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13-25절/유월절에 성전에서(26.02.0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15절)

​예수님은 갈리리 가나에서 첫 표적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의미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종교였습니다. 의미와 생명은 사라지고 습관과 형식만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가나 혼인잔치 기적을 행하신 진정한 의미가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즈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우리는 1장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1: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양이 유월절 어린양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일이 한번 기록되었지만, 요한복음에는 세 번 올라가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신 예수님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합니다. 14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성전 안”이라고 했는데 건물 안이 아니라 이방인의 뜰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성전 경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장사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이 이런 모습으로 변질되었는가? 성전에 올 때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드리는 제물의 기준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레22:20-22).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상인들과 결탁해서 상인들이 파는 제물만을 흠이 없는 제물로 인정을 해준 겁니다. 그리고 상인들이 주는 이익을 챙깁니다. 그러니 제물을 사는 사람들은 상인들이 가격을 높여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 년에 한 번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통되던 로마 화폐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상이 없는 두로 화폐로 환전해서 성전세를 냅니다 그래서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이익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가?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고 돈을 쏟고 상을 엎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6절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도전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시지만 타락한 성전의 모습에 분노하십니다.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와 반대로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눈치 보고 사람 중심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열심이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할 것은 구약 다윗이 이야기를 통해 설명합니다(시69:9절).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예수님의 행동에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18절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표적으로 입증하라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주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19절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십니다. 아마 듣는 모든 사람이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합니다. 20절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오래 전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지었던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증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46년 동안 진행 중이었고, 약 80년 만에 완공이 됩니다. 그런 성전을 3일 만에 일으킨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아마 함께 있던 제자들 역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21-22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깨달은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고,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성전을 헐라),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임을 깨달은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요 앞부분인 가나 혼인 잔치 기적을 행하신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성전이십니다. 구약시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므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완전한 제물이 되셔서 단 한 번의 십자가의 죽으심(제사)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성전이 되시고, 성전되신 예수님이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 또한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에게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24절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인기를 구하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2:4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때, 목적 즉 십자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과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한 신앙을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의 인기를 얻는 신앙이 아닌 오직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2:1-12절/물로 된 포도주(26.02.04)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1절)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장소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라고 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참석합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 문제가 생깁니다. 3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결혼풍습은 7일간 진행이 되었고, 결혼식의 기쁨으로 유지하는데 포도주가 중요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신랑과 신부뿐만 아니라 가족의 불명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창세기와 연결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은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 됨을 깨뜨리고 이후 사람에게는 슬픔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3장부터는 그런 사람의 예를 하나씩 들어 설명합니다. 당시 최고의 석학인 니고데모, 4장은 당시 가장 낮은 지위의 여인인 수가성 우물가여인, 5장은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슬픔의 장소가 된 곳을 기쁨으로 바꿔주십니다. 죄로 인해 절망에 빠진 모든 인생에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기쁨, 생명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표적이 혼인 잔치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3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 문제는 주최측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부탁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탁은 기적을 행하라는 요청이라기 보다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요구입니다. 어머니로서 자연스러운 부탁일 수 있지만, 마리아의 요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먹고사는 문제, 정치적인 억압 등을 해결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절처럼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중에 기적을 행하시지만 분명하게 자신이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 때”를 위해 왔고, 그때는 인간의 일상적인 문제가 아닌 근본적인 문제,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그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을 선명하게 아시고 그때를 향해 나가십니다.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부르는데 헬라어로는 존칭으로 부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잉태하고 태어날 때 천사들이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데 방법이 6절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두세 통은 약 100리터의 양입니다. 이런 돌항아리가 여섯 개가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돌항아리의 용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정결 예식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돌항아리가 비어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이스라엘 종교가 내용과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겁니다. 그런 신앙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짐을 지우는 신앙일 뿐입니다. 그곳을 예수님은 물로 채우시고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식만 남은 죽음의 종교를 생명과 기쁨의 종교로 바꾸실 것입니다.

하인들에게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하니 아귀까지 채웁니다. 그리고 8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물을 채우는 것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물을 떠서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는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는 것은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연회장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자칫 모욕과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인들은 순종해서 가져다줍니다. 그 결과 9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물로 된 포도주”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연회장이 놀랍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첫 표적의 목적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을 ‘영광의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부분인 1-12장까지는 이런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고, 13-21장까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영광스럽게 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집중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표적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알고 따르고 있지만 점점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합니다. 정결예식 돌항아리처럼 습관화 형식화되어 있지는 않는지 생각합니다. 물로 채워지고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듯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쁨과 생명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끊이지 않는 우리 삶의 문제들을 변화시키고 해결하시는 주님께 맡깁시다.

요한복음1:35-51절/함께 거하니(26.02.03)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38절)

​예수님을 소개했던 세례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그러자 36절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합니다. 어제 본문 29절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세례요한은 인생의 문제가 ‘죄’라는 사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당시 오실 메시아에 대한 왜곡된 기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안드레라고 40절이 소개합니다. 다른 한 제자의 이름을 성경학자들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일 것이라고 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정확한 설명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낸 겁니다. 이제 따르고 섬겨야 할 분은 예수님이라는 거지요. 세례요한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삶을 삽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38절 “무엇을 구하느냐” 바꿔 이야기하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무엇을 원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들은 예수님을 랍비, 즉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어디 계신지를 묻습니다. 그곳에 함께 머물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함이 이 제자들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9절 “와서 보라”고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이 말이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46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와서 보라”고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 계신 곳으로 가서 함께 거합니다. 시간이 10시쯤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시간으로 오후 4시입니다. 아마 하루를 함께 보내고 이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이후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가 변화된 모습을 보면, 예수님과 교제하며 많은 대화를 나눈듯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이 지금까지 이들이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안드레가 찾아간 사람은 형제인 시몬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41절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안드레의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달라졌습니다. 랍비(선생님)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메시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곧바로 자기 형제 시몬에게 전한다는 것은 먼저 안드레의 마음에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그런 기쁨과 확신을 주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 가운데 시몬이 생각났다는 것은 시몬 역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몬을 알아보시고 이름을 바꿔주십니다. 그런데 본문 47절부터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도 예수님께 오는데 그 역시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알아보십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정확하게 아신다는 겁니다. 아실 뿐만 아니라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게바’입니다. 헬라식으로 하면 ‘베드로’인데, 의미가 ‘반석’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그는 처음에 반석이 아닙니다. 좌충우돌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가면 반석이됩니다. 초대교회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시고 그렇게 만들어가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베드로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부족함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 나라 향한 꿈도 주시고 이루게하시는 분이십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46절)

​다음 날에는 예수님께서 빌립이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두 제자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랐다면, 빌립은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제자를 삼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 역시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합니다. 나다나엘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46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말은 구약을 잘 알고 있는 나다나엘이 메시야와 나사렛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빌립이 46절 “와서 보라”고 합니다. 빌립이 지혜롭습니다.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합니다. 우리도 전도하다 보면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요즘같은 시대 교회를 공격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논쟁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과 빌립처럼 “와서 보라”, “와서 말씀 들어봐라”, “와서 예배드려보라”고 초대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빌립의 전도로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오자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아십니다. 47절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놀란 나다나엘이 자신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묻자 48절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에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49절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즉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맞습니다”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만 했는데 나다나엘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요?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아마 그 아래에서 나다나엘이 간절히 메시야를 고대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런 그가 메시야를 만났고 자신이 기도했던 것을 아시는 것을 보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놀라는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50절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일”이 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창세기에서 야곱이 한 곳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었는데 사닥다리가 보이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의미가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하늘과 땅,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사역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된 관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연결하시고 회복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매일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됩시다. 또한 주님을 만난 기쁨을 “와서 보라”고 전하는 삶이 됩시다.

요한복음1:19-34절/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6.02.02)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20절)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반복해서 ‘말씀’을 강조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천지 만물 창조사역에 함께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좋은데,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요, 이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잠언 8장에 나오는 ‘지혜’였고 더 나아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를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또한 이방인인 헬라인들은 철학적 사고를 하면서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로고스’라는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당신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이분이다!”라는 선언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당신들은 신이 존재하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분이 바로 로고스이신 예수님이다!”라고 선언하는 겁니다. 탁월한 단어 선택입니다.

요한은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곧바로 4절에서 생명과 빛으로 연결합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죽음이요 어둠입니다. 9절 보면 예수님은 참 빛으로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외면합니다. 자신들의 기대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합니다. 창조주를 피조물이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이 특권과 권세 누리고 있음이 감사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예수님이 아닌 자를 소개합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 이야기가 1장에서 많이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주목하고 기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저자 요한은 6-8절까지 세례요한은 ‘사람’이고 그의 사명은 ‘증언’이라는 것을 반복 강조합니다.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으며,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소개합니다. 세례요한에게 특사단이 파견되어 19절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세례요한은 드러내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답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인기가 있어지면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인기가 더 치솟을 겁니다. 영광과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고 단호하게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마17:12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먼저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세례요한이 그 엘리야입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세례요한은 자신을 그런 특별한 존재라고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의 대답에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냐?” 요한의 답은 23절 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 사40:3절을 인용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왕이 등장할 때 그 길을 미리 준비하는 역할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는 소리는 사라지고 말씀만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은 사라지고 예수님만 드러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만 흥하고 자신은 쇠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또한 자신은 27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3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런 소개에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을 겁니다. 당시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의 강한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해줄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29절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나오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세상 영광 지고 가는 하나님의 숫 사자”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여기 어린양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양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집문에 바르므로 장자의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의 문제가 정치, 경제적인데 있지 않다는 말해줍니다. 그것이 해결된다고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는 오직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주님께만 영광돌립시다. 세상 죄를 지고 자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어 갑시다.

창세기21:1-21절/말씀하신 대로(26.01.30)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2절)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납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1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를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돌보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십 평생 자녀가 없었던 사라를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행하시니 임신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시기, 하나님의 때가 되니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1-2절의 강조점은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시기에 반드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부분에서 실패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기가 아닌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처럼 가정에 갈등과 아픔이 발생합니다.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때를 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입니다.

낳은 아들 이름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후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4절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여기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입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민족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라함도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도록 언약 백성의 징표로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할례를 통해서 언약에 신실한 삶을 스스로 결단하며, 이삭의 몸에도 징표를 새기고 있습니다.

5절은 이삭이 태어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를 기록합니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100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2절은 “노년의 아브라함”, 7절도 “아브라함의 노경에”가 반복됩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인간이 끝났다고 절망하고 포기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시고 소망을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슬픔 가운데 있던 사라를 웃게하셨습니다. 또한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도 웃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쓴웃음이 변하여 함박웃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시30: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다 보면 절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시는 때입니다. 다시 웃게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12절)

​이삭의 태어남은 기쁨이지만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뒤를 이을 것인가입니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태어남으로 변화가 생깁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이삭이 젖을 떼고 잔치를 베푸는 날에 일어납니다. 보통 젖을 떼는 나이는 세 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이스라엘의 나이는 17살 정도 되었습니다. 상당히 장성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소망이요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갈등이 발생하는데 9절 하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여기 “놀리는지라”의 본 의미는 “웃었다”입니다. 비웃은 겁니다. 아이가 비웃은 것을 가지고 가족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내쫓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좀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 비웃음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가는 것에 대한 비웃음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거대한 세상을 만들고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그러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사라는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11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사랑하는 아들, 지금까지 큰 기쁨이었던 아들은 쫓아낸다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12절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라의 말처럼 내 보라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맺은 언약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도적으로 하갈의 아들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거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14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순종하기 쉽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순종합니다.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의 모습 가운데 이런 내용이 많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머뭇거리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따릅니다.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주고 하갈과 아들을 내보냅니다. 이들은 머지않아 죽을 위기를 만납니다. 그런데 17절에는 두 번이나 하나님께서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들으셨다”인데 이름처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갈을 위로하시며 아들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밝히니 샘이 보이고 물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마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때에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인내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 통해 순종을 요구하실 때 즉각 순종합시다.

창세기20:1-18절/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26.01.29)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2절)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구체화되었습니다. 18: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지 25년여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를 앞두고 있으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 가정이 지금 그래야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수는 이미 12장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왔는데 기근을 만나자 애굽으로 내려가며 두려움에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합니다. 애굽 왕이 사라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위기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큰 재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1장은 드디어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브라함의 실수는 하나님의 약속이 시작된 직후에,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사실을 강조합니다. 15장 횃불 언약을 통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책임지시고 언약을 이루십니다. 사람은 위기를 만들지만 하나님은 위기를 해결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해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수합니다. 실패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붙잡으시고 이루어가십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갑니다. 지금 사라의 나이가 90인데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데려갔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어찌 되었든 위기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개입하십니다.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3절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아무것도 몰랐던 아비멜렉은 자신이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행한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비멜렉의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7절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을 치료하셔서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는 롯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9:2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로 롯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점점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땅에 살던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온 세상을 향한 스스로 꿈꿀 수 없는 비전을 주시고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며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부르신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10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책망했듯이 아브라함을 책망합니다. 이 일로 자칫 아비멜렉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까지 위기를 겪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묻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절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8절 하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신뢰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다면 어디에 있든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사람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아비멜렉의 책망에 아브라함의 대답이 계속되는데 13절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고 합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이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두 번 이상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12장에서 아브라함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케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방패와 상급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실수를 통해서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전과 다른 말과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문제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점검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 신앙을 시작하신 분들이 세상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왔음에도 여전히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오늘 본문처럼 한 가정과 인생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장에서도 실수를 통해 재물을 얻은 것처럼 아비멜렉도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또한 16절 “은 천 개”를 줍니다. 많은 액수입니다. 아비멜렉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물질로 보상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비멜렉을 위해 아브라함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 출산케 하십니다.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새로운 환경이나 두려운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고, 이전과 다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