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1-13절/네가 어디 있느냐(26.01.05)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6절)

​2:25절은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 어떤 허물이나 장벽이 없는 하나 됨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하나 된 관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3장으로 오면 모든 관계가 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짐승이 ‘뱀’입니다. 1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기 ‘간교한’은 ‘지혜롭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지혜를 사탄이 사용하니 간교함이 됩니다. 간교함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뱀은 먼저 여자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는 인간의 타락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절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도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으로 먹되 단 하나 선악과만을 금하셨습니다(2:16). 그런데 하나 금하신 것을 전부 금하신 것으로 질문을 던져 하나님에 선의에 대해 의심하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신뢰에 균열이 생기도록 합니다. 이처럼 사탄은 사람의 약점을 잘 알고, 또한 사탄의 공격은 작은 틈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뱀의 질문에 여자가 대답하는데,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답입니다. 3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의 명령은 2: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였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만지지 말라”는 말을 포함시키고, “반드시 죽으리라”를 “죽을까 하노라”로 바꿉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고, 알았더라도 견고하게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아담이 아닌 하와를 먼저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성경 흐름으로는 선악과 명령은 하와가 만들어지기 전에 아담에게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와의 마음에 균열이 생긴 것을 확인하자 사탄은 직접적으로 공격합니다. 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오히려 5절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선악과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처럼 다스리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임을 알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이 되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알면서도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람을 속이는 옹졸한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여인이 넘어갑니다. 그러자 선악과가 이전에 보던 것과 달리 보입니다. 이전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과일이었다면 이제는 6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입니다. 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따먹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먹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입니다. 그렇다면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을 때 아담도 같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담도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선악과를 주자 받아 먹습니다.

그 결과가 7절인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사탄의 말처럼 눈이 밝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고 맙니다. 이렇게 인간의 타락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9절)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실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경고하신대로 징계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먼저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그러자 아담과 하와의 반응이 8절 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전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기다렸습니다. 만남이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습니다. 그래서 숨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이런 아담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9절 “네가 어디 있느냐” 몰라서 찾으시는 것이 아닌,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육체가 어디있느냐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상태냐고 묻고 계십니다. 아담 영혼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담은 육체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 때문에 두려워서 숨었다는 겁니다.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 때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 핑계하고 탓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까지도 탓합니다. 12절에서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에게 핑계하면서 하와를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라고 합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된데는 하나님 탓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핑계하고 합리화하게 합니다. 누군가를 탓합니다. 그러면서 죄인을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여전히 우리도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13절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의 물음에 뱀을 핑계합니다.

첫 번째 아담은 이처럼 사탄의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가 들어왔습니다. 사탄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고 승리하셨습니다. 마4:10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만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말씀 붙잡고 승리합시다.

창세기1:14-25절/공허를 채움으로(26.01.02)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14절)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홀로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의 교제와 기쁨을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시기를 위함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런 하나됨이 죄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목적으로 창조하셨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하시고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세상의 모습은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혼돈과 공허, 흑암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혼돈의 세상에 질서를, 공허의 세상에 채움을, 흑암의 세상에 빛을 비추십니다. 1-13절이 질서를 세우시는 과정이라면, 오늘 본문은 공허를 채우시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을 만난다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만드신 것이 빛이라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빛입니다. 태양의 빛도 중요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우리 영혼을 비추는 생명의 빛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통해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광명체를 통해 낮과 밤을 나누게 하셨다는 말이 반복됩니다(14,16,18).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는 빛과 어둠, 낮과 밤이 다 좋은 것입니다. 필요한 것입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쉼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둘째 날은 궁창을 중심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십니다. 쉽게 설명하면 하늘 공간을 만드시고 밑으로는 바닷물을, 위로는 물로 이루어진 대기권을 만드셨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창조의 중심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시기 위한 기초 작업입니다. 셋째 날은 궁창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모이고 땅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곳에 각기 종류대로 식물을 심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혼돈의 세상에 공간을 만드십니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말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4,10,12,18,21,25,31).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니 생각나는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계획 속에서 하나하나 창조하십니다. 1-3일은 기초를 세우시고 그 토대 위에서 4-6일은 세부적인 것들을 채워 넣으십니다. 그래서 1일과 4일이 연결되고, 2일과 5일, 3일과 6일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통해 계획대로 이루어지니 기뻐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콧노래를 부르시면서 행복함으로 창조하시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며 영광을 받으시고 은혜를 베푸실 날을 기대하시면서 창조하십니다.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25절)

​넷째 날, 하나님은 하늘에 광명체를 만드십니다.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입니다. 해와 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사람들이 해와 달을 우상으로 숭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광명체들을 우상으로 경배해야 할 대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낮을 주관하고 밤을 주관하게 하신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나라는 겁니다.

다섯째 날은 하늘의 새를 만드시고 바다의 생물들을 만드십니다. 그 가운데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이방 신화에는 신과 경쟁하는 무서운 바다 큰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말이 “번성하여”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주신 축복이요 사명인데요, 하나님은 이처럼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하나 반복되는 말은 “종류대로”입니다(21,24,25). 모든 바다 생물과 땅의 짐승들을 하나님은 하나하나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만물이 진화를 통해서 생겨났다는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모든 만물은 우연한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 속에서 종류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 땅에 있는 꽃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섯째 날은 땅의 생물들을 종류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합니다. 창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만드시고 다른 것을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환경을 완전하게 만드시고 최종적으로 인간을 만드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을 아시지만 곧바로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세심하고 완벽하게 준비하시고 중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니 당장 눈에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

26년 한해 말씀의 능력으로 채우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한해가 됩시다.

시편150:1-6절/호흡이 있는 자마다(25.12.3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1절)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편의 마지막 편을 묵상합니다. 시편의 시작은 1:1-2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의 주제입니다. 행복한 인생은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고, 머물러야 하는 곳에 머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 150:6절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로 끝이납니다. 모든 사람에게 호흡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기쁨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인정하고 주인 삼고 찬양하는 삶이 행복입니다.

본 시편은 6절로 구성된 짧은 시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 찬양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어디서 찬양해야 하며, 찬양의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 그리고 누가 찬양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먼저 찬양의 장소는 1절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입니다. 성소는 땅에 있는 성전을 의미하고 권능의 궁창은 하늘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땅과 하늘, 즉 모든 공간에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본다면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항상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언제든지 찬양해야 합니다. 기쁠 때만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고, 온 세상을 섭리 속에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만나 탄식이 변하여 찬양이 됩니다. 사실 극심한 고난 속에서는 찬양과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할 때 찬양하게 됩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6절)

​그렇다면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2절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은 지극히 위대하십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출20:18절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라고 합니다. 우레와 번개, 가득한 연기 가운데 임하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을 땅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강림하시고,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구원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들이지만, 하나님이 아니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특히 우리가 늘 기억하며 찬양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의 구원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어둠 가운데 방황하던 인생이 빛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기적을 통한 능력이 아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가 가장 위대한 능력이요, 완전한 지혜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찬양해야 할까요? 3-5절에는 다양한 악기들이 등장합니다. 나팔, 비파와 수금, 현악과 퉁소, 그리고 제금입니다. 이에 더해서 4절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라는 겁니다. 춤추며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5절에는 “큰 소리”와 “높은 소리”가 반복됩니다. 이런 표현들은 시인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격이 어떠한지를 알게 합니다. 찬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매일, 전심으로 찬양해도 부족할 따름입니다.

이런 시인의 마음에 다른 것들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어둠과 불안, 원망과 불평, 거짓과 탐욕이 자리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이 가장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먼저는 예배할 때 시인의 마음으로 전심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 찬양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목소리 높여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가사를 생각하지 않고 입술로만 찬양해서는 안 됩니다. 늘상 불러서 익숙한 찬양이라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찬양할 때가 있습니다. 바른 예배의 태도가 아닙니다. 찬양의 가사는 성경의 내용을 압축해서 전달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니 가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찬양은 노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면 모든 것이 찬양입니다. 입술의 고백도, 마음의 생각도 찬양입니다. 그러니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시편148:1-14절/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25.12.29)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1절)

​본 시편도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찬양 시입니다. 시인은 1-6절까지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7-10절에서는 밑으로 내려와 바다와 땅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11절부터는 세상의 왕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찬양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혼자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과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모든’입니다(2,3,9,11,14). 온 세상 만물,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기에는 부족함을 느낍니다. 지금 시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먼저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존재는 천군천사입니다. 2절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뿐만 아니라 3절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 4절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하라고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하늘에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하늘은 가장 높은 하늘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5절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하나님의 명령, 즉 말씀의 능력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손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한 6절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고 하는데 의미가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움직이는 법칙을 확고하게 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상은 하나님께서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시점인데요, 그동안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 역시 하나님께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시인도 광야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별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다양한 빛을 내고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별들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별 하나와 지구가 충돌한다면 세상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수많은 별들이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우연이 아니요 하나님의 붙들어주심입니다. 시인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니 곳곳에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가득합니다.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14절)

​이제 시인은 하늘에서 밑으로 내려옵니다. 바다와 땅을 향해 찬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연현상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8절 ‘불’은 번개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라고 합니다. 세찬 비바람도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붑니다. 산과 나무들 그리고 짐승들과 새들도 찬양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산들도 모양이 다 다릅니다. 나무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다양성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섬세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꽃 한송이에도 온 우주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1절부터는 땅 위에 사는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이 찬양해야 합니다. 특히 12절은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라는 표현을 통해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가 찬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이유를 밝힙니다. 13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하나님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뛰어나시기 때문입니다. 종종 글이 성경 저자의 마음을 다 담지 못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요한계시록도 그렇습니다. 요한이 하늘로 올라가 바라본 장면은 이 땅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시인의 고백도 그렇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높으심과 영광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말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경험해야 합니다. 어떤 기도의 응답보다 이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고 찬양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한 삶입니다.

어쩌면 시인은 고난 중에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난 속 광야에서 기도하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보고, 나무와 짐승을 보고, 번개와 바람을 만나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발견하고, 영광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벅찬 감격이 시인의 마음에 가득합니다. 자연을 붙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시인의 인생 역시 붙들어주신다는 사실이 감격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14절은 “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라고 찬양합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으로 향하던 시인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 “모든 성도”에게로 향합니다. 크신 영광의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자들이 세상의 부와 권력자들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도들입니다. 뿔을 높여주십니다. 능력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성도들을 향하고, 성도들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매일 새롭게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고 벅찬 감격의 찬양을 드리는 삶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또한 하나님 백성됨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이 됩시다.

미가6:1-16절/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25.12.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2절)

​1-2절에는 ‘변론’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법정에 세우시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심각한데 이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증인으로는 2절의 “산들과 견고한 지대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산과 땅이 항상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답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론하시는 이유는 3절 때문입니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괴롭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6절부터의 말씀을 통해 보면 아마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무거운 짐으로 느낀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안식일에 그리고 절기마다 다양한 제물과 방법으로 제사드리는 일이 부담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약백성으로 세상과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섬기는 것이 괴롭고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없이 쉽게 살면되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합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인 문제인지를 알려주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은 겁니다. 그래서 5절에는 “기억하라”가 반복됩니다. 백성들이 기억할 것은 먼저 4절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입니다. 400년 애굽 노예생활하던 백성들을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백성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인도자를 세워주셔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5절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발람의 이야기를 자주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이 거짓 선지자인 발람을 돈을 주고 매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발람이 저주가 아닌 축복을 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싯딤은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2명의 정탐을 보낸 장소입니다. 그리고 길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머문 곳으로 가나안 정복의 전초기지가 된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항상 함께 하였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부담이 아닌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면서 꼭 기억하고 회복해야 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십자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예배가 부담이 아닌 하나님과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기쁨과 감격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향한 섬김이 은혜와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8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 년된 송아지 아니면 천천의 숫양, 만만의 기름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맏아들을 드린다해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제물이 아닌 백성들의 삶을 원하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본받아 정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제물은 필요가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로 이어집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과거에 신앙이 좋다는 분들을 보면 자신만 신앙이 좋다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말도 함부로 합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9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9: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습관과 형식이 됩니다. 그러자 바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과 가증한 에바가 있습니다. 거짓 저울추를 사용해서 사람들을 속이고 강포와 거짓으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가 13절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나니” 이들의 노력, 기대와 전혀 다른 피폐한 삶을 살아갑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쌓아도 보존되지 못합니다. 씨를 뿌려도 추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예법을 지킨다고 책망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 아합이며, 아합의 아버지가 오므리입니다. 악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이들의 길을 걷고, 이들의 삶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사랑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은혜에 기초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물이 아닌 정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입니다.

미가4:1-13절/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25.12.24)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2절)

​미가 선지자는 3장에서 지도자들의 죄악을 고발했습니다. 정의를 미워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3:12절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4장으로 오면 갑자기 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이어집니다. 2장에서도 그랬습니다. 2:1-11절까지는 침상에서 죄를 꾀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힘있는 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2:12-13절은 남은 자를 모으시겠다는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의 외침에는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가 번갈아 등장합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반드시 회복으로 이어집니다. 바꿔말하면 회복을 위해서는 징계를 통한 정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변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은 1절 “끝날에”입니다. 심판의 끝이 아니고 회복이 끝입니다. 승리가 끝입니다.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끝날에 수풀만 우거졌던 하나님의 성전이 산 꼭대기에 높이 서게 됩니다. 많은 민족들이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이들이 성전을 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2절은 이것을 ‘도’, ‘율법’, ‘말씀’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하나님 없이 행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던 사람들이 인생의 문제와 한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어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로 나와 인생의 길을 찾고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와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면 칼과 창으로 서로 전쟁하는 나라가 아닌 보습과 낫을 사용하는 평화의 나라가 임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4절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표현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두렵게 할 자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5절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친히 온 세상에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십니다.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이를 통해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복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머무는 가정과 일터 그리고 공동체 안에 함께 하시며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머무는 곳이 칼과 창이 난무하는 곳이 아닌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7절)

​범죄한 이스라엘은 해산하는 여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할 것입니다. 아름다웠던 성읍은 무너지고 이방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함부로 대할 것입니다. 뼈저리게 죄악의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소망이 사라지는 절망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을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회복하십니다.

돌아오게 하시는데 6절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라고 합니다. 저는 자와 환난 받는 자들을 모으십니다. 연약한 자들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남은 백성이 되게 하시며 이들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십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야곱의 가족 70명을 이루게 하시고,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만들어가십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8절 “너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이전의 영광과 권능을 회복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3절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거침없이 달리고, 거침없이 승리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합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쇠의 뿔처럼, 놋 굽처럼 달리고 승리케 하실 것을 기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