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12-18절 / 생명의 길, 사망의 길(26.10.16)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12절)

어제 말씀에서 야고보는 시련 가운데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했습니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련을 만난 사람이 모두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가난한 형제는 높음을,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다시 시험에 대해 말합니다.

12절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4절에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참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힘들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인내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왜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은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끝까지 견딘 사람만 받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멈추고 싶은 마음을 이기고 끝까지 달려야 우승의 면류관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길에도 멈추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견디는 사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지금 내가 인내해야 할 자리와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특히 이 면류관이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련을 견디는 것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견딜 수 없습니다. 인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막상 시련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시련 앞에서 죽겠다, 못 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주님이 살아 계시고 반드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견디면, 주님은 생명의 면류관으로 우리 삶을 풍성하게 이끄십니다.

13절은 같은 ‘시험’이라는 말을 쓰지만 다른 의미로 이야기합니다. 12절까지의 시험은 믿음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부터의 시험은 죄로 끌어들이는 유혹입니다. 원어에서도 같은 단어가 두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믿음을 단련하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이 있고, 내 안에서 생기거나 사탄이 속여서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혹에 넘어가 무너진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셨느냐고 핑계를 댑니다. 그 당시 성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유혹해서 무너지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유혹은 어디서 옵니까? 14절은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속이는 사람이 가장 큰 문제지만, 속는 사람에게도 욕심이 있으면 그 안의 함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옳은 길인지 분별해야 하는데, 욕심에 끌리면 눈이 가려져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유혹이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여도, 그 유혹에 끌려가게 만드는 것은 내 안의 욕심입니다.

●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17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욕심이 작은 것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작은 욕심이 생명처럼 자라서 죄가 되고, 그 죄가 자라서 사망에 이릅니다. 우리 안의 작은 욕심을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여기서 12절과 14절이 대조를 이룹니다. 12절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14절은 “자기 욕심에 끌리는 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길의 끝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고, 욕심을 따르는 길의 끝에는 ‘사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대로 살다가 죽음과 같은 결과를 맞은 것처럼, 욕심은 결국 사망을 가져옵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무엇에 속지 말라는 것일까요? 욕심을 부리면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17절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말합니다. 좋은 것은 욕심을 부려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주셔야 얻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려 움켜쥔 것은 오히려 나를 죄로 끌고 가지만,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온전한 선물입니다.

17절은 그 아버지를 “빛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고 말합니다. 해와 달과 별 같은 빛들은 움직이고 그림자도 바뀝니다. 그러나 그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채우십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이 위로부터 좋은 것으로 우리 삶을 채우십니다.

18절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았습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십니다. 같은 낳는다는 말로 두 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낳는 것은 죄와 사망이고, 말씀이 낳는 것은 의와 새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려고 낳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유혹을 받고 욕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욕심에 끌려가면 죄와 사망으로 갑니다. 그러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살면 그 길이 의와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좋은 것은 모두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것은 욕심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변함없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로부터 주십니다. 지금은 시련 가운데 있어도 반드시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견딥시다.

또한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욕심이 많은 세상에서 내 생각대로 살면 결국 죄와 사망에 이릅니다.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택의 순간마다 말씀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승리합시다.

야고보서 1:1-11절 /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6.10.15)

●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사사기 묵상을 마치고 오늘부터 야고보서를 묵상합니다. 야고보서는 1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1장에서 한 이야기를 2-5장까지 더 구체적으로 풀어 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편지입니다. 1절을 보면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 그리고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 편지의 배경을 살펴보고, 야고보가 시련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럿 나옵니다. 이 편지를 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가족들은 예수님을 잘 인정하지 않았지만, 부활 이후 믿음을 갖게 되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 야고보는 자기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형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시고, 나는 그분께 속하여 순종하는 종이라는 고백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입니다. 믿음 때문에 살던 곳을 떠나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성도들입니다. 낯선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믿는다고 핍박을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습니다. 문제는 그 시련 속에서 흔들려 원망하고 불평하며 신앙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들을 열두 지파라고 부릅니다. 사사기에서 열두 지파가 서로 싸우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구약에서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이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가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새 공동체로서, 구약 백성이 실패한 길을 이제 우리가 바르게 걸어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편지의 첫마디는 성도들이 겪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2절에서 야고보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이라고 말합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우리라면 어쩌겠냐고, 참고 견디라고,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참고 견디는 것을 뛰어넘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시련 가운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성도들의 형편을 몰라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 뒤에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시련만 바라보며 원망하고 절망하지 말고, 그 뒤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3절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4절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2-4절까지 ‘온전’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온전히 기뻐하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인내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족함이 채워지고 견고한 신앙으로 세워집니다.

인생의 문제는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문제가 옵니다. 더 크고 심각한 문제가 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문제가 빨리 끝나는 데만 마음을 쓰면 우리는 계속 흔들립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주저앉을 것 같던 시련도 인내하다 보니 지나갔고, 그 과정에서 믿음이 자라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 시련은 낙심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기대할 일입니다.

●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9절)

5절은 시련을 만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입니다.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하고 행동하는 힘입니다. 믿음이 좋아 보이던 사람도 갑자기 큰 문제를 만나면 잘못된 선택을 하고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약속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내 감정과 기분, 눈앞의 이익을 따라 결정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 안의 욕심과 잘못된 기준을 보게 하십니다. 6절은 그때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3절의 ‘믿음의 시련’에 이어 6절에서도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결국 선을 이루시고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까, 책임지실까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8절은 그런 사람을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부릅니다. 두 마음은 원어로 “영혼이 둘로 나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다른 것을 함께 품고 있는 마음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삶에서는 우상을 품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9절에서 야고보는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낮은 형제는 가난하고 비천한 성도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풍요롭게 사는데 예수 믿는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묻는 성도에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높음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영적인 신분이 그만큼 높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비교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그리고 이 신분은 영원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부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11절은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져 아름다움이 없어지듯,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말합니다. 영원할 것 같은 세상의 부도 해 한 번 뜨면 사라지는 꽃과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가난한 성도는 세상의 부자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가졌고, 부한 성도는 그 부가 잠깐이라는 것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기대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눈앞의 시련에만 마음을 빼앗기면 원망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하고 부족함 없는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지혜가 부족할 때는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합시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어떤 형편에 있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그 은혜로 얻은 이 신분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보지 말고 성도의 정체성으로 나를 보며, 날마다 감사하고 담대하게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사사기 21:13-25절 / 회복의 출발점(26.10.14)

● “베냐민 자손에게 …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13절)

오늘로 사사기를 마칩니다.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열한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2만 6천 명이 넘던 베냐민 군대에서 60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이스라엘은 그제야 방법을 찾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그들은 베냐민에게 자기 딸을 주지 않겠다는 맹세를 지키려고 야베스 길르앗을 치고 처녀 400명을 데려왔습니다. 아직 200명이 부족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200명을 채우는 이야기로 사사기가 끝이 납니다.

먼저 온 회중은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 평화를 공포합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이제 평화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싸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주는 셈입니다. 베냐민이 돌아오자 야베스 길르앗의 여자들을 아내로 주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15절은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라고 합니다. 전쟁의 결과가 너무 참담하자 그제야 후회합니다. 하나님께 먼저 묻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분노와 감정대로 움직이고 나서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오지 않아도 될 자리까지 와 버렸습니다. 문제를 풀겠다고 한 일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를 풀려고 또 다른 일을 벌이는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15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끝까지 쫓아가 거의 없앤 것은 이스라엘의 분노와 잔인함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만든 결과를 하나님이 하신 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회중의 장로들이 의논합니다.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남은 자들이 어떻게 아내를 얻게 할 것인가, 한 지파가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번에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들끼리 방법을 찾습니다. 지금 당장 혼인하지 않는다고 일이 급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방법도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18절에서 그들은 다시 미스바에서 했던 맹세를 떠올립니다.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맹세했으니 자기 딸은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맹세가 아니라 자기들이 분노 가운데 한 맹세입니다. 그 맹세를 지키려고 또 다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만 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25절)

19절에서 장로들은 실로에서 해마다 여호와의 명절이 있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실로는 하나님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절기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 혼란한 시대에도 절기에 실로에 올라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추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20-21절에서 장로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추러 나오면 각각 하나씩 붙들어 아내로 삼아 돌아가라고 지시합니다. 납치를 허락합니다.

충격적인 계획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가 붙들려 가서 알지 못하는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인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들의 가족은 또 어땠겠습니까? 출21:16절은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합니다. 납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여서 결정한 일이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근본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고민하고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고민 속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또 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우리도 문제가 생기면 열심히 고민하지만,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기준으로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 풀릴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입니다.

22절에서 장로들은 가족들의 항의에 대한 대답까지 준비해 둡니다. 여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따지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달라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준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니 맹세를 어긴 죄는 너희에게 없다고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여인과 한 가정의 아픔을 은혜라는 말로 덮으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의논 가운데 정작 붙들려 간 여인들을 걱정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나그네와 과부 같은 약한 사람이 보호받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여인들이 이렇게 다루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베냐민 자손은 그대로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가운데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고,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 성읍을 건축하고 거기 거주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각기 자기 지파와 가족에게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갑니다. 전쟁은 끝났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겉으로는 일이 수습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 한, 어디로 돌아가든 혼란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19-21장까지 이어진 이 사건은 레위인의 첩이 기브아에서 욕을 당하는 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로의 딸들이 붙들려 가는 일로 끝납니다. 시작도 끝도 연약한 여인들이 짓밟히는 일입니다. 사사기는 이렇게 이스라엘 사회가 어디까지 무너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25절이 사사기의 마지막 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7:6절에서 사사기의 마지막 이야기들을 시작할 때 한 말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왕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고, 그 결과가 이 혼란과 어두움이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크고 작은 일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결정했고, 그 결과가 이렇게 참담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순간순간의 선택은 내 뜻대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지, 이런 혼란을 가져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께 묻고 말씀의 기준으로 결정합시다.

또한 회복도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조금씩 무너져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가 작은 일 하나부터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할 때 우리의 삶은 서서히 회복됩니다. 사사기를 슬픔으로만 덮지 말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날마다의 순종으로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시다.

사사기 21:1-12절 / 잘못된 맹세(26.10.13)

● “누구든지 딸을 …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1절)

사사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레위인의 첩 사건으로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동족끼리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연합군은 베냐민을 끝까지 추격해 거의 진멸했고, 어제 베냐민 지파는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만 남았습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입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은 이스라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1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했다고 말합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 미스바에 모였을 때 한 맹세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입니다. 베냐민이 기브아의 죄를 감싸고 전쟁을 선포했으니 그들과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맹세가 아닌, 전쟁을 앞두고 분노가 가득할 때 한 맹세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맹세라는 말이 되풀이됩니다. 1절에서 “미스바에서 맹세”했고, 5절에서 “크게 맹세”했으며, 7절에서 “여호와로 맹세”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맹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방 사람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셨지, 동족과 혼인하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삿3: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딸을 아내로 맞고,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었습니다. 말씀 벗어나 이방인과 혼인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족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지만, 그 내용은 순간의 분노와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기에 무겁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은 내 감정과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벗어난 맹세를 하면, 그 맹세를 지키려고 또 다른 잘못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맹세가 잘못된 결정을 낳고, 그 결정이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2절에서 백성은 벧엘에 이르러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 큰 소리로 웁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왜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셨느냐고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이 일이 누구 때문에 생겼습니까?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전쟁을 시작한 것도, 이미 이긴 싸움에서 베냐민을 이삭 줍듯 끝까지 추격한 것도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진멸해야 할 가나안 족속은 남겨 두고 동족을 진멸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잘못 결정하고, 잘못 행동해 놓고, 그 결과를 하나님의 잘못인 것처럼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들이 했어야 할 기도는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해서 일이 어그러졌는데,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기게 하셨습니까 하고 하나님을 탓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먼저 내 잘못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는 길입니다.

4절에서 백성은 이튿날 일찍 일어나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전쟁에서 질 때도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이긴 뒤에도 드렸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결정을 보면 신앙이 회복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나섭니다. 예배는 드렸지만 결정은 자기들이 내립니다. 예배와 삶이 따로 움직였습니다.

● “이곳은 가나안 땅이더라”(12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은 5절에서 총회에 올라오지 않은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않은 자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크게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동족과의 전쟁에 모든 지파를 불러 모으려고 한 또 하나의 잘못된 맹세입니다. 확인해보니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총회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쪽에 있는 성읍입니다. 전쟁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두 맹세가 맞물립니다. 오지 않은 자는 죽이기로 맹세했고, 베냐민에게는 자기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 길르앗을 치고 거기서 여인들을 데려와 베냐민에게 주자는 결정을 내립니다.

회중은 큰 용사 1만 2천 명을 보내며 명령합니다.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는 것입니다. 11절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치라고 말합니다. 야베스 길르앗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베냐민에게 아내를 구해 주겠다는 이유로 또 동족을 진멸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까지 칼로 치라는 명령이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한 지파를 살리겠다고 또 한 성읍을 없애고 있습니다.

12절에서 그들은 야베스 길르앗 주민 가운데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젊은 처녀 400명을 얻어 실로 진영으로 데려옵니다. 그런데 남은 베냐민 사람은 600명이었습니다. 아직 200명이 부족합니다. 내일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그 200명을 채우려고 또 다른 일을 벌입니다.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으려고 또 다른 잘못을 하는 일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사사기는 이렇게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숨기지 않고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12절은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로 끝납니다. 실로는 하나님의 집이 있는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그런 실로를 굳이 가나안 땅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땅인데도 그 안에서 사는 모습이 가나안 사람과 다르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 가나안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분노와 감정으로 맹세했고, 그 맹세를 지키려고 또 다른 잘못을 이어 갔습니다. 우리도 감정과 욕심과 이익을 따라 결정하면 당장은 유익해 보여도 결국 인생이 혼란 속으로 빠져듭니다. 말씀을 알아야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바르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날마다 말씀의 기준으로 선택합시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그곳은 가나안 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게 산다면 우리 삶도 혼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살지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붙들고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사사기 20:29-48절 / 승리 아닌 승리(26.10.12)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35절)

사사기는 2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이제 한 장이 남았습니다. 갈수록 혼란스러운데, 그 혼란의 중심에 레위인이 있습니다. 레위인은 기브아에서 자기 첩을 밖으로 내보내 죽게 하고도 자기 잘못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보냈고, 이스라엘은 레위인의 말만 듣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은 채 베냐민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숫자로 보면 싸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40만 명, 베냐민은 2만 6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은 두 번이나 패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며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28절에서 하나님은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말씀대로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29절에서 이스라엘은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시킵니다. 전에는 숫자만 믿고 정면으로 싸웠지만 두 번이나 지고 나서 작전을 바꾸었습니다. 성읍 가까이에 군사를 숨겨 두고, 앞의 군대는 지는 척 물러나 베냐민을 성읍 밖으로 유인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셋째 날 이스라엘은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춥니다.

아니나 다를까 31절에서 베냐민 자손은 나와 맞서다가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납니다. 그들은 큰길에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 30명가량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베냐민 자손은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성읍에서 큰길로 꾀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지는 척하며 물러나 베냐민 군대를 성읍 밖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작전에 베냐민이 말려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전과 같이’, ‘처음과 같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30,31,32,39절). 두 번을 이기고 나니 베냐민은 이번에도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승리가 베냐민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 교만이 패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교만이 패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바알다말에서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 초장에 숨어 있던 복병들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승리에 취해 이미 함정에 빠진 것도 몰랐습니다. 교만은 눈앞의 위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35절이 전쟁의 결론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그날 베냐민 사람 2만 5천1백 명이 죽었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베냐민을 치신 일이었습니다. 기브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이 그 불량배들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 베냐민은 듣지 않았습니다. 심각한 죄에 무감각하고 자기 편만 감싸는 베냐민을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내 사람이라는 이유로 덮어 주는 것은 공동체를 지키는 길이 아닙니다. 베냐민은 지파를 지키려다 지파 전체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내 편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죄를 바로 다룰 때 공동체가 삽니다.

●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42절)

36-46절까지는 이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다시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36절에서 이스라엘이 잠깐 물러난 것은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병은 급히 기브아로 돌격하여 온 성읍을 칩니다. 40절에서 연기 구름이 기둥같이 성읍 가운데서 치솟습니다. 복병과 미리 약속한 신호였습니다. 성읍이 점령되었다는 뜻입니다. 베냐민 사람들이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니 온 성읍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도망하던 이스라엘 군사가 베냐민 군대를 향해 돌아서자,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그들은 광야 길로 도망하지만, 이스라엘은 뒤쫓아 그 가운데에서 진멸합니다.

43절부터는 구체적으로 몇 명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잔인하고 집요하게 베냐민 지파를 죽였는지 고발하는 겁니다. 베냐민을 에워싸고 추격하며 그들이 쉬는 곳에서 짓밟습니다. 44절에서 1만 8천 명이 쓰러졌고, 45절에서 림몬 바위로 가는 큰길에서 또 5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기돔까지 쫓아가 2천 명을 더 죽입니다. 그날 쓰러진 베냐민 용사가 모두 2만 5천 명이었습니다. 600명만 림몬 바위로 도망하여 넉 달 동안 지냈습니다. 2만 6천 명이 넘던 베냐민의 군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600명뿐이었습니다. 이미 승부가 결정났음에도 이스라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진멸했다, 추격했다, 짓밟았다, 이삭 줍듯 했다”는 말로 이스라엘이 동족 베냐민을 얼마나 처절하게 죽였는지 자세히 기록합니다. 48절은 군사만이 아니라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을 모두 불살랐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멸하는 일은 하나님이 죄악이 가득한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실 때 하라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동족에게 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은 끝까지 진멸하지 못하고, 동족은 진멸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승리일까요? 물론 기브아의 죄는 다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 지파를 이렇게 없애고 성읍을 불살라야 할 일이었는지 사사기 저자는 묻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의감에 시작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일 본문에서 이 승리는 또 다른 혼란으로 이어집니다.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이스라엘은 다시 문제를 풀려고 애쓰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행한 폭력이 또 다른 문제를 낳는 악순환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 이긴 것 같아도 이긴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혼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이겼지만,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를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지난 승리로 인해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냐민은 두 번의 승리에 취해 이번에도 전과 같이 이길 것이라 여기다가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전에 잘했던 일을 습관처럼 되풀이하며 하나님께 묻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익숙하고 자신 있는 일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물어야 합니다. 늘 해 오던 일이라도 하나님께 묻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없는 승리는 승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잘된 것 같아도 결국 더 큰 혼란과 문제로 이어집니다. 작은 일 하나도 하나님께 묻고 그 뜻을 따라 결정합시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안정감 있고 견고하게, 그리고 복되게 이끌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