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0 | 매일성경
● “두로에 관한 경고라”(1절)
이사야 13장부터 오늘 본문까지, 하나님은 여러 나라를 향한 심판을 이어 오셨습니다. 그 첫 나라가 바벨론이었고, 오늘 두로가 그 열방 심판의 마지막입니다. 이런 구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론은 세상 나라의 대표로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 곧 세상의 ‘힘’을 상징했습니다. 두로는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쌓은 나라, 곧 세상의 ‘풍요’를 대표합니다. 열방 심판이 힘으로 시작해 풍요로 끝납니다. 세상이 의지하는 두 가지, 힘과 풍요가 다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1절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다시스의 배는 먼 거리를 오가며 무역하던 큰 상선을 가리킵니다. 그 무역의 중심에 두로가 있었습니다. 두로는 바로 옆 시돈과 함께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 성경에 두 이름이 짝을 이루어 자주 등장합니다.
두로는 이스라엘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다윗과 우호를 맺었던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기술자와 백향목을 보내 도왔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을 도왔던 그 두로가 이제 심판을 받습니다. 1절 중간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다” 풍요의 상징이던 도시가 순식간에 폐허가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깃딤, 곧 지중해 건너 먼 섬에까지 전해집니다. 그토록 견고하던 무역 도시의 몰락이 온 바다에 충격으로 퍼집니다.
두로가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 3절에 나타납니다.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시홀과 나일은 애굽의 강입니다. 애굽에서 나는 곡물을 배로 실어 날라 여러 나라에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두로는 ‘열국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곡식이 필요한 나라들이 다 두로를 거쳐야 했으니, 그 부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그 풍요가 무너지자, 4절에서 두로는 자식을 낳지도 기르지도 못한 여인에 비유됩니다. 번성의 상징이던 도시가 생산이 끊긴 불모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5절, 이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애굽도 고통받습니다. 곡물을 실어 나르던 판로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몰락이 무역으로 얽힌 이웃 나라에까지 파장을 미치는 것입니다.
7절은 두로의 옛 영광를 회고합니다.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무역으로 풍요와 향락을 누리며, 먼 곳까지 다니며 식민지를 세우던 그 도시가 이렇게 무너졌느냐는 탄식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도시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몰락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8절 “면류관을 씌우던 두로, 그 상인들은 고관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라 이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면류관을 씌우던’이라는 표현이 두로의 위세를 보여줍니다. 두로는 여러 지역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고 거기에 왕을 세워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왕을 세우고 폐하는 권세를 부리던 나라입니다. 그 상인들은 한 나라의 고관에 견줄 만한 존귀한 자들이었습니다.
이토록 위세 등등하던 두로를 누가 무너뜨렸습니까. 9절이 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두로의 몰락은 우연이나 국제 정세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없이 쌓은 영화를 욕되게 하시고, 스스로 주인 되어 교만하던 자를 낮추시려는 것입니다.
11절은 하나님의 열방 다스리심을 다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서 열방을 흔드시며” 사람의 눈에는 강대국이 세상을 이끌고 그 질서가 영원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바다 위에까지 손을 펴서 열방을 흔드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무역 제국도, 하나님이 손을 펴시면 흔들립니다. 결국 무너집니다. 우리 의지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17절)
12절은 학대받는 처녀 딸 시돈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갈지라도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앞서 두로의 몰락 소식이 전해졌던 그 먼 섬 깃딤으로 피신해 가도, 거기서 평안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안전해 보이는 장소에 머문다고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이 없는 곳으로 몸을 옮긴다고 평안이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러니 좋은 장소 혹은 좋은 상황이 아닌 좋으신 하나님을 구하고 함께 합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15절부터 ‘칠십 년’이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두로가 칠십 년 동안 잊힌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칠십 년은 사람들이 두로를 완전히 잊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정하신 기한이 차자 두로를 다시 돌보십니다.
16-17절은 그 회복을 잊혔던 기생이 다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기억에 오르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는 두로의 무역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그린 것입니다. 무역하는 도시가 이익만 좇아 어디든 오가는 모습, 기준 없이 값을 받는 기생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회복된 두로의 무역 소득이 예전처럼 쌓이고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히 여호와께 구별되어 그분 앞에서 섬기는 자들의 양식과 옷감이 됩니다. 세상의 풍요를 상징하던 두로의 부가,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 소득이 어떤 경로로 하나님께 바쳐지는지 본문이 자세히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풍요마저 결국 당신의 뜻과 백성을 위해 돌리시는 주권자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마지막 모습은 두로를 향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남유다를 향한 말씀입니다. 두로가 겪은 칠십 년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시간을 지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회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남유다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남유다도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겪겠지만, 그 고통의 끝에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두로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그 길을 미리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의 힘과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열방 심판의 처음은 힘의 나라 바벨론이었고 마지막은 풍요의 나라 두로였습니다. 세상은 힘과 풍요를 따라 움직이고, 우리 마음도 그리로 쏠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힘과 풍요를 손 안에 쥐고 흔드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무너짐을 통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두로조차 칠십 년 후에 돌보시고, 마침내 그 소득을 하나님께 돌리는 나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8.07 | 매일성경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21절)
어제 하나님은 애굽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심판이 끝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시는 것은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을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는지, 그리고 이 이야기가 사실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날에’라는 말이 여섯 번 반복됩니다(16,18,19,21,23,24절). 이사야에서 ‘그날’은 때로 심판의 날이지만, 오늘은 회복의 날입니다. 16-17절이 그 회복의 첫 장면입니다. “그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강대국 애굽이 연약한 여인처럼 떤다는 것인데, 무엇을 보고 떨까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애굽을 떨게 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군대가 아니라 그 위에 얹힌 하나님의 손입니다. 더 니아가 17절은 유다의 땅이 도리어 애굽에 두려움이 된다고 합니다. 국력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 두 나라인데 그 관계가 뒤집히는 것은, 유다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이라고 합니다.
18절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이 가나안 방언, 곧 하나님 백성의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 강대국의 언어를 약소국이 배우는 것이 상식인데, 도리어 애굽이 하나님 백성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중심지가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19절 “그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제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이고, 기둥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표시하는 표지입니다. 이 두 단어는 창세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불렀고,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며 기둥을 세웠습니다. 곧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며 제단과 기둥을 세웠던 그 일이, 이제 애굽 땅에서 재현됩니다. 이사야는 창세기의 언어를 빌려, 이방 애굽이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날을 그리고 있습니다.
20-21절은 또 다른 성경의 그림을 가져옵니다. 애굽이 압박하는 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 건지시고, 마침내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로 경배합니다. 이것은 사사기의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이방의 압제를 받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 곧 구원자를 보내 건지시던 그 패턴이, 이제 애굽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제단과 기둥이 창세기의 그림이라면, 구원자의 부르심은 사사기의 그림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애굽에서 되풀이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22절이 이 단락의 핵심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치심(마카)과 고침(라파)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기록됩니다. 하나님의 치심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고침이 목적입니다. 우리 향한 하나님의 손길도 동일합니다.
●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24절)
23-25절에서 하나님의 회복은 상상을 넘어섭니다.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놓이고, 서로 대적하던 두 나라가 그 길로 오가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첫 범죄 이후 가장 먼저 깨진 것이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남편과 아내, 그리고 형제의 관계가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회복은 그 깨진 관계를 회복하여 원수 되었던 나라들을 한 예배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25절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이 선언은 파격적입니다. ‘내 백성’과 ‘내 기업’은 본래 이스라엘에게만 쓰이던 칭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 삼았던 애굽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잔인한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것’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한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온 열방을 향한다는 것, 훗날 신약에서 이방인이 ‘내 백성’이라 불리는 그 복음이 여기 이미 씨앗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선포의 진정한 방향은 애굽이 아니라 유다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 된 애굽조차 치시고 고쳐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라면, 자기 백성을 치실 때의 마음은 얼마나 더 간절하겠습니까.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 역시, 무너뜨림이 아니라 돌이켜 고치시려는 사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20장에 오면 그 영광스러운 미래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납니다. 앗수르 사르곤 왕이 블레셋의 아스돗을 점령하던 때(주전 711년경), 앗수르의 세력이 한창 뻗어 가던 시절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이 아니라 몸으로 예언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행위 예언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베옷과 신을 벗고 삼 년을 다니게 하시는데, 벗은 몸은 포로로 끌려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사로잡혀 벗은 몸으로 끌려가 수치를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말로 해도 듣지 않는 백성에게, 이사야가 자기 몸으로 삼 년을 그 경고를 새겨 보인 것입니다.
5-6절이 그 경고의 초점을 드러냅니다.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던 자들이 그 몰락을 보고 “우리가 믿던 나라,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피하리요” 하며 부끄러워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바라고 의지한 자의 끝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열방 이야기가 결국 유다를 향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흔들리지 않는 인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강대국 애굽이 흔들린다는 것은 세상의 부한 자도 강한 자도 다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약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인생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애굽이 마침내 흔들림을 멈추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것처럼, 참된 견고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애굽조차 치시고 고쳐 돌아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백성을 향한 마음은 얼마나 더 간절하겠습니까.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길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2026.08.06 | 매일성경
●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1절)
하나님이 유다를 둘러싼 나라들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계속 말씀하십니다. 어제는 북쪽의 아람과 북이스라엘이었다면, 오늘은 남쪽의 나라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노예 생활하던 애굽, 그리고 그 너머 구스, 오늘날의 에디오피아입니다.
1절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그 당시 구스는 애굽을 정복해 왕조를 이룰 만큼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은 무역선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 나라가 강하고 무역이 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구스 사람들이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민첩한 사절들을 여러 나라로 보냅니다. 이유는 앗수르가 점점 부강해지자 자기 힘으로는 안 되니 여러 나라와 손잡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절들을 향해 “너희 백성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2절이 복잡해 보이지만 의미가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사14:32절과 같습니다. 거기서도 블레셋이 사신을 보내 “서로 손잡고 앗수르를 대적하자”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고 답하게 하셨습니다. 앗수르를 이기는 것은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온을 견고케 하심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돌려보내라 하신 그 구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2절에 나옵니다. “장대하고 준수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강성한 백성”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손잡고 의지하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돌려보내라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강한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손잡고 싶어 하는, 든든해 보이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으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3절은 하나님이 산들 위에 깃발을 세우시고 나팔을 부시는 날이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승리의 나팔을 부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승리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4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하리니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세상은 어디를 의지할지 몰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하나님은 그 처소에서 조용히 세상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경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 같고 잠잠히 감찰만 하시는 것 같은데, 그 잠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놀랍게 이루어집니다. 5절 보면 추수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익어갈 때 하나님이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고 퍼진 가지를 찍어 버리십니다. 누구도 물리치지 못할 것 같던 앗수르를, 하나님이 이렇게 순식간에 찍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2절에 나왔던 그 장대하고 준수하고 강성한 백성이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산에 이르리라” 처음 남유다에 올 때는 “손잡고 앗수르를 대적하자”며 왔던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앗수르를 심판하시고 뜻을 이루시니, 이제 예물을 들고 하나님을 경배하러 시온에 오는 것입니다. 유다가 의지하려던 그 나라가, 도리어 하나님 앞에 경배하러 옵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만나면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의지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것 의지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를 주시겠다고. 앗수르처럼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문제도, 하나님이 손대시면 하루아침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해결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19:3절)
19:1절부터는 애굽에 대한 내용입니다. 1절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애굽은 우상을 숭배했고, 특히 왕인 바로를 신의 아들로 여겨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임하시니 그 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고, 자기들이 대단하다 여기던 애굽인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앞에 엎드리고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2절은 그렇게 든든하던 애굽이 무너져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성읍이 성읍을, 나라가 나라를 치는 내분에 빠집니다. 3절 애굽인의 정신이 쇠약해지고 하나님이 그 계획을 깨뜨리시니, 그들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묻습니다. 애굽이 그 큰 나라를 이룬 기초가 이런 미신과 우상이었는데, 하나님이 임하시니 그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실 때 가장 먼저 어디를 치십니까. 5-10절까지 반복되는 말이 바닷물, 강, 나일입니다. 애굽의 부강을 이룬 것이 나일강이었는데, 하나님이 그 강을 가장 먼저 치십니다. 바닷물이 없어지고 강이 잦아 마릅니다. 강에서 악취가 나고 강물이 줄어듭니다. 경제가 통째로 무너집니다. 어부들이 탄식하고, 그물 던지는 자들이 슬퍼하며, 세마포 만드는 자들까지 낙심합니다. 애굽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11-15절은 애굽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애굽은 부강하면서 자기 지혜를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지혜자들이 있으니 우리나라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혜’라는 말이 이 단락에 반복됩니다. 그러나 13절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로 세운 나라가, 하나님이 한 번 손대시니 와르르 무너집니다.
특히 14절이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을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애굽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고의 지혜로 곧바로 잘 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지혜를 도리어 사용하셔서, 그들이 그 지혜 때문에 엉뚱한 길로 가고 결국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무너지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결과가 이렇습니다. 지혜라 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우리의 일상이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 나는 내 생각대로 합니까, 말씀대로 합니까. 말씀을 알면서도 자기 생각대로 가곤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곧 비틀거리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말씀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장대하고 준수하고 강성한 것을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과 두려움에 이리저리 요동할 때, 하나님은 그 처소에서 조용히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 삶에도 여러 일이 밀려오지만, 우리도 하나님처럼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반드시 능력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2026.08.05 | 매일성경
●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4절)
열방을 향한 심판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앗수르, 블레셋, 모압을 다루셨다면, 오늘은 유다 북쪽에 있는 다메섹, 곧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 뜻대로 운행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1절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입니다. 3절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리라”고 나오는데,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이 아람과 북이스라엘 두 나라를 함께 책망하십니다.
이 두 나라는 앞서 7장에서 서로 동맹을 맺고 남유다를 공격했던 나라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고 연합했던 그 두 나라를, 이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다메섹은 그 당시 무역의 중심으로 부강하고 견고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메섹이 성읍조차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된다고 하십니다. 어제 모압도 그랬듯이, 지금 보기에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것도 하나님이 손대시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4절부터 북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날에’라는 말이 반복됩니다(4,7,9). 세상이 하나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손대시는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4절 “그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완전히 쇠하고, 살진 몸이 파리하게 마른다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다 멸망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아세라 상과 태양상을 만들어 숭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풍요롭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풍요를 원했던 그들의 몸이 도리어 파리하게 말라 갑니다. 하나님 없는 풍요는 잠깐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6절 말씀이 놀랍습니다. 완전히 말라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북이스라엘에도 무엇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남아 있다’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감람나무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열매 두세 개가 남고, 무성한 나무의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토록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북이스라엘인데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 남은 자를 남겨두십니다. 그 남은 자를 통해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서도 반드시 긍휼을 베푸시고 남겨두시는 분입니다.
7절 “그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심판이 임하자 그제야 북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선지자를 보내 “그렇게 살면 안된다, 어서 돌아오라” 하셨는데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선지자들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 나라가 멸망한 뒤에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돌이켰다면 어떠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새벽마다 말씀을 듣고 매일 묵상하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지자를 보내 외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7절과 8절에 대조가 나타납니다. 7절은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8절은 정반대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과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 목상과 태양상”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보다, 자기 손으로 짓고 만든 우상을 더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심판과 멸망의 길입니다.
지금 우리는 손으로 아세라 상을 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들지 않았어도,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더 가득한 것이 있다면, 성경은 그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내 손으로 만든 우상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13절)
9절 보면 북이스라엘도 한때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부강함은 잠깐이었습니다. 결국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림받은 수풀 속 처소처럼 황폐하게 됩니다. 여기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림받은”이라는 말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곳은 견고하며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죄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도 이 땅에서 죄악 가운데 거하면, 내 백성이라도 가나안처럼 무너뜨리겠다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이 지금 그대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10절이 그 이유입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경제나 군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반석’이라는 말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붙드시는 그 하나님을 두고, 다른 것을 의지하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능력의 반석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12절부터 보여줍니다. 12, 13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소동’과 ‘충돌’입니다.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려고 얼마나 소동하고 충돌하는지 모릅니다. 12절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남유다를 공격하는 열방의 위세가, 거대한 파도가 남유다를 집어삼킬 듯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밀려오는 문제의 파도와도 같습니다.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집채만 한 파도로 달려들면, 우리는 너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열방이 많은 물이 몰려오듯 쳐들어올 때 누가 개입하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13절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하나님이 그 거대한 파도를 한마디로 꾸짖으십니다. 그 한마디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처럼 흩어져 사라집니다. 그토록 우리를 삼킬 것 같던 것이, 하나님의 한마디에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능력의 반석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14절이 답합니다.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훗날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와 남유다를 포위하고 위협했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고,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를 치셨습니다. 성경은 그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밤사이 죽어 아침에 다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저녁의 두려움이 아침이 오기 전에 티끌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능력의 반석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손으로 만든 우상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풍요를 좇아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을 의지하다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손으로 깎지는 않았어도,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주관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 하나님을 마음의 첫자리에 두고 신뢰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의 파도가 한꺼번에 달려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대한 파도를 말씀 한마디로 겨처럼, 티끌처럼 흩으시는 능력의 반석이십니다. 저녁의 두려움을 아침이 오기 전에 사라지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2026.08.04 | 매일성경
●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1절)
어제에 이어 오늘도 모압을 향한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압이 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무너지는 세상 한복판에서 무엇이 홀로 굳게 서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산으로 보낼지니라” 이사야가 하는 말이니 ‘이 땅 통치자’는 유다의 통치자입니다. 이것은 모압이 유다의 통치자에게 어린 양을 조공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모압의 양들을 셀라에서 광야를 지나 시온산으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왜 모압이 시온산으로 양을 바칩니까. 어제 14:32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의 때가 되면 온 세상이 무너지는데, 오직 시온만이 굳게 서서 피난처가 됩니다. 그러니 모압 사람들이 곡물과 양을 바치며 “제발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2절은 그 피난의 다급함을 보여줍니다.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여인들이 배를 타고 도망가야 하는데, 사람이 많으니 나루터가 혼란에 빠집니다.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흩어진 새 새끼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떠도는 모습입니다. 한때 부강하고 번성했던 모압이 순식간에 무너지니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3-4절 앞부분에서 모압은 유다에게 간절히 청합니다.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겨 달라”는 것은, 지금 대낮 같은 죽음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으니 그늘진 피난처로 숨겨 우리를 살려 달라는 절박한 호소입니다. 그런데 4절 중간부터 상황이 바뀝니다.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토색하는 자가 망하고, 멸망시키는 자가 그치고, 압제하는 자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머지않아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세상 곳곳이 다 무너집니다. 한때 강하고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나라들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그런데 무너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던 다윗의 장막이 굳건히 세워집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다윗의 장막이야말로 연약하고, 다른 나라들의 왕위가 굳건해 보이는데, 정반대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 나라가 강한가요 아니면 하나님 나라인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세상 나라가 강해 보이고 영원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그것이 진정한 견고함이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견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때로 흔들리고 연약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나라가 견고함을 믿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고 말씀을 붙드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점점 더 견고케 하십니다.
이 다윗의 장막에 앉은 이가 “충실함으로 판결한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익에 따라 움직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세워지는 왕위는 메시아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는 충실함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십니다. 곧 모압이 흔들리는 이 심판의 한복판에서 다윗의 장막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그것이 진정한 안정과 행복이며, 하나님 없는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6절)
그러면 모압은 왜 멸망합니까. 6절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한 절 안에 교만, 거만, 교만, 분노, 자랑이 이어집니다. 모압이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교만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7절부터의 모압 이야기에는 통곡과 눈물이 계속 반복됩니다. 한때 영광스럽던 나라가 완전히 무너진 것을 본문은 ‘포도’로 설명합니다.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고, 세상 곳곳으로 뻗어 나가던 그 좋은 가지가 꺾였습니다. 포도가 모압의 영광이었는데, 그것이 사라진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이렇습니다. 순식간에 있다가도 사라집니다.
그런 모압을 향해 9절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누가 우냐면 하나님이 우십니다. 또한 9절 하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라” 모압을 위하여 우시는 하나님, 모압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나라를 심판하시면서도 하나님이 이토록 애통하며 우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는 어떠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애끓는 마음으로 자기 백성이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우리를 보며 애통해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야,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문제 앞에서 그렇게 두려워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는데,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닌데 왜 그렇게 주저앉아 있느냐” 하시며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도 눈물 흘리시고 아파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또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9절 끝 “즐거운 소리가 그치고”, 10절 “즐거움과 기쁨이 떠나고”,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고”,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한때 모압은 하나님 없이도 너무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억압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허탄한 것에 얽매여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기기에,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없는 기쁨은 영원하지 않아 순간 있다가 사라지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붙들고 누리는 기쁨은 어느 쪽입니까. 사라질 순간의 기쁨입니까, 영원한 기쁨입니까.
12절이 다시 우상의 헛됨을 보여줍니다.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으리로다” 모압이 어려움을 만나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자기 신을 향해 울부짖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비록 피곤하여 부르짖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약속하신 것이 있어 반드시 이루시고 회복시키시며, 영원하고 굳건한 왕위를 세워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때 즐겁고 기쁘며 영원할 것 같지만,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굳건히 세워지고 메시아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우리도 세상 나라 속에 살지만,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붙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시다.
다른 하나는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모압이 무너진 것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겸손하게,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처럼 견고케 하시고 복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