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9 | 매일성경
●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38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셔서 위대한 생명의 기적을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가시며 38절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여기 ‘비통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33절에도 나왔지만 단순히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정도의 감정이 아닙니다. 원어(엠브리마오마이) 의미는 마치 말이 코에서 콧김을 내뿜으며 분노로 치를 떠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강력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이토록 분노하셨을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요한복음이 “새 창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1:1절이 창세기처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하는 것은, 창세기에서 망가진 문제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해결하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질병이나 늙음, 죽음이 없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인간은 죽음과 질병의 굴레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절망해왔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피조물을 짓누르고 파괴하는 이 “죽음의 세력”을 향해 맹렬하고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로 막힌 굴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다급히 만류합니다. 39절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사실 마르다는 바로 앞선 대화에서 예수님을 27절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훌륭하게 고백했던 여인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훗날 마지막 부활의 때에나 이루어질 막연한 진리였을 뿐,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부패해가는 오라비의 시신을 주님이 살려내실 것이라는 “현재적인 믿음”은 없었습니다.
마르다의 모습은 곧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고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내 경험과 이성, 내 한계에 주님의 능력을 가둬두고 신앙생활을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그런 마르다에게 40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며 참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니라, 내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이 선행될 때 비로소 죽은 자가 살아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 “나사로야 나오라”(43절)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41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이 굳이 무리들 앞에서 소리 내어 기도하신 이유는, 자신이 행하는 이 생명의 기적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임을 주변 사람들이 믿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십니다. 창조주의 생명 말씀이 선포되자, 죽었던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얼굴은 수건에 싸여서 무덤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앞으로 이어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를 살리셨는데, 머지않아 유대인들은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것입니다. 또한 나사로의 얼굴이 ‘수건’에 싸여 있었다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요20:7절은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나사로가 수건을 감고 살아난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훗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실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걸어 나오는 이 엄청난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둘로 나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고발했습니다. 그들은 진리 앞에서도 예수님을 제거하고 죽이기로 결의하는 완악함을 보입니다.
이 엇갈린 반응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내 삶에 더 큰 기적과 응답을 주시면 내가 더 잘 믿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던 유대인들처럼,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것은 “더 많은 기적과 체험”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기적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기적이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기적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적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새로운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온전한 믿음’임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르다처럼 내 생각과 경험의 한계에 갇혀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죽음과 절망의 문제를 향해 맹렬히 분노하시며 굽어살피시는 생명의 참된 주관자이십니다. 더 많은 기적을 구하기보다,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밝히 보여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시다. 내 삶의 절망적인 무덤 앞에서도 “나오라” 부르시는 생명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복된 하루가 됩시다.
2026.03.06 | 매일성경
●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4절)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개의 기적 중 마지막 일곱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표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의 시작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를 넘어,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0:38절에서 분명한 표적들 앞에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고 하셨는데, 가장 위대한 일, 표적을 행하십니다.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에 걸렸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3km 동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3절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렇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것을 보면 나사로가 위중한 상태였음을 알게 됩니다. 자매들은 당연히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급히 오셔서 오라버니를 고쳐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급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4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나사로는 결국 죽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병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이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위대한 일이 될 것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죽음조차 사용하십니다. 우리 삶에 예기치 않은 질병이나 실패, 깊은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짓누르는 그 고난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나는 거룩한 무대’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6절)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예수님의 다음 행동입니다. 5절은 예수님이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분명히 ‘사랑하셨다’고 기록하는데, 6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너무나 위급한 상황인데, 왜 일부러 지체하셨을까요?
우리는 17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요단강 저편”(10:40절)과 베다니는 걸어서 하루 정도의 거리입니다. 나사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가지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출발한 후 나사로는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고, 소식을 들으신 후 이틀을 더 유하신 겁니다. 그리고 하루 걸어서 베다니로 향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지 4일 만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의 지체하심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체하심은 결코 사랑이 없거나 무관심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다급한 요청이나 필요에 이끌려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단순히 아픈 병을 고쳐주는 것을 넘어,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생명’이라는 훨씬 더 크고 영광스러운 선물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해 주님의 응답이 지체되는 것 같아 답답할 때, 그것은 ‘거절’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완벽한 기다림”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절)
이틀이 지난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놀라며 만류합니다. 8절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베다니를 향해 가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가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자신은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나사로와 같이 죽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는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은 것을 11절 “잠들었다”고 표현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육신의 잠을 자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성경은 종종 죽음을 잠에 비유합니다. 영원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다시 일어나듯, 살아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이 끝 혹은 영원한 절망이 되지 못합니다. 죄로 인해 찾아온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
16절은 상황을 오해한 도마의 외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런데 이 말이 기록된 의미가 있습니다. 도마의 말처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 이 사건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의 결의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죽음을 길을 가신 겁니다. 그렇다면 도마의 이 고백은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제자는 도마의 고백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어두운 무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 시간표대로 응답되지 않아 절망하고 계십니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합시다. 내 삶에 닥친 고난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참된 소망 가운데 승리합시다.
2026.03.05 | 매일성경
●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6절)
오늘 본문의 배경은 ‘수전절(성전 봉헌절)’이며, 계절은 ‘겨울’입니다. 수전절은 주전 164년경 마카비 혁명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더럽혀졌던 성전을 되찾아 깨끗하게 한 후, 하나님께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굳이 22절 “때는 겨울이라”고 명시한 것은, 단순히 날씨가 춥다는 사실을 넘어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향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차갑고 냉랭한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성전 안 솔로몬 행각을 거니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다그칩니다. 24절을 새번역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로 번역했습니다. 언뜻 보면 이 질문은 메시아에 대한 순수한 갈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힘 있고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원했기에, 양의 문이요 목자로 오신 예수님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말씀과 표적으로 당신이 누구신지 증명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되었던 자가 눈을 뜬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믿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를 주님은 이렇게 진단하십니다. 26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즉, 증거나 기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들이 정해놓은 율법적 세계관과 욕망의 틀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원하는 방식의 예수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영적인 교만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8절)
반면, 예수님의 참된 양들은 거짓 목자들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음성을 따르는 양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첫째는 ‘영생’을 주어 영원히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28절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절대적인 안전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29절에서는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로 이어집니다. 즉,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님의 손”은 곧 온 우주를 창조하신 만유보다 크신 “아버지 하나님의 손”과 완벽하게 동일함을 선포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실패, 심지어 사탄의 세력조차도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우리를 결코 끊어내거나 훔쳐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안전한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나 행위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절대적 안전을 보증하시며, 예수님은 위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뜻, 생명을 주시는 권능이 곧 성부 하나님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신성모독이라며 분노하여 돌을 들어 치려 합니다. 생명의 주님이시며, 참된 성전이신 창조주가 눈앞에 계시건만, 기득권과 자기중심적인 신앙에 갇힌 그들은 오히려 구원자를 죽이려 드는 치명적인 영적 소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41절)
결국 예수님은 돌을 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떠나, 과거 세례 요한이 사역하던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 안의 사람들은 그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요단강 저편의 무리들은 41절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표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말씀에 반응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자신의 유익만을 좇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반응하여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진정 선한 양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 현주소를 돌아봅니다. 나는 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내 욕망과 내 방식대로 응답해주시는 메시아만을 원하며 주님과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당장의 문제 해결이 없다고 해서 쉽게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강한 손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를 굳게 붙들고 계십니다. 내 삶에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추운 겨울이 찾아올지라도,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크신 손을 굳게 신뢰합시다. 요단강 저편의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이 없을지라도 오직 ‘말씀’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쁨으로 순종하는 생명력 넘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026.03.04 | 매일성경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3절)
10장은 9장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 육신의 눈은 떴으나 영적으로는 맹인인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1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참된 목자가 아닌 거짓 목자임을 밝히시며 예수님 자신이 ‘참된 목자’이심을 설명하십니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길잃은 양과 같이 방황했던 이유는 바로 목자가 되어주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 34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당시 지도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십니다. 2-3절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한 목자를 세우시겠다고 합니다. 겔34:23절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선한 목자가 되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양의 우리와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여러 주인의 양들을 하나의 우리에 모아두고 문지기가 지킵니다. 아침이 되어 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가는 이가 참 목자이며, 울타리를 넘어가는 자들은 절도며 강도입니다. 참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내고, 앞서 걸어가며 양들을 이끕니다. 실제로 목자들은 양들의 숫자가 많아도 이름을 알고 부른다고 합니다. 또한 양들도 앞서가며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 뒤를 믿고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항상 함께 하시면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는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양은 자신의 힘을 키움으로, 자신의 지식을 쌓음으로, 자신의 지위를 높임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없습니다. 어떤 목자를 만나느냐가 삶과 죽음을 결정합니다. 예수님만 목자로 삼고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9절)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양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는 ‘양의 문’이심을 구체적으로 밝히십니다. 화재 현장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문을 찾아야 하듯, 죽음이 도사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십니다. 10절에 보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지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이단이나 우리를 이용하려는 거짓 목자들의 달콤한 유혹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의 음성,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묵상하며 순종하여 따라갈 때에만 우리는 멸망의 길이 아닌 풍성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
이어서 예수님은 두 번째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가장 큰 차이는 위기의 순간에 나타납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립니다. 반복되는 말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입니다(11,15,17,18).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양 몇 마리를 지키기 위해 목자가 죽는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처럼 보입니다. 양 수백 마리가 죽어도 목자는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8절에서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시며, 양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세상의 가치로 양을 계산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처럼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누리셨던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됨처럼 우리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양과 같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다른 양들은 장차 복음을 듣고 주님게 돌아올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막힌 담을 허시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모든 자들이 하나가되는 구원의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양들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 사랑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이 바로 나의 선한 목자이심을 기억합시다. 세상의 복잡하고 유혹하는 소리들을 뒤로하고, 내 이름을 아시고 나를 푸른 초장으로 앞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며 순종하는 풍성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6.03.03 | 매일성경
●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예수님께서 실로암 연못에 씻게 하심으로 고쳐주신 표적으로 시작합니다. 눈을 뜬 이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기 위해 먼저 이 사람의 부모를 불렀지만, 부모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형 선고와도 같은 가혹한 형벌인 출교가 두려워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며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자를 두 번째로 다시 부릅니다.
그들이 이 사람을 두 번째 부른 이유는 자기들이 정해놓은 답, 즉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고 죄인이다”라는 대답을 강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24절에서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윽박지릅니다. 이는 좋은 뜻이 아니라, “우리가 듣고 싶은 진실, 즉 예수가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라”는 위협적인 요구였습니다. 평생 앞을 보지 못해 구걸하며 살았던 그에게 당대 최고 권력자인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은 엄청난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치료함을 받은 그는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강압에도 위축되지 않고 25절에서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자신이 직접 겪은 부인할 수 없는 은혜의 체험을 바탕으로 굽히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참된 증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30절)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했는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이 사람은 27절에서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라며 오히려 그들을 조롱하듯 반문합니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섰음을 당당히 드러낸 것입니다. 분노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라 칭하며, 이 예수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요한복음은 반복적으로 예수님께서 모세가 했던 일들을 완성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인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광야에서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한 것처럼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십니다. 특히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죽어가는 자들을 살린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죄로 인해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실 것입니다. 모세를 제대로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모세보다 크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의 상태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억지에 맹인이었던 자는 자신이 아는 상식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반박합니다. 30-33절에서 그는 “창세 이후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들으시겠습니까? 이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며 확신에 찬 선포를 합니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궁지에 몰린 바리새인들은 결국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며 인신공격을 가하고 그를 쫓아냅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출교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끝까지 증거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38절)
자신을 증거하다가 출교를 당해 버림받은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친히 다시 찾아가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35절에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시며, 당신이 장차 십자가를 지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 즉 ‘인자’이심을 분명하게 계시해 주십니다.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눈앞에 계신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그는 38절에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육신의 눈을 뜬 것에만 머물지 않고, 예수님을 온전한 나의 주인으로 알아보는 ‘영적인 눈’까지 완전히 떠지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의 결론으로 예수님은 39절에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자신은 죄인이며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무지를 인정하는 자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지만, 바리새인들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교만하게 주장하는 자들은 영원히 눈먼 자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발끈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산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스스로 성경을 알고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며,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영적 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늘 겸손하게 말씀 안에 머물며,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영적인 눈을 매일매일 새롭게 떠가야 합니다. 또한 맹인이었던 자처럼 세상의 위협과 불이익 앞에서도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는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2026.02.13 | 매일성경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2절)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을 방문하셔서 한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여인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유대 갈릴리로 오시는데, 사마리아와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이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을 그런 태도를 책망하시면서도 병들어 죽어가는 왕의 신하 아들을 말씀으로 고쳐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1절 “그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어느 명절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양문은 양들이 지나다니는 문으로 제물로 바쳐질 양을 씻기 위해 사용되던 문입니다. ‘베데스다’의 의미는 “자비의 집”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자비가 넘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 다섯 개가 있는데, 그 안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있습니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아마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나고 절망이 깊은 장소였을 겁니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곳이 아니었을까요?
이 병자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베데스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4절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기가 막힐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연못의 물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다 물이 움직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달려야 합니다. 누군가를 제쳐야 하고, 누군가는 밟고 지나가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1등을 해야 치료가 됩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절망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정말 천사가 내려와서 물이 움직였을까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연못에 가끔 온천수가 솟아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천사가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한 연못 물에 철분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간혹 치료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것이 미신같은 이야기로 이어진 겁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육신은 멀쩡하지만 죄의 영향력 아래 신음하며 살아갑니다. 헛된 소망을 붙잡고 서로 경쟁하며 달려갑니다. 이런 세상에 유일한 소망은 누구일까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참 긴 시간입니다. 지금과 다른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해본다면 이 사람은 거의 평생을 질병의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이 연못에 얼마 동안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먼저 들어가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런 병자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의 질병이 오래 된 줄 아시고 물으십니다. 6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나 마나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병자는 다른 대답을 합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대답 속에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내 곁에 힘 있고 발 빠른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데 그럴 수 없어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라도 곁에 머물면서 그런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병자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겁니다. 바로 앞에서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살려주신 분입니다. 죽을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니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처음보았기 때문이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병자보다 이 시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잘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능력의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저 사소한 몇 가지만 해결할 분으로 믿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8절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참으로 당혹스런 말씀인데 병자는 순종합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기적이 특이한 것은 보통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네가 낫고자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혹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며 치유하시는데 이 사람은 그냥 치유하십니다.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합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육신의 질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안식일인데 병을 고치는 것도 문제요, 병자가 치유되었다고 자기 자리를 들고 가는 것도 문제라는 겁니다. 참 냉혹한 사람들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이들의 이웃이었을 겁니다.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살았는지 너무 잘 압니다. 하지만 병자의 치유를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 안식일 규정으로 그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은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병자에게 안식은 질병의 짐을 벗는 겁니다. 드디어 참된 안식을 누린 겁니다. 그런데 정죄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육신은 멀쩡한데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를 망각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런 유대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지적에 당황한 병자는 누가 자리를 들고 가라고 했는지 대답을 못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고, 자신이 치유되어 기뻐하는 사이 예수님이 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4절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육신의 질병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외칩니다. 15절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예수님만이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선포합니다.
어디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소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누리고 있다면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