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1:36–55절 / 하나님이 내 수고를 보시고(26.04.28)

●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40절)

야곱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20년 동안 참아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그동안 야곱은 라반 앞에서 을이었습니다. 항의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2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합니다. 36절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이전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20년 동안 야곱과 함께하시며 그를 이렇게 만들어 오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쏟아낸 말의 핵심은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38절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야곱이 맡은 양떼에서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습니다. 외삼촌의 것에 손을 댄 적도 없었습니다.

39절 내용은 더 놀랍습니다.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든지 밤에 도둑을 맞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그 당시 법으로는 짐승에게 물려 찢기거나 도둑을 맞은 경우 양치기에게 배상 책임이 없었습니다. 그냥 ‘잃었다’고 말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그마저도 야곱에게 채워 넣으라고 했고, 야곱은 그렇게 했습니다. 억울하지만 따지지 않고, 요구받은 것보다 더 성실하게 감당해왔습니다.

40절에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이것이 야곱의 20년이었습니다. 속이는 자로 살았던 야곱이, 라반 아래에서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면서 맡겨진 일은 대충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도 성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성실함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고백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은 41절과 42절에 있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봉사하였는데 외삼촌은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고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정작 받아야 할 것은 10번이나 빼앗겼습니다.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내버려 두면 빈손으로 만들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렇게 가족과 재물을 이끌고 돌아갈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42절에 야곱이 직접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을 것이라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이 빈손이 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과 수고를 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끝까지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20년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계셨습니다.

이 말이 오늘 우리에게 참 크게 닿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느낌, 성실하게 감당했는데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억울함.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모든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환경과 사람을 보며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44절)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부를 때 두 번이나 “이삭이 경외하는 이”(파하드 이츠하크)라고 부릅니다(42,53). 여기 ‘경외하다’는 깊은 두려움과 떨림을 의미합니다. 왜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요?

이삭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 번제로 드리려 했던 그 날입니다. 칼이 내려오려는 순간 하나님이 막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떨리는 분이었습니다.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살아계셔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마 아버지 이삭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20년의 삶을 통해 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벧엘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라반의 손을 막으신 하나님,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신 하나님. 야곱에게도 이제 하나님은 가볍게 대할 수 없는 두렵고 살아계신 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경외하는 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습니다. 돌무더기를 쌓아 증거로 삼고,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언약을 맺는 장면이 창세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브라함도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었고(21장), 이삭도 같은 왕과 언약을 맺었습니다(26장). 그리고 오늘 야곱도 라반과 언약을 맺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한 개인이었던 믿음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의 강한 자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라반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49절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또 50절에는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라반, 드라빔도 믿고 조상신도 믿는 혼합주의 신앙의 사람 라반이, 야곱의 하나님을 살피시고 증인이 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삶을 2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본 라반이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을요. 우리도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네”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실함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성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신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십니다. 42절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이 한 문장이 야곱을 버티게 한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붙들고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창세기31:17–35절/드라빔을 버려라(26.04.27)

●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24절)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의 행렬이 출발합니다. 혼자 떠났던 길을 이제 아내 넷, 자녀 열한 명, 그리고 그동안 모은 가축과 재물을 이끌고 돌아갑니다. 20년 전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고향을 떠났을 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두운 밤 돌을 베개 삼아 누운 그 자리에서 마음은 두렵고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약속하셨습니다. 28: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야곱의 가정이 평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속고 속이고, 시기하고 경쟁하며, 두 자매가 자녀 낳기 경쟁을 벌이는 혼란스러운 20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약속하신 것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 가셨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떠납니다. 라반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았고, 아들들의 태도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멀리가서 자리를 비웠습니다. 야곱은 이때가 도망칠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가족과 모든 재물을 이끌고 조용히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이때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몰래 훔쳐 낙타 안장 밑에 감췄습니다. 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작은 우상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집집마다 두는 부적이나 수호신 같은 것입니다. 라반이 이 드라빔을 굉장히 소중히 여겼다는 것은, 뒤에서 라반이 야곱을 추격하며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드라빔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라헬은 왜 이것을 훔쳤을까요? 먼 길을 떠나는 불안함 속에서, 하나님보다 이 드라빔이 자신과 가족, 그리고 미래를 더 확실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본문 바로 앞 16절에서 라헬은 “하나님이 …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고 하며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손에는 드라빔을 쥐고 있었습니다. 입으로 하는 고백과 실제로 의지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 라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는 무언가를 더 붙들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연약함입니다.

라반은 3일이 지나서야 야곱이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분노한 라반이 형제들을 데리고 야곱을 추격합니다. 무려 7일을 달려 길르앗 산에서 야곱을 따라잡습니다. 야곱은 가족과 짐을 이끌고 있고, 라반은 형제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라반이 나중에 스스로 고백하는 말이 29절에 있습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이 말이 라반의 진짜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대로 야곱을 만났다면 큰 해를 당했을 것입니다. 야곱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위기의 순간을 단 한 절로 정리합니다. 24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한 번 나타나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형제들을 이끌고 야곱을 해하러 달려왔던 라반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숨기고 있지만, 야곱의 가정을 실제로 지킨 것은 드라빔이 아니었습니다. 20년 전 베델에서 “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라반의 손을 막으셨습니다. 드라빔은 그 어두운 밤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34절)

라반이 드라빔을 찾겠다며 야곱의 장막들을 샅샅이 뒤집니다. 레아의 장막, 두 여종의 장막을 다 뒤졌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라헬의 장막에 들어갔을 때, 라헬은 이미 드라빔을 낙타 안장 밑에 깊이 숨기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35절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라반은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성경이 이 장면을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문화적으로 이 상황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것인지를 독자들은 알았습니다. 가정을 지켜준다는 드라빔이 지금 여인의 안장 밑에 깔려 있습니다. 그것도 제의적으로 부정하다는 생리하는 여인이 앉은 안장 아래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드라빔의 실체입니다. 사람을 지킬 수 없고, 자신을 숨겨준 사람도 지킬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이 발견되지 않게 막을 힘조차 없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통해 우상의 무능함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드라빔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웃음과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낙타 안장 밑에 숨겼듯, 우리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드라빔을 하나씩 숨겨두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돈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사람의 능력이나 인맥이 나를 안전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 지위나 건강에 대한 과도한 의존. 이것들이 현대판 드라빔입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삶이 흔들리지 않는 동안에는 우리가 진짜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드러납니다. 위기가 장막을 뒤집을 때, 우리가 하나님보다 무엇을 먼저 붙들고 있었는지 보이게 됩니다.

야곱의 가정은 혼란스럽고 부족했습니다. 속고 속이고, 시기하고 경쟁했습니다. 그 가운데 드라빔까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가정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20년 전 벧엘에서 하신 약속 한마디가, 라반의 손을 막고, 야곱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말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손에 꼭 쥔 드라빔이 있지 않는가? 드라빔은 우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약속하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그 드라빔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붙드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30:1–24절/하나님을 대신 하겠느냐(26.04.24)

●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3절)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레아와 라헬 두 자매와 결혼합니다. 라헬을 사랑했고 레아는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레아에게 하나님은 네 명의 자녀를 주었습니다. 네 번째 유다를 낳으면서 레아는 29:35절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녀만 놓고 보면 레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 자매가 남편 하나를 두고 자녀를 낳기 위해 경쟁하고, 각자의 여종을 남편에게 들이고, 식물 하나를 두고 협상을 벌입니다. 창세기 30장은 야곱의 가정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태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이야기를 이토록 솔직하게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자녀가 없었던 라헬이 언니 레아에게 네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며 시기합니다. 야곱에게 말합니다. 1절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곱이 화를 냅니다. 2절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의 말이 맞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은 여기서 기도하며 기다리는 대신, 자기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들입니다. 빌하를 통해 단을 낳자 6절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고 하고, 납달리를 낳자 8절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합니다. 자녀를 낳는 과정에서 기쁨보다 억울함과 경쟁의 언어가 먼저 나옵니다.

이런 라헬의 이 모습이 누구와 닮았습니까? 야곱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모습이 꼭 야곱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외삼촌 라반을 통해 야곱에게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셨다면, 이번에는 아내 라헬을 통해 야곱이 자기 자신을 다시 보도록 하십니다. 형의 장자권을 시기하고 욕심내어 자신의 방법으로 빼앗으려했던 야곱이었습니다. 자녀를 주고 안 주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야곱이, 정작 자신은 온 삶을 내 힘으로 쥐려 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17절)

유다를 낳으면 하나님을 찬양했던 레아도 라헬이 여종을 통해 자녀를 낳자, 자신의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줍니다. 실바를 통해 갓과 아셀이 태어납니다. 이름의 뜻이 각각 ‘행운’과 ‘행복’입니다. 그런데 정작 레아 자신이 행복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 어머니에게 가져옵니다. 합환채는 그 당시 사랑과 임신을 돕는다고 여겨지던 식물입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던 아들이 마음을 담아 가져온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그것을 달라고 합니다. 레아가 분노합니다. 15절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그러자 라헬이 조건을 겁니다. 합환채를 자신에게 주면 오늘 밤 남편을 언니 침소에 보내겠다는 겁니다. 야곱이 라헬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산 것처럼, 라헬이 합환채로 남편의 하룻밤을 거래하고 있습니다. 그 방식이 많이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 가정의 이 혼란을 통해 야곱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하나님은 계속해서 거울처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저물 때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자 레아가 영접하고 동침합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소원을 들으셔서 다섯째 아들 잇사갈, 여섯째 아들 스불론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딸 디나도 태어납니다. 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흔치 않은 일입니다. 디나는 나중에 34장에서 큰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자녀가 없던 라헬이 처음부터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야곱의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삭이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이 들으셔서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기도하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동원했습니다. 그 결과 가정이 시기와 경쟁으로 뒤엉켰습니다.

그리고 22절, 드디어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라헬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합니다. 이 요셉이 어떤 사람이 됩니까? 나중에 야곱의 가정 전체를 기근에서 살려내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살아남도록 길을 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시고 주신 아들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야곱의 가정이 너무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혼란스러운 과정을 통해 야곱의 아들 열한 명이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열둘이 됩니다. 이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민족이 형성됩니다. 시기와 경쟁과 거래와 혼란 속에서, 하나님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사람의 민낯이 이렇게 드러나도,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 가정도, 우리 공동체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시기가 있고, 경쟁이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에게 집중하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이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라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있습니다.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동원하고, 조급하게 서두르고, 남과 비교하며 경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까?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기억하신 라헬에게 요셉을 주셨듯이,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그 자리가, 기도해야 할 자리입니다.

창세기29:21–35절/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26.04.23)

●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25절)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외삼촌 라반을 위해 일한 7년을 며칠처럼 여겼습니다. 드디어 7년의 기한이 차서 외삼촌 라반에게 말합니다. 21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라반은 잔치를 베풀었고, 야곱은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야곱이 눈을 떠보니, 자기 곁에 누운 사람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분노하며 외삼촌에게 따집니다. 25절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그런데 이 모습은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라반이 레아를 야곱에게 데려간 시간이 ‘저녁’이었다고 합니다(23절). 어두울 때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것도 바로 그 아버지의 눈이 어두웠을 때였습니다(27:1절). 어두움을 이용해 속였던 자가, 이제 어두움 속에서 속임을 당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일 때 형의 옷을 입고 염소 가죽을 몸에 붙여 자신을 위장했듯이, 레아도 어쩌면 면사포를 쓰고 어둠 속에서 라헬인 척 야곱에게 들어갔을 것입니다. 방식이 너무 닮아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연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심은 것을 야곱이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라반은 말합니다. 26절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형이 먼저라는 말, 순서가 있다는 말이 야곱의 가슴에 어떻게 들렸을까요. 야곱은 형 에서의 순서를 빼앗았던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차지하려 했던 사람입니다. 이 한마디가 지난 모든 것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27절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야곱은 결국 라헬을 위해 다시 7년을 섬깁니다. 처음 7년에 속은 7년, 도합 14년의 세월입니다.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은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14년이라는 긴 시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14년 동안 야곱은 자신이 타인에게 주었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몸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은 이렇게 찾아옵니다. 우리가 뿌린 것의 무게를 우리가 직접 느끼게 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첫 번째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야곱이 속임을 심었더니 속임을 거뒀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이기도 하지만, 뒤집으면 소망의 말이기도 합니다. 진실을 심으면 진실을 거두고, 사랑을 심으면 사랑을 거두고, 섬김을 심으면 섬김을 거둡니다. 오늘 하루 내가 무엇을 심는지가 중요합니다.

●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32절)

야곱의 가정은 이제 온전하지 않습니다. 두 아내가 있는데, 야곱은 레아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31절 “사랑받지 못함”이라고 표현하는데, 원래 뜻은 ‘미워함’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레아를 볼때마다 자신의 인생이 레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레아도 억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원해서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닌데,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도 온전하지 않았는데 야곱이 이루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연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변함없이 이루어가십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는 라헬이 행복할 것 같은데 31절은 의외의 문장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야곱이 레아를 외면했지만, 하나님은 레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이름을 지으며 그 마음을 드러냅니다. 첫아들 르우벤을 낳고는 32절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둘째 시므온을 낳고는 33절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시므온은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내 아픔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고백입니다. 셋째 레위를 낳고는 34절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며 여전히 남편을 향한 소망을 붙잡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런데 넷째 유다를 낳을 때 레아의 고백이 달라집니다. 35절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더 이상 남편 이야기가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구하던 레아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이 변화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한 신앙의 성장입니다.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레아는 환경이 바뀌어서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상황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시다는 것, 들으신다는 것, 돌보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고백이 사람을 향한 갈망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뀐 것입니다. 물론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시 동생과 자녀 낳기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레아에게서 유다가 태어납니다. 사랑받지 못했던 레아, 그러나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한 레아의 아들 유다의 후손으로 다윗이 태어나고, 그 계보를 따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자리에서, 사람이 외면하는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경고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무슨 말을 심는지, 어떤 마음을 품는지가 결국 내게 돌아옵니다.

다른 하나는 위로입니다. 사람이 나를 외면해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레아처럼 억울하고 답답한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이 그 자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 고통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선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진실을 심고, 사랑을 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창세기29:1–20절/하나님이 함께하시면(26.04.22)

●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6절)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고향인 브엘세바에서 출발한지 며칠 되지 않아서 돌을 베개 삼아 누운 그 외진 곳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창28: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29장은 그 만남 이후 야곱의 발걸음으로 시작됩니다.

1절 보면 “야곱이 길을 떠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길을 떠났다’는 표현이 원어로 ‘두 발을 들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어제까지 두렵고 무거웠던 발이, 이제는 가볍게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힘입어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과 후, 같은 길이지만 발걸음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인생의 발걸음이 무겁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신뢰해야 할 때입니다.

야곱은 하란이 속한 동방 사람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는 외삼촌 라반의 집이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넓은 서울, 어느 곳에 사는 외삼촌을 내비게이션 없이 찾아가는 상황입니다.

마침 우물가에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어디서 왔는지 묻습니다. 놀랍게도 야곱의 목적지인 하란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라반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당연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놀라운 일입니다. 동방이라는 넓고 넓은 낯선 땅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외삼촌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목자들은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6절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이 외삼촌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습니다. 외삼촌의 딸이 먼저 야곱에게로 오고 있었습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내가 애써 찾아 헤매야 할 것들이 때로 내게로 걸어오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찾는 일은 며칠 걸려도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들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하나님은 순간에 해결하시기도 하십니다. 오랫동안 막혔던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손대시면 순식간에 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붙잡고 씨름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맡길 때, 하나님이 하시면 문제가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11절)

구약에서 우물은 자주 결혼 이야기의 무대가 됩니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갔던 아브라함의 종도 우물에서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오늘도 우물가에서 야곱이 자신의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납니다. 본문에는 우물이 큰 돌로 덮여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 지역에서 물은 생명과 같았고, 그 귀한 우물을 아무나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여러 목자들이 힘을 합쳐야만 옮길 수 있는 큰 돌로 막아두었습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라헬이 양떼를 몰고 오는 것을 본 야곱이 혼자서 그 돌을 옮겼습니다. 본문은 담담하게 기록하지만,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기쁨,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야곱에게 없던 힘을 솟아나게 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야곱이 첫눈에 라헬에게 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라헬 앞에서 야곱은 생각지도 못한 힘을 냅니다. 야곱의 인생에 새로운 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라헬을 만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한 달을 함께 지내며 지켜본 라반이 한가지 제안을 합니다. 15절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야곱은 열정적이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라반은 그것을 알아봤고 야곱이 자신과 함께 머무는 것이 유익이라고 생각하여 이런 제안을 합니다.

야곱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18절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그 당시 신부를 맞이할 때 지참금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당시 노동자 1년 임금이 5-10세겔이었고, 보통 신부 지참금은 30-50세겔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제시한 7년은 상당히 후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만큼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20절,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7년을 며칠처럼. 사랑이 있으면 긴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는 말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야곱이 얼마나 소망을 붙들고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기다리는 것이 있는 사람은 다르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복선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품삯을 받는 순간, 가족 관계가 고용 관계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외삼촌 라반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라반에 의해 야곱은 혹독한 훈련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보다 훨씬 더 강한 사기꾼 외삼촌 라반을 통해 야곱을 훈련시키십니다. 앞으로 야곱이 라반에게 당하는 과정에서 야곱은 자신이 가족들에게 주었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때로 내가 했던 일의 무게를 직접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힘들지만, 그 과정이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치 못함을 같은 방식으로 다듬어가십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면, 더 강한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지요.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쉽지 않지만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갈 때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겪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발걸음이 벧엘 이전과 이후에 달라진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 하루를 바꿉니다. 오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찾아야 할 신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올 때 야곱처럼 무거운 돌도 옮기고, 긴 시간도 며칠처럼 지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내 힘으로 안 된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내가 찾아 헤맬 것들이 때로 나에게 걸어오기도 합니다.

창세기28:1–22절/내가 너와 함께 있어(26.04.21)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4절)

혼자가 된다는 것은 두렵습니다. 익숙한 모든 것을 떠나 낯선 길을 가야 할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마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낍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이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자신의 계획과 다르게 야곱이 축복받은 것을 보며, 반드시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을 이을 축복의 자녀가 야곱임을 인정합니다. 야곱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에게 가서 아내를 맞이하도록 보냅니다. 이제 야곱은 집을 떠나 먼길을 가야 합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기 전, 본문은 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이 자신의 축복을 빼앗아 갔다는 것을 알게 된 에서는 분노했고, 동생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에서는 자신이 축복을 받지 못한 이유를 생각합니다. 8절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그가 내린 결론은 자기 아내인 가나안 여인들을 부모님이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런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서가 선택한 것은 아내를 한 명 더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새로운 아내로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의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에서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팔아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아내들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에서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문제를 보지 않으니, 아무리 변화를 시도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에서의 모습이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자주 바깥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환경이 문제이고, 다른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먼저 내 안에서 변화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회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

야곱은 이제 혼자입니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걷습니다. 약 900km의 먼 거리입니다. 한 달 이상을 걸어야 합니다. 야곱은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해가 지자 더 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길가에서 돌 하나를 베개 삼아 눕습니다. 이 장면이 야곱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해가 저 어두운 것처럼 미래가 어둡습니다. 혼자라는 현실이 불안합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막막합니다. 그런데 그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사닥다리가 보였습니다. 땅에 서 있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닥다리 끝에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야곱의 마음속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면 하나님도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내 상황을 알고 계실까? 내 절박한 기도가 하늘까지 닿을 수 있을까?” 이 모든 불안에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사닥다리를 통해 답하셨습니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3절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아브라함과 함께했고, 이삭과 함께했던 그 하나님이, 이제 야곱과 함께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십니다.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지켜주겠다!”,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 하나님은 야곱의 마음을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혼자라는 두려움, 위험에 처할까 하는 두려움, 돌아오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하나님은 그 두려움 하나하나를 안심시켜 주십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16절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고백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돌을 베개 삼아 누운 그 외진 곳에도 계셨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그 밤에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이 깨달음에 놀라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그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이름 붙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20-22절입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오.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그의 서원을 살펴보면 아직 미숙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시면 나도 이렇게 하겠다는, 조건이 달린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지만, 아직 하나님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야곱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에서 나가면 하나님도 멀어지시는 것처럼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요? 어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내 상황을 모르실 것 같아 혼자 끙끙 앓고 있지는 않은가요? 벧엘에서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머무는 자리, 불안한 그 자리에도 함께 하십니다. 땅과 하늘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닿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 이 말씀 붙잡고 오늘 하루도 승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