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3 | 매일성경
●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바울은 계속해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지만, 함께 모인 자리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면 공동체의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일 때는 방언보다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렇다면 은사를 교회 안에서 어떻게 질서 있게 사용할지를 아주 자세하게 가르칩니다.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바울은 ‘악’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도리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성도에게 상처를 준다면, 잘못된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지혜에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사28:11-12절).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먼저 자기 백성의 선지자를 보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듣지 않자, 마침내 앗수르에 포로로 보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언어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곧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부르심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임하는 메시지는 돌이킬 시간이 지나고 심판이 임박했다는 신호였습니다.
이 배경에서 22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심판의 표적과 같다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은 그럼에도 돌이키게 하는 부르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실제 상황을 통해 설명합니다.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처음 교회를 찾은 사람이 모두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 자리에 정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예언을 하면, 곧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 전해지면, 들어온 사람이 그 말씀을 통해 자기 마음의 숨은 것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전에는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말씀을 들으니 자기 문제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새벽에 말씀을 듣다가 한 번씩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절)
그래서 바울은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26절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세우려 하면 문제가 되고, 교회를 세우려 하면 바른 사용입니다.
방언을 하려거든 두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반드시 통역하는 사람을 두어야 합니다.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만 말하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방언을 사용하는 것은 막지 않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29절, 예언하는 자도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하라고 합니다. 여기 ‘분별’은 원어로 ‘디아크리노’인데 의미가 “신중하게 따져보다, 무게를 달아 가늠하다”입니다. 즉 말씀을 따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곁에 있는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말하던 자는 잠잠하고, 한 사람씩 차례로 하여 모든 사람이 배우고 권면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예언이라도 여럿이 한꺼번에 하면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30절에서 말하는 ‘계시’는 그 당시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때는 기록된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라, 하나님이 때로 직접적인 계시로 말씀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하나님이 완성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 완성 이전과 이후는 다르기에, 이 부분에서 혼란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34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배경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앞서 11장에서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이미 인정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잠잠하라’는 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무조건 입을 다물라는 뜻은 아닙니다. 34절과 35절을 보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복종과 남편이라는 배경 안에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상황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교회에서 예언을 하는데, 아내가 그 자리에서 남편의 예언을 가로막고 공개적으로 평가하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내가 회중 앞에서 남편을 그렇게 한다면, 그 당시 사회에서는 남편에게 수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정의 질서 안에서 권면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아내가 남편을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논쟁하지 말고, 배울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묻고 남편의 권위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곧 무조건 침묵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성도들은 방언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예언을 해야 할지 망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히 정리합니다.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둘 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니 사용하되, 잘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0절이 은사에 대한 결론이자 신앙생활 전체의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내 생각대로 가볍게 행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여, 이것이 성도와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 될지를 헤아려 질서 있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의 중심은 이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에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익숙하게 하던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것이 교회의 유익이 되는지 걸림돌이 되는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누가 우리 공동체를 보더라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고 본이 되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2026.06.22 | 매일성경
●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절)
12-14장까지 바울은 은사를 다룹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필요를 따라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며, 그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은사를 말하는 12장과 14장 사이, ‘사랑’장인 13장이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회 은사 문제의 진짜 핵심이 드러납니다.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사랑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앞서 말한 대로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사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은사를 통해 사랑이 나타나고 있는가가 은사 자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사랑 없이 은사를 자랑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먼저 예언이 무엇인지 짚어야 합니다. 은사의 종류를 설명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예언은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설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나누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런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왜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방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곁에 있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반면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기에 사람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합니다. 그래서 4절이 핵심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 단어는 원어로 ‘오이코도메’인데, ‘집을 짓다’라는 뜻입니다. 건물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듯, 사람을 세워가고 공동체를 건축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언은 자기 자신을 세우지만, 예언은 교회라는 집을 함께 지어 올립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데 있다면, 공동체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예언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세움(오이코도메)’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거듭 등장합니다. 3절 “덕을 세우며”, 4절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절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12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17절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이 단어의 반복은 곧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를 세우지 않고, 자기만 세우는 방식으로 은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더구나 18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했습니다. 방언을 못해서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5절 뒷부분에서 조건을 답니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방언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도록 통역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유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무리 유창한 방언이라도 공동체 안의 성도들이 알아 들을 수 없다면 무익하다는 겁니다.
●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15절)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자신이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7-8절에서는 악기를 예로 듭니다. 피리나 거문고도 분명한 음을 내지 않으면 무슨 곡인지 알 수 없고,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나팔로 전쟁의 신호를 보냈는데, 그 소리가 분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9절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또한 11절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면 서로에게 외국인처럼 되고 만다고 합니다.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내용이 중요하기에 13절부터 예배의 실제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대표 기도를 하러 나온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회중은 당황할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여기 ‘마음’은 ‘나의 생각’, 이성적 사고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그 내용을 자기 머리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말로 기도하면 그 내용을 알기에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데, 방언은 그 이해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런 의미입니다. 기도도 찬송도 영으로 하되 마음으로, 곧 그 뜻을 이해하며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송도 가사의 의미를 묵상하며 부를 때 은혜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축복하고 감사하면, 곁에 있는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아멘’ 할 수 없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면 그 감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19절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개인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바울은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신비한 은사라며 자랑하여 시도때도없이 떠들어대는 것보다 공동체의 성도들을 생각하며 유익이 되도록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바울의 권면을 통해 고린도교회를 보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로 교회가 오히려 혼란과 상처 가운데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은사의 기초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섬김이 사랑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은사는 나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의 덕을 세우는가, 아니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를 물으며,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2026.06.19 | 매일성경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4절)
11장에서 예배의 질서를 다룬 바울은, 12장부터 14장까지 은사를 다룹니다. 그 유명한 사랑장인 13장이 바로 이 은사 이야기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은사를 길게 다룬다는 것은 곧 고린도 교회가 은사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의 중심에는 방언이 있었습니다.
1절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여기 ‘신령한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은사에 대해 바르게 알기를 원합니다. 먼저 성도들의 이전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2절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우상을 숭배했다고 하면 될 텐데, 굳이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이방 신전에서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 신비한 말과 행동을 쏟아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예수 믿기 전에는 그렇게 우상에 휘둘려 끌려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른 일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람의 특징은 신비한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율법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 내 생명과 시간과 소유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주로 인정하던 시대에, “내 주는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때론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면, 그것 자체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4-6절을 보면 바울이 같은 내용을 세 번에 걸쳐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4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절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은사가 원어로 ‘카리스마’입니다. 이 단어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에서 나왔습니다. 곧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은사를 ‘은사’, ‘직분’, ‘사역’으로 부르며, 그 주체를 각각 성령, 주(예수님),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곧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굳이 삼위 하나님을 다 언급할까요? 삼위 하나님은 서로 경쟁하지 않으십니다. 완전한 신뢰 가운데 하나를 이루십니다. 그런 삼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면, 그 은사는 마땅히 교회의 하나 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사 때문에 경쟁과 분쟁이 생긴다면 그것은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11절)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유익은 내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입니다. 이것이 은사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은사는 내 자랑이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자기 자랑과 영광을 구하느라 은사가 분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11절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받고 싶은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주권대로 각 사람에게 알맞게 나누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는 반드시 은사가 있습니다. 다만 자기 은사를 스스로 잘 모를 때가 있는데, 오히려 곁에 있는 이들이 정확히 알아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나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8-10절에서 바울은 은사의 종류를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입니다.
몇 가지는 오해를 풀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는 세상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다 혼란에 빠졌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은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겸손히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도 특별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확신을 뜻합니다. 보통 사람은 작은 문제에도 흔들리는데, 강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가장 많이 오해받습니다. 흔히 미래를 내다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예언자라고 하고, 이들이 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들을 말하며 바울이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7절 “성령을 나타내심”, 8절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9절 “같은 성령으로”,“한 성령으로”, 그리고 11절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입니다. 다양한 은사가 있어도 그것을 주시는 분은 한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은사를 두고 누가 낫고 못하다며 경쟁하고 다투는 것은,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본래 뜻을 놓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받으면 특별히 은혜받은 것이라 여겨 절제 없이 예배를 어지럽힌 것이 잘못된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공동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으니, 내 은사가 무엇인지 기도하며 찾고, 모르겠다면 주변에 물어 발견하여, 그것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 섬길 때, 다른 사람은 힘들어하는 일도 기쁨과 감사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알맞게 선물로 주셨으니, 그것을 두고 자랑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본래 하나 됨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2026.06.18 | 매일성경
●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22절)
11장 앞부분에서 예배의 질서를 다룬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성찬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며 그 십자가를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칭찬했습니다(2절). 그러나 오늘은 정반대입니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22절 끝에서도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거듭 말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심각했을까요? 17절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성도들의 모임이 유익이 아니라 해로움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일 때마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 차라리 모이지 않는 편이 나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모임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배도 소그룹도 함께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런 모임이 은혜와 기쁨, 격려와 위로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상처와 갈등이 된다면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우리 자신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속한 모임이 유익이 되고 있는가, 해로움이 되고 있는가. 나는 유익이 되는 모임을 이루고 있는가?”
18절에서 바울은 다시 분쟁을 언급합니다. 1장부터 다룬 분쟁이 성찬 자리에서도 드러난 것입니다. 20-21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이 내용은 당시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예배당 건물이 없어, 큰 집을 가진 부유한 성도의 집에 모였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시간이 여유로워 일찍 와서 주인과 친한 이들끼리 안쪽의 좋은 자리에 앉아, 다른 성도들이 오기도 전에 떡을 배불리 먹고 잔을 마음껏 마셨습니다. 심지어 취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취하도록 마신 것입니다.
반면 가난한 성도, 노예 신분의 성도는 늦게까지 일하다가 뒤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음식이 없어, 주님의 떡과 잔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이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가요? 당시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세상에서 함께할 수 없던 주인과 노예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한 식탁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의 벽이 복음으로 깨진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는 먼저 먹고 취하고, 없는 자는 소외되어 굶주린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이라고 책망합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성찬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때, 마음으로 차별하고 소외시킨다면 역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를 일입니다. 오히려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삶이 회복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방향입니다.
●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절)
바울은 성찬이 무엇인지 다시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찬을 시행하신 시점이 중요합니다. 23절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24-25절에서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고,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새 언약’이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통해, 죄로 깨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세로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했다면, 가로로는 성도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성도가 지체를 이루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성찬식을 하면서 빵 한 덩어리를 함께 떼어 먹었는데, 이는 “우리가 한 몸”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찬을 나누면서 차별하고 분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찬식이 죄를 짓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를 살피라”는 말을 “내가 죄지은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바울이 말하는 ‘자기 살핌’은 내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성도를 소외시키거나 차별하지 않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온전히 실현하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29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서 ‘주의 몸’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하나 된 몸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분쟁을 일으키며 참여하면,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30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으니라” 여기서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로 약해지고 병들고 죽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심판이 아니라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함을 일깨우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권면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잠깐을 기다리지 못해 늦게 온 성도를 소외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나의 권리와 자유를 조금 내려놓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계속되는 문제의 밑바탕에는 자유와 권리의 남용이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바울은 자유와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내려놓고 절제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 모임이 유익이 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임 공동체입니다. 그 모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도록 세워가는 것, 때로 힘들어도 소그룹에 참여해 함께 나누며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찬에 참여할 때 공동체의 하나 됨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지체들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지,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2026.06.17 | 매일성경
●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3절)
8장부터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룬 바울은, 11:2절부터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예배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여자가 머리를 가리느냐 마느냐, 남자가 무엇을 쓰느냐는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알면 바울이 진짜 다루는 문제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본문을 풀어가는 열쇠는 13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곧 고린도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그것도 조용히가 아니라 과격하게 기도하고 예언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의 도시였고, 이방 신전에서 여자 사제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광적으로 예언하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예배 중에 누군가 갑자기 일어나 머리를 풀고 소리치며 기도한다면 예배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를 괴롭혀온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배 중에도 “나는 은혜받아서 하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은혜받았다 해도 다른 사람의 신앙에 걸림돌이 된다면 옳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전제 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2절에서 바울은 모처럼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문제가 많은 교회였지만, 잘하는 부분은 분명히 칭찬합니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책망할 것은 책망하는 균형은 우리도 배울 점입니다.
그러나 3절에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예배의 혼란을 질서와 권위의 문제로 정리해 갑니다. 여기서 ‘머리’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서가 3절 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동등하지만 질서 안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남성과 여성을 똑같이 존귀하게 지으셨지만, 가정과 예배의 질서 안에서는 권위의 자리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질서를 가정에 적용해 설명합니다. 아내에게는 복종을, 남편에게는 사랑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 같은 사랑입니다. 생명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복종이 어려워 보이지만,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이야말로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질서는 한쪽의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책임 위에 세워집니다.
이 질서 위에서 바울은 머리 문제를 다룹니다. 4-5절,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고, 여자는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방 신전에서 남자 제사장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예배를 집례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교회 남자들이 그것을 따라 한다면 우상숭배와 교회 예배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둘째, 여자 사제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예언하던 모습이 교회 여성들에게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오히려 영광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5절의 표현은 충격적입니다. 머리를 가리지 않고 예언하는 것은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당시 머리를 미는 것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강제로 가하던 수치의 표시였습니다. 바울은 그만큼 강한 표현으로 이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6절에서 바울이 권하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예배드릴 때 단정하게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13절)
14절의 ‘본성’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본성’은 당시 사회가 남녀를 구별하던 보편적 관습을 가리킵니다. 그 시대 문화에서 남성은 머리에 무언가를 쓰지 않고 여성은 단정히 가리는 것이 통념이었는데, 고린도 교회 여성들이 이를 거부하며 “우리는 자유롭다”고 한 것이 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울의 설명을 듣다 보면 여성에게 불리하게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균형을 잡아줍니다. 11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처음 창조 때는 아담에게서 하와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모든 남자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속해 있고,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핵심은 분명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주 안에서 똑같이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가정과 예배에는 질서와 권위가 있고,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6절 “그러나 누구든지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누가 따지고 논쟁하려 해도, 바울은 담대하게 교회의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본문대로 여성이 머리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핵심은 머리를 가리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두 가지 원리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복장이나 태도, 예배에서의 자세가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한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둘째는 성도의 유익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새로 온 사람이 우리 모습을 보고 은혜받을 수도,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내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보편적인 관습을 존중하며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절제하고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 그것이 복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2026.06.16 | 매일성경
●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절)
8장부터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며 우상의 신전에까지 들어가 담대하게 그 음식을 먹었고,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9장에서 바울은 사도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자신을 예로 들었고, 10장에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거울 삼아 우상숭배를 경고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 제물에 대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바울의 권면이 강하고 거칠수록, 그 밑바닥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고 부릅니다. 여기서 ‘피하라’는 의미는 ‘도망치듯 달아나라’입니다. 음행을 피하듯 우상숭배도 피해 달아나야합니다. 15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늘 지혜를 자부하던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 지혜로 분별해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작정 “하지 말라” 하지 않고, 왜 안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풀어갑니다. 그 출발이 성찬입니다. 16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성찬에서 잔을 마시고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여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코이노니아’로, 단순한 동참을 넘어 깊은 사귐과 연합을 뜻합니다. 또한 17절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이 구절에 ‘하나’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곧 성찬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참여한 성도들끼리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18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제사를 예로 듭니다.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의식과 하나가 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냥 몸만 참여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참여하다’가 많이 반복됩니다(16,17,18,21). 그런데 바울은 ‘참여’를 뜻하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를 의도적으로 함께 씁니다. 16, 18, 20절의 ‘참여’는 깊은 내적 연합을 뜻하는 ‘코이노니아’이고, 17절과 21절의 ‘참여’는 겉으로 함께하는 동참을 뜻하는 ‘메테코’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저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메테코) 이미 깊은 연합인 ‘코이노니아’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으로 동참하는 것조차 금합니다. 그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식탁과 하나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바울은 앞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꺼냅니다. 20절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우상 자체는 헛것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우상으로 향하게 하고 그 숭배를 조종하는 영적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이 귀신의 일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배후에서 일하는 어둠의 세력은 실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신전의 자리에 참여해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어둠을 주관하는 귀신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21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예수님과 하나 된 성도가 귀신의 자리와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보았듯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합이 되기에,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을 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권면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자유를 내세워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4절)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6장에도 나왔던 것처럼 “모든 것이 가하다”는 고린도 성도들의 구호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두 가지 잣대를 댑니다. 이것이 유익한가,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이어 본문의 핵심이 나옵니다.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신앙생활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다 말하고 다 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실제 상황에 적용해서 우상 제물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25-26절,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라 해도,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이 초대해 음식을 차려주면 그것도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은 제물입니다”라고 알려주면 그때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 말을 꺼낸 사람의 마음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먹어도 죄가 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입니다.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이 말씀이 바로 이 긴 이갸기의 결론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를 두고, 결국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32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다른 성도가 시험에 들고 흔들린다면 옳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보고 은혜받고 도전받아 더 신실하게 살고 싶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섬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분을 본받아, 바울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것은 곧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 참여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인지, 아닌지를 잘 살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것이 지혜롭고 성숙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성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가 하나로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