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7:1-17절/인침을 받은 자들(25.07.11)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3절)

​6장에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여섯 번째 인까지 열렸습니다. 인이 열릴 때마다 전쟁과 기근이 일어납니다.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지니 전 우주적인 재난이 발생합니다(6:12-17). 이로 인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 부자들과 강한 자들이 하나님의 분노가 두려워 차라리 산과 바위가 자신들에게 떨어지길 간구할 정도입니다. 그러면서 6:17절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묻습니다. 이 진노를 피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뿐만 아니라 보호를 받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1절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요한은 네 천사를 봅니다. 이들은 땅 네 모퉁이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네 천사는 바람을 붙잡고 있는데, 이 네 천사와 바람을 2절에서는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라고 합니다. 즉 이들이 잡고 있는 바람을 놓으면 온 땅에 재난이 임하게 됩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다른 천사가 등장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3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을 치는 대상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 로마 황제를 주인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섬긴 자들입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요, 그렇다면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소유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감히 건들 수 없습니다. 성도의 신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엡1:13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믿는 성도는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인침을 받은 숫자가 144,000명입니다. 어떤 이단들은 이 숫자를 실제적인 숫자로 이해해서 이 숫자가 차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5-8절까지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인침 받은 자가 12,000명으로 동일합니다. 실제 숫자라면 이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12지파의 내용이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은 장자인 르우벤이 가장 먼저 나오는데 유다 지파에 맨 앞에 나옵니다. 유다 지파를 통해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각 한 지파씩인데, 6절에 므낫세가 나오고 8절에는 에브라임이 아닌 요셉 지파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보통 레위 지파는 12지파에서 빠져 있는데 레위 지파가 들어가 있고 대신에 단 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단 지파가 빠진 이유로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우상숭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 곳에 세우는데 벧엘과 단입니다. 이렇게 단이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고,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우상숭배를 배격하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인 침받은 자 144,000명은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144,000은 12×12×1000으로 되어 있는데, 앞에서 24장로에서 설명했듯 하나의 12는 구약의 12지파요 그 다음 12는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하며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징입니다. 여기에 충만한 숫자인 1000을 곱해서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성도들의 숫자를 상징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15절)

​그래서 이어지는 9절에는 144,000을 새롭게 표현하는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 이들이 흰 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서서 찬양합니다. 흰 옷과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이들의 찬양이 너무 웅장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만큼 은혜와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4장과 5장에서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에 대한 감격의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본문에서 찬양합니다. 하나님 앞과 예수님 앞에서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바로 찬양과 경배입니다. 12절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때 장로 중 하나가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인침을 받고 이렇게 영광 가운데 찬양할 수 있는가? 14절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환난에서 나왔다는 것은 환난을 겪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깨끗하게 되었고, 그런 신앙을 환난을 겪음으로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입술로만의 믿음이 아닌 고난의 삶으로 믿음을 확증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15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고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위해 과거 성막에 거하셨던 것처럼,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다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으며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17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믿음을 지키다 고난의 눈물을 흘리지만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혹 순교의 길을 갈지라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 말씀이 당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와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존재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끝이 아니기에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합시다. 하나님께서 인치셔서 소유 삼으신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장막을 치시고 영광의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로 영광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6:1-17절/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25.07.10)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1절)

​5장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들려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내용이 안팎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악인들에 대한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두루마리를 봉인한 일곱 인이 하나씩 떼어지면서 일어나는 재난들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장은 일곱 개의 인 중 여섯째 인까지 떼어집니다.

첫 번째 인을 떼는데 1절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하나님 보좌 옆에서 피조물의 대표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네 생물 중 하나가 “오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러자 심판하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인을 뗄 때마다 “오라”는 외침이 있습니다. 즉 심판하는 말 탄 자들이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4절 “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라고 합니다. 오는 것도 그렇고 심판하는 것도 허락을 받아 행합니다. 즉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이루어집니다.

첫 인을 떼니 2절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고 합니다. 넷째 인까지 말이 등장합니다.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땅에 전쟁과 기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말이 2절의 “흰 말”입니다. 왜냐하면 계19:11절을 보면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도 백마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며 공의로 심판합니다. 이 백마를 탄 자는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의 흰 말을 탄자도 예수님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의 흐름을 보면 두루마리 내용은 심판에 관한 내용이고 말들이 등장하면서 심판을 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아닌 심판하는 자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첫째 인이 떼지니 흰 말 탄 자가 이기고 또 이깁니다. 그렇다면 악의 세력들이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인에 떼지니 붉은 말을 탄 자로 인해 땅이 화평이 사라지고 서로 죽이며 칼을 받게 됩니다. 셋째 인이 떼어지니 검은 말이 등장하는데 그의 손에 저울이 들려있습니다. 저울은 식량을 매매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6절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면 노동자 하루 품삯인데 그것으로 밀 한 되 혹은 보리 석 되만 살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물가가 심히 올라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겁니다.

하지만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당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곡물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 포도나무의 절반을 베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소동이 일어났고 그 명령은 취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말씀은 그 당시 성도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이해했을 것이며, 핵심은 흉년이 얼마나 극심한지,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넷째 인을 떼니 청황색 말이 나와 땅 사분의 일이 검과 흉년 사망의 고통을 당합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11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는 상황이 좀 바뀝니다. 9절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라고 합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순교자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삶이 하나님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부르짖습니다. 10절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자신들의 흘린 피를 갚아 주시길 호소합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땅에 임하는 재앙들은 바로 순교자들의 이런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잠시 동안 쉬라 하십니다. 그리고 11절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십니다. 더 많은 순교자가 생겨서 순교자의 숫자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행동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순교자들의 피와 희생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9절)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생명보다 귀한 것임이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생명력있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본문 마지막 여섯째 인을 떼시는데 온 세상에 전무후무한 재난이 발생합니다. 큰 지진에 해가 검어지고 달은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땅에 떨어집니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산과 섬이 옮겨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엄청난 재난이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는 겁니다. 15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땅의 임금과 왕족, 부한 자들과 강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주인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재난이 임합니다.

그래서 산과 바위 틈에 숨는데 더 무서운 것은 16절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고 합니다. 산과 바위에게 자신들에게 떨어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죽는데도 그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가 너무 두렵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은 나은 것과 같은 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진노를 땅의 사람들에게 쏟으신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순교한 성도들, 그리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7절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 진노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7장에 가면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땅의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의 생명력있는 신앙을 통해 생명의 복음이 우리가 있는 곳에 아름답게 증거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5:1-14절/죽임 당하신 어린양(25.07.09)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2절)

​4장은 열린 문을 통해 올라간 요한이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를 주목하였습니다. 그 영광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립니다. 5장은 요한의 시선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향합니다. 1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고 합니다. 안팎으로 쓰인 두루마리가 있고 일곱 인으로 봉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안팎으로 쓰인 두루마리에 대한 내용이 겔2:9-10에 나옵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에서는 안팎에 쓰인 글의 내용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두루마리도 하나님의 심판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과연 누구를 향한 심판인가?”하는 겁니다.

힘 있는 천사가 외칩니다. 2절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인을 떼서 두루마리를 펼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이 심판의 책이 두루마리가 열리길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기록된 심판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인 악의 세력을 향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사탄과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의 날은 반대로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루마리가 반드시 열려야 하는데 열 사람이 없어서 요한이 통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성도들이 아닌 사탄과 악의 세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심판은 성도들의 승리로 이어집니다.

울고 있는 요한에게 장로 중 한 사람이 인을 뗄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5절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는 창49:9-10절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사자(Lion)입니다. 또한 “다윗의 뿌리”는 사11: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는데 이새는 다윗이 아버지입니다. 이 인물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을 뗄 수 있습니다. 요한이 이 분을 찾기 위해 둘러봅니다. 6절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승리한 사자를 기대했는데 어린양이 서 있습니다. 그것도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십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을 반복 강조합니다(6,9,12).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어떤 승리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은 사자와 같은 승리를 기대합니다. 힘과 부와 권력으로 누르고 삼키는 승리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리는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희생과 섬김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사자가 되고 싶은지 아니면 어린양의 되고 싶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6절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참된 권세와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능력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인을 떼십니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10절)

​8-14절은 어린양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어제 말씀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후반부를 가득 채웠다면 오늘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가득합니다. 요한은 고난의 시기를 지나는 성도들에게 문제와 고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찬양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찬양 이전에 8절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금대접에 담아 놓으십니다. 그리고 이 성도들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세요!, 우리의 고통을 신원하여 주세요!”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지만 계시록의 심판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고, 당연히 성도들을 향한 심판이 아닌 사탄과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입니다.

어린양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9-10절을 보면 일찍이 죽임을 당하셨는데 이유는 사람들을 피로 사시기 위함입니다. 생명을 주셔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은 10절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렇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고 왕노릇하는 존재입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연결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사람을 왕노릇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노예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다시 왕노릇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세상과 다르지 않지만, 우리의 신분은 나라와 제사장이요 왕입니다.

이 어린양되신 예수님 앞에 합당한 반응은 찬양과 경배입니다. 만만, 천천의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그 내용이 12절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 마음의 벅찬 감격을 쉴 새 없이 선포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역시 13절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찬양하며 경배합니다.

악이 가득하며 온 세상을 지배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린양의 승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자처럼 힘과 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희생과 섬김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양이 피로 사셨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왕노릇하게 하시는 존재임을 기억하며 하루도 승리합시다.

요한계시록4:1-11절/보좌 위에 앉으신 이(25.07.08)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1절)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내용이 아닌, 저자인 요한이 강조하는 부분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보석들의 이름도 나오고, 신비한 네 생물의 모습도 나옵니다. 하지만 본문의 강조점은 14번 반복되는 단어인 “보좌”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은 하늘에 있는 열린 문으로 올라오라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1:10절에 나왔던 주님의 음성입니다. 하늘에 열린문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이고 마지막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은 하늘과 땅이 연결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분리가 되었고 하늘 문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요한을 열린 문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이유는 1절 하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입니다. 1:1절에서도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고 했습니다. 지금 요한과 성도들은 박해 속에 있습니다. 그 중심에 로마 황제가 있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서 무서운 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이런 박해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 있습니다. 속히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이 있습니다. 핵심은 성도들의 승리입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간 요한이 본 것은 하늘 보좌에 그 위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3-11절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과 주변에 있는 존재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의 모습으로 앉아서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 땅에서 잠깐의 권세와 인간의 능력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아있는 통치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능력으로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로마 황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잠깐 있다 사라질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두려워할 분은 눈에 보이는 로마 황제가 아닌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관점이 바로 “하늘 관점”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10절)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십니까? 3절에 보석의 종류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 영광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겁니다. 계시록을 묵상하다보면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기에 언어의 한계를 느끼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높으심을 표현하기에 인간의 언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같고…같다”라고 합니다. 무지개가 보좌에 둘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무지개 언약을 생각나게 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보좌 주변에 24개의 보좌가 있고 24장로가 흰 옷을 입고 그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4, 7, 12, 24 등의 숫자가 반복됩니다. 여기도 24가 나오는데 12+12가 24입니다.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보좌 주변에 금관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이 금관은 2:10절을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에 비춰보면 죽도록 충성하며 믿음을 지킴으로 얻은 관입니다.

6-7절에는 네 생물이 나오는데 특징은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고 합니다. 8절도 다시 강조합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셋째 생물은 사람, 넷째 생물은 독수리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각 피조물들의 대표를 말합니다. 동물은 사자, 가축은 송아지, 최고의 피조물인 사람, 그리고 새들의 대표가 독수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합니다. 많은 눈들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감찰하시고 보살피심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부분은 8-11절입니다.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이 무엇을 하는가? 8절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렇게 생물들이 쉬지 않고 찬양하는 하나님을 본문은 두 번이나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라고 합니다(9,10).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잠깐 있다 사라질 황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네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자 이번에는 24장로들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쓰고 있던 금관을 벗어 드립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금관은 죽도록 충성한 결과로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쓰고 자랑해야 할 것 같은데 벗어서 드립니다. 영광의 하나님 앞에 그것을 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곳을 가면 자동적으로 감탄사가 나오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아름다움 앞에 네 생물도 24장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강요해서 경배하는 것이 아닌 자동적으로 엎드립니다. 금관을 벗어 드립니다. 이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11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확신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땅의 관점으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하늘의 관점으로 살아갑니까?”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확신하며 살아갑시다. 또한 이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바른 반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 습관적인 예배가 아닌 영광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벗어 드리며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14-22절/네가 열심을 내라(25.07.07)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15절)

​일곱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로마 시대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 돈이 많은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비옥한 땅과 양 떼를 먹일 수 있는 넓은 초원을 가지고 있어 좋은 양모가 생산되었고 옷감과 양탄자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돈이 많으니 금융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유명한 의대가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 멘카루신전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의학전문학교였고 거기서 귀를 치료하는 연고와 눈을 치료하는 안약이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런 의료산업의 발달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했습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14절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등장하십니다. “아멘”이시다는 의미는 진리의 주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충성”은 성경에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한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참된 증인”은 당시 순교자를 의미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라오디게아에 필요한 모습이 바로 “아멘과 충성 그리고 참된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15-16절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들의 신앙이 차지도 뜨겁지도 않습니다. 미지근합니다. 그러면 토하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충격적인 말씀인데요,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풍부한 라오디게아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바로 물입니다. 이 물을 근처의 도시에서 긴 상수관을 설치해서 공급을 받았습니다. 물을 공급받는 곳이 두 곳인데 하나는 골로새입니다. 여기서는 차고 정결한 물을 공급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히에라볼리입니다. 지금 파묵칼레라는 유명 관광지입니다. 여기는 뜨거운 석회 온천수가 나옵니다. 그런데 약 10km의 관을 타고 온 물은 식어서 미지근한 상태가 됩니다. 석회질이 포함된 미지근한 물은 토하고 싶은 물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라오디게아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를 의미는 신앙의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들의 신앙이 어떠했기에 주님께서 이런 책망을 하시는 것일까요?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라고 합니다. 이들은 부요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신앙인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계2:9절에서 서머나교회를 주님께서 칭찬하시면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와 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는 상인들이 연합해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하는 일에 돈을 대주었고 그 댓가로 부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그곳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의 부요함은 신앙의 타협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을 양보해서 얻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실상은 부요함이 아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입니다. 심각한 상태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20절)

​주님은 처방을 내리십니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세상의 부요를 추구하고 자랑하지 말고 영적 부요함을 위해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교회의 정결성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고난 속에서도 참된 증인으로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고난과 수고는 피하고 쉽고 편한 길을 걷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하십니다.

또한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흰 옷은 성도의 거룩성을 의미합니다. 흰 옷 입은 거룩한 성도로서 무엇을 가까이 하고 무엇을 멀리해야 하는지를 알아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은 안약을 사서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은 세 번이나 “사라”고 하십니다. 정체성이 분명한 신앙을 위해서는 수고가 따릅니다. 결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은 주님의 아픔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책망하십니다. 열심을 내기를 기다리십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들은 주님없이 교회를 이루고 주님없이 많은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문을 열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이 시대 교회와 가장 비슷한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풍요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회복해야 합니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길을 걷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과 수고를 피하지 말고 감당하면서 열심을 내어 주님을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