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1 | 매일성경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2절)
7월을 시작하며 시편을 묵상합니다. 시편은 성경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150편으로 이루어진 가장 긴 책입니다. 그중 맨 처음에 놓인 1편은 시편을 여는 서문이자, 시편 전체를 꿰뚫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 첫마디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사람이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1절의 첫 단어 ‘복 있는’은 원어로 ‘아쉬레’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깊은 행복을 뜻합니다. 그러니 시편의 첫머리는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면 “참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입니다. 세상도 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복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복이 어디서 오는지 몰라 엉뚱한 곳에서 찾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편을 여는 이 첫 노래에서 참된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중요한 점은, 1절과 2절을 보면 행복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그 복은 우리의 삶을 통해 흘러옵니다. 그리고 그 삶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먼저는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다음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우리는 복을 받으려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시인은 먼저 하지 않아야 할 일을 말합니다. “아니하며, 아니하며, 아니하고”가 거듭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인이 악의 길을 단순히 ‘악하다’고 하지 않고, 세 단계로 묘사합니다.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동사도 ‘따르다(걷다)’, ‘서다’, ‘앉다’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죄가 어떻게 사람을 사로잡는지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악인들의 꾀를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이익을 좇아 작은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두 번 하다 보면 그것이 걸어가는 인생길이 됩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자리에 아예 주저앉아, 그런 삶이 자기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걷다가, 서다가, 앉는 것입니다.
죄는 한 번 행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꾀가 길이 되고, 길이 자리가 되어 우리를 집어삼킵니다. 누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으면 악 자체가 우리를 멸망의 자리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참된 복의 첫걸음은, 무언가를 하기 이전에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첫 단어인 ‘오직’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행복의 길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이 많고 가르치는 사람도 많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한 곳, 여호와의 말씀을 붙듭니다.
이 구절에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은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표현입니다. 말씀을 의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즐거워할까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이 즐거워지고, 즐거우니 자연스럽게 주야로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묵상하다’는 원어로 ‘하가’인데, 본래 “중얼거리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입니다. 말씀을 입에 담고 하루 종일 곱씹으며 되뇌는 것입니다. 사자가 먹이를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듯, 입속에 말씀을 놓고 중얼중얼 곱씹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러니 오늘 들은 말씀을 일터에서도, 길에서도 입으로 되뇌는 것, 그것이 묵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3절)
이렇게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에게 어떤 복이 주어질까요.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가 받고 싶어 하는 복은 보통 ‘형통’입니다. 그런데 그 형통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형통을 돈, 건강, 성공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진정한 복의 열매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이 참된 행복이라고 합니다.
왜 돈과 건강과 성공이 참된 복이 아닐까요. 4절이 답합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세상이 약속하는 그 복은 겉보기에 화려해도, 바람 한 번 불면 겨처럼 순식간에 흩어져 버립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습니다. 여기서 ‘심은’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옮겨 심으셨음을 뜻합니다. 그 복은 아무 문제가 없는 복이 아닙니다. 바람도 불고 폭풍도 치지만, 뿌리가 시냇물에 깊이 닿아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맺게 하시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또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가득하여 늘 은혜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형통과는 다른,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형통입니다.
4절은 복있는 사람과 반대되는 악인에 대해 말하는데,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악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흔히 나쁜 죄를 짓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시인은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단계를 그리며, 그 정점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을 둡니다.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제멋대로 사는 사람, 그가 악인 중의 악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중에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삶에서는 자기가 주인 되어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교회 안에 있다 해도, 그런 삶의 열매는 결국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견고하지 못한, 가벼운 인생입니다.
5절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자기가 주인 되어 산 삶은 무언가를 이룬 것 같아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며,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이 결론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서 의인은 곧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인정하신다’는 것은, 그와 동행하시고 늘 함께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반면 악인의 길이 ‘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징계를 내려 멸하신다기보다, 하나님 없는 선택을 거듭하며 스스로 점점 소멸해 간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순간순간 두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착한 일과 나쁜 일 사이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받아 그분을 따라 걸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주인 되어 세상의 방식으로 살 것인가, 이것이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복이 우리의 삶을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복 받기를 원하지만, 그 복은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를 통해 흘러옵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해야 할 그 한 가지가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입에 담아 곱씹는 삶, 그런 성도에게 하나님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견고하고, 철을 따라 열매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복을 베푸십니다. 그 복된 삶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합니다.
2026.06.30 | 매일성경
●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4절)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끝맺음이 아닌, 짧고 강한 권면, 동역자를 향한 감사, 그리고 무거운 경고와 따뜻한 사랑이 한데 어우러져, 바울이 이 편지 전체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짧고 굵은 권면을 연달아 던집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마치 한 편의 짧은 설교 같습니다.
첫째,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어 있음이 없으면 자칫 흘러가 버리기 쉽습니다. 둘째, ‘믿음에 굳게 서라’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무엇 위에 서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오직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셋째, ‘남자답게 강건하라’입니다. 이 표현은 ‘용감하게 행하라, 담대하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신31장)고 격려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바울은 영적 싸움이 치열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그 담대함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용감하게 나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14절에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권면이 이어집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3장에서 바울은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도 결국 은사는 자랑하면서 사랑이 없었던 데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 전체를 마무리하는 한마디는 결국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도, 굳게 섬도, 담대함도, 그 모든 것이 사랑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15절부터 바울은 동역자들에 대한 감사를 표합니다.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스데바나의 가정은 고린도가 속한 아가야 지역의 첫 회심자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황량한 땅의 첫 믿음의 사람이니, 그 자체로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더 귀한 것은 이 첫 회심자가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첫 번째로 믿은 그가 자기 사명을 ‘성도 섬기는 일’로 삼은 것입니다. 회심한 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이 땅에 복음의 기초를 세우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라 결심하고,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한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권합니다. “이 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고린도 교회에는 교만하고 자랑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교회를 섬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뭔가를 드러내고 눈에 띄는 일을 하는 사람을 통해 교회가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사명을 알고 묵묵히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 교회는 세워져 갑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라고 권합니다. 그 말에는 이런 성도들을 하나님이 반드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리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17-18절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이 세 사람이 고린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채운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직접 개척했기에 그들을 향한 사랑이 컸지만, 동시에 그 교회로 인한 상처도 컸습니다. 지도자를 두고 파가 갈리고, 일부는 바울을 두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 아픈 상황에서, 이 세 사람이 먼 길을 와 바울과 함께하고 격려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부족함을 채웠습니다.
또한 이들은 18절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바울의 마음도,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도 시원하게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문제를 일으키는 미숙한 신앙도 많았지만, 누군가의 부족을 채우고 자기가 섬길 자리를 아는 성숙한 성도들이 있었기에 교회가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서로에게 걱정과 근심을 안기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만 해도 기쁘고 감사하여 함께하고 싶은, 서로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22절)
19절부터는 문안 인사입니다. 특히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눈에 띕니다.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으로 쫓겨나 고린도로 갔다가 거기서 바울을 만나 함께 교회를 섬긴 이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부부를 그리스도 안의 동역자라 부르며,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롬16:3-4). “그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에서, 당시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 예배드렸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바뀝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문안과 은혜로 따뜻하게 끝날 것 같던 편지에, 갑작스러운 경고가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보았듯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바울의 말을 흘려듣고, 교만과 자랑으로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편지의 내용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말고 무겁게 받아 마음에 새기라고 강하게 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곧 그분의 사랑을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바울은 외칩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가 잘 아는 ‘마라나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깨어 담대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이 곧 오시기 때문입니다. 15장에서 본 부활의 영광을 입을 성도라면, 그 오심을 기다리는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23-24절이 마지막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할지어다”
편지를 마칠 때 흔히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하기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4절이 특이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이 편지는 책망이 강했습니다. 바울은 염려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편지를 읽으며 “바울이 우리를 공격하는구나” 하고 마음 문을 닫아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점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분명히 합니다. 이 모든 권면은 개인적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눈물의 기도 속에서 여러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라고. 그러니 ‘나의 사랑’이 너희와 함께한다는 이 마지막 한마디는, 강한 책망 뒤에 그 모든 말의 진짜 뿌리가 사랑이었음을 전하는 고백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담대히,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사람에게도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분별하여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서로의 부족을 채워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도 사람에게도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적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채워주는 사람, 그가 곧 누군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그렇게 서로를 세우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2026.06.29 | 매일성경
●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1절)
고린도전서 마지막인 16장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기근과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앞으로의 선교 계획입니다. 이 안에 은혜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연보’는 쉽게 말해 구제 헌금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같은 지도자들이 기근으로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아달라고 부탁했고(갈 2장), 바울은 그 일을 여러 교회에 알리며 고린도 교회에도 동참을 권한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줍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매주 첫날’은 주일을 가리킵니다. 부활 이후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습니다. ‘각 사람’은 몇몇이 아니라 모두가 빠짐없이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수입에 따라’는 더 정확히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신 대로”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인색하지 말고 그에 합당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모아 두라’고 한 것은, 미리 기억하여 준비하라는 권면입니다.
돈에 대한 이야기는 민감한 문제인데, 바울은 놀랍도록 당당합니다. 그 이유가 3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여기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헌금인데, 바울은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곧 영적인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손에 잡히는 은혜, 만질 수 있는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흘러 나가 다른 형제의 필요를 채우는 것, 그것이 헌금입니다.
바울이 이 헌금을 부르는 방식은 그 외에도 풍성합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같은 헌금을 ‘코이노니아’(나눔, 사귐)라 부르기도 하고, ‘디아코니아’(섬김, 봉사)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의 ‘연보’는 원어로 ‘로기아’인데, 이는 강제로 내야 하는 세금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더 드리는 헌금을 뜻합니다. 의무로 떠밀려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쳐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 헌금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것을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은혜받은 성도의 마땅한 반응으로 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은혜를 누리려는 사람,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물질로, 헌신과 봉사로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물질이 우리 시대의 주인이자 우상이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는 은혜가 과연 참된 은혜일까요. 물질로, 섬김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참된 은혜이며, 그 은혜는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풍성한 은혜로 우리 삶을 채웁니다. 바울은 그 확신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이 당당함은 6절에서도 드러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과 겨울을 함께 지내며 머물기를 원하면서,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당시 바울은 에베소에 있었고, 고린도에 들렀다가 다음 선교지로 떠나려 했습니다. 선교지로 가려면 물질과 후원이 필요한데, 그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담대히 요청합니다. 누군가의 복음 전파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 그들도 누군가를 보내어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받은 성도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7절)
5절부터 바울은 앞으로의 계획을 밝힙니다. 에베소에서 출발해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가려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나름의 계획이 있었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 오래 머물기를 원한 것은, 교회의 많은 문제가 하루 이틀에 해결될 수 없어 직접 가르치고 바로잡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 머무는 이유를 말합니다.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에베소는 복음 전파의 전초 기지와 같은 곳이어서, 여기서 복음이 힘 있게 퍼지면 놀랍게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적하는 자도 많았습니다.
지금 바울은 두 가지를 동시에 보고 있습니다. 복음이 확산될 ‘광대한 문’과, 그것을 막는 ‘많은 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게 세워질 때는 반드시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가 중요합니다. 대적에 초점을 맞추면 멈출 수밖에 없지만, 열린 문에 초점을 맞추면 그 대적을 이기고 나아가게 됩니다. 바울은 대적이 아니라 복음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늘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문제와 어려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상황이 반드시 있습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통해 이루실 그분의 놀라운 계획에 초점을 맞출 때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10-12절에서 바울은 두 동역자를 언급합니다. 먼저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앞서 4:17절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일깨우도록 디모데를 보낸다고 했는데, 여기서 그를 보내며 마음에 걱정이 많아 보입니다. 10-11절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라”
디모데는 젊은 사역자였습니다. 교만과 자랑이 밑바닥에 깔려 자기 기준으로 지도자를 평가하고 줄 세우던 고린도 성도들이라면, 젊은 디모데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교만이 아볼로파, 바울파, 베드로파 같은 분쟁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존중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당부합니다.
12절은 아볼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가라고 여러 번 권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교회가 파당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자신이 가면 오히려 갈등을 키울 수 있다고 여겨,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역자들의 성숙한 분별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헌금이 받은 은혜의 가시적 표현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제 헌금을 ‘은혜’라 불렀습니다. 우리의 헌금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 은혜가 물질로 흘러나오는 것인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늘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방해하는 문제가 함께 있습니다. 방해하는 사람이나 걸림돌이 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6.26 | 매일성경
●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바울은 어제 본문 결론으로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은 분명히 있다고 담대히 선포하며, 그 부활이 어떻게 온 세상의 회복으로 이어지고, 부활을 소망하는 성도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서 ‘첫 열매’는 원어로 ‘아파르케’입니다. 구약에서 추수의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던 예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추수 때 가장 먼저 거둔 한 단의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 한 단은 두 가지를 뜻했습니다. 하나는 뒤이어 거둘 추수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그 추수가 뒤따른다는 보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그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을 대표하며 동시에 우리 부활을 반드시 보증한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예수님이 역사상 처음으로 죽었다 살아난 분은 아닙니다. 엘리야 시대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처럼 죽었다 다시 일어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을 때와 같은 몸으로 일어나 결국 다시 죽었습니다. 그것은 소생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은 단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죽지 않는 새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참된 부활의 첫 분, 죽음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을까요? 21-22절은 죽음이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시작되었듯, 생명과 부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다고 합니다. 아담은 옛 인류의 대표로서 모든 사람을 죽음 아래로 데려갔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대표로서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부활을 가져오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우리는 아직인가?” 그래서 바울은 부활에 순서가 있음을 말합니다. 23절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가장 먼저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고, 그다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자들이 부활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강림하실 때, 부활과 함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24-28절에서 바울이 길게 설명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이 세상을 지배하던 악한 세력이 완전히 패배하여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이 세상에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고, 공중 권세 잡은 세력이 여전히 활개를 치며 사람들을 어둠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옛 뱀의 머리를 깨뜨렸습니다. 일찍이 창세기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신 약속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창3:15절). 십자가 사건으로 사탄의 세력은 이미 치명타를 입었고, 승패는 이미 갈렸습니다. 다만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에, 패배가 결정된 세력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입니다. 그 마지막 승리가 완성되는 때가 주님이 강림하시는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십니다. 또한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두실 때까지 왕 노릇 하십니다. 26절이 핵심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죄로 인해 죽음이 왔는데, 그 죄가 그리스도로 인해 정복됨으로 마침내 죽음까지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제 죽음은 더 이상 믿음의 성도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27-28절은 좀 복잡해 보이지만 결론은 분명합니다. 만물이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아들도 친히 만물을 복종케 하신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입니다. 여기서 아들이 아버지께 복종한다는 말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구속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신 뒤 그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세상이 죄로 어그러졌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온전히 회복하셔서, 죽음이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창조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회복이 부활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부활이 없다면 이 회복도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만큼 부활은 결정적입니다.
●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34절)
29절에서 바울은 한 가지 예를 듭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고린도 교회에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아 해석이 어려운 구절입니다. 아마 먼저 믿었다가 죽은 사랑하는 이들과 부활하면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며, 신앙고백하고 세례받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관습이 무엇이든 그 밑바탕에 부활의 소망이 깔려 있었다는 점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0절부터 바울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예로 듭니다. 30절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부활이 없다면 예수를 위해 목숨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31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부활이 없는 사람들의 결론을 그대로 옮깁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이 말은 본래 이사야서에서 심판 앞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향락에 빠진 사람들의 태도를 가리킨 표현입니다. 죽으면 끝이라면, 굳이 고생하며 헌신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즐기다 한 번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돌아봅니다.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목소리가 도처에 있습니다. 그래서 33절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그런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복되고 가치 있으며 장차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이런 시대일수록 말씀으로 정신을 차리고, 부활이 있다면 이 땅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히 알아 흐트러짐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부활의 확신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첫 열매가 되셨으니, 우리도 반드시 부활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보증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이 확신을 품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 신앙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가치는 죽은 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합니다. 바울처럼 날마다 주님을 위해 죽으며, “네가 제일 중요하다”는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을 소망하는 성도의 복된 삶입니다.
2026.06.25 | 매일성경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13절)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전했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회상하며, 부활이 수많은 증인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 설명합니다. 15장은 고린도전서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장이 마지막 인사임을 생각하면, 바울이 마지막에 부활을 다룬다는 것은 곧 부활 신앙이 성도에게 가장 핵심적이며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바울이 그토록 분명히 전한 부활인데,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 복음을 전했고, 그것을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굳게 붙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철학과 잘못된 신앙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 자체를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헬라철학, 특히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사고입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꿔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은 거룩하게 여기면서 세상에 나가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 그 한 모습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이원론 때문에 육체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죽으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영적으로만 오시고 영적으로만 부활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은 온전한 육체로 오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가정을 거듭하며, 부활을 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13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고린도 성도들의 기준대로 육체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조차 부활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자기 주장이 얼마나 큰 모순을 품고 있는지 보지 못한 채, 자기 기준으로 신앙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복음도 헛되고, 그 복음 위에 세워진 믿음도 헛됩니다. 신앙의 기초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우리 생각이나 세상의 기준으로 신앙을 재단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부활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모든 신앙의 기초가 헛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셋째, 15절 만일 부활이 없다면 바울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마저 공격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지 못하신 것이 되고, 결국 하나님을 무능한 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 전체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능력까지 부정하는 일입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19절)
17절에서 바울은 한 가지를 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여기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죄 사함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됩니다. 죄가 인간에게 가져온 가장 심각한 결과가 죽음인데, 그 죽음을 이기고 정복한 것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이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는 여전히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죄 사함은 믿지만 부활은 못 믿겠다”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 역시 십자가의 은혜는 깊이 새기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사람이 죽으면 정말 다시 살아날까”라고 의심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몸의 부활, 곧 우리 몸이 새로운 몸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봐야 안다, 혹은 그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식으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18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잠자는 자’는 예수를 믿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믿고 죽은 이들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전 생애를 헌신했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건 그 모든 헌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가장 헌신한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논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은 분명히 있고, 그래서 이 땅에서의 수고와 헌신은 결국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어집니다. 죽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삶을 제대로 살듯, 부활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이 땅의 삶을 제대로 살아갑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매 순간 십자가 앞에 나를 죽이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부활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부활을 머리로만 아는지, 삶으로 살아가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을 압니다. 그러나 핍박의 자리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위협 앞에 설 때, 부활 신앙이 없으면 믿음을 끝까지 고백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장담했지만 그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부활을 믿기에 죽음이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부활 신앙이 주는 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이 확실하다면 이 땅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이 고백했듯, 부활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을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주님이 주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부활의 삶의 열매를 맺어가기를 원합니다.
2026.06.24 | 매일성경
●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1절)
15장에서 바울은 새로운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부활입니다. 13장이 ‘사랑장’이라면 15장은 ‘부활장’입니다. 바울이 부활을 다루는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영적인 부활만 생각하고 육체의 부활은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본격적인 가르침에 앞서, 복음의 기초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설명합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울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들은 복음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며 자기 생각과 세상의 기준대로 왜곡한 데 있었습니다. 복음의 변질입니다. 이처럼 교회 문제의 뿌리는 복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2절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은 곧 고린도 성도들이 지금 그 말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두려운 것은, 부활을 잘못 이해하면 그것이 구원의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복음을 오해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기초, 특히 복음의 중심 위에 바르게 서 있는가 하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가 변질된 이유는 세상의 가치관이 하루아침이 아니라 하나둘씩 서서히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과 다르지 않은 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에도 그대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가 복음 위에 제대로 서 있는지 늘 말씀을 통해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내용이 3-4절입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바울이 두 번 강조하는 말은 ‘성경대로’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두 절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는데, 그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확증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함께 가야 합니다.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으면 반쪽이고, 부활만 있고 십자가가 없어도 반쪽입니다. 십자가로 죄가 해결되고, 그 결과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음이 부활로 확정되는 것, 이것이 온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3-4절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죽으셨고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해 보이는 이 사실을 바울이 굳이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육체로 와서 비참하게 죽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이 영적으로 오시고 영적으로 죽으셨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못박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육체로 죽으셨고, 온전한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부활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셨고, 우리도 육체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지금의 병들고 연약한 몸 그대로가 아니라, 완전하고 새로운 몸, 곧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 “내게도 보이셨느니라”(8절)
5절부터 바울은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셔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셨음을 강조합니다.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시고 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6절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일시에’입니다. 오백 명이 각자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증인들 대다수가 편지를 쓰는 지금도 살아 있다고 덧붙입니다. 곧 누구든 직접 물어 확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7절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가족을 전도하기가 가장 어렵듯, 동생 야고보도 형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고도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어, 후에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만났고, 바울은 승천 이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기에 형태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래서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5-8절까지 ‘보이셨다’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부활의 증인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바울은 본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핍박자였던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 은혜이고, 그 은혜가 그를 헌신적인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모든 것이 이해되었습니다. 부끄럽게만 여겼던 십자가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도 주님과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미래를 바라보았기에 바울은 그토록 헌신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기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11절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수많은 증인이 함께 증거한 것이며, 고린도 성도들도 그 복음을 받아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 복음을 바르게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신앙의 기초인 복음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초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바른 복음인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향으로 변질된 복음이 아니라,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살아나신 그 복음 위에 날마다 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를 받은 바울이 누구보다 헌신했듯, 그 은혜를 경험한 우리도 감사함으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활의 분명한 소망을 품고 주님 다시 오실 때를 바라보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