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2 | 매일성경
● “삼손이 가사에 가서”(1절)
어제 본문에서 삼손은 여우 300마리로 블레셋의 곡식 밭을 태웠고, 유다 사람 3,000명에게 결박되어 블레셋에 넘겨졌지만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밧줄을 끊고 나귀의 턱뼈로 천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샘을 터뜨려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 샘이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입니다. 이만큼 은혜를 경험했다면 삼손이 달라지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삼손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1절에서 삼손은 가사에 갑니다. 가사는 블레셋의 중심 성읍 가운데 하나입니다. 삼손은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14장에서 블레셋 딤나의 한 여자를 보고 좋아했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번에도 삼손은 눈에 보이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사가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계속 블레셋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블레셋은 삼손이 즐길 곳이 아니라 맞서 싸워야 할 곳입니다. 나실인이요 사사인 삼손은 하나님과 말씀에 마음을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관심은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에 있었습니다. 누가 삼손을 떠밀어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에게 삼손은 눈엣가시였습니다. 2절에서 삼손이 왔다는 소식이 가사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그들은 곧 그곳을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기다립니다. 밤새도록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새벽이 되면 그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힘을 알고 있으니 많은 사람이 숨죽이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삼손은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갑니다. 집 문이 아니라 성문입니다. 그것을 통째로 뽑아 메고 간 것입니다. 이런 힘을 가진 사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이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는 작전으로 이어집니다.
●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4절)
4절에서 삼손은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합니다. 소렉 골짜기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경계 지역입니다. 들릴라가 어느 민족인지 본문은 말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삼손이 사랑한 여인들을 보면 블레셋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기에 블레셋 방백들이 그녀에게 돈을 주고 삼손을 넘기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고만 말할 뿐,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어제까지 한 여인 때문에 그 많은 일을 겪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야 할 텐데, 삼손은 또 다른 여인을 찾고 또 찾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지 못하면 사람은 다른 것으로 자기를 채우려 합니다. 삼손은 여인으로,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쾌락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그럴수록 그것이 우리를 결박하여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말씀으로, 또한 기도로 채워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5절에서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들릴라를 찾아옵니다. 블레셋은 다섯 성읍의 방백들이 다스렸습니다. 그들이 삼손을 꾀어서 그 큰 힘이 무엇으로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아내라고 합니다. 그러면 각각 은 천백 개씩을 주겠다고 합니다. 다섯 방백이면 은 5,500개, 엄청난 돈입니다. 블레셋은 그만한 돈을 들여서라도 삼손을 없애는 것이 이득이라고 보았습니다.
꾀어서라는 말은 14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네 남편을 꾀어 수수께끼를 알아내라고 할 때 쓴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삼손을 바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하려 합니다. 철저히 욕보이고 싶을 만큼 복수심에 불타 있었습니다.
들릴라는 돌려 말하지도 않고 바로 묻습니다. 6절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블레셋 방백들이 한 말 그대로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포상금을 타는 수단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삼손이 제정신이었다면 이 질문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차렸어야 합니다.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7절에서 삼손은 마르지 않은 새 활줄 일곱으로 결박하면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아질 것이라고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8절에서 방백들이 활줄을 가져오고 들릴라가 삼손을 결박합니다. 9절에서 이미 사람들이 방 안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다고 외치자 삼손은 그 줄을 불탄 삼실 끊듯이 끊습니다. 그의 힘의 근원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가사에서는 성 밖에 숨은 매복을 뚫고 나간 삼손이, 이번에는 대적이 바로 방 안에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삼손의 눈이 멀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 본문에서 삼손이 붙잡혀 가장 먼저 당하는 일이 눈을 뽑히는 일입니다.
10절에서 들릴라는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거짓말을 했다며 다시 묻습니다. 삼손은 쓰지 않은 새 밧줄로 결박하면 약해질 것이라고 대답하고, 들릴라가 새 밧줄로 결박하지만 삼손은 팔 위의 줄을 실 끊듯이 끊습니다. 이때도 사람들이 방 안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들릴라가 자기를 블레셋에 넘기려 한다는 것을 두 번이나 겪고도 삼손은 그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들릴라도 포기하지 않고 묻자 삼손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3절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처음으로 머리털 이야기가 나옵니다. 들릴라는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짭니다. 바디는 베틀에서 씨실을 쳐서 천을 촘촘하게 짜는 도구입니다. 삼손은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냅니다. 이번에도 힘은 그대로였지만, 삼손의 대답은 점점 말해서는 않되는 비밀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삼손은 그 질문을 처음부터 끊었어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무엇을 가까이하며 사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과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살아야 할 나실인이었지만, 세상과 쾌락과 여인을 가까이했습니다. 그 큰 힘을 가진 사람을 무너뜨린 것은 더 큰 힘이 아니라 한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 둔 작은 유혹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힘입니다. 그 힘을 스스로 내려놓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또한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무엇인가에 눈이 멀면 사람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갑니다. 삼손은 여인에게 눈이 멀었고, 오늘 많은 사람은 돈과 권력과 욕심에 눈이 멀어 삽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면 말씀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말씀이 쉽지 않아도 붙잡고 묵상하며, 말씀으로 서로를 세워 갑시다.
2026.10.01 | 매일성경
●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3절)
어제 본문에서 삼손은 결혼 잔치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해 답을 알아냈고,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여 그 옷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심히 노하여 아내를 두고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삼손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 일어난 일입니다.
1절에서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아내를 찾아갑니다. 아내를 두고 떠났던 일을 풀고 화해하려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장인은 삼손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2절에서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네 친구에게 주었으니 대신 그의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삼손이 말합니다. 3절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삼손의 분노가 장인이 아닌 블레셋을 향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아내를 협박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보복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먼저 낸 사람은 삼손이었습니다. 삼손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남의 탓만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약속된 나실인이었지만, 삼손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매고 두 꼬리 사이에 홰를 하나씩 답니다. 홰는 횃불입니다. 5절에서 홰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넣습니다.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가 다 탔습니다. 밀을 거두는 때였으니 한 해 농사가 다 사라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누가 이 일을 했느냐고 묻고,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 장인 때문에 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살랐습니다. 14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아내를 협박했습니다. 아내는 그 일을 피하려고 삼손 앞에서 울며 답을 알아냈지만, 결국 그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보복이 보복을 부르고 있습니다.
7절에서 삼손은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입니다. 많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 머뭅니다. 지금 삼손은 개인의 분노와 복수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치고 있는 대상은 블레셋입니다. 이상한 방식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한 사람의 분노지만, 그 밑에는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흐르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은 눈엣가시입니다.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유다지파를 이용합니다. 11절에서 유다 사람 3000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 삼손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이 잡으러 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입니다.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상대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블레셋인데, 유다는 자기 편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누가 적인지도 모르게 된 이스라엘의 형편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말합니다. 11절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래 지배를 받다 보니 유다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죄의 영향 아래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래되면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여기며 익숙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래 무엇인가에 매여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삼손은 동족인 유다 사람들에게 결박당합니다. 13절에서 그들은 결단코 죽이지 않겠다고 하고 새 밧줄 둘로 삼손을 결박해 바위 틈에서 끌어냅니다. 새 밧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줄이고, 그것도 두 겹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18절)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마주 나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떨어졌습니다. 15절에서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입니다. 한 사람이 천 명을 죽이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한 일인데 삼손은 내가 했다고 말합니다. 17절에서 턱뼈를 던지고 그곳을 ‘라맛레히’라 이름합니다. “턱뼈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이룬 일을 기념하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서 상황이 바뀝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13장부터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삼손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방금 전까지 내가 천 명을 죽였다고 하던 삼손이, 목이 마르고 나서야 이 구원을 베푸신 분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턱뼈로 언덕을 쌓을 만큼 강한 사람도 목마름 하나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물이 솟아납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합니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습니다.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17절의 라맛레히가 삼손이 자기 공을 기념한 이름이라면,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이름입니다. 20절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때에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사사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별다른 변화없이 계속해서 블레셋의 압제를 당했습니다. 삼손이 사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유다는 지배받는 것에 익숙해져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랐고, 삼손은 힘이 있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부르짖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주소를 바로 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우리 삶의 문제와 어려움과 연약함을 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터뜨려 주십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이렇게 산다는 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아래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을 이어 가고 계셨습니다. 우리 인생과 가정과 공동체가 너무 어둡고 혼란해서 끝났다고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2026.09.30 | 매일성경
●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1절)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지도 않았는데 마노아의 가정을 찾아오셔서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약속대로 삼손이 태어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으며,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13:24-25절). 이제 이 어두운 시대에 삼손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지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기대를 깨는 삼손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삼손은 딤나에 내려갑니다. 딤나는 본래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었지만 아직 차지하지 못해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곳입니다. 삼손이 할 일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본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1절에서 “한 여자를 보고”, 2절에서 부모에게 “한 여자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3절에서 삼손은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원문으로 보면 “그 여자가 내 눈에 옳다”는 말입니다. 7절에서도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사사기가 그 시대를 두고 되풀이하는 말, 곧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17:6,21:25절). 삼손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방 사람을 가까이하다 보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게 되고, 결국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삼손에게 그 말씀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내 눈에 좋은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말합니다. 3절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부모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잉태되어 태어났으며,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듣지 않고,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라고 부모에게 명령하듯 말합니다. 한 여자에게 눈이 멀어 하나님이 주신 사명도, 부모의 말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절이 뜻밖의 말을 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치려고 이 여자를 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삼손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좋은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통해서도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그 뜻을 이루어야 할 백성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포도원에 이릅니다. 포도원은 포도주와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나실인은 포도주를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그 근처를 서성입니다. 거기서 젊은 사자가 삼손을 보고 소리를 지릅니다. 6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습니다. 지금까지 여호와의 영이 사사에게 임하면 사사는 대적과 싸워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사자를 찢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사자의 주검을 보니 벌 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9절에서 삼손은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부모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유혹일수록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삼손은 거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넘어갔고, 부모까지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9절)
10절에서 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가고, 삼손은 거기서 잔치를 베풉니다. 그 시대 잔치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지만 삼손은 그렇게 살 생각이 없었습니다. 11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십 명을 데려와 삼손의 친구로 삼아 함께하게 합니다.
삼손은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잔치하는 이레 동안 풀면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고, 풀지 못하면 그들이 같은 것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상당한 액수를 걸었습니다. 수수께끼는 이것입니다. 14절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자기가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먹은 일입니다. 자기만 본 일을 두고 낸 수수께끼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맞히겠습니까? 그들은 사흘이 되도록 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합니다. 남편을 꾀어 답을 알아내지 않으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합니다. 16절에서 아내는 삼손 앞에서 울며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7절에서 아내가 잔치하는 칠 일 동안 울며 강요하자, 삼손은 결국 일곱째 날에 답을 알려 주고 아내는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알려 줍니다.
18절에서 성읍 사람들이 답을 말합니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어쨌든 수수께끼의 정답을 말한 것입니다. 약속대로 옷을 주어야 합니다. 19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은 블레셋 땅 아스글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그 옷을 빼앗아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줍니다. 그리고 심히 노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갑니다. 혼자서 30명을 죽일 만큼 큰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이 주신 그 능력을 삼손은 자기 분노를 푸는 데 썼습니다. 6절도, 19절도 그렇습니다.
20절에서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일은 뒤에 더 큰 문제로 이어집니다. 삼손의 모습은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으로 선택받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셨지만, 그 은혜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욕망과 이익을 위해 썼습니다. 사사기는 삼손을 통해 그 시대 이스라엘의 영적인 형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시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내 눈에 좋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삼손은 구별된 사람으로 태어나 여호와의 영이 함께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시다.
또한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삼손도, 그 여인의 집도, 블레셋 사람들도 성숙하지 못하니 문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성숙하지 못하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문제 속에서 살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성숙한 신앙이 내 삶에 안정감을 주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복되게 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어 갑니다.
2026.09.29 | 매일성경
●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18절)
어제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나실인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마노아가 그 사람을 다시 보내 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은 들으셨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이번에도 아내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마노아에게 여인에게 한 말을 다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뒤에 여호와의 사자와 마노아 부부 사이에 오간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처럼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노아의 집에 찾아온 분은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마노아는 그분을 말씀을 전하는 사람 정도로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16절 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마노아가 말합니다.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그 시대에는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자녀가 없던 집에 아들을 약속하고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마노아는 그를 잘 대접하고 싶었고, 곁에 머물게 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대답합니다.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네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절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나를 대접하려 하지 말고 여호와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붙잡아 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켜야 할 말씀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어두워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회복의 출발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설 때 다른 모든 부분의 회복이 시작됩니다.
마노아가 다시 묻습니다. 17절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약속이 이루어지면 그 이름을 기억하고 높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마노아는 여전히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노아만의 모습이 아니라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대답합니다. 18절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기묘자는 놀랍고 기이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이름을 알려 준 것이 아니라, 네가 알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노아는 이름을 알아 두고 사람을 높이려 했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사람이 붙잡아 둘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 삼손이라 하니라”(24절)
마노아는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립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이적이 일어났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기이한 일을 행하셨다는 뜻이고, 18절의 기묘자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기묘자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다음 절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20절에서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갑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본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제물을 받으시는 분이 누구시며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분명해졌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마노아는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았습니다. 마노아가 아내에게 말합니다. 22절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여호와의 사자였다면 자기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으로만 알았을 때는 대접하려 했는데, 누구신지 알고 나니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아내가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다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않으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죽으면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내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신 말씀으로 판단했습니다. 아내가 참 지혜롭습니다.
24절에서 그 여인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합니다. 삼손은 태양이라는 말에서 온 이름으로, 작은 태양이라는 뜻으로 풀기도 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25절에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사사들과 함께하셨던 여호와의 영이 삼손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13장에서 이 모든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셔서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어머니에게 한 번, 아버지에게 또 한 번 알려 주셨습니다. 약속대로 삼손이 태어났고,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으로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삼손이 나실인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삼손의 책임입니다. 받은 은혜와 사명을 잊고 사는 삼손의 모습은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가장 어두운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어두울 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도 의지할 사람이 없고 형편이 너무 힘들고 누구도 내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때 찾아오셔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사람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곁에 붙잡아 두려 했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2026.09.28 | 매일성경
●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3절)
사사기에는 열두 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어제 본문까지 우리는 열한 명의 사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유명한 삼손입니다. 13장부터 삼손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집니다. 삼손 하면 들릴라가 먼저 떠오르지만,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전체의 흐름 안에서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사사기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악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1절 하반절에서 드러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사사기에서 이방 민족의 손에 넘겨진 기간 가운데 가장 긴 시간입니다. 그만큼 죄악이 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고통을 당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13장에는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40년 동안 블레셋의 지배를 받으며 그 삶에 익숙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있었습니다.
이어서 소라 땅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삼손의 아버지입니다. 마노아라는 이름은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노아는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나라는 블레셋의 압제 아래 있었고, 집안에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큰 아픔이었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부르짖지 않고, 한 가정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입니다.
3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납니다. 아무도 부르짖지 않는데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지 않는 백성을 위해서도 먼저 한 가정을 찾아가시고, 그 가정을 통해 구원자를 보내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였습니다. 본문에 남편의 이름은 마노아로 나오지만 아내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남성 중심의 그 시대라면 하나님의 사자가 남편에게 나타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아내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담겨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조심할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태 안에 주실 새 생명을 위해 술을 마시지 말고, 율법이 부정하다고 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머리를 깎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나실인은 스스로 서원하고 정한 기간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아야 합니다(민6장). 그런데 삼손은 태에서부터 하나님이 구별하셨고,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나실인과 다른 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왜 이런 방식으로 구원자를 보내실까요? 한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태어나기 전부터 구별된 사람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삼손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이었습니다. 이방인과 다르게 살아야 할 백성이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뒤에 나실인 삼손이 부정한 일을 가리지 않고 이방 여인을 가까이하는 모습은 바로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여인은 남편에게 가서 내용을 전합니다.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웠다고 말합니다. 7절에서 여인은 들은 말을 전하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한 말과 비교하면 빠진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는 말입니다. 왜 빠뜨렸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집에서 태어날 아이가 이 형편에서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14절)
8절에서는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다시 오게 하셔서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가르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을 믿지 못했다기보다 자기가 직접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노아에게는 이 일을 자기가 이끌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9절에서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은 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임한 곳은 이번에도 여인이 밭에 앉아 있을 때였고,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아내를 중심에 세우고 일하십니다. 10절에서 여인이 급히 달려가 남편에게 알리고, 11절에서 마노아가 아내를 따라가 그 사람에게 이릅니다.
12절에서 마노아가 묻습니다.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그런데 13절과 14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새로운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며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키라고 하십니다. 마노아는 새로운 것을 듣고 싶었지만, 필요한 말씀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미 주신 말씀을 지키는 것이 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우리가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인 나실인입니다. 이스라엘처럼 그것을 잊고 세상에 익숙해지지 말고, 세상과 다르게 말씀 중심으로 살아갑시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한 말은 그 시대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두운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 길은 새로운 무엇을 찾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