회복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며 그 날에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왜 이렇게 이끌어 오셨는지를 이해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1-3절은 개인의 찬양입니다. 1절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여기서 ‘전에는’과 ‘이제는’이 대비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진노하셨는데, 이제는 그 진노가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진노가 돌아선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안위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품에 안아 주시고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찬양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다수는 징계를 받았고, 지금 이 노래는 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부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다수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그 가운데 신실한 소수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함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 구절은 출15장,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뒤 모세와 백성이 부른 그 노래에 나오고, 시118편에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새로운 출애굽의 노래입니다. 특히 2절 앞부분을 보면,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함이 없으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대개 문제를 만났을 때입니다. 그런데 왜 두렵습니까. 하나님보다 문제가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깊이 생각할 때,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계속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 문제를 이겨내는 길은, 이 모든 문제보다 하나님이 훨씬 크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지금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두려울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인가.

3절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 구절에도 출애굽의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통당하던 백성에게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목마르고 메마른 삶을 생수로 채워 만족시키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목마른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소망은, 크신 일을 행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5절)

4절부터 찬양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확대됩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 모두 함께 찬양하며 온 세상에 그 이름을 선포하자는 것입니다. 4절 “그날에 …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절 끝에는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너무 크고 놀라워 우리 안에만 담아 둘 수 없기에, 만국 중에 선포하고 온 땅에 알리자고 합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찬양의 이유는 5절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음이니” 하나님이 극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는데, 그 ‘아름다운 일’은 절망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시고, 진노를 돌이켜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어 찬양하고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다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더니 너무 좋아서,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혼자 담아 둘 수 없어, 온 세상에 선포해 그들도 이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게 하자는 것입니다. 다만 순서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이 은혜를 경험하고, 먼저 하나님을 아름답게 예배하여 그 은혜로 충만해진 다음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내 안에 은혜와 기쁨이 있어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가 도리어 은혜를 받습니다. 전하면서 내 안의 은혜와 기쁨이 다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6절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우리가 소리 높여 선포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크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시며,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구원과 회복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질병으로 긴 터널을 지나며, 언제 끝날지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어 불안이 마음에 자리 잡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두려울 때, 내가 아는 하나님이 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신뢰합시다.

다른 하나는 먼저 예배하고, 그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삶이 먼저입니다. 그 예배를 통해 은혜로 충만해지고, 그 충만함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을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 그것이 복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충만한 은혜를 기쁨으로 전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11:1-16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즐거움(26.07.30)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1절)

지금까지 이사야는 앗수르의 심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끝내 돌아오지 않아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다 멸망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도 다 끝나 버린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 11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니, ‘이새의 줄기’는 다윗 왕조를 가리킵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크고 부강한 나라, 나무로 치면 거대한 나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끝에 와서 완전히 잘려, 이제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길 그때, 하나님은 그 그루터기에서 연한 싹 하나가 돋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싹을 통해 다윗 왕조보다 더 완전하고 위대한 나라, 진정한 통치를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시작하십니다. 이 싹은 앞서 이사야가 예고해 온 그분, 곧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삶을 살다 보면 “이제 끝이구나, 절망이다”라는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끝이 없고 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새롭게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싹, 곧 새로운 통치자는 무엇으로 나라를 이끄실까요. 2절 “그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통치합니다. 여기 여러 영이 나열되는데, 지혜와 총명과 모략, 그리고 거기에 ‘지식’이 더해집니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본문은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 바르게 섬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어떻게 됩니까. 2절 끝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안다면, 경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경외가 3절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데 어쩔 수 없어서, 매 맞을까 봐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니까 그 하나님이 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워서,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래 신앙생활한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예배하러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옵니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옵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나옵니까. 만약 예배가, 신앙이 부담으로 느껴진다면 문제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즐거움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만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때, 신앙은 자칫 무거운 짐이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 섬김이 기쁨과 감격이 되는데, 누군가에게는 갈수록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런 자리에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다시 알아가는 것, 그 회복을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3절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어떻게 판단합니까. 4절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특히 4절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이 사람의 입에 막대기가 있다는 것은, 그 입술에서 하나님의 바른 기준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기준을 바르게 짚어 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서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오늘 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세상의 기준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입니까.

●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9절)

6절부터는 이 메시아가 다스리시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이끌립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해도 해를 입지 않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은 본래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함께 삽니다.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이 함께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을 때의 본래 모습입니다.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세상이 약육강식의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은 이 깨어진 세상을 본래의 화평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세상은 정치를 잘하면, 경제가 발전하면 억울한 사람 없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치가 그런 세상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공약과 계획을 세워도, 모든 문제의 뿌리인 인간의 죄성을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9절이 답합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름다운 세상은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질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인정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당히 알아서는 안 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적당히 안는데 있습니다. 적당히 알고 적당히 삽니다. 그런데 적당히 알고 적당히 살면,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을 택하게 됩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적당함’때문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아는 지식은 지금 어느 깊이에 있습니까.

10절부터 이 회복이 한 나라를 넘어섭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 만민의 기치로 서고,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옵니다. ‘기치’는 깃발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깃발로 높이 세우셔서 온 열방이 그리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면 13절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유다는 남유다를 대표합니다. 본래 한 동족인 두 나라가 갈라진 뒤 서로 질투하고 잡아먹을 듯 다투었는데, 메시아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그 질투와 다툼이 끊어지고 하나 되어 화평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백성에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우리 안에 맺혀야 할 열매도 이것입니다. 질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괴롭히고 다투고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즐거움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기쁨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회복된 세상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충만해질 때 이루어집니다. 적당히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생각하면 감사와 감격이 넘치도록 그 지식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이사야 10:20-34절 /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26.07.29)

●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21절)

지금까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였던 앗수르가 교만하여 심판받는다고 했습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이제 남유다까지 삼키려 진격해 오는데, 하나님은 그 앗수르를 반드시 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거기에 소망이 있다”입니다.

20절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하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의지하리니” 본문에 ‘남은 자’가 반복됩니다. 심판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이제는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진실하게 의지하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특히 22절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을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백성 가운데 정작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남은 자’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숫자의 많음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고, 도리어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드는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많은 무리가 아니라,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24절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남유다를 향하여 ‘내 백성아’라고 부르십니다. 비록 죄악 가운데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깨닫게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앗수르가 아무리 강하게 공격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가 앗수르에게로 옮겨져 그들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옛날 출애굽과 사사기 시대의 사건을 통해 확증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을 치셨던 것처럼, 그리고 애굽에서 홍해를 가르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그 구원이, 지금 이 백성에게도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27절 “그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앗수르의 공격은 남유다에게 무거운 짐이자 목을 짓누르는 멍에였습니다. 왕과 백성이 그 앞에서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짐을 어깨에서 벗기시고 멍에를 목에서 부러뜨리십니다. 그 이유가 ‘기름진 까닭’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기에, 그 풍성함으로 멍에가 부러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름짐’이라는 말에 이사야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기름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앗수르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이 더 든든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도리어 목에 멍에를 진 삭막하고 메마른 삶이었습니다. 기름진 삶을 좇아 하나님을 버렸는데, 얻은 것은 빼빼 마른 삶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더 나은 삶,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을 뒷전에 두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붙드는 편이 더 안전하고 더 기름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기름지고 복된 삶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 참된 풍요입니다.

●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33절)

28-32절까지는 여러 지명이 이어집니다. 이 지명들은, 앗수르 군대가 북쪽에서부터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해 오는 경로입니다. 한 성읍 한 성읍 무너뜨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와 예루살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32절 “그날에 그가 놉에 서서 딸 시온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놉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앗수르가 거기까지 진격해 와,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공격하려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수도가 함락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이 장면을 이토록 생생하게 설명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니, 남유다 백성은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위기가 이르기 전에 돌이키라는 간절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향해 위협하며 손을 흔들던 그 앗수르는 어떻게 됩니까. 33-34절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예루살렘을 두렵게 하던 앗수르를 하나님이 혁혁한 위력으로 꺾으십니다. 울창한 삼림 같던 앗수르의 군대가 도끼에 찍히듯 쓰러지고, 그 높은 것이 낮아집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를 치셨습니다. 아무도 무너지리라 상상하지 못한 그 최강대국이, 하나님의 손에서는 한순간에 베이는 나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결국 남유다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남유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내가 예언한 대로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쳤고, 또 내가 예언한 대로 그 앗수르가 멸망한다. 그러니 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니, 남유다야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남유다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돌아오라, 거기에 소망이 있다!”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남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무리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많은 백성이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 때 하나님은 징계하시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드는 남은 자를 통해 뜻을 이루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께 영광 돌리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한 사람으로 서 있는지, 오늘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다른 하나는 혁혁한 위력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문턱까지 이른 최강대국조차 한순간에 꺾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혁혁한 위력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어깨의 짐을 벗기시며, 대신 싸우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10:5-19절 /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26.07.28)

●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5절)

어제 본문에서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심판받는지를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남유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니 겸손히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께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듣지 않고 제 길을 간 것입니다(9:9절).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앗수르에 대한 심판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된 앗수르가 마치 자기 힘으로 이룬 것처럼 교만해지자, 하나님이 앗수르마저 심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5절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앗수르는 그 시대 최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 ‘내 분노의 몽둥이’라 부르십니다. 앗수르가 강한 것은 스스로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쓰시려고 그렇게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않은 나라를 치게 하시고, 노하신 백성을 쳐서 탈취하고 노략하며 짓밟게 하십니다. 곧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친 것은 앗수르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자기가 정복하는 줄 알았지만, 실은 하나님 손에 들린 막대기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내용을 읽으면 “앗수르가 하나님께 멸망당하나 보다”하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앗수르의 멸망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를 향해 “저 나라가 곧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눈에는 그렇게 크고 강한 것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압도하고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까? 아무리 거대하고 견고해 보이는 나라도, 사람도, 문제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 튕기시면, 또한 하나님의 콧김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쓰러진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나를 압도하는 거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앗수르의 속마음입니다. 7절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쓰셨는데, 정작 앗수르는 그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더 많은 나라를 파괴하고 멸절하려는 정복욕만 가득했습니다.

8-11절에서 그 교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앗수르 왕은 자기 고관들이 다 왕과 같다고 뽐내며, 정복한 성읍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습니다. 그러고는 무서운 말을 합니다. 자기가 우상을 섬기는 여러 나라를 쳤는데 그 나라들의 우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더 대단했다며, 그렇다면 예루살렘과 그 우상에게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앗수르의 근본 문제입니다. 앗수르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섬기다 버린 여느 우상들과 똑같은 급으로 여겼습니다. 다른 나라 우상을 짓밟았듯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짓밟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한낱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과 동급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교만의 절정입니다.

또한 앗수르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섬기는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결국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신앙의 실패였습니다.

●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15절)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교만한 마음과 거만한 눈을 벌하시겠다고 하십니다. 13절에는 앗수르 왕의 자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모든 것을 ‘내 힘, 내 지혜’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자기가 새의 둥지에서 알을 줍듯 열국의 재물을 손쉽게 거두었고, 아무도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려 저항하지 못했다고 뽐냅니다.

이 교만에 하나님이 던지시는 물음이 15절입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도끼가 나무를 찍습니다. 그런데 그 도끼가 “이 나무는 내가 찍었다”라고 자랑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도끼는 사람 손에 들려 움직였을 뿐입니다. 톱도, 막대기도, 몽둥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구가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 큰소리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앗수르가 바로 그 도끼였습니다. 하나님 손에 들려 쓰임받았을 뿐인데,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자랑한 것입니다.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해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교만한 자의 말의 특징은 ‘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도, 재능도, 시간도, 기회도, 심지어 오늘 하루 숨 쉬는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더 중요한 것은 그 은혜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교만한 앗수르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그토록 살지고 강성하던 앗수르가 여위어 쇠약해지고, 그 영화가 불에 타 버립니다. 17절이 인상적입니다.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교만한 앗수르에게는 태워 버리는 불이 됩니다. 같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는 따뜻한 빛이 되시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에게는 소멸하는 불꽃이 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울창한 삼림 같던 군대와 영화가 다 타 버려, 마치 병든 자가 쇠약해지듯 스러지고, 남은 나무가 어린아이라도 셀 수 있을 만큼 몇 그루 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정복 이후 점점 쇠퇴해서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가 도끼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이루면 그것을 내 공로로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자로 살아가는 하루 됩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그 시대에 아무도 무너지리라 상상하지 못한 나라였지만, 하나님의 손안에서는 곧 소멸할 삼림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우리를 압도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