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4 | 매일성경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7절)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6-7절은 계시록의 서론인 1장과 비슷한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처럼 서론과 결론에 반복되는 내용이 계시록의 강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6절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라고 하는데 1:1절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입니다. 용과 짐승의 패배와 어린양의 승리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약속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내가 속히 오리라”로 이어집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에 세 번 반복됩니다(7,12,20). 이것을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이유는 당시 성도들의 기도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 주님 오셔서 완전한 승리를 주십니까?”라고 기도했는데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당시도 “속히”오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 주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는 언제든지 주님이 오실 수 있는 때입니다. 이것을 말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세지말, 즉 주님 오심이 더욱 가까워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근신함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7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서론인 1:3절에 나왔던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3절은 읽고, 듣고, 지키라고 했다면 22:7절은 “지킴”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진정한 복은 핍박이 없고 문제없는 삶이 아닌 고난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지키는 삶이라고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
8-15절은 계시록의 핵심을 정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만 경배하라”입니다(9절). 요한은 말씀을 전해주는 천사에게 경배하려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만류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19:10절에도 나왔습니다. 당시 성도들에게 이 내용이 중요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대한 경배 위험이 있었습니다. 천사숭배 사상도 있었다고 하고, 황제숭배도 강요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오직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 한분 뿐이십니다. 지금 시대도 경배를 받으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돈이, 사람이, 과학 기술이 그렇습니다. 이런 시대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예배합시다.
두 번째는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십니다. 시작과 마침이라는 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불안하고 어두운 현실이지만 이것 역시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14절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면 여기는 옷을 빠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옷을 빤다는 것은 매일 자신을 말씀으로 돌아보며 죄를 고백하고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큰 성 바벨론 속에서 세상 정신을 따라 살지 않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16절에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합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라고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계시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이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알겠는데, “다윗의 뿌리”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 다윗의 근원이 되십니다. 이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십니다.
또한 “광명한 새벽별”입니다. 당시 어둠이 짙습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반드시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춰주시고 밝은 새벽이 오게 하십니다.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니 신부인 교회로 나오는 자들만이 목마른 영혼에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며 경고의 말씀도 주십니다. 예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재앙을 더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계시록의 말씀에 내가 본 천국과 같은 신비한 이야기를 덧붙여서 말씀의 의미를 변질시켜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말씀을 이용해서도 안됩니다. 또한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서도 안됩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순종하기 힘든 내용은 외면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말씀을 우리 삶에 중심에 두고, 잘 읽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순종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은 “속히 오신다”고 다시 한번 말씀하시며 위로하십니다. 성도들은 이 약속을 확신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화답합니다. “마라나타”입니다. 이 말이 당시 성도들의 인사였다고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오심을 확신하며 믿음과 인내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 오시지 않을 것처럼, 아니면 지금 말고 나중에 오셨으면하는 삶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매일 “마라나타”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며,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이 되십니다. 모든 것 주관하시며 반드시 찬란한 새벽을 열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삶이 됩시다.
2025.08.01 | 매일성경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2절)
요한의 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하는 이유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곳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대리 통치자로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혹이 넘어가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타락합니다. 그런 세상은 계시록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큰 성 바벨론이 중심되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전했습니다. 그런 악의 세력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1절 하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합니다. 바다는 짐승이 올라오는 악의 장소였습니다. 모든 것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5절 말씀처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요한은 바로 이어서 2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을 바로 이어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 성도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냐면? 앞에서도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큰 성 바벨론이 통치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는 믿음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결과를 두고 봐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승리한 싸움을 싸운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고전3: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즉 성도는 큰 성 바벨론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대적이 사라지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2절 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신부로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거룩함”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요한은 이제 보좌에서 나는 음성을 듣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축복과 영광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3절은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하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 같이 함께 하십니다. 3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합니다. “내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장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들로 만드셨다는 겁니다. 왕이신 하나님처럼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죄로 인해 아들됨과 특권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들이기에 아버지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7절)
그때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합니다.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리고 사망과 애통,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것들이 원래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죄의 열매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죄의 근원을 제거하셨기에 이제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합니다. 애통과 아픔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5-6절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니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6절도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보좌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 되셔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절)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셨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를 위해 7절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첫째 사망은 우리 모두가 죽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게 되는가? 목록이 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인가?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로마의 박해를 아래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순교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크면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황제를 숭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포기하고 로마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면 결과는 둘째 사망이지요.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담대하고 당당하게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들인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즉 순교하지 않고 이 땅에서 몇 년 혹은 몇 십년 더 살겠다고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당당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 성도인 우리가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갑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완전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면서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2025.07.31 | 매일성경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2절)
19장 후반부는 백마 타신 예수님께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유황불 못에 던지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부리던 악의 우두머리인 용은 어떻게 될까요? 본문이 용과 그 추종자들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에 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와서 용을 결박합니다. 그런데 이 용의 정체가 2절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공격해서 믿음에서 떨어지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이 용이 결박되는데 그 기간이 천년이라고 합니다. 이제 용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3절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잠깐 놓이면 또 용의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 그 결과가 7-10절에 나옵니다. 잠깐 놓인 용이 이전에 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땅의 사방 백성들을 모아 대적합니다.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고 합니다. 성도들을 공격하려 합니다. 그런데 9절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10절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합니다. 이미 두 짐승이 들어가 있는 유황불 못에 최종적으로 용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모든 게임이 끝이 납니다. 사탄의 완전한 패배입니다.
1-3절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그렇게 천하를 호령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무섭게 공격했던 용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한 천사가 쇠사슬로 결박하니 천 년 동안 결박을 당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천 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보통 네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전천년설입니다. 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후천년설은 반대로 천년 후에 재림하십니다. 셋째, 무천년설은 계시록에 많은 상징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천년이라는 숫자도 하나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비성경적인 해석으로 역사를 7시대로 나누어 성경의 내용들을 조립해서 마지막 때 일어날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계시록의 잘못된 해석이 대부분 여기서 나왔고 시한분 종말론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설명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요한계시록은 당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20장 말씀도 천년왕국이 언제 올지 논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시록의 강조점처넘 “교회와 성도의 승리”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교회가 그런 승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6절)
그래서 용이 결박된 천년의 기간은 성도들에게는 왕노릇하는 기간입니다. 4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번 보좌가 나옵니다. 4절의 “보좌”와 11절의 “흰 보좌”입니다. 완전히 반대입니다. 4절의 보좌는 승리한 성도들이 왕 노릇하는 곳이라면, 11절의 흰 보좌는 용과 짐승을 추종하던 자들이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는 장소입니다.
4절에서 천년 동안 왕노릇하는 자들은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단은 이 말씀으로 영사불사를 주장합니다.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과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만나 죽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과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을 구분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아 순교를 당했고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순교해서 하늘에 있든지, 아니면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셔서 사탄을 결박하셨습니다. 결박된 사탄은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미 성도는 승리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존재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성도는 이긴 싸움을 싸우는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과 짐승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11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흰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 앞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수로 되어 있고 하나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책들”은 12절 하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입니다. 이들은 기록된 행위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모든 행위가 기록되어 있기에 책들입니다.
하지만 다른 책은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는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검은 우리를 주님의 보혈의 흰 세마포 옷으로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광이며 특권입니다. 지금이 사탄이 결박된 천년의 기간이고 성도들이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기간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확신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갑시다.
2025.07.30 | 매일성경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절)
18장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징은 크고 거대한 성이 한 시간에 망해 버립니다. 또한 결코 다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바벨론의 멸망은 교회와 성도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19장 앞부분은 할렐루야 찬양이 울려 퍼졌고 또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승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씀합니다. 바로 백마를 탄 자를 통해서입니다. 11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흰색이 승리를 상징하는데 여기 백마 탄 자는 바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백마 탄 왕자처럼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6장에서도 인 재앙이 시작될 때 흰 말을 탄 자가 나왔는데, 이 분도 예수님일까? 6장은 흰 말만 나온 것이 아니라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나와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세상을 심판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6장의 흰 말 탄 자는 예수님은 아닙니다.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등장하시는 장면은 오늘 본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11절 하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주님은 타협하지 않으시고 말씀의 기준을 따라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12절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14절에서도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고 했는데, 불꽃 같은 눈으로 온 세상을 감찰하십니다. 본문은 심판과 관련되기에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피시기에 주님의 심판은 정확합니다. 많은 관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16절에도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십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온 세상의 왕으로, 또 주인으로 경배를 받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왕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유일한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12절에 적혀 있는 이름은 예수님만 아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3절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예수님은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십니다. 15절을 보면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고 했는데 짐승과 추종자들을 심판하시면서 피가 옷에 뭍은 것입니다. 이런 묘사는 주님께서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14절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합니다. 백마를 탄 예수님을 따르는 하늘 군대가 있습니다. 이들은 피뭍은 옷이 아닌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주님을 따릅니다. “깨끗한 세마포 옷”은 8절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바른 행실로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들이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승리의 전쟁에 함께 합니다. 싸움은 주님이 하시고 성도들은 그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영광과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3절 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지 만물이 창조될 때 말씀으로 함께 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주님이시며, 말씀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15절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라고 하는데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 말씀의 검입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은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라고 합니다. 말씀이 예리한 기준이 되어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17절)
이렇게 예수님께서 승리하시면 바벨론과 추종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17-21절입니다. 한 천사가 모든 새들을 향해 외치는데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고 합니다. 마치 전쟁이 끝난 후 승리자들이 떠나고 난 자리 죽은 자들의 시체를 새들과 짐승들이 먹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19장에는 두 개의 잔치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9절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17절의 “하나님의 큰 잔치”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른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외면하고 짐승을 따르며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던 자들은 새들에게 먹히는 심판의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은 두 잔치 중 하나에 반드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로마, 즉 세상의 신부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또한 무너질 바벨론 세상을 주도했던 짐승과 또 다른 짐승인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의 군대를 모아 백마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하는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과의 싸움은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패배하여 산 채로 유황불 못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설명하는 내용이 20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고 합니다. 이런 거짓 선지자의 심판은, 그 당시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며 세상으로 나가려는 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 결과가 이렇다는 겁니다.
최후 승리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와 교회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수고와 인내의 열매입니다. 십자가 뒤에 얻게 되는 영광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린양의 신부로서 주님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살아갑시다.
2025.07.29 | 매일성경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20절)
큰 성 바벨론을 따르던 땅의 왕들과 땅의 상인들 그리고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음행하고 사치하며 치부했습니다. 울며 애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심판은 바꿔 말하면 큰 성 바벨론의 지배 아래서 고통 당하던 성도들에게는 승리의 날입니다. 그래서 20절은 성도들과 사도들, 선지자들에게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인내하는 성도들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셨습니다. 24절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발견되었느니라”고 하시면서 이에 대한 보응으로 땅의 사람들에게 심판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 같았지만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처럼 분명하게 나타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큰 맷돌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결코 다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18:21-24절까지 “결코 다시”라는 말이 6번이나 반복됩니다. 심판으로 인해 결코 다시 들리지 않는 소리, 보이지 않을 모습들이 있습니다.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기쁨의 시간이 끝이 났다는 겁니다. 또한 세공업자가 결코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로(12절) 돈을 모으고 사치했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경제가 무너집니다.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들리지 않습니다. 풍요의 시대가 가고 핍절의 시대가 옵니다. 등불 빛도 결코 다시 비치지 않습니다. 저녁이 되면 등불 빛을 켜는 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인데 그런 일상이 무너집니다. 가장 슬픈 일은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들리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결혼의 기쁨이 없어지고 뿐만 아니라 미래가 절망입니다.
왜 이런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를 다시 설명합니다. 23절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왕이 되어 교만하며 하나님께 도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존귀한 성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또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상 정신을 따라 살게 하였습니다.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이 마땅합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절)
그렇다면 큰 성 바벨론과 추종자들의 심판으로 결코 다시 기쁜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이때 성도들은 어떤 소리,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인가? 그것이 19장의 내용입니다. “할렐루야”를 외쳐 부릅니다. 19:1절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1-6절까지 “할렐루야”가 4번 반복됩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영광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글로 기록된 본문 속에서 할렐루야 찬양하는 승리한 성도들의 감격과 기쁨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참되고 의로운 심판으로 큰 음녀인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피 흘린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셨으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은 이 찬양 소리가 얼마나 큰지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우렛소리와 같은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감격입니다. 이 찬양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동참합니다.
이 시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찬양이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통치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승리와 영광의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할렐루야” 찬양으로 영광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 예배할 때마다 이 은혜와 감격을 가지고 할렐루야 소리 높여 하나님께 경배합시다.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 중에 그 유명한 ‘할렐루야’라는 곡이 있습니다. 메시아를 작곡하기 전 1741년 헨델은 파산과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거기다 중풍과 류마티스 등으로 자신이 음악가로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절망의 시기에 한 단체로부터 자선 음악회에서 연주할 곡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고 곡을 쓰게 됩니다. 놀랍게도 260쪽에 해당하는 악보를 단 24일 만에 완성합니다. 헨델은 메시아 완성 직후 “나는 내 앞에서 하늘을 보았고 또한 위대한 하나님을 분명히 보았다.”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악보 끝에 SDG라고 기록을 했는데 이 말은 라틴어로 ‘Soli Deo Glroria’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의 줄임말입니다.
1742년 영국에서 초연될 당시 영국 국왕이 참석을 했는데 ‘할렐루야’가 연주 될 때 그 웅장함에 감동되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기립을 한 후로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는 모든 청중이 기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웅장한 헨델의 ‘할렐루야’가 바로 오늘 본문을 근거로 작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헨델은 본문 속에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그로 인해서 할렐루야 목소리 높여 찬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기쁨이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7절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결혼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시신데, 그렇다면 신부는 바로 교회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아내를 위해 예수님은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신부가 입는 드레스는 8절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하는데 이는 성도들의 올바른 삶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우리가 함부로 살 것이 아닌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어린양 예수님의 신부로서 매일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맡깁시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할렐루야 찬양으로 하나님을 경배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올바른 삶으로 깨끗한 세마포를 준비합시다.
2025.07.28 | 매일성경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10절)
일곱 대접 재앙 이후 17장부터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큰 성 바벨론은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 어떤 심판이 임하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17장에서는 바벨론을 “큰 음녀”로 표현했고, 18장에서는 성도들은 거기서 나와 바벨론의 죄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으로 바벨론을 따르던 자들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9-10절은 땅의 왕들, 11-16절은 땅의 상인들, 그리고 17-19절은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먼저 땅의 왕들은 바벨론과 음행하고 사치했습니다.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10절에는 바벨론을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라고 표현합니다. “견고한”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들어가 있는데 땅의 왕들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진노로 불에 타 연기가 올라옵니다. 그것을 보고 자신들에게도 재앙이 올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견고한 큰 성 바벨론은 10절 하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고 합니다. 본문에 반복되는 말들이 많은데, 가장 중요한 말은 10절과 17절, 19절에 반복되는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입니다. 사람들이 견고하다고 생각한 바벨론이 한 시간 만에 망해버린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겉보기만 크고 화려했지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3:12-15절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렇습니다. 불 타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7절)
땅의 상인들도 바벨론을 위해 울고 애통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바벨론의 심판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함이 아닌 더 이상 매매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치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들의 관심은 땅이 전부입니다. 12-13절은 상인들이 매매했던 품목들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 은과 보석은 물론이고 고급 옷감과 그릇들입니다. 특히 주목을 끄는 품목은 13절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입니다. 사치와 치부는 새롭고 고급스러운 부분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관심을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들의 치부로 인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겁니다. 이들이 매매하는 것들 중에는 “종들과 사람들의 영혼들”까지 있습니다. 새번역은 “노예와 사람의 목숨”으로 번역했습니다. 사람을 노예로 사고 파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의 목숨도 돈으로 거래하는 무자비한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돈이면 못하는 일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 사람들이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14절 “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라고 하는데 입으로 맛보는 맛있는 과일이나 음식, 그리고 눈으로 보는 빛난 것들입니다. 꼭 우리 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먹방 시대입니다.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또한 눈으로 보는 것에 집중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비슷합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들에 시대 정신이 반영되어 있고 그것을 주도하는 것이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잘 분별해야 합니다. 롬12:2절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지막으로는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이들 역시 울며 애통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땅이 아닌 하늘에, 그리고 순간이 아닌 영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은 사치와 치부에 관심이 있지만 성도는 영적인 부요함을 누려야 합니다. 3장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부요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자랑하는 자들을 향해 계3:17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영원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견고한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