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9 | 매일성경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2절)
4장은 열린 문을 통해 올라간 요한이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를 주목하였습니다. 그 영광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립니다. 5장은 요한의 시선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향합니다. 1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고 합니다. 안팎으로 쓰인 두루마리가 있고 일곱 인으로 봉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안팎으로 쓰인 두루마리에 대한 내용이 겔2:9-10에 나옵니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에서는 안팎에 쓰인 글의 내용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두루마리도 하나님의 심판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과연 누구를 향한 심판인가?”하는 겁니다.
힘 있는 천사가 외칩니다. 2절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인을 떼서 두루마리를 펼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요한은 이 심판의 책이 두루마리가 열리길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기록된 심판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인 악의 세력을 향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사탄과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의 날은 반대로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루마리가 반드시 열려야 하는데 열 사람이 없어서 요한이 통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은 성도들이 아닌 사탄과 악의 세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심판은 성도들의 승리로 이어집니다.
울고 있는 요한에게 장로 중 한 사람이 인을 뗄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5절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합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는 창49:9-10절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사자(Lion)입니다. 또한 “다윗의 뿌리”는 사11: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는데 이새는 다윗이 아버지입니다. 이 인물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을 뗄 수 있습니다. 요한이 이 분을 찾기 위해 둘러봅니다. 6절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승리한 사자를 기대했는데 어린양이 서 있습니다. 그것도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십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을 반복 강조합니다(6,9,12).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어떤 승리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은 사자와 같은 승리를 기대합니다. 힘과 부와 권력으로 누르고 삼키는 승리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리는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희생과 섬김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사자가 되고 싶은지 아니면 어린양의 되고 싶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6절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참된 권세와 온 세상을 감찰하시는 능력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인을 떼십니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10절)
8-14절은 어린양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어제 말씀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후반부를 가득 채웠다면 오늘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가득합니다. 요한은 고난의 시기를 지나는 성도들에게 문제와 고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찬양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찬양 이전에 8절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금대접에 담아 놓으십니다. 그리고 이 성도들 기도의 응답으로 지금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세요!, 우리의 고통을 신원하여 주세요!”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지만 계시록의 심판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고, 당연히 성도들을 향한 심판이 아닌 사탄과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입니다.
어린양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9-10절을 보면 일찍이 죽임을 당하셨는데 이유는 사람들을 피로 사시기 위함입니다. 생명을 주셔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은 10절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렇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고 왕노릇하는 존재입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연결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사람을 왕노릇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노예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다시 왕노릇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세상과 다르지 않지만, 우리의 신분은 나라와 제사장이요 왕입니다.
이 어린양되신 예수님 앞에 합당한 반응은 찬양과 경배입니다. 만만, 천천의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그 내용이 12절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 마음의 벅찬 감격을 쉴 새 없이 선포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역시 13절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찬양하며 경배합니다.
악이 가득하며 온 세상을 지배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린양의 승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자처럼 힘과 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희생과 섬김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양이 피로 사셨습니다. 나라와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왕노릇하게 하시는 존재임을 기억하며 하루도 승리합시다.
2025.07.08 | 매일성경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1절)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내용이 아닌, 저자인 요한이 강조하는 부분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보석들의 이름도 나오고, 신비한 네 생물의 모습도 나옵니다. 하지만 본문의 강조점은 14번 반복되는 단어인 “보좌”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은 하늘에 있는 열린 문으로 올라오라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1:10절에 나왔던 주님의 음성입니다. 하늘에 열린문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이고 마지막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은 하늘과 땅이 연결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분리가 되었고 하늘 문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요한을 열린 문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이유는 1절 하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입니다. 1:1절에서도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고 했습니다. 지금 요한과 성도들은 박해 속에 있습니다. 그 중심에 로마 황제가 있습니다. 황제의 자리에 앉아서 무서운 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이런 박해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 있습니다. 속히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이 있습니다. 핵심은 성도들의 승리입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끝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간 요한이 본 것은 하늘 보좌에 그 위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3-11절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과 주변에 있는 존재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의 모습으로 앉아서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 땅에서 잠깐의 권세와 인간의 능력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아있는 통치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능력으로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로마 황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잠깐 있다 사라질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두려워할 분은 눈에 보이는 로마 황제가 아닌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관점이 바로 “하늘 관점”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10절)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십니까? 3절에 보석의 종류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 영광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겁니다. 계시록을 묵상하다보면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기에 언어의 한계를 느끼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높으심을 표현하기에 인간의 언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같고…같다”라고 합니다. 무지개가 보좌에 둘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무지개 언약을 생각나게 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보좌 주변에 24개의 보좌가 있고 24장로가 흰 옷을 입고 그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4, 7, 12, 24 등의 숫자가 반복됩니다. 여기도 24가 나오는데 12+12가 24입니다.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보좌 주변에 금관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이 금관은 2:10절을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에 비춰보면 죽도록 충성하며 믿음을 지킴으로 얻은 관입니다.
6-7절에는 네 생물이 나오는데 특징은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고 합니다. 8절도 다시 강조합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셋째 생물은 사람, 넷째 생물은 독수리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각 피조물들의 대표를 말합니다. 동물은 사자, 가축은 송아지, 최고의 피조물인 사람, 그리고 새들의 대표가 독수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합니다. 많은 눈들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감찰하시고 보살피심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부분은 8-11절입니다.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이 무엇을 하는가? 8절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렇게 생물들이 쉬지 않고 찬양하는 하나님을 본문은 두 번이나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라고 합니다(9,10).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잠깐 있다 사라질 황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네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자 이번에는 24장로들이 자신들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쓰고 있던 금관을 벗어 드립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금관은 죽도록 충성한 결과로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쓰고 자랑해야 할 것 같은데 벗어서 드립니다. 영광의 하나님 앞에 그것을 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곳을 가면 자동적으로 감탄사가 나오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아름다움 앞에 네 생물도 24장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강요해서 경배하는 것이 아닌 자동적으로 엎드립니다. 금관을 벗어 드립니다. 이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11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확신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땅의 관점으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하늘의 관점으로 살아갑니까?”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확신하며 살아갑시다. 또한 이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바른 반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 습관적인 예배가 아닌 영광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벗어 드리며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5.07.07 | 매일성경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15절)
일곱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로마 시대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 돈이 많은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비옥한 땅과 양 떼를 먹일 수 있는 넓은 초원을 가지고 있어 좋은 양모가 생산되었고 옷감과 양탄자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돈이 많으니 금융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유명한 의대가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 멘카루신전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의학전문학교였고 거기서 귀를 치료하는 연고와 눈을 치료하는 안약이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런 의료산업의 발달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했습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14절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등장하십니다. “아멘”이시다는 의미는 진리의 주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충성”은 성경에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한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참된 증인”은 당시 순교자를 의미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라오디게아에 필요한 모습이 바로 “아멘과 충성 그리고 참된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를 15-16절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들의 신앙이 차지도 뜨겁지도 않습니다. 미지근합니다. 그러면 토하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충격적인 말씀인데요,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풍부한 라오디게아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바로 물입니다. 이 물을 근처의 도시에서 긴 상수관을 설치해서 공급을 받았습니다. 물을 공급받는 곳이 두 곳인데 하나는 골로새입니다. 여기서는 차고 정결한 물을 공급받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히에라볼리입니다. 지금 파묵칼레라는 유명 관광지입니다. 여기는 뜨거운 석회 온천수가 나옵니다. 그런데 약 10km의 관을 타고 온 물은 식어서 미지근한 상태가 됩니다. 석회질이 포함된 미지근한 물은 토하고 싶은 물이었습니다. 이 모습이 라오디게아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를 의미는 신앙의 분명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들의 신앙이 어떠했기에 주님께서 이런 책망을 하시는 것일까요?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라고 합니다. 이들은 부요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신앙인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계2:9절에서 서머나교회를 주님께서 칭찬하시면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와 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는 상인들이 연합해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하는 일에 돈을 대주었고 그 댓가로 부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그곳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의 부요함은 신앙의 타협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을 양보해서 얻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실상은 부요함이 아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입니다. 심각한 상태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20절)
주님은 처방을 내리십니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세상의 부요를 추구하고 자랑하지 말고 영적 부요함을 위해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교회의 정결성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고난 속에서도 참된 증인으로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고난과 수고는 피하고 쉽고 편한 길을 걷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하십니다.
또한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흰 옷은 성도의 거룩성을 의미합니다. 흰 옷 입은 거룩한 성도로서 무엇을 가까이 하고 무엇을 멀리해야 하는지를 알아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은 안약을 사서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은 세 번이나 “사라”고 하십니다. 정체성이 분명한 신앙을 위해서는 수고가 따릅니다. 결단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은 주님의 아픔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책망하십니다. 열심을 내기를 기다리십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들은 주님없이 교회를 이루고 주님없이 많은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문을 열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어쩌면 이 시대 교회와 가장 비슷한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풍요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합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회복해야 합니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주님을 본받아 주님의 길을 걷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과 수고를 피하지 말고 감당하면서 열심을 내어 주님을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5.07.04 | 매일성경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일곱 교회 중 에베소교회에 이어 오늘은 서머나교회와 버가모교회를 향한 편지입니다. 서머나는 지금의 튀르키예 이즈미르인데요, 당시에 ‘아시아의 영광’이라 불릴 정도로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서머나교회에 편지하시는 주님은 8절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입니다. 1:17-18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에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서머나교회는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은 처음이며 마지막으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 주님이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한 칭찬은 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습니다. 서머나 도시는 풍요로운데 성도들은 가난한 삶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서머나의 풍요가 황제숭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이 조직을 만들고 돈을 거둬 황제 숭배하는 일에 지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여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건을 매매하는 일에도 성도들은 왕따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환난과 가난이 기다리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궁핍한 성도들을 향해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하십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모습과 실상이 다르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고 말하는 것과 주님이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실상은 부요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처음이며 마지막이 되신 주님은 일시적인 이 땅에서 풍요를 누리는 것을 부요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성도들이 실상은 부요한 자들입니다. 바울도 고후6: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을 소유한 자들로서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진정 부요한 자들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비방도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비방하는데 사탄의 무리처럼 공격합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쉽지 않은데 주님은 10절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라고 하십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몇 사람이 옥에 던져집니다. 그 기간이 10일 이라고 합니다. 계시록에는 숫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10일은 길지 않은 기간입니다. 환난이 있지만 짧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환난과 궁핍, 비방 거기다 옥에 던져지는 고난을 받는다면 이어지는 말씀은 구해주시겠다 혹은 대적을 물리쳐주시겠다는 내용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죽음의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관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관의 의미는 “면류관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잠시 잠깐 이땅에 살겠다고 신앙을 저버리는 삶이 아닌, 죽더라도 믿음의 길을 걸으면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11절 하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둘째 사망은 영원히 지옥에 들어가는 겁니다. 죽도록 충성할 때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성도는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917절)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12절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검으로 싸우는 대상은 안타깝게도 버가모 성도들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칭찬하십니다. 버가모 교회가 있는 곳이 13절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입니다. 다른 지역보다 열광적인 황제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니 박해도 극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안디바’입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던 교우가 로마의 칼에 의해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칼끝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버가모 성도들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책망할 것이 있다 하십니다. 15절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6절에서 에베소교회는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는 말씀을 통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에 동참하는 자들로 인해 책망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니골라 당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14절의 말씀을 보면 민수기22장에 나왔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를 지나려하자 모압왕 발락이 두려움을 느끼고 이스라엘을 저주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 사람이 발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오히려 축복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던 발락의 계획은 무산됩니다. 그런데 민25장으로 가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모압 여인들과 우상숭배하면서 음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모압 여인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했고 거기에 응한 사람들이 제사의식 중 하나로 음행을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이 발생하여 24,000명의 백성들이 죽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버가모 지역에서도 발생한 것입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거기있는 여사제들과 음행을 하는데 그 중에 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시며 회개하지 않으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검은 성도들을 향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기고 승리하면 17절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만나와 흰돌을 주십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던 하늘 양식입니다. 만나를 주시는 이유는 니골라 당에 참여하는 자들이 먹던 것이 14절 “우상의 제물”입니다. 그것 거부하면 하늘 양식으로 채워주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 잔치를 누리게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입장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흰 돌입니다. 당시 공적 축제와 왕족 회의에 들어가려면 자기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이 입장권이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합시다. 궁핍 가운데 있지만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다.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잠시 이 땅에 잘 살기 위해 주님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 길이 실상은 영원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당시 니골라 당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성도들을 유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함께 하자고 합니다. 이런 삶은 주님의 검이 우리를 향하는 삶입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오히려 믿음의 삶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이 됩시다.
2025.07.03 | 매일성경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2절)
2-3장은 편지를 받는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도를 보면 1:11절에 나오는 일곱 교회 순서가 에베소교회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편지를 전달받는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말씀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편지하라”는 명령이 나오고, 두 번째는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1:12-20절에 나왔던 내용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에 대한 칭찬입니다. 네 번째는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리고 이어 회개에 대한 촉구가 나오고 회개하지 않을 때의 경고가 이어집니다. 다섯 번째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지막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 순입니다.
먼저 에베소교회입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풍요의 여신인 아데미를 숭배했으며, 황제 숭배 사상도 번성했던 지역입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마술과 마법에도 관심이 많은 지역입니다. 에베소 유적으로 유명한 것이 셀수스도서관입니다. 두란노서원으로도 알려져있는데요, 그렇다면 에베소 사람들은 부와 명예 그리고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런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1절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등장하십니다. 1:13,16절에 나타난 인자같은 이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붙잡고 계시며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만 읽어도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박해 아래 풍전등화와 같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붙잡고 계십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습니다. 교회 사이를 거니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누리는 주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롬8: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합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붙잡아 주시고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3절 끝에도 “아노라”고 하십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다 아십니다. 특히 수고와 헌신, 인내를 아십니다. 에베소 교회가 잘한 일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자칭 사도라고 하면서 거짓 복음을 들고 교회로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던 자들입니다. 당시 이런 유혹에 흔들리던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냈습니다.
6절에도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반대로 2:15절을 보면 버가모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14절을 통해 보면 우상숭배와 행음을 같이 하게 해서 성도들을 유혹하는 당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이런 유혹을 분별해서 물리쳤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에베소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분별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이단들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때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우리로 분별력있는 진리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특히 강조하는 것이 2절 “인내”, 3절 “참고”, “견디고”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내했습니다.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하지만 책망할 것도 있습니다.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가 잃어버린 사랑이 하나님 사랑인지 아니면 성도들을 향한 사람인지가 궁금합니다. 본문의 칭찬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뜨겁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고 드러내고 용납하지 않다보니, 이들의 시각이 누군가를 대할 때에도 자칫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지적하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이 점점 식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교회는 냉랭해지고 생명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사람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에베소교회는 사랑의 위기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돌아봐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사랑이 식었는지 확인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잃어버린 성도들이 많습니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때문일 수도 혹은 교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회개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기에 이런 경고를 하십니다. 대신 생각하고 회개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정리해보면, 먼저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더불어 사람을 향한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2025.07.02 | 매일성경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11절)
요한은 계시록을 쓰게 된 동기를 설명합니다.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라고 합니다. 신앙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성도들과 같은 형제요, 같은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전하므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누군가 조언을 하면 “당신은 이런 고난을 당해봤어?”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한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하는데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9절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합니다. “나라”를 중심으로 “환난”과 “참음”이 나열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 정의와 공의가 중심인 예수님의 나라를 이루려면 반드시 환난이 있습니다. 세상이 가만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참고 인내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환난을 만나고 참고 있다면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런 고난이나 문제가 없다면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환난 가운데 있는 요한, 또한 많은 성도들이 박해로 인해서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요한의 마음에 질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알고 계시는지, 역사하실 것인지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응답이 임합니다. 10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하는데, 주일에 예배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때 성령에 감동되어 음성을 듣게 됩니다.
10절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입니다. 큰 나팔 소리가 울릴 때는 전쟁에서 왕이 등장할 때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큰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왕으로 전쟁에 등장하시는 겁니다. 세상 왕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미 승리하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반드시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그 내용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십니다. 계시록에는 숫자가 많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7’이 자주 등장합니다. 완전수입니다. 일곱교회에 보낸다는 것은 모든 교회가 읽고 듣고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요한은 뒤에서 들리는 큰 음성이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켰는데, “일곱 금 촛대”를 보게 됩니다. 계시록에는 이처럼 상징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20절 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일곱 교회라고 하면 되지 왜 혼란스럽게 촛대를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앞으로 계시록에 많은 환상과 상징들이 등장할 것인데 그렇게 보여주는 것이 더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를 보여준다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데, 교회를 촛대로 보여주면 선명합니다. 성막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창문이 없다는 겁니다.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캄캄합니다. 유일하게 빛을 비추는 것이 바로 가지가 일곱으로 뻗어 있는 금촛대입니다. 교회가 촛대라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어둔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당시 교회는 핍박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어둔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자 같은 이”이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누구도 건들 수 없습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16절)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13절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흰 머리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불꽃 같은 눈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불꽃 같은 눈으로 돌아보십니다. 하지만 교회를 조롱하고 박해하는 자들은 불꽃 같은 눈으로 기억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16절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일곱 별”은 20절 하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능력의 오른 손으로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계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 역시 말씀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심판의 검이 될 것입니다. 말씀이 기준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어떤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이 예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성도들의 얼굴 역시 해가 힘있게 비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만난 후 요한은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됩니다. 주님의 영광 앞에 죄인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오른손을 얹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17-18절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처음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아시고 주관하십니다.
특히 “살아 있는 자”이십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또한 이것이 성도들의 정체성입니다. 죽지만 살아납니다. 세세토록 살아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박해 앞에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순교의 길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반대로 목숨을 위해 신앙을 저버린다면 그것이 사망의 길입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주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이 영광의 주님을 알고, 이 주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심을 알고, 성도들이 믿음을 지켰을 때 주어는 결과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압시다. 승리의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에 해가 힘있게 비치게 하십니다.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