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1 | 매일성경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3절)
요한계시록 묵상이 시작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어렵다”와 “두렵다”입니다. 혹은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성경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당시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다른 어떤 성경보다 성도들에게 위로와 확신과 기쁨을 주는 성경입니다.
계시록을 묵상하면서 계속 기억해야 할 것은 계시록이 ‘편지’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편지는 받는 사람의 형편을 잘 알고 그 사람의 상황에 합당하게 보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편지를 읽는 사람이 그 내용을 다 이해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상징이나 환상들이 등장하지만, 그 당시 성도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오히려 말로 전달되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이해하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문화의 차이로 인해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절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입니다. 제일 중요한 말씀입니다. 계시록 이해의 방향지시등과 같습니다. 계시록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심판이나 재앙 그리고 사탄이나 종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계시’(아포칼립시스)는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을 통해 예수님이 더 선명하고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이 계시를 주시는 이유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입니다.
계시록을 읽는 성도들의 상황은 로마 황제의 극심한 핍박 아래 있습니다. 순교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박해가 계속될지 알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믿음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살기 위해 예수님과 신앙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들의 의미와 결과를 알려 주시기 위해 이 편지를 쓰게 합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8절에 나오는 “알파와 오메가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입니다. 그러니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 성도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당시처럼 박해가 있는 시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들을 흔들고 무너뜨리려는 유혹들이 넘쳐납니다. 이때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도 말씀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8절)
요한은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은 고난과 박해가 사라지는데서, 문제가 해결되어야 온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요한은 은혜와 평강은 그런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강조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4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부르짖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신다고 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장차오셔서 악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승리를 반드시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십니다. 슥4:6절을 보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지만 성령께서 이루십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또한 성자 예수님은 5절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여기 “증인”은 순교자를 의미하는데, 순교의 길을 걷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충성된 순교자셨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계시록은 신과 같이 높임을 받는 로마 황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성도는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함께 하시는 존재요, 성령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존재이며,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존재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이 부분에서 요한은 감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하신 일을 열거합니다. 6절 끝과 7절 끝에 나오는 ‘아멘’은 편지에는 일반적이지 않는 형식이라고 합니다. 요한이 감격해서 형식을 무시하고 ‘아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요한을 감동하게 했을까요? 5-6절을 보면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납니다. 노예였던 그들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신분을 부여하시는데 출19:6절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노예에서 해방된 보잘것없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당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볼품없습니다. 힘도 없고 가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을 구원하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게 됩니다. 특히 7절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라고 하는데, 진짜 예수님을 찌른 사람들이 아닌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하나님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성도들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애곡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8절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2025.06.30 | 매일성경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20절)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을 송축했습니다. 10절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기서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왜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15절은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원래 조상들은 이방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그림자 같이 희망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18절 “우리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라고 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함께 해주셨습니다. 인도해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 부강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중요하며, 성전을 통해 영광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송축한 다윗은 백성들에게도 권면합니다. 20절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랬더니 회중이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그 숫자가 21절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천 마리요 숫양이 천 마리요 어린 양이 천 마리요 또 그 전제라” 모두 3,000마리의 번제를 드립니다. 놀라운 숫자입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도 놀라운 일인데 여기는 세 배나 되는 3,000마리의 번제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크다는 겁니다. 즉 감사의 크기가 제물의 숫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드리고도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 모든 일의 기초입니다. 예배할 때도, 봉사할 때도 그렇습니다. 특히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기대하고 바랐지만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구원을 우리는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합당한 삶을 살아갑시다.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28절)
22절에서 특이한 내용은 “무리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다시 왕으로 삼아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 돌려 주권자가 되게 하고”입니다. 솔로몬을 다시 왕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8절에 “그가 …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하는데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아마 다윗과 솔로몬이 일정 기간 공동통치를 한듯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이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어지는 사독에 대한 내용입니다. 왕을 기름부어 세운 이야기 뒤에 제사장 사독을 기름부어 세운 일을 같은 선상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역대기 저자의 제사장과 레위인 중심의 관점을 보게 됩니다.
23-25절까지는 솔로몬이 누린 영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조하는 것이 23절 “형통하니”, “온 이스라엘이 순종”, 24절 “왕에게 복종”, 25절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심히 크게 하시고, 왕의 위엄을 그에게 주사, 모든 왕보다 뛰어나게 하셨더라”고 합니다. 사실 열왕기상을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왕의 자리를 탐내기도 하였습니다. 안정을 위해 반대자들을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은 이런 내용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형통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강조합니다.
저자가 이렇게 솔로몬의 형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역대기의 시각으로 보면,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왕과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들이 왕의 명령에 순종해야 큰 역사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내용은 다윗에 관해서입니다. 40년을 통치했는데 28절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부와 존귀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와 존귀를 목표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을 향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부와 존귀를 주십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한 것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무엇을 회복해야 할 일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중요하게 붙잡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2025.06.27 | 매일성경
●“일 년 동안 달마다 들어가며 나왔으니”(1절)
23-26장까지 레위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8-29장은 성전 건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 27장이 들어 있는데 내용이 군대 조직에 관한 내용입니다.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은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신앙만을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나라의 안정과 풍요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대의 조직과 왕의 곳간에 대한 이야기가 27장에 나옵니다.
우리 신앙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매일매일 교회에서 기도만하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로 일에만 집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하는 신앙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가정과 일터라는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균형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군대 조직은 1절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가문의 우두머리와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을 섬기는 관원들이 그들의 숫자대로 반이 나누이니 각 반열이 이만 사천 명씩이라 일 년 동안 달마다 들어가며 나왔으니”라고 합니다. 한 조직이 지휘관을 중심으로 24,000명씩 구성되어 있고 이런 조직이 12조직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직무를 감당합니다.
이런 군대 운영은 평상시에 이루어진 것이고 전시가 되면 모든 군인들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2-15절까지는 각 조직(반)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를 기록합니다. 눈에 띄는 인물이 둘인데, 하나는 5-6절에 나오는 브나야입니다. 그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면서 6절 “이 브나야는 삼십 명 중에 용사요 삼십 명 위에 있으며”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30용사 중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7절에 나오는 ‘아사헬’입니다. 아사헬은 이미 죽은 인물입니다. 삼하2장을 보면 아사헬은 아브넬을 뒤쫓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때가 다윗왕 초기입니다. 그런 아사헬이 여기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12조직이 한 달씩 돌아가면서 나라를 지키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24장을 보면 레위인 찬양대도 24반차로 조직되어 돌아가면서 직무를 감당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공동체는 서로 임무를 나누어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 시대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조직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다윗의 숙부 요나단은 지혜가 있어서 모사가 되며”(32절)
16-22절은 각 지파의 지도자 이름이 나옵니다. 르우벤을 시작으로 단까지 이어지는데, 우리가 아는 12지파와 차이가 있습니다. 17절에는 아론 자손이 한 지파처럼 등장합니다. 아론도 레위 지파에 속하는데, 둘을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계속 레위인과 제사장을 강조합니다. 또한 므낫세지파를 요단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서 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절 “길르앗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입니다. 대신에 아셀지파와 갓지파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당시 이 지파들이 미약한 상태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3-24절은 21장에 있었던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합니다. 다윗이 해서는 안되는 인구조사를 시행해서 하나님의 진노로 70,000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23절은 “이스라엘 사람의 이십 세 이하의 수효는 다윗이 조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사람을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20세 이상 군대에 나갈 사람들의 숫자는 계수했지만, 20세 이하는 계수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을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숫자가 기록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이곳에서 다윗의 잘못을 기록하면서도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5-31절은 왕의 곳간을 맡은 자들입니다. 상당히 길게 다양하게 열거되는 것을 보면 당시가 번성의 시대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 토대 위에 성전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내용은 다윗 곁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새 정부가 들어서고 중요한 인사가 단행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주변에 누가 세워지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윗 왕 곁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2절 “다윗의 숙부 요나단은 지혜가 있어서 모사가 되며” 지혜로운 모사입니다. 33절 아히도벨도 모사입니다. 또한 왕자들을 돌보고 교육시키는 수종자도 있고, 33절 하 후새는 왕의 벗으로 나옵니다. 군대 지휘관들도 있습니다. 다윗 혼자가 아닌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내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수고가 모아져서 공동체가 아름답고 든든하게 세워집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좋은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누군가의 좋은 동역자가 되고, 또한 사람들을 세워 사명을 위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025.06.26 | 매일성경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6절)
레위인들이 담당했던 직무들에 관한 내용이 계속됩니다. 23장에서 레위인을 계수하였고, 23:4-5절은 “육천 명은 관원과 재판관이요 사천 명은 문지기요”라고 했는데 본문은 문지기와 곳간 책임자 그리고 관원과 재판관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문지기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문지기는 여러 일들 중에서 좀 하찮은 일로 여겨질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6절 “큰 용사라”, 7절 “능력이 있는 자이니”, 8절 “다 능력이 있어”, 9절 “능력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용사들과 능력있는 자들이 문지기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23:5절은 문지기의 숫자가 4,000명이라고 하니 군대와 같이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성전을 지키는 일이 그처럼 중요했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모세를 통해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울타리를 두르도록 지시하십니다. 이 울타리가 세상과 하나님이 계신 곳의 경계입니다.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함부로 넘어오면 안 됩니다. 성전 시대 그 역할을 문지기들이 감당합니다. 문지기들이 이처럼 능력있는 용사들이라는 사실은 어떤 강력한 세상의 공격에도 성전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문지기들 가운데 오벧에돔에 대한 설명이 중심을 이룹니다(5-8절). 5절 하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라”고 합니다. 13장에 나온 것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실패합니다. 수레에 법궤를 싣고 운반하는데 법궤가 흔들리자 웃사가 손을 만져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다윗은 두려워합니다. 궤 운반하는 일을 중단했고 법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간 머뭅니다. 그리고 13:14절은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셨다는 것은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궤를 잘 보관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이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법궤를 옮기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이런 오벳에돔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많은 수의 자손들이 능력있어 문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오벳에돔이 이런 일을 기대하면서 법궤를 잘 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 다른 사람이 두려워하는 일이지만 감당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므로 그것이 복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문지기 맡은 자들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됩니다. 마25:2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일, 누가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잘 감당해야 합니다.
13절은 문지기를 세우는 일도 “대소를 막론하고 다 제비 뽑혔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맡게 하신 일에 순종합니다.
●“이 슬로못과 그의 형제는 성물의 모든 곳간을 맡았으니”(26절)
20-28절은 곳간을 맡은 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곳간은 두 곳이 있습니다. 20절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입니다. 이 가운데 성물 곳간이 어떤 곳이며, 어떤 물건을 모아두는지를 설명합니다. 26-28절을 보면 “구별하여 드린 성물”이라고 표현이 반복됩니다. 다윗을 비롯한 왕들이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두면 전리품 중에 구별하여 하나님의 곳간에 드려 성전을 개보수하고 유지합니다. 이 일은 다윗뿐만 아니라 28절을 보면 사무엘과 사울왕 그리고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과 요압도 드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28절 하 “구별하여 드린 성물은 다 슬로못과 그의 형제의 지휘를 받았더라”고 합니다. 아무리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요 군대장관이지만 구별하여 드린 성물을 곳간에 바치는 것은 레위인의 지휘를 받아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은 관원과 재판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들의 임무를 29절은 “성전 밖에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30절은 “여호와의 모든 일과 왕을 섬기는 직임을 맡았으며”라고 하는데 이는 세금을 거두는 일을 맡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렇게 보면 레위인들이 성전 봉사는 물론 찬양대와 문지기 그리고 곳간 책임자와 모든 지역에 흩어져 관원과 재판관의 직무를 감당합니다. 왕과 군대장관들도 이들의 지휘를 받습니다. 이런 레위인의 사명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스라엘 곳곳에서 이루어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 나라가 세워지게 하십니다. 그 중심에 레위인이 있고 레위인들이 사명을 잘 감당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열방 위에 뛰어난 나라가 됩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본문의 레위인의 사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능력있는 문지기가 되어 가정과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025.06.25 | 매일성경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1절)
23:5절에서는 레위인들을 계수하면서 “사천 명은 그가 여호와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만든 악기로 찬송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4,000명의 찬양하는 사람들을 조직합니다. 이처럼 역대상을 보면 찬양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합니다. 15장에서 언약궤를 운반하고 안치하는 과정에서도 헤만과 아삽 등 노래하는 자들을 세워 찬양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성막 시대를 지나 성전 시대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조직 중 하나로 레위인 중심의 찬양대를 세웁니다. 그 내용을 25장 한 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조직은 다윗 임의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찬양대를 세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대상17:7절을 보면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양을 치던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작고 미약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거주할 땅을 주시며 다윗을 통해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고백과 찬양을 기뻐 받으시고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 은혜에 감격해서 다윗과 같은 찬양과 감사가 있는지를 돌아봅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얼마나 찬양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역대기 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회복되고 살아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나라의 회복과 부강을 기대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찬양과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때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또한 앞으로 베푸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마음을 모으고 목소리를 모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아삽의 지휘 아래 왕의 명령을 따라”(2절)
다윗은 1절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불렀던 노래가 “신령한 노래”라고 반복됩니다(1,2,3). 그런데 “신령한 노래”의 원어는 “예언을 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찬양대가 부른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노래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을 노래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5절은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의 선견자라”고 합니다. 찬양하는 자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찬양이 말씀과 별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곡조에 담아 함께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실제로 아삽(시50, 73-83)과 헤만(시88), 여두둔(시39,62,89)의 찬양 내용이 시편에 담겨 있습니다. 시73편 아삽의 시를 예로 들어본다면, 자신의 신앙 경험을 시에 담았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실족할 뻔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악인의 결과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73:28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이런 찬양을 만들어 함께 부를 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하나 반복되는 말이 “지휘 아래”입니다(2,3,6). 2절 “왕의 명령을 따라”, 6절 “왕의 지휘 아래”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찬양대가 왕의 직속 기관으로 왕의 명령과 지휘 아래 직무를 감당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가문 대표의 지휘 아래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합니다. 찬양에 있어 중요한 요소입니다.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목소리가 좋고, 악기 연주를 잘 한다고 나만 튀면 안 됩니다. 때론 절제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어우러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휘를 잘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구성원들이 있어도 하나로 어우러지지 않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족하여도 지휘자의 지도 아래 하나가 될 때 아름다운 목소리를 냅니다.
또한 이들은 7절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8-31절까지 288명이 어떻게 조직되어 직무를 감당했는지 이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배우고, 연습을 반복하여 찬양합니다. 이런 찬양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함께 듣는 백성들에게 큰 은혜와 울림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8절 “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제비 뽑아 직임을 얻었으니”라고 합니다. 레위인들에게 직무를 맡기는데 이런 내용이 반복됩니다. 24:31절도 그랬습니다. “제비 뽑혔으니 장자의 가문과 막내 동생의 가문이 다름이 없더라”고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가문이 중요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 간격이 컸지만 하나님 앞에서 일을 감당할 때나 찬양할 때는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제비뽑아 감당했습니다.
이 시대 적용할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의 찬양은 어떻습니까? 모르는 찬양이라고 외면하지 않습니까? 배우고 익숙하도록 해야 합니다. 요즘 유튜브 등이 잘되어 있어 검색만 하면 배울 수 있습니다. 마음과 열심의 문제입니다. 또한 아는 찬양이라도 전심으로 찬양하는지요? 마음을 다해 큰 목소리로 찬양한다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소리들이 어우러질 때 서로에게 감동이 있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루가 됩시다.
2025.06.24 | 매일성경
●“아론 자손의 계열들이 이러하니라”(1절)
23장부터 레위 자손 가문과 담당 직무를 이야기하다가 24:1-19절까지는 아론 자손의 제사장들이 어떻게 조직되어 직무를 감당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24:20-31절까지는 레위인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아론 제사장 가문도 레위 지파, 그핫자손에 속합니다. 또한 레위인들이 맡은 주된 일이 23:32절은 “그들의 형제 아론 자손의 직무를 지켜 여호와의 성전에서 수종드는 것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론 자손이 어떻게 직무를 감당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시각에서 제사장과 레위인 중 중요한 직책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 역할을 합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의 직무를 돕는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역대기에 중요한 직책인 제사장에 관한 내용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레위인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역대기가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오는데 제사장들은 많이 돌아옵니다. 제사장의 직책이 특권과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로에서 2차 귀환을 할때 보니 레위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에스라8:15절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왜 레위인들이 없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레위인의 직무에 대한 정체성과 자부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처럼 중심에 서거나 주목을 받지도 못하고, 허드렛일이나 하는 직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돌아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 레위인을 모집해서 돌아옵니다.
이런 레위인들이 정체성과 자부심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레위인이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레위 가문의 명단을 열거합니다. 레위인들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이 어떤 부르심 속에서 어떻게 사명을 감당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감당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5절)
1절 “아론 자손의 계열들이 이러하니라”고 하면서 2절 “나답과 아비후가 그들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라고 합니다. 본문은 왜 나답과 아비후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레10:1-2절과 민3:2-4절에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민3:4절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고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불로 분향을 해야 하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다른 불로 분향하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영광의 직분이 주어졌지만 그에 합당하게 감당하지 못하므로 죽게 된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으므로 다른 아들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합니다. 그래서 3절 보면 다윗이 이들을 각각 나누어 직무를 감당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다윗이 이런 일을 하는가에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로서, 이처럼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주도합니다. 다윗이 자기 열심으로 너무 앞서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어제 본문 23:25-26절은 성막 시대가 가고 성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성전 시대에는 그에 맞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가 필요합니다. 이런 일을 당연히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이 했어야 하는데,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모든 것은 무너지고 그것을 주관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무엘이 세워졌지만, 사무엘은 영적으로 무너진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런 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직접 성전을 짓지 않았지만, 생각으로 수도 없이 성전을 짓고 또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곳곳에 배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 많은 것을 묻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직무를 나누고 감당하게 합니다.
제사장들의 숫자를 세어보니 엘르아살 가문 우두머리가 16명이고, 이다말은 8명입니다. 직무를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숫자가 많은 가문이 주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숫자는 적지만 능력 있고 똑똑한 가문이 먼저하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시대같으면 시험을 치러 순위에 따라 맡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5절 “이에 제비 뽑아 피차에 차등이 없이 나누었으니”라고 합니다. 제비를 뽑습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말이 바로 “제비뽑기”입니다. 31절에 레위인들도 공정하게 제비를 뽑아 직무를 감당하게 합니다. 구약시대 제비뽑기는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이 “차등이 없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동일한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세상의 기준으로 차등을 두지 않고 감당하게 합니다. 좀 부족한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책임지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해서 24개의 조직으로 편성해서 돌아가면서 성전에 들어가 대제사장의 일을 돕습니다.
레위 자손도 마찬가지입니다. 31절 하 “그들의 형제 아론 자손처럼 제비 뽑혔으니 장자의 가문과 막내 동생의 가문이 다름이 없더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특권을 가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는 장자의 가문과 막내의 가문이 다름이 없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오늘 말씀을 교회에 적용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은 감당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큰 일, 작은 일이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귀한 일입니다. 또한 직분이 있고 경험이 있다고 내 마음과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 아닌 조심스럽게 서로 의논하면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을 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할 수 있음이 은혜임을 감사하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