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9 | 매일성경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3절)
본 시편 역시 ‘다윗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삶에 예기치 못한 고난이 찾아올 때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때가 소망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우리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시인이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외로움과 두려움이 시인의 삶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가면서 오히려 큰 은혜 누리며 능력과 빛을 경험하게 됩니다.
1-6절에 반복되는 단어는 “아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시냐면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아십니다. 여기 ‘살펴보셨다’의 의미는 보석을 분별할 때, 법적인 분쟁에서 증거를 찾을 때, 그리고 군사작전에서 적진을 정찰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냥 아시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향한 깊은 관심으로 집중해서 살펴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라고 번역합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들고,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이 말씀이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아신다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길을 가거나 누워있는 것을 아십니다. 일거수일투족을 아십니다. 이처럼 외형적인 것만 아시는 것이 아니고 내면도 아십니다. 마음과 생각을 밝히 아시고 거기서 나오는 혀의 말도 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고 합니다.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둘러싸 주십니다. 그리고 안수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또 하나의 단어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손’. 10절에서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십니다.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잡아 주십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깊은 고독 속에서 하나님께서 시인의 손을 뜨겁게 붙잡아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인과 함께 하십니다.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 깨달음으로 시인은 놀랍게 됩니다. 6절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지금 시인은 고난과 외로움 속에서 흔들리고 무너져야 합니다. 두려움 속에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살피시고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니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며 소망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0절)
그리고 아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 하십니다. 7-10절이 그 내용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어느 곳에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스올에 자리를 펼지라도 함께 하십니다. 9절은 복음성가에도 자주 나오는 표현인데요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입니다. 이 장면은 동이 틀 때 태양광선이 순식간에 뻗어나가 바다 끝에 닿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빛의 속도로 날아간다 할지라도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합니다.
롬8:35-39절 말씀이 생각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이처럼 아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인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흑암과 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인의 상황입니다. 흑암 가운데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니 어둠이 어둠이 아닙니다. 밤이 하나님으로 인해 낮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12절 하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현실은 고난과 어둠이지만 내면은 빛입니다. 소망입니다. 기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2025.12.08 | 매일성경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2절)
본 시편은 ‘다윗의 시’로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환난 가운데서 지은 시편입니다. 시작은 1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시인은 지금 감사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1절 “신들 앞에서”는 “천사들 앞에서”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이방신들 앞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이방 신들이 다스리는 이방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도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라고 합니다. 성전 가까이에 있다면 성전에 가서 예배하며라고 해야 할 텐데, 그럴수가 없으니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광야에 같은 환경,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시인은 “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또한 간구합니다. 이것이 힘과 기쁨이 넘치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시인이 감사하는 이유는 2절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입니다. 시인은 시작인 2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인 8절에서 다시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라고 합니다.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언약에 신실하심입니다. 말씀하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진 것과 같지만 시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예배하며 찬양합니다.
그리고 간구합니다. 비록 이방 땅,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하나님은 아니계신 곳이 없고 자기 백성을 반드시 기억하시며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간구합니다. 시인의 간구에 하나님은 힘을 주십니다. 강하게 하십니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7절)
시인은 이어 4절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라고 합니다. 1절에서는 “신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이제는 세상의 모든 왕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경험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 왕에게 말씀하시고, 순종하지 않자 10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세상 왕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5절은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그 무엇, 그 누구보다 하나님이 높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크고 위대하십니다.
시인의 고백이 놀라운 것은 당시 세상 왕들은 신과 같은 존재로 경배를 받습니다.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세상 모든 왕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백성들이 영광스러운 존재요, 영광의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당시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거대한 로마제국 황제의 핍박 아래 놓여있습니다. 황제 앞에 성도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요한을 열린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계4:1절). 그리고 보여주신 것이 보좌였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며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이 땅 로마제국의 황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한치의 두려움없이 믿음의 길을 걸어 가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과 다릅니다. 6절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세상은 힘과 권력 부를 가진 자들이 중심입니다. 낮은 자들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삶이 피폐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높이 계시지만 낮은 자들, 연약한 자들을 아시고 살피십니다. 도우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반면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십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본문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낮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7절을 새번역으로 보면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에게 새 힘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고난의 한복판을 걸어도 하나님께서 능력의 오른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눈물과 수고와 인내를 아시고 갚아주십니다. 8절 하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하는데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28: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감사할 수 없는 현실, 예배할 수 없고 기도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시인은 전심으로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 기도의 삶을 삽니다. 좋은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닮아 하나님 나라 정신을 따라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삶, 낮고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5.12.05 | 매일성경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3절)
성벽 봉헌식을 하며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말씀을 통한 부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말씀이 백성들을 새롭게 합니다. 점점 더 온전케 합니다. 이들이 낭독한 내용은 1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는 구절입니다. 이는 신23:3-6절의 내용입니다.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척하고 잔인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라는 주술사에게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습니다.(민22-24장) 하지만 하나님은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민24:10절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니 이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기준을 따라 분리해야 합니다. 이전 에스라 때에는 이방인과 통혼하는 문제가 있어 스10:11절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관계의 단절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의 완전한 분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절은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신앙의 순수성과 거룩함을 위해 섞이면 안 됩니다. 분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계속 이스라엘은 섞여 있었습니다. 분명 공동체에 분명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지 못했고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깨닫고 분리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묵상하며 작은 부분 하나도 점검하면서 세상 속에 살지만 구별되어야 합니다. 구별된 가치관,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분리해야 할 것을 분리해야 합니다.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11절)
이어지는 4-13절은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면서 충격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교제하면서 도비야를 위해 성전에 큰 방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의 원래 목적은 제사장과 성전 봉사자들인 레위사람들을 위해 예물을 쌓아 놓는 방이었습니다. 도비야는 어떤 인물입니까? 1절에서 분리해야 할 대상인 암몬 사람입니다. 산발랏과 함께 성벽 재건을 방해하며 조롱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자가 다른 곳도 아닌 하나님의 성전에, 다른 방도 아닌 성전 봉사자들을 위해 예물을 보관하는 방에 머물렀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그 일을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이 주도했다는 것은 더 충격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너무 갑작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과정이 말씀 중심으로 회개와 은혜 속에서 회복되어 갔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6절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설명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있지 않을 때 일어났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에게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예루살렘에 올 때 돌아온 기간을 정하고 왔기 때문입니다(2:6절).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는 2:1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제2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간 때는 아닥사스다 32년입니다. 12년 정도 총독으로 일을 하다 돌아간 것입니다. 그 이후 일어난 일입니다.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은 아마도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런 일을 저지른 듯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의 행동은 진실이 아닌 가식이었습니다. 13:28절에도 보면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의 손자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닌 사람 앞에서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마음 중심이 변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6절 하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며칠 후”를 새번역성경은 “얼마가 지나서”로 번역했고 아마 2-3년 후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서도 고국에 대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염려가 된 듯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는데 짧은 기간 안에 예루살렘은 많은 것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앞에서도 계속 강조하였듯 외형적인 건물을 세우는 것보다 내적인 신앙을 온전히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전도 성벽도 세워져 있지만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세우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다 던지고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예물을 들여놓습니다.
도비야가 성전 방을 차지한 것은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12:44-47절에 나온 것처럼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레위인들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생계를 위해 밭으로 도망합니다. 성전 중심 예배를 위해 질서있게 조직했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신앙이 이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지도자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불러 다시 제자리에 세웁니다. 오늘 본문에 “다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9절 “다시 그리로”, 11절 “다시 제자리로”. 그렇습니다. 다시 원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섬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치울 것은 치우고 다시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다시 곳간에 성전 봉사자들을 섬길 예물을 채우고 관리하는 자들을 세웁니다. 이들은 13절 하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정직하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바르게 분배하게 합니다. 늘 강조하지만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 일상에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순결을 위한 분리가 필요합니다. 다시 채워야 할 것으로 마음의 성전을 채우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돌아가 서야 합니다.
2025.12.04 | 매일성경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27절)
성벽을 완공 후 말씀 중심의 신앙회복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성벽 봉헌식이 이루어집니다. 성벽 봉헌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전에 비하면 성벽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있지만, 성벽이 없는 성전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백성들도 그렇습니다. 온전한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벽이 완공되어야 모든 것이 안정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도 온전해 집니다.
그런데 성벽 공사가 쉽지 않았습니다. 내부, 외부적으로 많은 장애물과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이기고 완공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의미로, 또한 완공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봉헌식을 진행합니다.
봉헌식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 레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있어야 27절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포로에서 돌아온 레위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도 예루살렘 근처에서 살고 있다가 모여듭니다. 이렇게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할 사람들이 준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봉헌식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30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정결입니다. 사람들이 정결해야 합니다. 제사장, 레위인들 그리고 백성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문과 성벽까지 정결하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정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봉사할 때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정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벽 봉헌식은 특이하게 진행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성벽 위로 오르게 합니다. 뒤를 이어 감사 찬송하는 큰 무리가 따르게 하는데, 이들을 둘로 나누어 서로 반대쪽으로 걸어가며 찬양하게 합니다.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향합니다. 이 무리의 인도자는 36절 하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라고 합니다. 에스라입니다. 이들은 분문을 지나 샘문, 그리고 수문으로 향합니다.
에스라가 인도하는 무리와 반대로 왼쪽으로 향하는 무리는 느헤미야가 지도자입니다. 이 무리도 백성의 지도자와 찬양하는 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뒤를 따라갑니다. 화덕 망대를 지나 옛문과 어문, 그리고 양문을 지나 감옥문에 멈춥니다. 이렇게 행진하여 두 무리가 함께 만난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행진은 성전 반대 쪽에서 시작해서 성전에서 만나도록 진행되었습니다.
성벽 위를 걸으며 감사 찬양하는 무리의 마음에는 큰 감격과 감사가 넘쳐났을 것입니다. 방해하는 자들이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백성들이 세우려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견고한 성벽을 완공하고 그 위를 걸으며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니 감격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함께 성전에 모였을 때는 42절 하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라고 합니다. 성전이 큰 찬양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43절)
그리고 이들은 43절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립니다. 큰 제사는 많은 예물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즐거움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을 43절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라고 “즐거워하고”를 네 번이나 반복합니다. 부녀와 어린 아이까지 모두가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즐겁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즐거움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주어졌습니까? 힘들고 어려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했을 때 큰 즐거움이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기뻐하시는 일,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감당할 때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제 성벽 봉헌식을 마쳤으니 앞으로 계속해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중요한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입니다. 또한 이들이 지속적인 봉사를 하려면 이들의 생계를 채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백성들이 드리는 예물을 곳간에 채웁니다. 거제물과 첫 열매, 그리고 십일조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힘을 다하여 노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의 인도로 함께 예배하는 백성들의 마음에도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육적인 필요를 채우도록 하십니다. 또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줍니다. 이렇게 둘은 하나가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지를 돌아봅니다. 습관적인 예배가 아닌 일상의 정결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므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수고스럽지만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2025.12.03 | 매일성경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1절)
오늘 본문에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 관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장에도 10절부터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명단이었습니다. 그런데 11장은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들의 명단이라고 한다면, 본문은 1차 포로 귀환 때부터 시작해서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명단을 따로 소개하는 이유는 12:27절부터 시작되는 성벽 봉헌식을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성벽이 완공된 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이전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예배하는 일을 담당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입니다.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는 느헤미야의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외형적인 건물이 잘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회복 우선입니다. 성전 제도의 회복이 먼저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도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1절은 1차 포로 귀환 때부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 시대로부터 약 100여년 정도 앞선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러하니라” 페르시아 고레스왕의 마음의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귀환하게 합니다. 스룹바벨은 총독으로 정치 지도자였고, 예수아는 대제사장으로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1-7절에는 돌아온 제사장들의 대표 22인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이때 함께 돌아온 레위 사람 명단입니다. 제사장들의 명단이 많은 반면 레위 사람 지도자는 6명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감당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 “이 맛다냐는 그의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고 또 그들의 형제 박부갸와 운노는 직무를 따라 그들의 맞은편에 있으며” 24절도 그렇습니다. “레위 족속의 지도자들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그들은 그들의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이들은 찬양대를 조직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맞은편에도 찬양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찬양대가 둘로 나뉘어 서로 찬양으로 화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전과 관련하여 노래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돌리는 것이 성전 예배에서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이유가 사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입술의 찬양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찬양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아는 요야김을 낳고”(10절)
10절부터는 대제사장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차 포로 귀환 때 예수아부터 시작해서 요아김, 엘리아십, 요야다, 요나단, 그리고 얏두아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는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인 부분을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신앙이 어떻게 이어져 사명을 잘 감당하느냐가 이스라엘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닌 역사 속에서 신앙의 전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현재 이처럼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본이 되는 신앙은 우리 자녀와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염려를 많이 합니다. 미래가 어둡다고 합니다. 교회마다 아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가 기도하며 미래세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복음을 전하며,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 좋은 신앙의 본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12절부터는 예수아를 이은 대제사장 요야김 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족장들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귀향민 2세대에 활동한 제사장들입니다. 마치 100년 이상된 교회의 교회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보면 1대 목사님부터 2대 목사님 등 시대별로 누가 사역했으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22절부터는 제사장들의 계보가 계속 이어졌던 것처럼 레위인들의 계보 역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4절은 레위인들의 찬양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며, 25절은 “문지기로서 순서대로 문안의 곳간을 파수하였나니”라고 합니다. 성전 창고를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계속 반복하지만 크고 작음과 어렵고 쉽고를 떠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일은 무엇이 되었든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킵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동체는 아름답게 세워지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름답게 드려집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신앙이 우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벽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앞두고 있는데, 건물이 세워진 것보다 신앙이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건물일지라도 다시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을 점검하고 무너진 곳이 있다면 다시 세워나갑시다.
2025.12.02 | 매일성경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1절)
예루살렘 성벽이 52일 만에 하나님의 은혜와 백성들의 수고로 완성된 후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7:4절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이전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급선무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지도자들은 누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지도자들의 솔선수범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합니다. 두 번째는,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합니다. 7:5-73절까지 계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 1/10을 뽑아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게 합니다. 제비뽑기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갑니다. 이처럼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공동체는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세 번째는, 2절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라고 하는데 예루살렘에 살기를 자원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위험하고 불안정한 상황이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주를 자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자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든든하게 세워지고 확장되어 갑니다.
이어 3절부터는 예루살렘에 거주한 지방의 지도자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이라” 쉽게 말하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지파가 남유다를 이루었고 포로에서 귀환할 때도 중심이 되었습니다. 먼저 4절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입니다. 그리고 5절의 ‘마아세야’입니다. 6절 “예루살렘에 거주한 베레스 자손은 모두 사백육십팔 명이니 다 용사였느니라” 유다 지파 베레스 자손은 468명으로 용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루살렘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살루와 갑배, 살래 등으로 928명입니다. 그 가운데 9절 “시그리의 아들 요엘이 그들의 감독이 되었고 핫스누아의 아들 유다는 버금이 되어 성읍을 다스렸느니라”고 합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성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17절)
다음으로는 제사장들의 명단입니다. 10-11절 “제사장 중에는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이며 또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이니”라고 합니다. 스라야는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자”입니다. 이처럼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이 822명이요, 형제의 족장된 자가 242명, 형제의 큰 용사들은 128명입니다. 제사장들 가운데도 큰 용사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그랬듯 제사장들의 숫자는 많습니다.
제사장들에 이어 레위 사람이 소개됩니다. 16절 “또 레위 사람의 족장 삽브대와 요사밧이니 그들은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았고” 제사장이 성전의 안쪽 일을 맡았다면 레위인들은 성전의 바깥 일을 맡아 감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백성들의 헌물으로 모아 성전에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 주는 일 등입니다. 그 가운데 17절 “ 맛다냐이니 그는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가 되었고 형제 중에 박부갸가 버금이 되었으며” 이들은 성전 소속 성가대의 지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성 문지기들(19-20절), 느디님 사람들(21절), 노래하는 자들(22-24절) 순으로 소개됩니다. 그 중 22절의 ‘웃시’가 노래하는 자들의 감독으로 봉사합니다. 그는 23절 “이는 왕의 명령대로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할 일을 정해 주었기 때문이며”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모두가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필요한 부분에 사람들을 세워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25-36절까지는 예루살렘 주변에 사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거주지역입니다. 어디에 살든지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공동체에 필요한 몇 가지 요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부족한 부분을 지혜롭게 잘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에 부족한 인원을 제비뽑기 방식을 통해 채웠습니다. 지혜로운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백성들 역시 수고와 헌신으로 함께 했습니다. 두 번째는 지도자들의 모범입니다. 그동안 지도자들로 인해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제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에 지도자들이 앞장섭니다. 세 번째는 백성들이 서로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고 각자 맡겨진 사명에 충실합니다. 제사장들은 성전 안 일을 하고 레위인들은 바깥 일을 맡습니다. 기도할 때 말씀을 인도하는 자도 있고, 매일 노래하는 자들에게 할 일을 정해주는 자도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주신 사명을 따라 묵묵히 감당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소중하게 감당합니다. 그런 수고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