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9 | 매일성경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6절)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작정하십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창조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진노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시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1절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다시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돌아간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은 노아 당시 세상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한마디로 섞여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섞인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많은 설명들이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셋의 후손이요,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가인의 후손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흐름대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악을 주도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행하는 일들이 ‘보고’, ‘좋아하고’, ‘삼는다’입니다(2절). 마치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보고’, ‘좋아하고’, ‘먹는다’와 같습니다. 죄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4절도 그렇습니다. 당시 ‘네피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네피림의 의미는 ‘타락한 자들, 떨어진 자들’입니다. 악한 자들이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4절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인해서 태어난 자들이 ‘용사’였고, 이들이 행하는 일들이 “명성이 있었다”는 것은 힘과 권력 통해 자기 이름을 날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음에 드는 모든 여인을 마음대로 취하고 있고 그것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원어는 ‘베네 엘로힘’인데요, 의미가 “하나님의 아들들”도 되고 “신의 아들들”도 됩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신의 아들’은 힘을 가진 왕이나 도시의 지배자들에게 붙여졌습니다. 어쩌면 가인과 같이 성을 쌓고 성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가인의 후예인 라멕처럼 일부다처제를 행하면서 무자비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군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섞여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섞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와 포악함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모습과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3절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120년 뒤에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행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
5-7절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노아입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그러나’의 삶을 살았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데 노아만은 하나님을 향해 걷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의롭게,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붙잡는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심판 계획을 노아에게 말씀하시고 방주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재료는 고페르나무이고 역청을 칠합니다. 크기가 길이는 150m, 넓이는 25m, 높이는 15m입니다. 거대한 방주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들어가서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합니다. 120년 동안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얼마나 힘든 과정이었을까요? 얼마나 조롱과 비웃음을 견뎌야 했을까요? 흔들리며 멈추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준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은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하십니다. 구약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어떤 언약일까요? 아담과 맺으신 창조 언약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라”는 언약입니다. 비록 세상은 심판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노아를 통해서 이 언약이 이루어가시길 원하십니다. 인간은 다시 실패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 나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셔서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면서 붙잡아야 할 것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또한 이 시대를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6.01.08 | 매일성경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1절)
5장은 아담의 계보를 적고 있습니다. 여기 ‘계보’는 ‘톨레돗’이라는 단어인데, 창세기는 10개의 톨레돗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2번째 톨레돗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읽기 힘든 부분이 바로 계보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때 계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새 일을 감당하는 중심인물은 보통 계보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도 4장에서 가인과 그의 후손들이 만들어가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노아’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6장은 노아 홍수 사건의 시작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절망적이어도 하나님의 뜻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 계획하신 일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사람(아담)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130세에 3절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처럼, 아담도 자기 모양과 형상대로 셋을 낳습니다. 이것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범죄한 아담의 ‘자기 형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온전하지 않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아담이 낳은 자녀는 가인도 있는데,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범죄 이후 세상은 둘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가인의 후예들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주인 삼는 셋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중심의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가인의 후예가 아닌 묵묵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의 길을 걷는 셋의 후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어느 길을 걸어야 할지 분명합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습니다. 이미 4: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세상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족보에서 반복되는 말은 “낳고”와 “죽었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살았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죽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육체적 죽음을 가져옵니다. 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고리를 끊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에녹입니다.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이 죽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동행의 원어적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스스로 걸어갔다”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주도하는 세상 속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것입니다. 세상의 길이나 많은 사람들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외로운 싸움이요, 고단한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을 동행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은 것이 계기가 된 듯합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로 969세를 삽니다. 그런데 연대를 계산해보면 므두셀라가 죽던 해 노아 홍수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가 태어나면서 에녹은 죄악된 세상의 끝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세상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이루실 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은 노아를 낳습니다. 29절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죄악된 세상에 안식, 안위를 가져올 아들입니다. 그런데 안위가 심판을 통해서 오게 될 것입니다.
4장과 5장을 비교해보면 등장 인물들 이름이 비슷합니다. 에녹, 라멕 등. 그러나 삶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동행은 한두 번 함께 걷는 것이 아닌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생명으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2026.01.07 | 매일성경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자녀를 낳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아담과 하와의 자녀에게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 이어질까요?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죄악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첫째 아들 가인이 태어난 후 동생 아벨이 태어납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가인은 농사를 짓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예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받으시는 예배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제물로 드립니다.
그 결과를 4-5절은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많은 설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입니다. 제물보다 하나님은 드리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제물로 삼아 드립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저 땅의 소산물로 드립니다. 어쩌면 아벨이 드리니 마음은 없지만 그냥 따라서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수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최고의 제물이라 할 수 있는 “살진 짐승의 기름”(사1:11절)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헛된 제물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피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온갖 악을 행하면서 많은 제물로 악을 가리려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요 예배 드리는 자를 보시고 그의 삶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대 우리가 기억하고 회복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면 가인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분노하고 안색이 변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면,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하고 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른 기준을 알려주심에도 자신이 기준이 되어 옳고 그름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7절 하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십니다. 지배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죄는 기회만 되면 사람을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니 지배 당하지 말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 본성이 죄로 왜곡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망입니다. 죄는 점점 확장되고 깊어져 가는데 이길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가인은 시기심으로 인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입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9절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아담과 하와에게 3:9절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도 물으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가인의 대답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담과 하와는 탓하고 핑계하였다면 가인은 적극적으로 거짓말까지 합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도전합니다. 가인이 인정하지 않은 죄를 땅에 고발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절)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에게 12절 하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벌을 내리십니다. 그러자 가인은 자신의 벌이 너무 무겁다고 항의합니다. 사랑해야 할 동생은 무자비하게 죽였으면서도 자신의 벌은 힘들다고 하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온갖 악을 행하고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작은 말 한마디도 견디지 못하는게 인간입니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은 표를 주시면서 15절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기준으로 보면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지켜주십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십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으로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고 성을 쌓습니다. 아들 이름으로 성 이름을 짓습니다. 하나님은 유리하는 자가 되라고 했는데 거부하고 정착합니다. 거기다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쌓습니다. 스스로 안전을 지키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성의 시작, 도시의 시작에 이런 뿌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이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 방식을 버리고 일부다처제를 처음으로 행한 인물입니다. 자녀를 낳는데 이들이 세상 경제와 문화를 주도하는 자들입니다. 야발은 축산업의 조상이요, 유발은 문화예술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두발가인은 산업과 무기의 조상입니다. 대단한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모습이 라멕이 하는 말 속에서 드러납니다. 23절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은 작은 상처 때문에 소년을 죽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셨던 말을 빙자해서 자신을 해하는 자에게는 벌이 77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선악과를 따먹은 죄가 이제는 괴물의 출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고 내가 기준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후 세상의 모습을 어떻게 될까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시는데 ‘셋’입니다. 셋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짓는데 이때 26절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합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가인의 후속과 셋의 후손을 대조해보면 가인의 후손이 세상의 모든 부분을 주도합니다. 거대한 성장과 업적을 남깁니다. 이에 반해 셋의 후손은 존재감이 없어 보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셋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고 함께 하십니다.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변해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2026.01.06 | 매일성경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15절)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심각한 죄악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가장 먼저 뱀에게 내리십니다. 14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매일성경은 “배로 다니고 흙을 먹는다”를 싸움에 패하여 굴욕적인 처지에 놓이는 것을 표현하는 관용구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즉 하나님과 같이 높아질 수 있다고 유혹했는데 결과는 땅을 기어다니는 가장 비천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높아지려할 때 가장 낮은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뱀에 대한 심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후손에 대해서까지 이어집니다.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뱀의 유혹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삭일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세력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박살을 내시는데,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고 죽게 합니다. 이것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부수시고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3일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이 내용이 복음의 핵심인데, 놀라운 것은 범죄 후 이런 회복과 소망의 메시지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여자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16절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임신과 해산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고통이 됩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의미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지배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구절이 바로 이어지는 4:7절 하나님께서 범죄한 가인에게 하시는 말씀에도 나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에 대한 지배권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범죄 이전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하나님처럼 되어 통치권을 행사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어지는 심판은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높아지려하자 철저히 낮아지는 겁니다. 뱀도 배로 다니고 흙을 먹고, 여자도 지배를 받고, 남자 역시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심판이 가장 깁니다. 선악과를 먼저 먹은 것은 여자이지만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문제는 17절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입니다. 아내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겁니다. 아담 역시 축복으로 주신 명령이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고통이 됩니다. 죄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는 모든 관계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과, 부부 사이에, 자연과,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마저 파괴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절)
여기까지 보면 인간의 미래는 절망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습니다. 의미가 ‘생명’입니다. “산 자의 어머니”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하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가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가죽옷을 입히시기 위해서는 짐승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거룩한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갈3: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입은 옷을 보시고 거룩하다 인정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장 절망의 순간을 하나님의 가장 소망의 약속으로 바꿔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생명나 무의 길을 막으십니다.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고 하는데, 사람이 선악을 하나님처럼 안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비꼬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뱀은 그렇게 유혹했지만 인간의 깨달은 것은 벌거벗은 수치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절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불 칼로 막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게 되는 죽음도 사실은 은혜입니다. 죄악된 세상의 삶을 그치고 새로운 에덴동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음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말씀 안에 거할 때 복된 인생입니다. 비록 흙과 같은 존재이지만 생명이 되고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소망을 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2026.01.05 | 매일성경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6절)
2:25절은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 어떤 허물이나 장벽이 없는 하나 됨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하나 된 관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3장으로 오면 모든 관계가 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짐승이 ‘뱀’입니다. 1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여기 ‘간교한’은 ‘지혜롭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지혜를 사탄이 사용하니 간교함이 됩니다. 간교함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뱀은 먼저 여자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는 인간의 타락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절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도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으로 먹되 단 하나 선악과만을 금하셨습니다(2:16). 그런데 하나 금하신 것을 전부 금하신 것으로 질문을 던져 하나님에 선의에 대해 의심하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신뢰에 균열이 생기도록 합니다. 이처럼 사탄은 사람의 약점을 잘 알고, 또한 사탄의 공격은 작은 틈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뱀의 질문에 여자가 대답하는데,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답입니다. 3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나님의 명령은 2: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였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만지지 말라”는 말을 포함시키고, “반드시 죽으리라”를 “죽을까 하노라”로 바꿉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고, 알았더라도 견고하게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아담이 아닌 하와를 먼저 공격했는지 모릅니다. 성경 흐름으로는 선악과 명령은 하와가 만들어지기 전에 아담에게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와의 마음에 균열이 생긴 것을 확인하자 사탄은 직접적으로 공격합니다. 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오히려 5절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선악과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처럼 다스리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임을 알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이 되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알면서도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람을 속이는 옹졸한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여인이 넘어갑니다. 그러자 선악과가 이전에 보던 것과 달리 보입니다. 이전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과일이었다면 이제는 6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입니다. 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따먹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먹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입니다. 그렇다면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을 때 아담도 같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담도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선악과를 주자 받아 먹습니다.
그 결과가 7절인데요,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사탄의 말처럼 눈이 밝아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고 맙니다. 이렇게 인간의 타락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9절)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실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경고하신대로 징계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먼저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그러자 아담과 하와의 반응이 8절 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전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기다렸습니다. 만남이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습니다. 그래서 숨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이런 아담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9절 “네가 어디 있느냐” 몰라서 찾으시는 것이 아닌,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육체가 어디있느냐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상태냐고 묻고 계십니다. 아담 영혼의 현주소를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담은 육체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 때문에 두려워서 숨었다는 겁니다.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리 때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보다 핑계하고 탓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까지도 탓합니다. 12절에서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에게 핑계하면서 하와를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라고 합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된데는 하나님 탓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핑계하고 합리화하게 합니다. 누군가를 탓합니다. 그러면서 죄인을 찾아오셔서 손을 내미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여전히 우리도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13절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의 물음에 뱀을 핑계합니다.
첫 번째 아담은 이처럼 사탄의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가 들어왔습니다. 사탄은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고 승리하셨습니다. 마4:10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만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말씀 붙잡고 승리합시다.
2026.01.02 | 매일성경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14절)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홀로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의 교제와 기쁨을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시기를 위함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런 하나됨이 죄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목적으로 창조하셨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하시고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세상의 모습은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혼돈과 공허, 흑암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혼돈의 세상에 질서를, 공허의 세상에 채움을, 흑암의 세상에 빛을 비추십니다. 1-13절이 질서를 세우시는 과정이라면, 오늘 본문은 공허를 채우시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을 만난다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만드신 것이 빛이라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빛입니다. 태양의 빛도 중요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우리 영혼을 비추는 생명의 빛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빛을 통해 빛과 어둠을 나누십니다. 오늘 본문에도 광명체를 통해 낮과 밤을 나누게 하셨다는 말이 반복됩니다(14,16,18).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는 빛과 어둠, 낮과 밤이 다 좋은 것입니다. 필요한 것입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쉼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둘째 날은 궁창을 중심으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누십니다. 쉽게 설명하면 하늘 공간을 만드시고 밑으로는 바닷물을, 위로는 물로 이루어진 대기권을 만드셨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창조의 중심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시기 위한 기초 작업입니다. 셋째 날은 궁창 아래의 물들이 한 곳으로 모이고 땅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곳에 각기 종류대로 식물을 심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혼돈의 세상에 공간을 만드십니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말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4,10,12,18,21,25,31).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니 생각나는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계획 속에서 하나하나 창조하십니다. 1-3일은 기초를 세우시고 그 토대 위에서 4-6일은 세부적인 것들을 채워 넣으십니다. 그래서 1일과 4일이 연결되고, 2일과 5일, 3일과 6일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통해 계획대로 이루어지니 기뻐하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콧노래를 부르시면서 행복함으로 창조하시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며 영광을 받으시고 은혜를 베푸실 날을 기대하시면서 창조하십니다.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25절)
넷째 날, 하나님은 하늘에 광명체를 만드십니다.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입니다. 해와 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사람들이 해와 달을 우상으로 숭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광명체들을 우상으로 경배해야 할 대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낮을 주관하고 밤을 주관하게 하신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나라는 겁니다.
다섯째 날은 하늘의 새를 만드시고 바다의 생물들을 만드십니다. 그 가운데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을 만드셨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이방 신화에는 신과 경쟁하는 무서운 바다 큰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말이 “번성하여”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주신 축복이요 사명인데요, 하나님은 이처럼 번성하여 땅에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하나 반복되는 말은 “종류대로”입니다(21,24,25). 모든 바다 생물과 땅의 짐승들을 하나님은 하나하나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만물이 진화를 통해서 생겨났다는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모든 만물은 우연한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 속에서 종류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 땅에 있는 꽃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섯째 날은 땅의 생물들을 종류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합니다. 창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먼저 만드시고 다른 것을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환경을 완전하게 만드시고 최종적으로 인간을 만드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을 아시지만 곧바로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세심하고 완벽하게 준비하시고 중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니 당장 눈에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
26년 한해 말씀의 능력으로 채우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한해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