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8-10:4절 /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26.07.27)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11절)

7장에서 하나님은 남유다 왕인 아하스에게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그러면 반드시 회복시키고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앗수르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북이스라엘의 예를 들어 보여주십니다. 남유다에서 예언하던 이사야가, 북이스라엘이 장차 겪을 일을 통해 남유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같은 말이 네 번 반복됩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9:12, 17, 21, 10:4). 이 네 번의 반복은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심판하시겠다니,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나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 네 번 반복된다는 것은, 네 가지 부분에서 이 백성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지적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8절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앞서 반드시 말씀을 보내십니다.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9-10절.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합니다. 마음과 귀를 닫고 듣지 않습니다. 대신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경고로 벽돌이 무너지고 나무가 찍히는 일을 겪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너졌으면 더 좋은 것으로 쌓으면 되지”하며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다듬은 돌과 백향목은 벽돌과 뽕나무보다 훨씬 값진 것입니다. 심판을 겪고도 회개하기는커녕 자기 힘으로 더 크게 일어서겠다고 장담하는 교만입니다.

그 결과가 11-12절입니다. 하나님이 대적들을 일으켜 그들을 치게 하시는데,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킵니다. 앞뒤로 협공을 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북이스라엘과 연합했던 아람이 집어 삼키려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의지하면 그것이 우리를 삼키려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3절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그리하여도’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치시는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매를 맞으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돌아보아야 하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고난이 왔을 때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도리어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판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14-16절에서 하나님은 머리와 꼬리,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하루 사이에 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머리는 존귀한 자, 곧 장로와 지도자이고, 꼬리는 거짓을 가르치는 선지자입니다. 특히 16절은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고 합니다.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도리어 미혹하니, 그를 따르는 백성이 함께 멸망합니다. 지도자의 타락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10:3절)

세 번째, 18-19절은 그 악이 어떻게 퍼지는지를 불에 비유합니다. 악행이 불타오르는 것 같아서 찔레와 가시를 삼키고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치솟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작은 불씨가 온 숲을 태우듯, 죄악이 온 사회로 번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불탈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해하고, 형제가 형제를 공격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20-21절.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먹어도 배고프고 왼쪽으로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여, 마침내 “각기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지경에 이릅니다. 심지어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치고, 둘이 합하여 유다를 칩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본래 형제 지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는 결국 서로를 뜯어먹고 형제가 형제를 치는 데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렇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10:1-2절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궁핍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번에는 법과 제도를 가진 자들의 죄입니다. 법을 만들고 판결하는 권한을 가진 자들이, 그 힘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 쓰지 않고 도리어 약자를 짓밟는 데 씁니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어 가난한 자의 권리를 빼앗고, 과부의 것을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합니다. 1장에서 하나님이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신 요구가, 정반대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마음 아파하시는 죄가 바로 힘없는 자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3-4절에서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디에 두려느냐” 심판의 날이 오면 그 많던 재물과 권세를 어디에 두고 누구에게 도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약자에게서 빼앗은 그 모든 것이 심판의 날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포로들 아래 구푸리고 죽임당한 자들 아래 엎드러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네 번이나 반복되는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는 돌아오길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죄악이 가득합니다. 당장 심판하셔서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회복시켜주시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심판을 받으면서도 그 매를 드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돌아가는 사람이 있고 도리어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불의와 죄악이 일상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런 시대 속에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7:1-25절 / 굳게 믿으라(26.07.24)

●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1절)

어제 우리는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대가 바뀌어 아하스 왕 때의 일입니다. 나라가 흔들리는 위기 앞에서 왕이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를 알게 합니다. 안타깝게도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이 유다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임마누엘’이 오늘 본문에서 나옵니다.

아하스는 히스기야의 아버지인데, 남유다 왕 가운데 상당히 악한 왕으로 꼽힙니다. 우상숭배를 일삼았고, 심지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까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을 행한 왕입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앗수르가 급격히 강성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북쪽의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손을 잡고 앗수르에 맞서려 했는데, 남유다가 여기에 동참하지 않자 두 나라가 연합하여 남유다를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그 소식에 2절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두 강대국이 연합해 쳐들어오니 왕도 백성도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1절 끝에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그들이 아무리 강해도 절대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남유다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도록 이사야를 보내십니다. 3절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왕궁이 아니라 물길이 있는 곳으로 가라 하십니다. 아하스가 거기 있었는데, 아마 전쟁을 준비하며 성의 수원을 점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계획으로 위기를 넘겨 보려는 곳으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 혼자 가라 하지 않으시고 아들인 스알야숩을 데려가라 하십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고,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두 이름이 두 갈래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구원을 얻지만, 끝까지 불순종하면 나라가 무너지고 다만 남은 자만 돌아오게 되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 통해 아하스에게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삼가며 조용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하스가 두려워하는 두 나라를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미 다 타 버려 연기만 나는 나뭇가지 토막이라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눈에는 온 세상을 뒤흔들 것 같던 세력이, 하나님의 눈에는 곧 꺼질 부지깽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에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겁니다.

어제 본문에서 우리는 세상의 왕이 죽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하나님이 세상의 강대국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만 커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그 문제는 연기 나는 부지깽이일 뿐입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 두 나라는 유다를 쳐서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합니다(6절). 이는 다윗 왕조를 끊어 버리고 자기들 뜻대로 조종할 왕을 앉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다윗에게 그 왕위가 끊어지지 않으리라 언약하셨습니다. 그래서 7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사람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하나님의 언약을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읽으면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굳게 믿다’와 ‘굳게 서다’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 끝에 말하는 ‘아멘’이 그 어근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말씀은 “굳게 붙들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한다”, “아멘 하지 않으면 아멘 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오직 믿음이 하나님 백성의 존재 기초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굳건하지 않으면 견고하게 설 수 없습니다.

●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절)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확실하게 이루어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12절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신실한 말로 들리지만, 그의 속마음은 정반대입니다. 징조가 주어지면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경건한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믿는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 고집대로 하면서, 그것을 그럴듯한 신앙의 언어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유다를 무너뜨린 뿌리였습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 ‘처녀’는 원어로 ‘알마’인데, 혼기에 이른 젊은 여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아하스 당시에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나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두려워하던 두 나라가 황폐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16절). 곧 이 아이의 자라남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그대로 기록됩니다. 곧 아하스 시대의 한 아이를 통해 주어진 이 징조가, 궁극적으로는 동정녀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핵심입니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지금 아하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두 나라를 막아 낼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그 확신을 한 아이의 이름에 담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그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18-25절은 그러나 아하스가 하나님 대신 앗수르를 의지할 때 벌어질 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파리와 앗수르의 벌을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의지하려던 그 앗수르가 도리어 벌이 되어 쏘게 되고, 포도원이 있던 자리마다 찔레와 가시가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눈에 두 나라는 온 나라를 삼킬 세력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연기 나는 부지깽이였습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문제만 커 보입니다. 그때 붙들어야 할 말씀이 이것입니다.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

다른 하나는 경건한 말 뒤에 불순종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 고집을 신앙의 언어로 포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말씀에 정직하게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이사야 6:1-13절 / 높이 들린 보좌(26.07.23)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3절)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왜 이 소명 이야기가 1장이 아니라 6장에 놓여 있는지 궁금합니다. 1-5장까지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식처럼 기르셨는데 짐승만도 못하다 하셨고, 정의와 공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이 가득하다 하셨으며, 여섯 번이나 화 있을진저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뒤에 6장이 이어져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대조됩니다. 그리고 그 대조 속에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습니다.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은 처음에는 신실했으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교만해졌습니다.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다 나병에 걸렸고, 부정한 자로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생을 마쳤습니다. 52년을 통치한 웃시야 왕의 죽음은 백성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가 본 것은 이 땅의 왕은 죽었지만,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여전히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 왕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늘 변합니다. 영원할 것 같던 왕들도 때가 되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보좌에서 통치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옷자락 한 자락만으로도 성전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절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스랍은 ‘불타는 자’라는 뜻을 지닌 천상의 존재입니다. 여섯 날개 중 둘로만 날고, 넷은 자기 얼굴과 발을 가리는 데 씁니다. 왜 그럴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감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존재조차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스랍들이 찬양합니다. 3절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거룩하다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단순히 ‘매우 거룩하다’가 아니라, 비교할 수 없고 견줄 데 없이 거룩하시다는 뜻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세 번 반복해 강조한 곳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셔서,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마다 진동합니다.

우리는 5장에서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비웃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어디 한번 일해 보시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6장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합니다. 그런 하나님 향한 백성들의 조롱은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진정한 왕으로 통치하시며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이사야의 첫마디는 5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좋기만 할 것 같은데, 실제로 그 앞에 서니 “내가 죽게 되었구나”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5장에서 하나님이 여섯 번 ‘화 있을진저’ 하고 선언하셨는데, 이제 이사야가 자기 자신을 향해 ‘화로다’라고 부르짖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을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과 비교할 수 없이 신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보니, 하나님의 일을 하던 그 입술조차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죄와 부정함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하십니다. 스랍을 통해 제단의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해주십니다. 7절 하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숯이 ‘제단’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제단은 희생 제물을 잡아 바치고 그 피가 뿌려지는 곳, 곧 희생을 통해 죄가 사해지는 곳입니다. 그 제단의 숯불이 이사야의 입술에 닿자 그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곧 이사야의 정결함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제단의 희생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정함이 정결하게 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그 자리에서 이사야는 한 음성을 듣습니다. 8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하나님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죄악으로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회복을 위한 말씀을 전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서에 나오는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 이면에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8절 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핍박할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9-10절에서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자신을 드립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가 갈꼬, 누가 할꼬”라며 찾으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제가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다”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자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대답입니다.

이사야가 묻습니다. 11절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언제까지 이 말씀을 전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답은 성읍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고 가옥에 사람이 없으며 토지가 황폐하게 될 때까지라고 하십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신다는 것은 포로로 끌려가 나라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때까지도 이 백성이 돌이키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3절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기 ‘그루터기’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나무를 베어 밑동만 남으면 다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면 뿌리가 살아 있고, 거기서 새싹이 돋아납니다. 하나님이 심판으로 나무를 베셨지만 그루터기를 남기셨다는 것,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라 불린다는 점입니다. 이사야에서 ‘씨’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실제로 이 그루터기 이미지는 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로 이어집니다. 잘린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그 새싹이 메시아이십니다. 곧 이스라엘의 회복은 남은 자들의 힘이 아니라, 거룩한 씨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무섭게 심판하시지만, 그 심판의 메시지 끝에는 회복의 약속이 놓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견줄 데 없이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우리 노력이 아니라 제단의 숯불, 곧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옵니다.

다른 하나는 부르심 앞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이사야가 들은 것은 “누가 갈꼬”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렇게 물으십니다. 그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고백하며, 힘들고 어려워도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이사야 5:18-30절 / 악을 선하다 하는 자들(26.07.22)

●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절)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를 맺은 자기 백성에게 두 가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8,11절). 집에 집을 잇는 탐욕과,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 없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어서 네 가지의 화가 선포되고, 그 결과 심판이 어떻게 임하는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길게 화를 선언하시는 것은, 그만큼 자기 백성이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8절이 세 번째 화입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수레 줄로 죄악을 끈다’는 표현은 죄를 어쩌다 짓는 것이 아니라, 밧줄로 수레를 끌듯 죄를 자기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죄를 짐스러워하기는커녕 애써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죄를 이끌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19절인데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그럼 어디 한번 속히 해 보시지. 그 계획을 어서 이루어 우리 눈으로 보게 해 보라” 하나님의 심판을 대놓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말을 믿지 않고, 도리어 빈정대며 비웃습니다. 이것은 앞서 시편에서 본 어리석은 자, 곧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없는 듯 사는 자의 뻔뻔한 모습입니다.

20절이 네 번째 화이자,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것은 가치가 뒤집히고 기준이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악을 악이라 하고 선을 선이라 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부릅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옳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안을 가지고도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심각한 죄인 것은 죄를 죄로 아는 사람은 돌이킬 수 있지만, 이들은 잘못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으니 회개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악이라 하는 것을 세상은 점점 선이라 부릅니다.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도리어 어둡고 답답한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뒤집힌 기준이 마치 시대의 상식인 것처럼 자리 잡아 갑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도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21절이 다섯 번째 화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앞서 악을 선이라 부르게 되는 뿌리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지 않고 자기 판단을 기준 삼으니, 하나님이 악이라 하신 것도 자기 눈에 좋으면 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22-23절이 여섯 번째 화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술 마시는 데는 영웅호걸이면서, 뇌물을 받고는 판결을 뒤집는 자들입니다. 뇌물을 받고 악인을 옳다 하고, 의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정의를 돈 때문에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바라신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24절)

그렇다면 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24절은 이 모든 화의 원인을 말합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문제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멸시한 것입니다. 그 결과 뿌리가 썩고 꽃이 티끌처럼 날립니다. 겉으로 아무리 무성해 보여도, 말씀을 버린 삶은 뿌리부터 썩어 결국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2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느니라.” 여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느니라”는 말씀이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손을 드셨는데, 그 손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앞부분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데,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 손이 돌이킬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손을 드신 것은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심판이 어떻게 임합니까. 26절 “그가 기치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자기에게로 오게 하실 것이라” 하나님이 먼 나라를 부르셔서 심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여기서 ‘부르신다’는 말의 원어는 휘파람을 불어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목자가 휘파람 한 번으로 양 떼를 부르듯, 하나님이 휘파람 한 번 부시면 저 먼 나라의 군대가 순식간에 달려온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는, 강대국의 군대조차 휘파람 한 번에 움직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는 앗수르와 훗날의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27-30절은 그 군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설명합니다. 지친 자도 없고 넘어지는 자도 없으며, 조는 자도 자는 자도 없습니다. 화살은 날카롭고 활은 당겨져 있으며, 말굽은 부싯돌 같고 수레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습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준비된 군대입니다. 이 군대가 사자처럼 먹이를 움켜 가는데 건질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온 땅에 남는 것은 흑암과 고난, 빛조차 구름에 가려진 어둠입니다. 앞서 20절에서 이 백성은 흑암을 광명이라 부르며 어둠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온 땅을 덮은 것은 빛 하나 없는 흑암이었습니다. 어둠을 빛이라 부른 자들이 마침내 진짜 어둠에 삼켜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선과 악의 기준을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점점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이 뒤집어 부른다고 악이 선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내 판단이나 시대의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흑암을 광명이라 부르는 어리석음에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펴져 있는 그 손 앞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손을 드셨지만 그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이는 아직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휘파람 한 번으로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말씀을 버리고 멸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돌이키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5:1-17절 / 좋은 포도를 바랐더니(26.07.21)

●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1절)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전제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말이 “내가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조건없는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1절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심판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노래는 한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2절 “심히 기름진 산에” 포도원이 있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주인이 포도원에 쏟은 정성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장소는 ‘심히 기름진 산’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달리 남유다는 기름진 땅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을 파서 돌을 골라냈습니다. 그리고 아무 나무가 아니라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도 세우고 술틀도 만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것입니다. 좋은 땅, 돌을 골라낸 수고, 최고의 품종, 지키는 망대, 수확의 준비까지. 그러니 당연한 기대가 있습니다. 극상품 포도가 맺히리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맺힌 열매는 2절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들포도는 작고 시고 쓸모없는, 먹을 수 없는 열매입니다. 원어는 ‘베우심’으로 ‘악취나는 포도’라는 의미입니다. 최고의 조건에서 최고의 품종을 심었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이 포도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5-6절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주인이 하시는 일은, 지금껏 베푸신 것을 하나하나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걷으시니 짐승이 먹어 버리고, 담을 헐으시니 짓밟히며, 돌보던 손길을 거두시니 가시가 자랍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은혜로 이 포도원을 붙들고 계셨는지가 도리어 여기서 드러납니다. 특히 “구름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면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셔서 포도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이 노래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지시고 광야에서 먹이시고 좋은 땅에 정착시키시고 말씀을 주시며 정성껏 가꾸신 그 나무가 바로 자기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맺은 것이 들포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좋은 열매는 무엇이었을까요. 7절 “그가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가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이 바라신 것은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정의는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아 각 사람에게 마땅한 몫을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억울하지 않도록 바르게 해결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관계 안에서 신실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 정의와 공의를 맺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맺힌 들포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정의 대신 ‘포학’이요 공의 대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히브리어로 읽어야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정의는 ‘미쉬파트’인데 맺힌 것은 소리가 거의 같은 ‘미스파흐’, 곧 포학이었습니다. 바라신 공의는 ‘체다카’인데 맺힌 것은 역시 발음이 닮은 ‘체아카’, 곧 억눌린 자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소리는 비슷하나 뜻은 정반대인 단어를 나란히 놓아, 하나님이 기대하신 것과 정반대의 것이 나왔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정의처럼 보였으나 실은 포학이었고, 공의인 줄 알았으나 실은 약자의 눈물이었습니다.

●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16절)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정의과 공의를 버렸을까요? 8절부터 하나님은 ‘화 있을진저’를 거듭 선언하시며 그 실상을 하나씩 짚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가운데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화가 8절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집에 집을 잇고 밭에 밭을 더해, 남은 자리가 없을 때까지 땅을 사들여 홀로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 죄일까요. 이스라엘에서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각 지파와 가문에 나누어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지켜 온, 하나님이 정하신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힘 있고 가진 자들이 그 이웃의 기업을 사들여 독차지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축재가 아니라, 힘없는 자를 그 땅에서 몰아내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앞서 본 ‘포학’과 ‘부르짖음’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심판이 9-10절입니다.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집을 그러모았지만 거기 살 사람이 없게 되고, 넓은 포도원과 밭에서 나오는 소출이 씨앗의 십분의 일 수준으로 쪼그라든다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모은 모든 것이 도리어 텅 비고 헛되게 됩니다.

두 번째 화는 11절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아침부터 밤까지 술과 잔치에 빠져 사는 삶입니다. 12절을 보면 그 잔치에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가 넘칩니다. 겉으로는 즐겁고 화려한 삶입니다.

그런데 12절 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문제는 향락 자체보다, 그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행하시는지 보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즐거움에만 눈이 팔려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사로잡힐 것이요” 여기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살다가, 결국 그 무지함 때문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다는 것입니다.

14-17절은 그 심판의 모습을 그립니다. 스올이 목구멍을 넓히고 입을 크게 벌려, 그 화려하던 무리와 떠들며 즐기던 자들이 그리로 삼켜집니다. 그리고 16절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사랑했던 자기 백성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자,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십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쏟으신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쏟으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 삶에 맺히는 것이 좋은 포도인지 들포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는 대단한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화를 받은 이들은 자기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았고, 그 무지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어떻게 일하시는지 관심을 두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