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1:15-25절/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6.04.08)

우리는 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찾아오셔서 제자들의 빈배를 채워주시고, 또한 그들의 허기진 배를 따뜻한 숯불과 식탁으로 채워주신 은혜를 묵상했습니다.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난 고요한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한 사람, 베드로를 향하십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식하는 21장 후반부는 철저히 실패하고 무너졌던 제자 베드로를 주님께서 어떻게 다시 회복시키시고, 영광스러운 사명의 자리로 부르시는지를 따뜻하게 보여줍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15,16,17). ‘시몬’은 베드로의 원래입니다. 예수님을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반석)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한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주님을 따르겠다며 굳건한 ‘반석’(베드로)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실패 이후,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을 반석이라 자부할 수 없는 연약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에게 원래의 이름인 ‘시몬’이라 부르시며, 네 힘과 결심으로는 결코 반석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와 함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 깊은 상처와 자괴감을 깨끗하게 치유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너는 왜 나를 배신했느냐”고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으시고, 그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실패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결국 ‘사랑의 문제’였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의 베드로는 자기 열심과 자기 기준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참 사랑을 경험한 지금, 그는 감히 자신의 사랑을 자랑하지 못하고 16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정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이기적인 기준과 방식만을 내세워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무조건적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 심령이 먼저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15절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영혼의 깊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들을 온전히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가 앞으로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예언하십니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자기 계획과 뜻대로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 팔을 벌려 원치 않는 십자가의 길로 이끌 것이라는 순교의 예언입니다. 그리고 19절 “나를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를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사명 앞에서, 베드로는 문득 곁을 있던 사도 요한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21절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유독 많이 받았던 저 제자의 미래는 어떨지 비교하고 궁금해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게 주신 십자가의 길,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집중하기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바라보며 비교하고 경쟁합니다. “나는 이렇게 수고하는데 저 사람은 왜 편안해 보일까?”, “나는 왜 저 사람보다 은사가 부족할까?”라고 하며 남과 나를 비교하고 경쟁하며 시기하는 마음은 주님을 따르는 길에 가장 치명적인 걸림돌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22절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의 사명이나 형편에 신경 쓰지 말고, 네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신실하게 감당하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은사와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타인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나를 부르신 주님만 바라보며 다른 지체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사도 요한은 이 모든 말씀이 참된 ‘기록된 증언’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이 더 있었지만 그것들을 다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기적이나 신비로운 표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지체들과 함께 나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영적 훈련입니다. 때로는 묵상하는 것이 버겁고 나누는 것이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된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나누는 매일의 영적 훈련이 차곡차곡 쌓일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에 흔들리지 않고 건강하고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라도 말씀의 자리를 소홀히 한 채, 당장의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기적만을 구하며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루, 내 힘과 능력을 다 내려놓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다가오시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온전히 거합시다. 비교와 경쟁의 시선을 거두고, 매일 내게 주어지는 생명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려, 주님이 걸어가신 그 생명의 길을 잠잠히 그리고 묵묵히 따라가는 복된 제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요한복음21:1-14절/빈 배를 채워주신 예수님(26.04.07)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입니다. 20장 끝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의 위대한 신앙 고백과 함께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나와있습니다. 마치 결론이 내려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21장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은 그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기뻐하는 데서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사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의 영광을 경험한 제자들이 앞으로 복음을 어떻게 세상에 전할 것인지, 그 사명의 중심에 누가 서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절)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얼마 후 디베랴 호수, 곧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많은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감격은 있었지만 아직 명확한 사명을 확신하지 못했기에 당장 눈앞의 생계는 이어가기 위해 익숙한 어부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3절 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년 동안 주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그들 손에 남은 것은 텅 빈 그물과 허탈함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배는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텅 빈 배처럼 깊은 공허함이 밀려오지 않는지요. 내 힘으로 채우려는 수고의 결과는 결국 밤이 새도록 애써도 빈 배일 뿐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인정도, 참된 평안도, 아름다운 열매도 맺힐 수 없습니다.

빈 배를 바라보며 허탈해하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6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했을 때, 무려 153마리의 많은 물고기가 잡히고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장면과 같습니다. 그 때도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빈 배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눅5:4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불러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첫사랑의 감격과 은혜를 잊고 현재는 주님을 부인했던 실패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잃었던 첫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회복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하시기 위해 세심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이 기적을 통해 가장 먼저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사도 요한입니다. 그가 “주님이시다!” 하고 외치자, 베드로는 벗고 있던 몸에 겉옷을 두르고 지체 없이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육지까지의 거리가 8절 “한 오십 칸쯤”된다고 하는데 90m정도의 거리입니다. 베드로는 그 거리를 헤엄을 쳐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 “와서 조반을 먹으라”(12절)

​육지에 올라온 베드로와 제자들을 맞이한 것은 주님께서 친히 차려놓으신 따뜻한 식탁이었습니다. 고요한 갈릴리 해변,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생선과 떡은 밤새 추위와 허기에 지친 제자들에게 위로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숯불’은 베드로에게 대제사장 안나스의 뜰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뼈아픈 실패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을 것입니다(요18:18절).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시며 그들의 텅 빈 마음과 주린 배를 온전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고기를 잡지 못해 ‘빈 배’를 채워주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은 제자들의 허기신 육신의 ‘빈 배’를 채워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빈 배”를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채움으로 다른 “빈 배의 인생”을 채우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차려주신 아침 식탁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떡과 물고기를 축사하시고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 자신을 요6:35절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육신의 배고픔을 넘어 영적인 허기입니다. 그 빈 배를 채워주실 분은 오직 하나,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님뿐입니다, 영적인 갈급함에 시달리는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사명이 이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히 채움을 받고, 세상 속에서 영적 기갈에 허덕이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물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사명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빈 배를 채워주고 영혼을 살리는 사명은 내 의지나 수고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은혜로 충만히 채워져야만, 지치지 않고 그 풍성함을 이웃에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또한 기도로 첫 사랑의 은혜와 감격을 회복하고 진리의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빈 배를 채우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합시다, 또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을 전하는 복된 하루가 됩시다.

요한복음 20:19-31절/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6.04.06)

안식 후 첫날, 주님 부활하신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요한은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참된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모여 있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예수님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절망을 평강으로 바꿔주십니다.

●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굳게 닫힌 문을 뚫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쳤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람과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첫마디는 정죄가 아니라, 19절 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이 말씀에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19,21,26). 치열하고 불안한 세상 속에서 진정한 평강은 내가 원한다고 노력해서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강은 주님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험난한 내 삶의 현장 한가운데 능력으로 함께하시며, 그 권능의 손으로 나를 굳게 붙들고 도우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할 때 비로소 누리게 됩니다.

평강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특이한 행동을 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숨을 길게 내쉬며 22절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흙의 먼지(원어로 ‘아파르’)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되게 하신 창조 사역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마치 에스겔 37장에서 골짜기에 가득했던 마른 뼈들에 여호와의 생기가 들어가자 거대한 군대로 살아났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내 지혜나 인간적인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 내 힘으로 감당할 때, 우리는 원망과 불평,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가득차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할 때, 비록 겉보기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 영혼에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벅찬 감격이 넘쳐나게 됩니다. 만약 주님의 일을 하면서 마음속에 기쁨 대신 불평이 피어오른다면, 그것은 곧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영적 신호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성령 충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찾아오사, 도마에게 친히 그 거룩한 상처를 보여주시며 27절 하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만난 도마는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28절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는 부르지만,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이 고백은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혼돈하고 어두웠던 세상을 새롭게 질서로 채우셨던 것처럼,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혼란스럽고 어두운 인생을 생명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도마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29절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곧 승천하십니다. 그렇다면 다가올 시대의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온전히 신뢰하는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보지 않고 믿을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신비로운 환상, 혹은 귀에 들리는 직접적인 음성을 보여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행하신 그 수많은 표적 중 오직 이 내용들만 선별되어 기록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31절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눈에 보이는 표적이나 체험에 의존하는 신앙이 아니라, 영원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발견하고 부활의 능력을 확신하는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가장 견고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급변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근심 때문에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두려움 가운데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활하사 우리 가운데 임하신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바라봅시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합시다. 기록된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삶 속에서 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됩시다.

요한복음19:28-30절/내가 목마르다(26.04.03)

●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28절)

​인간의 본성은 가장 힘들고 절망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 밑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생명이 끊어지는 십자가의 가장 극한 고통 속에서도 원망이나 저주가 아닌, 당신의 본성과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복음서 전체에 기록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말씀(가상칠언)’을 통해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묵상해 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기록하며 28절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19:24,18:32,9).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약에 예언된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목마른 예수님의 입에 적셔준 신 포도주가 ‘우슬초’에 매여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예수님께서 출애굽기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말씀의 성취입니다(출12:22절).

●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가상칠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말씀은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① 눅23: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상 첫마디는 용서와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② 눅23: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 십자가 좌우편에는 강도들이 달렸는데,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선행으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은혜로 얻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강도처럼 구원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즐기며 살다 죽음 전에 믿겠다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말입니다. 죽음 전에 그런 은혜가 주어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어 주인삼고 살아가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③ 요19:26-27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어제 살펴보았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혈연을 뛰어넘어 십자가의 사랑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영적 가족, 교회 공동체입니다.

④ 마27:46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두려워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고통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절규처럼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 고통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분이신데,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시고 분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리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⑤ 요19:28절 “내가 목마르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목마름을 느끼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영적 목마름을 가진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며,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음을 알게 합니다.

⑥ 요19:30절 “다 이루었다” 위대한 선언입니다.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죽음은 누가봐도 실패요 억울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을 완벽하게 성취하셨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동안 이 땅과 사람들들 지배하고 있던 사탄의 권세에 대한 승리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⑦ 눅 23:46절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셨습니다. 오신 목적 성취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

● “내가 목마르다”(28절)

​이 일곱 가지 말씀 중,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분입니다.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왜 십자가 위에서 그토록 타는 듯한 갈증을 겪으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갈구하며 영적인 목마름에 허덕이는 우리의 모든 절망을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극심한 목마름을 대신 당하셨기에, 비로소 우리는 해갈을 얻고 참된 영적 만족과 영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으며, 내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어떤 것들을 붙잡고 있습니까? 세상 것들로 갈증을 채우려는 시도는 마치 목마를 때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결국 더 큰 갈증과 죽음으로 우리를 몰아갈 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해갈은 오직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우리 심령을 다른 헛된 것들로 채우지 않고 오직 예수님으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실패와 문제를 짊어지시고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는 하루가 됩시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나의 모든 갈증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참된 생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19:17-27절/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26.04.02)

●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18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들을 보면 잔인합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끔찍한 고통의 과정이 너무나 생생해서 보는 내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본문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의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 담담하게 23절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라고만 기록할 뿐입니다. 저자인 요한은 우리가 단순히 감정적으로 십자가에 반응하기보다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 맞추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중요한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입니다. 사실 이 십자가는 종교 지도자들이 강제로 지운 것이고 빌라도가 허락한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끌고 가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고 목적이었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그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도전을 줍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 역시 각자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복음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며 ‘복음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총독 빌라도는 그 위에 명패를 써서 붙였습니다. 히브리어와 로마어, 그리고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었습니다. 지나가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고쳐 쓰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진짜 왕으로 믿어서 그렇게 쓴 것은 아니었겠지만,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참으로 만왕의 왕이시며, 이 땅에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성경이 증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경배해야 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3-24절에는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지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않으려고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지는 참담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잔인한 행동조차 사실은 예수님이 오시기 한참 전, 다윗 왕이 기록한 구약 시편 22:18절의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예언이 정확히 성취된 사건이었음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틀림없이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겉옷과 속옷을 모두 빼앗기시고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수치였습니다.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모든 죄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다 짊어지시고 덮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 덕분에 우리는 죄의 수치를 씻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26절)

이제 주님의 시선은 십자가 곁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여인들과,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향합니다.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찢어지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26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요한에게도 당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은 왜 갑자기 요한을 향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을까요? 만약 단순히 홀로 남으실 어머니의 부양이 걱정되셨다면 “요한아, 우리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라고 하시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육신의 혈육 관계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영적 가족’인 교회 공동체가 탄생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 안에서 이제 마리아의 아들이 요한이 되고, 요한의 어머니가 마리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피를 나눈 혈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 땅의 육신적인 혈연관계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결국 다 끊어지고 마는 유한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피로 맺어진 진정한 ‘영적인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더욱 사랑하고, 기꺼이 섬기며, 약한 자를 따뜻하게 세워주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인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의 모든 수치를 온몸으로 담당하셨으며, 우리에게 ‘영적 가족’이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복음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지고 생명의 길을 묵묵히 따라갑시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영원한 가족으로 묶어주신 우리 지체들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사랑으로 섬겨주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