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9:18-29절/보고 알린 결과(26.01.13)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22절)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그런데 18절은 함을 소개하면서 특이하게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가나안이 계속 반복됩니다(18,22,25,26,27). 오늘 사건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미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절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하나님은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노아와 아들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 같은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대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노아입니다. 20절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라고 하는데 여기 “농사를 시작하여”가 원어로 보면 “땅의 사람”(하아다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담이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를 먹고 벌거벗은 수치를 느낀 것처럼 노아는 마시고 취하면 안 되는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고 누워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창세기 3장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노아의 모습이 말해주는 것은 홍수심판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죄가 계속해서 확산되고 결국은 사람이 사람을 저주하는 데까지 나갑니다.

노아가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6:8-9절은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당시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홍수 이후 그는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닌 술에 취한 삶을 살아갑니다. 왜 그랬는지 성경이 설명하지 않지만, 홍수 이전에는 영적 긴장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를 만들고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데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맺어주면서 영적 긴장감이 사라지고 그 틈새를 포도주로 채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노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긴장하며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를 지켜주는 방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힘들어도 하나님을 감당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다른 길로 가지 않게 합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있는 것을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보게 됩니다. 22절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라고 하는데 여기 “보고”가 원어로 ‘라아’인데 “자세히 관찰하다”의 뜻입니다. 무의식적으로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또한 “알리매”도 신이 나서 떠벌린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주목하여 보고 떠벌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줍니다. 23절은 다시 한번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고 반복합니다. 함의 행동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창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하게 하고 그들이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게 한 것이 뱀이요 사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담과 하와에서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면서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함의 행동은 단순한 고자질 정도가 아니라 사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담 이후에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갈라진 것처럼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람과 사탄의 사람이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26절)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일어났던 이야기를 듣고 저주를 합니다. 25절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잘못은 함이 했는데 저주는 아들 가나안이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문제의 시작이 가나안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즉 함이 보기 전에 가나안이 할아버지의 수치를 보았고 그것을 아버지 함에게 알려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성경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창3장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창3:15절은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신 내용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도 잘못은 뱀이 했는데 뱀과 뱀의 후손이 저주를 받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대결이 일어날 것이고 여자의 후손이 승리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저주가 함의 아들과 후손에게 임합니다.

그렇다면 이 저주는 미래를 내다보게 합니다. 여자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 사탄의 후손이 가나안땅이 정복되고 그들이 노예가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서 사탄이 완전히 패배할 것을 말하는 겁니다.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죄는 계속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세상 향한 구원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승리하십니다. 그것을 미리 알려주시고 이루어가십니다.

세 아들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26-27절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야벳은 창대하게 됩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노예가 됩니다. 야벳은 창대하게 되지만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셈이 가장 복된 삶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전히 이 시대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경건했던 노아의 술취함을 보면서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읍시다. 또한 누군가의 허물을 보고 알리는 것이 아니라 덮어주고 기도해주는 삶이 됩시다.

창세기9:1-17절/무지개 언약(26.01.12)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절)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을 예배한 노아와 가족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염려도 있습니다. 홍수로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런 노아와 자녀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2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 말씀은 창1:28절에서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명령입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노아를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복을 받아 생육하고 번성하길 원하시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복된 나라 이루길 원하십니다.

홍수 심판 이전과 이후에 두 가지 점이 다릅니다. 하나는 땅의 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한 타락은 자연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자칫 짐승들이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데 이처럼 두려움을 주셔서 인간을 보호하십니다. 또 하나의 다른 점은 육식을 허락하십니다. 이전에는 채식을 하게 하셨습니다(1:29절). 이제는 육식을 허용하십니다. 홍수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맺히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육식을 통해 생존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육식을 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하나님은 창2장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노아에게는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잡아서 피를 빼고 먹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피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식을 위해 동물을 잡는다고 해서 생명을 죽이는 일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살인을 엄격하게 금하십니다. 살인이 일어나면 생명의 피를 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의 의미가 6절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즉 생명은 생명으로 갚도록 하십니다. 생명은 소중합니다. 그 이유가 6절 하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자신이 상처난 것 때문에 무자비하게 소년을 죽이고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소중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죄악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금지하십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갑질이라는 말이 만연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소중한 존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듯 그들 역시 사랑하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13절)

​홍수 이후 노아와 가족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비 구름이 하늘에 떠오르면 혹시 다시 홍수심판이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런 노아와 가족들에게 하나님은 언약을 맺어주십니다. 그래서 8-17절까지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9,11,12,13,15,16,17).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와 맺는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하십니다(9,15). 원래 언약은 혼자 맺는 것이 아니고 쌍방간에 맺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 언약”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신실하게 이루어가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맺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대상에는 노아와 가족들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루십니다. 그래서 이 언약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와 이루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이 은혜요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증거를 주시는데 ‘무지개’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말씀은 이 무지개를 누가 보도록 하늘에 두신 것일까요? 16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내가 보고”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무지개를 영어로 ‘Rainbow’라고 합니다. Rain과 Bow가 합쳐진 낱말인데, Bow가 활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지개가 히브리어로 ‘케세트’인데, 의미는 활도 되고 무지개도 됩니다. 그리고 활의 방향이 세상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 그리고 모든 생물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보호하십니다. 세심하게 필요를 채워주시고 미래에 대한 약속까지 해주십니다. 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도 붙잡아 주십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때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창세기6:1-22절/방주를 만들라(26.01.09)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6절)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작정하십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창조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시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1절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다시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돌아간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은 노아 당시 세상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한마디로 섞여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섞인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많은 설명들이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셋의 후손이요,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가인의 후손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흐름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악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행하는 일들이 ‘보고’, ‘좋아하고’, ‘삼는다’입니다(2절). 마치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보고’, ‘좋아하고’, ‘먹는다’와 같습니다. 죄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4절도 그렇습니다. 당시 ‘네피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네피림의 의미는 ‘타락한 자들, 떨어진 자들’입니다. 악한 자들이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4절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인해서 태어난 자들이 ‘용사’였고, 이들이 행하는 일들이 “명성이 있었다”는 것은 힘과 권력 통해 자기 이름을 날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음에 드는 모든 여인을 마음대로 취하고 있고 그것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원어는 ‘베네 엘로힘’인데요, 의미가 “하나님의 아들들”도 되고 “신의 아들들”도 됩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신의 아들’은 힘을 가진 왕이나 도시의 지배자들에게 붙여졌습니다. 어쩌면 가인과 같이 성을 쌓고 성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가인의 후예인 라멕처럼 일부다처제를 행하면서 무자비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군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섞여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섞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와 포악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모습과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3절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120년 뒤에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행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

​5-7절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아입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그러나’의 삶을 살았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데 노아만은 하나님을 향해 걷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의롭게,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붙잡는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심판 계획을 노아에게 말씀하시고 방주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재료는 고페르나무이고 역청을 칠합니다. 크기가 길이는 150m, 넓이는 25m, 높이는 15m입니다. 거대한 방주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들어가서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합니다. 120년 동안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을까요? 얼마나 조롱과 비웃음을 견뎌야 했을까요? 흔들리며 멈추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준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은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하십니다. 구약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어떤 언약일까요? 아담과 맺으신 창조 언약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라”는 언약입니다. 비록 세상은 심판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노아를 통해서 이 언약이 이루어가시길 원하십니다. 인간은 다시 실패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셔서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면서 붙잡아야 할 것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또한 이 시대를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5:1-32절/하나님과 동행하더니(26.01.08)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1절)

​5장은 아담의 계보를 적고 있습니다. 여기 ‘계보’는 ‘톨레돗’이라는 단어인데, 창세기는 10개의 톨레돗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2번째 톨레돗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읽기 힘든 부분이 바로 계보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때 계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새 일을 감당하는 중심인물은 보통 계보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도 4장에서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만들어가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노아’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6장은 노아 홍수 사건의 시작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절망적이어도 하나님의 뜻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 계획하신 일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사람(아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130세에 3절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처럼, 아담도 자기 모양과 형상대로 셋을 낳습니다. 이것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범죄한 아담의 ‘자기 형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온전하지 않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아담이 낳은 자녀는 가인도 있는데,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범죄 이후 세상은 둘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가인의 후예들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주인 삼는 셋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중심의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가인의 후예가 아닌 묵묵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의 길을 걷는 셋의 후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어느 길을 걸어야 할지 분명합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습니다. 이미 4: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세상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족보에서 반복되는 말은 “낳고”와 “죽었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살았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죽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육체적 죽음을 가져옵니다. 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고리를 끊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에녹입니다.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죽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동행의 원어적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스스로 걸어갔다”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주도하는 세상 속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것입니다. 세상의 길이나 많은 사람들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외로운 싸움이요, 고단한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동행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은 것이 계기가 된 듯합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로 969세를 삽니다. 그런데 연대를 계산해보면 므두셀라가 죽던 해 노아 홍수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가 태어나면서 에녹은 죄악된 세상의 끝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세상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이루실 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은 노아를 낳습니다. 29절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죄악된 세상에 안식, 안위를 가져올 아들입니다. 그런데 안위가 심판을 통해서 오게 될 것입니다.

4장과 5장을 비교해보면 등장 인물들 이름이 비슷합니다. 에녹, 라멕 등. 그러나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동행은 한두 번 함께 걷는 것이 아닌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생명으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창세기4:1-26절/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01.07)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낳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아담과 하와의 자녀에게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 이어질까요?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죄악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첫째 아들 가인이 태어난 후 동생 아벨이 태어납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짓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예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제물로 드립니다.

그 결과를 4-5절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많은 설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입니다. 제물보다 하나님은 드리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제물로 삼아 드립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저 땅의 소산물로 드립니다. 어쩌면 아벨이 드리니 마음은 없지만 그냥 따라서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수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최고의 제물이라 할 수 있는 “살진 짐승의 기름”(사1:11절)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헛된 제물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피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온갖 악을 행하면서 많은 제물로 악을 가리려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요 예배 드리는 자를 보시고 그의 삶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대 우리가 기억하고 회복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면 가인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분노하고 안색이 변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면,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른 기준을 알려주심에도 자신이 기준이 되어 옳고 그름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7절 하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지배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는 기회만 되면 사람을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니 지배 당하지 말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 본성이 죄로 왜곡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망입니다. 죄는 점점 확장되고 깊어져 가는데 이길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가인은 시기심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입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9절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아담과 하와에게 3:9절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도 물으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가인의 대답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담과 하와는 탓하고 핑계하였다면 가인은 적극적으로 거짓말까지 합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도전합니다. 가인이 인정하지 않은 죄를 땅에 고발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절)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에게 12절 하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자 가인은 자신의 벌이 너무 무겁다고 항의합니다. 사랑해야 할 동생은 무자비하게 죽였으면서도 자신의 벌은 힘들다고 하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온갖 악을 행하고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작은 말 한마디도 견디지 못하는게 인간입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표를 주시면서 15절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기준으로 보면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지켜주십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십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으로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고 성을 쌓습니다. 아들 이름으로 성 이름을 짓습니다. 하나님은 유리하는 자가 되라고 했는데 거부하고 정착합니다. 거기다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쌓습니다. 스스로 안전을 지키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성의 시작, 도시의 시작에 이런 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이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 방식을 버리고 일부다처제를 처음으로 행한 인물입니다. 자녀를 낳는데 이들이 세상 경제와 문화를 주도하는 자들입니다. 야발은 축산업의 조상이요, 유발은 문화예술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두발가인은 산업과 무기의 조상입니다. 대단한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모습이 라멕이 하는 말 속에서 드러납니다. 23절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은 작은 상처 때문에 소년을 죽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셨던 말을 빙자해서 자신을 해하는 자에게는 벌이 77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선악과를 따먹은 죄가 이제는 괴물의 출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고 내가 기준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후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될까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시는데 ‘셋’입니다. 셋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짓는데 이때 26절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가인의 후속과 셋의 후손을 대조해보면 가인의 후손이 세상의 모든 부분을 주도합니다. 거대한 성장과 업적을 남깁니다. 이에 반해 셋의 후손은 존재감이 없어 보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셋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고 함께 하십니다.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변해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창세기3:14-24절/진노 중의 큰 긍휼(26.01.06)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15절)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심각한 죄악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가장 먼저 뱀에게 내리십니다. 14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매일성경은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를 싸움에 패하여 굴욕적인 처지에 놓이는 것을 표현하는 관용구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즉 하나님과 같이 높아질 수 있다고 유혹했는데 결과는 땅을 기어다니는 가장 비천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높아지려할 때 가장 낮은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뱀에 대한 심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후손에 대해서까지 이어집니다.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뱀의 유혹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삭일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세력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박살을 내시는데,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고 죽게 합니다. 이것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부수시고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이 내용이 복음의 핵심인데, 놀라운 것은 범죄 후 이런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여자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16절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임신과 해산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고통이 됩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의미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지배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구절이 바로 이어지는 4:7절 하나님께서 범죄한 가인에게 하시는 말씀에도 나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에 대한 지배권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범죄 이전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하나님처럼 되어 통치권을 행사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어지는 심판은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높아지려하자 철저히 낮아지는 겁니다. 뱀도 배로 다니고 흙을 먹고, 여자도 지배를 받고, 남자 역시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심판이 가장 깁니다. 선악과를 먼저 먹은 것은 여자이지만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문제는 17절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입니다. 아내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겁니다. 아담 역시 축복으로 주신 명령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고통이 됩니다. 죄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는 모든 관계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과, 부부 사이에, 자연과,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마저 파괴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절)

​여기까지 보면 인간의 미래는 절망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습니다. 의미가 ‘생명’입니다. “산 자의 어머니”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하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가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가죽옷을 입히시기 위해서는 짐승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거룩한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갈3: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입은 옷을 보시고 거룩하다 인정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장 절망의 순간을 하나님의 가장 소망의 약속으로 바꿔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생명나 무의 길을 막으십니다.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하는데, 사람이 선악을 하나님처럼 안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비꼬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뱀은 그렇게 유혹했지만 인간의 깨달은 것은 벌거벗은 수치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절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불 칼로 막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게 되는 죽음도 사실은 은혜입니다. 죄악된 세상의 삶을 그치고 새로운 에덴동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음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말씀 안에 거할 때 복된 인생입니다. 비록 흙과 같은 존재이지만 생명이 되고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소망을 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