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6:9-43절 /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26.05.06)

●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15절)

오늘 본문은 이름들의 행렬입니다. 에서의 아들들, 손자들, 족장들, 왕들의 이름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낯선 이름들이 많아 읽기가 쉽지 않지만, 이 긴 목록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만이 아니라, 약속 밖에 있는 에서의 후손들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끌어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25:23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서와 야곱이 아직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은 야곱뿐 아니라 에서도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36장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에서의 아들들이 족장이 되고, 그 족장들이 곳곳에서 에돔 땅을 다스립니다. 9-19절까지 에서의 자손과 족장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43절에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 에서를 통해 하나의 민족이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에게만 신실하신 분이 아닙니다. 에서처럼 약속의 계보 밖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도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얼마나 더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어 가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간에 호리 족속 이야기가 20절부터 등장합니다. 호리 족속은 에서의 후손들이 이동해 오기 전부터 세일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원주민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고, 그 과정이 여기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24절에는 특이한 내용도 나옵니다.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당시에 온천을 발견한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유전이나 금광을 발견한 것과 같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세상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31절)

그리고 31절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기도 전에 에돔에는 이미 왕이 있었습니다. 32-39절까지 에돔의 왕들이 줄줄이 기록됩니다. 벨라, 요밥, 후삼, 하닷, 삼라, 사울, 바알하난, 하달까지 여덟 명의 왕이 차례로 에돔을 다스렸습니다.

야곱의 가족과 에서의 가족을 지금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야곱의 가족은 아직 떠돌고 있습니다. 문제가 끊이지 않고 혼란스럽습니다. 반면 에서의 후손은 왕을 중심으로 이미 강력한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에서 쪽이 훨씬 더 잘 나가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처음부터 읽어오면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더 화려한 세상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불신앙의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에서의 후손들이 세상적으로 더 강하고 더 화려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빠르게 성공하고,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들립니다. 저쪽이 더 좋아 보이고, 저쪽을 닮아가고 싶고, 저쪽으로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에서의 후손이 세상적으로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은 세상의 화려함과 다른 방향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번성해도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세상의 번성함으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에서의 후손이 먼저 왕을 세우고 더 강한 나라를 이루었지만, 하나님은 오직 야곱의 후손을 통해 다윗을 세우시고 그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에게 하신 약속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맺은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훨씬 더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우리 가정이 혼란스러워도, 우리 삶에 문제가 끊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야곱의 가족이 에서의 나라보다 약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을 통해 흘렀습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보다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세상이 더 화려하고 강해 보여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세상의 번성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창세기 35:23-36:8절 /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26.05.05)

●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26절)

야곱의 가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문제의 연속’입니다.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했고, 아들들이 살인자가 됐고,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났고,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완전히 망조가 든 가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혼란 뒤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22절 하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시각입니다.

23-26절까지 야곱의 열두 아들 이름이 기록됩니다. 레아에게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여섯 명. 라헬에게서 요셉과 베냐민 두 명.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서 단과 납달리 두 명. 레아의 여종 실바에게서 갓과 아셀 두 명. 도합 열두 명입니다. 이 열두 명이 태어난 과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두 자매의 경쟁, 여종들을 동원한 자녀 낳기 대결, 합환채 하나를 두고 벌인 흥정. 어디 하나 정상적인 과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혼란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열두 아들을 완성하셨습니다.

완전한 가정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가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빚어가십니다. 야곱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이런 과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먼저 문제를 바라보고, 또한 누가 문제인지를 따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27절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이릅니다. 28-29절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여기서 잠깐 나이를 계산해보면,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는 만난 나이는 야곱 107세, 이삭은 167세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돌아와서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10여 년 됩니다. 그리고 이삭이 눈을 감을 때 옆에 누가 있었겠습니까?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으로 이어지고 이삭이 세상을 떠날 때는 야곱과 열두 손자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리고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또 주목할 것은 29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는 기록입니다. 원수처럼 갈라섰던 두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에서 함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도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장례를 치렀습니다. 하나님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형제를 모으십니다.

●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6절)

36장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에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왜 갑자기 에서의 족보가 이렇게 길게 등장할까요? 창세기는 약속의 사람과 약속 밖의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36장은 에서가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사람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장입니다. 이것을 몇 가지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첫째로 아내들의 출신입니다. 2절에 에서의 아내들 앞에 “가나안 여인 중”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붙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지만 동시에 죄악이 가득한 땅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이 땅 여인이 아닌 외삼촌의 딸들과 결혼했습니다. 에서는 그 경계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에서의 아내 중 한 명은 이스마엘의 딸입니다. 이스마엘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둘째로 자녀들이 태어난 땅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26절에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라고 기록됩니다. 반면 36:5에 에서의 아들들은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라고 기록됩니다.

셋째로 거주지입니다. 6절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그리고 8절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주하니라” 지도를 보면 세일산 에돔은 가나안 땅의 동쪽에 위치합니다. 창세기에서 ‘동쪽’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동쪽으로 갔고, 가인도 동쪽으로 갔고, 아브라함과 헤어졌던 롯도 동쪽 요단 평지를 선택했습니다. 에서도 동쪽으로 갔습니다.

본문에서 좀 혼란스러운 것은 야곱에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는 이미 에돔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에서가 야곱과 헤어져 에돔 세일 산에 거주했다고합니다. 이미 분리되어 살고 있었지만 오늘 본문은 공식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는 야곱이 머물고 있고, 에서는 약속의 땅 밖으로 나갔다는 겁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에서의 이야기를 완결 짓습니다. 이제부터는 야곱, 곧 이스라엘의 이야기만 남았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후손입니까, 에서의 후손입니까?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약의 성도들을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온 언약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에서처럼 약속 밖에 있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약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 문제를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이 그렇게 혼란스러웠어도 하나님은 열두 아들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뒤엉켜 있어도,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붙잡는 것, 그것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힘입니다.

창세기 35:1-22절 /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26.05.04)

●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3절)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했고, 그 일을 갚겠다고 나선 아들들이 이방 족장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주변 족속들이 야곱의 가정을 가만두지 않으려 합니다. 위기의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 순간,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1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주하며 내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내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야곱은 원래 벧엘로 돌아오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고향을 떠나며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자리에서, 야곱은 이렇게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가나안 땅 세겜 근처 밭을 사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멈추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뒤로하고, 편한 자리에 머문 것입니다.

세겜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경계 같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세상도 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안정감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경계에서 머물던 야곱의 가정에 가장 충격적인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아,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거기가 아니다. 내가 너와 약속했던 벧엘로 올라가라.”

우리도 이런 경계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싶고 세상도 놓고 싶지 않은 그 자리.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경계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이 가족들을 모아 놓고 명령합니다. 2절,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라” 야곱의 가정에 이방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인데, 동시에 우상도 품고 있었습니다. 귀고리는 그 당시 부적처럼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야곱 가족들은 하나님도 믿고, 눈에 보이는 다른 것들도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가정이 겪은 문제의 뿌리였습니다.

야곱은 이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단절입니다. 이전의 삶, 이방 신상과 함께하던 삶과 완전히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 벧엘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그러자 5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살인을 저지른 야곱의 아들들을 주변 족속들이 추격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로 돌아서자, 하나님이 야곱의 가정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10절)

드디어 벧엘에 도착합니다. 약 30년 전, 혼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며 돌을 베개 삼아 누웠던 그 자리.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자리. 야곱에게 이 땅은 특별한 곳입니다. 7절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엘벧엘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에 오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10절 “내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이미 주셨던 이름인데 왜 다시 바꿔주실까요? 야곱이 실패하고 흔들리고 상처받은 뒤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야곱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와 우리 가정이 이렇게 엉망인데, 내가 정말 이스라엘이 맞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너는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실패한 뒤에도, 흔들린 뒤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11절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 이삭에게 이어졌고, 이제 야곱에게 더욱 구체화됩니다. 처음으로 왕에 대한 약속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다윗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약속입니다.

벧엘을 떠나는 길에 라헬이 산고 끝에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납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였습니다. 라헬은 숨이 끊어지면서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엄마 입장에서 자기는 죽어가고, 이 아이의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져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18절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아이의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야곱은 지금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딸은 성폭행당했고, 아들들은 살인자가 됐고, 가장 사랑하는 아내는 눈앞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이의 이름을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짓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야곱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이 아이도 슬픔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이 아이를 붙들 것이다.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 절망스러워서 ‘슬픔의 아들’이라는 이름밖에 붙일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이름을 바꿉니다.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것이라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그 자리를 벗어나 경계에 머물고 있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다른 하나는 정체성입니다. 실패하고 흔들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현실이 절망스러워도,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붙잡고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창세기 33:1-20절 / 엘엘로헤이스라엘(26.05.01)

●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4절)

에서라는 인생의 문제를 앞두고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발꿈치를 붙잡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이긴 자의 정체성, 즉 ‘이스라엘’로 살아가라 하셨습니다. 야곱의 겉모습은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 나빠졌지만 야곱의 내면에는 소망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에서가 자신을 선의로 대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에서를 보는 순간 야곱 과거의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단계별로 배치합니다. 여종과 그 자녀들을 맨 앞에, 레아와 그 자녀들을 중간에,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세웁니다. 맨 앞에 세워진 자녀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요셉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이 나중에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이 바뀐 야곱도,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3절“”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야곱이 앞장서 나갑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야곱의 마음속에는 위험이 닥치면 자신이라도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맨 뒤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이 먼저 나섭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이 야곱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향해 걸어갑니다. 어젯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야곱은 지금 절뚝이며 걷고 있습니다. 그 몸으로 형 앞에 나아가면서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혔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낮춘 것입니다. 절뚝이는 동생이 땅에 엎드려 일곱 번 절하는 모습. 20년 전 자기를 속이고 축복을 빼앗아갔던 그 야곱이 이렇게 나타났을 때, 에서의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은 4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울었더라”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복수하러 왔던 에서가 달려와 동생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극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라반이 야곱을 해하려고 달려왔을 때 하나님이 밤에 나타나 31:24절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처럼, 에서의 마음도 하나님이 움직이셨습니다. 약속의 사람을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 오늘 본문이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10절)

에서가 눈을 들어 아내들과 자녀들을 보며 묻습니다.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5절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11절에서도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라고 합니다. 이제 야곱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은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5절과 11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8절,10절 15절은 ‘에서의 은혜’를 구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에서에게도 은혜를 구하고 에서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은혜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 10절에 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20년 동안 야곱에게 에서의 얼굴은 두려움과 공포의 얼굴이었습니다. 어젯 저녁은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야곱은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32장과 33장은 ‘하나님의 얼굴’로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야곱이, 이제 원수 같았던 형의 얼굴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관계의 문제는 관계 자체를 붙잡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원수처럼 보이던 사람의 얼굴도 달라 보입니다. 인간관계에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을 향해 집중합니다. 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공격합니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은 항상 일어납니다.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내 마음의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엎드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볼 때 사람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에는 야곱의 부족한 모습도 있습니다. 17절에서 야곱은 숙곳에 머물며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리도 만듭니다. 28장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28:21-22절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약속했는데 벧엘까지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자기 집을 먼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아도, 우리의 변화는 한순간에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충만한 은혜를 받아도 교회 문을 나서면 이전과 비슷해집니다. 그렇다고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더디지만,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20절입니다.. 야곱이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만난, 내가 체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마무리합니다. 풀리지 않는 관계, 두려운 만남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두려웠던 사람의 얼굴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화가 더디게 느껴져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32:22-32절 / 날이 새도록 씨름하다가(26.04.30)

●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24절)

형 에서를 만나기 전 야곱은 예물도 보냈습니다.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22절 “밤에 일어나”라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서가 갑자기 기습해 올까 두려워 밤중에 일어나 아내들과 자녀들을 깨우고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소유도 모두 건너가게 하고 나서,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라고 합니다.

홀로 남은 야곱. 이 장면이 야곱의 인생 전체를 상징합니다. 아내도, 자녀도, 재물도 다 보냈습니다. 그 무엇도 이 큰 문제 앞에서 자신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야곱에게 남은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야곱은 평생 가장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24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이 홀로 남아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씨름을 겁니다. 나중에 야곱은 이 사람이 하나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30절에 야곱이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신학자 칼빈은 이 장면을 두고, 야곱과 씨름하신 분이 성자 예수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훗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그 시대에도 하나님이 야곱을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만날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인 것처럼, 야곱도 이 씨름을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씨름은 밤새 이어졌습니다. 야곱은 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고,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고, 외삼촌 라반과 20년을 씨름하며 버텨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이번에도 놓지 않았습니다.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야곱의 그 집요함, 그 아집과 의지를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 가지를 하셨습니다. 25절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더라” 허벅지 관절, 환도뼈는 인간 몸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골절되면 혼자 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씨름은커녕 걷는 것도 어렵게 됩니다. 31절은 말합니다.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을까요? 야곱은 자기 힘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아집과 고집, 자기 지혜와 의지, 이것들이 야곱 인생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야곱아! 너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내가 너에게 주려는 하나님의 약속, 그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은 절대 너의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다.” 이것을 하나님이 야곱의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에서의 문제는 네가 도망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해결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28절)

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놓지 않습니다. 26절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채로 매달립니다. 야곱의 평생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이 한 문장이 드러냅니다. 축복이었습니다.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던 것도,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것도, 20년 동안 라반 아래서 버텨온 것도 다 축복을 향한 집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야곱이 원했던 축복과 지금 야곱이 붙잡고 구하는 축복은 다릅니다. 이전에는 자기 방법으로 축복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꺾인 상태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십니다. 27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갑자기 씨름하다 말고 이름을 물으시는 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름은 정체성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붙잡는 자, 속이는 자’입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야곱의 대답 “야곱이니이다”는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이 동시에 자기 인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속이며 살아왔습니다. 경쟁하며 씨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28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세상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 이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곱아, 너는 이제 하나님이 함께하는 존재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에서 앞에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하나님이 새로운 정체성을 주신 것입니다. 이름이 바뀐 것은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속이는 자 야곱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30절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이 하룻밤의 만남을 자기 인생 전체에서 가장 소중한 장면으로 기억한 것입니다. 그리고 31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더라” 밤에 시작된 이 씨름이 새벽 해가 뜨면서 끝났습니다. 22절에서 두려움과 불안으로 시작된 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이 바뀐 뒤 찬란한 새벽으로 바뀐 것입니다. 야곱의 마음속에 가득하던 불안과 두려움이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의 빛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절고 있었습니다. 더 건강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몸의 중심이 꺾인 채로 새벽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해를 향해 걸어갑니다.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며 걸어가는 새로운 야곱, 이스라엘의 걸음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칠흑 같은 밤을 만날 때, 내 힘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할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가장 두려웠던 에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씨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바꿔주시고, 아침 해를 보게 하십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 이것이 오늘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의 길입니다.

창세기 32:1–21절 / 하나님의 군대(26.04.29)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1절)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라반의 위협을 겨우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 막아주셨고, 두 사람은 돌무더기를 쌓아 평화 조약을 맺고 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은 라반과 대등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20년 만의 귀향입니다. 한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는 좀 평안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한 문제가 해결되면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 앞에 라반보다 훨씬 두려운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20년 전 장자의 명분을 팥죽으로 사고, 아버지의 축복을 속임수로 가로챘던 그 일. 에서는 그때 야곱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20년이 흘렀지만 야곱의 마음속에 에서는 여전히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 먼저 만난 것이 있었습니다. 1절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구한 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그들을 보자마자 이렇게 외칩니다. 2절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그리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는데, 마하나임은 ‘두 개의 진지’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6절에 보면,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당시 400명의 무장한 군사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을 향해 에서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의 군대를 만나기 전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군대를 야곱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너와 함께 있다. 그것도 하나님의 군대로!”

20년 전 벧엘에서도 그랬습니다. 야곱이 혼자 두려움 속에 길을 떠날 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20년 만에 돌아오는 길에도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십니다. 가는 길에도, 오는 길에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야곱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야곱은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자신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심부름꾼을 에서에게 보냈는데 돌아온 소식은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 7절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합니다. 일행을 두 떼로 나눕니다. 에서가 한 떼를 치더라도 나머지 한 떼는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지만, 에서의 군대 앞에서 야곱은 여전히 떨렸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도 두려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두려움 앞에서 야곱이 무엇을 했느냐입니다.

●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11절)

야곱은 기도했습니다. 9절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이루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12절도 그렇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문제를 바라보며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 약속을 붙잡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도의 방법입니다. 절박한 상황일수록 문제에 집중하면 더 두려워집니다. 그런데 그 문제 위에 계신 하나님과 말씀의 약속을 붙잡을 때, 기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도 기도의 자리에 나올 때, 내 문제만 쏟아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그 말씀을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에는 또 하나 중요한 고백이 있습니다. 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가 이루었나이다” 지팡이 하나 들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20년 뒤 돌아올 때는 두 떼나 되는 사람과 가축과 재물이 생겼습니다. 예전의 야곱이었다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 지혜 덕분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이것이 자신이 감당할 자격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20년의 연단이 야곱을 이렇게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다시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 지금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야곱은 에서에게 예물을 준비합니다. 500마리가 넘는 짐승들을 준비합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세 떼로 나눠, 차례로 보내면서 에서의 마음이 누그러지도록 계획을 세웁니다. 야곱은 기도하고 난 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노력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노력 앞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모으고 최선을 다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시도록 기도하는 것. 야곱은 오늘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담대함입니다. 에서의 400명보다 먼저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와 함께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곁에 하나님의 군대가 있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의 방법입니다. 절박한 상황일수록 문제가 아니라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계획을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