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16:1-14절/변질 아닌 변화(25.10.03)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2절)

​하나님을 찾고 평안을 누리며 견고한 나라를 만들었던 아사 왕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계속 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사 36년에 북이스라엘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합니다. 이유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다로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5:9절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에서 나와서 저희 중에 머물러 사는 자들을 모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신앙을 찾아서 남유다 아사에게로 온 사람들입니다. 바아사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유다를 공격하면서 라마를 건축합니다.

이것은 남유다 아사 왕에게는 위기입니다. 위기 속에 이전의 아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14장에서 구스 사람 세라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아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14:11절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만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그런 아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아사는 위기를 만나자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합니다. 아람 왕 벤하닷에게 곳간에 있는 은금을 다 주면서 북이스라엘과 맺은 약조를 깨뜨리고 남유다와 약조를 맺어 북이스라엘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는 공격하는 것은 아람 왕 벤하닷과의 약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사가 건넨 은금이 많았는지 아람 왕은 아사의 말대로 북이스라엘과의 약조를 깨고 오히려 공격을 합니다. 북이스라엘 성읍이 공격을 받자 바아사는 라마건축하는 일을 중단하고 돌아갑니다. 이때 아사는 유다 백성들을 거느리고 라마로 가서 남겨진 건축자재들을 운반하여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사가 새로운 성읍은 건축하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무너졌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기초가되시는데 이 기초가 무너지면 결국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9절)

​이런 아사의 무너진 신앙에 대해 하나님은 선견자 하나니를 보내 책망하십니다. 7절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남유다를 아람 군대보다 강하게 하셔서 유다의 영향력 아래 있게 하길 원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관계가 유지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은금을 바치고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이제 아람이 강성해집니다. 유다의 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하나님이 아닌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므로 당장 눈 앞의 문제는 해결했지만, 더 심각한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9절 하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할 때 우리는 생각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 구스 사람의 많은 군대 공격에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를 주셨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능력을 베푸십니다. 이 말씀을 어제 본문 15:12,15절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온전한 마음, 나뉘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마음을 나뉘게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함을 빼앗아 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 신앙에 머물러 있지만 능력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선견자를 보내신 것은 아사를 사랑하셔서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선견자의 말이 끝나자 아사가 회개 대신 분노하고 하나니를 옥에 가둡니다. 듣기 싫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 중 몇 사람을 학대했다고 하는데, 아마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을 지적하자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아사가 이전과 달리 교만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만할 때 누군가의 권면과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 아사는 안타깝게도 좋은 변화, 성숙의 변화가 아니라 신앙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유지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견고해지자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힘으로, 외교 수단으로 살아가려 한 것입니다.

아사의 마지막은 슬픈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아사 39년에 발에 병이 들어 위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더 아사에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12절 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문은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좋은 변화가 있고 좋지 않은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는 이유는 변화와 성숙을 위함입니다. 그리고 성숙할수록 우리 안에 능력과 기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반면 신앙의 변질은 위험합니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를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나뉘었던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삶이 됩시다.

역대하15:1-19절/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25.10.02)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2절)

​아비야의 이야기는 13장 한 장이라면, 아사에 대한 이야기는 14-16장까지 3장에 이어집니다. 저자가 아사의 삶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것이지요. 아사는 어제 말씀에서 하나님을 찾고 평안을 누리며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스 사람 세라와의 전쟁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승리 이후 하나님은 아사에게 오뎃의 아들 아사랴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절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핵심은 다시 “여호와를 찾으라”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말씀이 반복됩니다(2,4,12,15).

질문이 생깁니다. 다른 어떤 왕보다 하나님을 찾아서 평안을 누린 아사에게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고 선지자까지 보내셔셔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데, 그 기준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12절과 15절을 보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남유다는 솔로몬 시대부터 우상숭배로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다보니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다행히 아사가 왕이 되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사의 마음에 이 정도 하나님을 찾았으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 강력하게 종교개혁을 추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잘못하는 사람에게도 경고하시지만, 잘 하고 있는 아사에게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는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에 참 신도 없고 제사장도 율법도 없은지 오래된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사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평안이 사라집니다. 서로 치는 전쟁이 일어나고 피차 상한 바가 되어 고통의 삶입니다. 이런 환난을 만나서야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찾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7절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강하게 하라는 것이냐면? 하나님을 찾고 우상을 제거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고 강하게 실행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다양하지만 어제 본문을 중심으로 본다면 고난이 아닌 평안이요, 평안을 통한 견고함입니다.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15절)

​아사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실행에 옮깁니다. 아사의 순종이 귀합니다. 먼저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가증한 물건들을 제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 빼앗은 성읍에서도 우상을 없앱니다. 8절 하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고”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제단도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9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고 합니다.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아사와 함게 하심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아사가 풍요를 누리고 성공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돌아옵니다.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이 회복해야 할 모습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이용한 부와 성공이 아닌 세상과 다르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아사는 전리품 중 소 700마리와 양 7000마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언약을 맺습니다. 내용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13절을 보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선포합니다. 과한 결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면 무엇이 이스라엘을 전쟁의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 넣었는가? 바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아사를 중심으로 남유다가 하나님을 찾을 때 15절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고 합니다.

본문은 마지막으로 우상 척결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16절은 아사 왕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상을 만들어 숭배했다고 합니다. ‘마아가’는 아비야의 어머니로 아사의 할머니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상숭배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4장에서도 우상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할머니의 우상숭배는 손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우상을 불사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 제거는 멀리서부터가 아닌 가까운 곳에서부터, 다른 사람부터가 아닌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와 가정과 교회의 우상들은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또한 한국교회 회복의 길입니다.

적당주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내 안의 우상부터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됩시다.

역대하14:2-15절/여호와를 찾았으므로(25.10.01)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2절)

​아비야에 이어 아들 아사가 왕이 됩니다. 아비야에 대해 역대기는 북이스라엘 여로보암과의 전쟁을 중심으로 기록했지만 왕상15:3절은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라고 합니다. 아버지 르호보암처럼 죄를 행하고 온전하지 못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아들 아사는 1절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라고 합니다. 아사의 기준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과 정의를 행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우상을 없애고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아사가 없앤 우상을 3절은 아비아 제단과 산당, 주상과 아세라상이라고 합니다. ‘주상’은 우상의 형상으로 돌을 기둥으로 세운 것입니다. 또한 5절은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남유다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많은 우상들을 함께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행위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나라가 나뉘어졌는데, 여전히 우상이 함께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개혁을 일으킨 인물이 아사입니다. 아사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4절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하나님을 찾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 중 첫 번째가 “하나님을 찾게 하였다”입니다(4,7). 그렇습니다. 회복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찾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우상을 버리고, 깨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주어지는 것이 두 번째로 반복되는 단어인 ‘평안’입니다(5,6,7).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고, 아사가 다스리는 유다 땅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은 전쟁이 없는 평안 가운데서 어떤 일을 행하였는가? 세 번째로 반복되는 단어가 ‘건축’입니다(6,7).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였고, 특히 7절 “성읍 주위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포로에서 돌아온 역대기 독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계속 반복하는 것처럼,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예루살렘은 황량하고 성벽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안전하지 않습니다. 언제 누가 공격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평안 속에서 견고한 성읍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 가정,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하고 견고한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가정과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우상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말씀보다 앞서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며 견고한 인생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11절)

​이런 아사에게 하나님은 유다 중에 30만 명의 군대와 베냐민 중에 28만 명의 군대를 허락하십니다. 견고한 나라를 이룹니다. 그런데 평안했던 남유다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100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옵니다. 어제 본문에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전쟁 상황에서 유다 군대는 40만, 북이스라엘 군대는 80만이었습니다. 숫자로는 게임이 안되는 전쟁이었는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승리를 주셨습니다(13:14).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남유다 군대가 58만이지만 100만의 대적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 아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11절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 줄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아사는 하나님만이 도움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대적이 승리하여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도우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대적을 치십니다. 완전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강한 군대, 많은 군대보다 하나님의 의지하며 부르짖는 백성이 가장 강합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회복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들을 발견하고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부르짖을 때 승리를 주십니다.

역대하13:1-14:1절/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25.09.30)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5절)

​르호보암에 이어 아들 아비야가 남유다 왕이 됩니다. 3년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2절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미가야요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이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11:21-22절에서는 아비야의 어머니를 “압살롬의 딸 마아가”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아들”을 “손자”로, “딸”을 “손녀”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딸이 있는데(삼하14:27절), 다말이 우리엘과 결혼해서 낳은 딸이 아비야의 어머니인 미가야(마아가)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비야가 했던 일 한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북이스라엘 여로보암과의 전쟁입니다. 먼저 아비야가 전쟁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군대의 숫자는 남유다가 40만명, 북이스라엘의 80만명입니다. 숫자로 보면 이미 승리가 정해진 듯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전쟁을 앞두고 아비야가 산에 올라 북이스라엘과 여로보암을 향해 했던 연설입니다. 먼저 ‘소금언약’을 거론합니다. ‘소금언약’은 파기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일어나 자기 주를 배반”했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여로보암이 반역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킵니다. 또한 반역자 여로보암과 함께 한 자들이 난봉꾼과 잡류들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비야의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과 다릅니다. 여로보암을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문제는 여로보암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주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왕상11:38절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과 같은 견고한 집을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합니다.

왜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음에도 어기고 통치를 시작하자마자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이유는, 절기가 되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남유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옵니다. 왕으로서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혹시나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떨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그곳에서 제사하도록 합니다. 그러니 온전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남유다 예루살렘으로 내려옵니다. 그러자 아무나 돈만 내면 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잘못된 출발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북이스라엘 역사 내내 문제가 됩니다.

여로보암은 문제가 있고 불안할 때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맡기지 않고 내 생각과 세상의 방식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과 같은 실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18절)

​반면 아비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0절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가 그를 배반하지 아니하였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워진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매일 드리는 번제와 진설병, 등잔대 분향 등을 통해 여로보암처럼 인간의 생각과 편리를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과 말씀에 순종합니다. 12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 부분이 역대기를 읽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하며, 어떻게 시작을 해야하는지를 말씀합니다. 불안하고 문제가 가득한 현실에서 사람의 생각과 편리를 따라 행동하면 안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방법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일보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합니다.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3절을 보면 남유다는 군사의 숫자로도, 작전에서도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북이스라엘 군대가 복병을 보내 앞뒤로 포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제사장들은 나팔을 붑니다. 그러자 15절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치시니”, 16절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므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시고 넘기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제 본문 12:5절 하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르호보암의 교만과 우상숭배를 하나님은 애굽왕 시삭의 손에 넘겨 깨닫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의 우상숭배를 남유다 아비야의 군대 손에 넘겨 깨닫게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일은 필패의 길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반면 18절 하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합니다.

이 전쟁의 결과 여로보암은 강성하지 못하고 결국 죽습니다. 반면 아비야는 점점 강성합니다. 그리고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며 그 땅에 10년 동안 평안이 있었습니다.

불안하고 문제가 있을 때 내 생각과 감정,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의지할 때 승리를 주십니다.

역대하12:1-16절/스스로 겸비하여(25.09.29)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2절)

​솔로몬의 뒤를 이어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이때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잘못된 통치로 인해 나라가 둘로 나누어집니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됩니다. 어려운 시국에서 르호보암은 견고한 성읍들을 건축하면서 나라를 강하게 했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이 우상을 숭배하자 그곳에 살던 하나님을 섬기려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백성들이 남유다 예루살렘으로 와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 결과 11:17절은 “그러므로 삼 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 년 동안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3년 동안은 르호보암이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걸었고 이때 강성하였지만 그 이후 하나님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1절은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고 합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견고하고 강해지니 르호보암에게 교만이 찾아오고 하나님의 율법을 버립니다. 르호보암의 죄를 왕상14:22-23절은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고 합니다. 왕의 범죄를 온 이스라엘이 본받습니다.

르호보암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할 때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보다 형통할 때 위기가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자신이 얻은 것으로 착각하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감사를 잊고 욕심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겸비’입니다(6,7,12). 하나님은 교만한 르호보암과 유다에 위기를 주셔서 겸비하게 하십니다. 겸손할 때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의 문제는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어떤 심각한 문제를 만난 후에야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춰보면서 하나님 앞에 겸비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14절)

​범죄한 유다를 하나님은 르호보암 왕 5년 되는 해에 애굽 왕 시삭을 통해 공격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그렇게 견고하게 세웠던 성읍들을 한 순간에 빼앗기고 맙니다. 하나님은 스마야 선지자를 통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십니다. 5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그렇습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먼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들을 버리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버리심은 완전한 외면이 아니고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때 왕과 방백들의 고백이 놀랍습니다. 6절 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고 고백하며 겸비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7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라고 하시는데, 의미가 애굽의 공격을 완전히 물리쳐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가까스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겸비한 백성들을 완전히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이렇게 가까스로 구원을 얻게 하실까요? 8절에 이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섬기는 특권과 은혜를 주셨지만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을 때 그것을 잠시 빼앗으시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할 때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은혜와 복이었음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포로에서 돌아와 역대기를 읽는 백성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고통의 이유를 묻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선포합니다. 이유없이 하나님께서 포로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우상숭배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겸비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 왕 시삭의 공격으로 솔로몬이 만든 영화로움의 표시였던 금방패를 다 빼앗깁니다. 르호보암은 놋 방패를 만들어 경호하게 합니다. 찬란했던 영광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순식간입니다.

마지막으로 13절부터는 르호보암의 통치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이 대조를 이룹니다. 13절 “르호보암 왕은 예루살렘에서 스스로 세력을 굳게 하여 다스리니라” 그런데 14절은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고 합니다. 르호보암의 문제는 “스스로 세력을 굳게” 하였지만,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않은” 결과가 오늘 본문과 같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굳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잠깐, 몇 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하는 것이 복된 신앙, 복된 인생의 길입니다. 이를 위해 형통할 때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합니다. 시련과 장애물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인내해야 합니다.

역대하9:13-31절/지혜와 영광(25.09.26)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17절)

​1장부터 시작되었던 솔로몬 왕에 대한 이야기가 9장에서 마무리됩니다. 솔로몬은 통치를 시작하면서 일천 마리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재판해서 정의와 공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1:12절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13-21절까지는 솔로몬의 부와 재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 해 세입금이 금 666달란트였습니다. 20톤의 양이라고 합니다. 그것만 아니고 무역을 통한 세금, 솔로몬과 무역하며 도움을 받는 나라들에서 보낸 금이 많았습니다. 금이 많으니 그것으로 큰 방패 200개의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듭니다. 이런 방패는 전쟁용이 아닌 왕의 행차나 국가 예식에서 과시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어 솔로몬이 앉는 왕의 보좌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상아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순금으로 입혔습니다. 보좌 양쪽에 팔걸이가 있고 보좌로 올라가는데 여섯 층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팔걸이 양 옆에 사자 형상이 하나씩 놓여있고, 올라가는 여섯 층계 양 옆에도 한 마리씩해서 12마리의 사자 형상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19절 하 “어떤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 솔로몬의 영광이 비교불가입니다.

솔로몬이 먹고 마시는 그릇도 다 금입니다. 이처럼 금이 넘쳐나 금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21절 보면 무역을 통해 다시스에서 들어오는 품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시스의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입니다. “원숭이와 공작”이 들어 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풍요를 누리다보니 애완용으로 기르며 보기 위해서 들여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솔로몬 시대의 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이것은 너무 사치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자랑할 일인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과 기준을 따라 해석하지 말고, 저자의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역대기를 읽은 백성들은 솔로몬이 완공한 영광스러운 성전과 솔로몬 시대의 부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습니다. 힘들고 소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은 메시아를 통한 회복과 소망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회복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메시아를 통한 회복은 가장 선명한 그림은, 바로 솔로몬이 누린 영광이요 그로 인해 열방 위에 뛰어난 나라가 된 것입니다. 저자는 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 우리는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영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모든 왕들보다 큰지라”(22절)

​22-28절은 솔로몬의 명성이 열왕 위에 뛰어났음을 강조합니다. 많은 왕들이 스바 여왕처럼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오면서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특히 24절 하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고 합니다. 표준새번역은 “해마다 이런 사람들의 방문이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26절은 솔로몬이 다스린 지역을 열거하는데,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블레셋과 애굽 지경까지 모든 왕을 다스렸습니다. 이것은 영토을 넓혔다기 보다는 솔로몬의 강력한 통치에 이들이 복종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27절은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고 하는데 이 구절은 1:15절에서 나왔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솔로몬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이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강조점은 솔로몬의 지혜, 그로 인한 부와 영광입니다.

솔로몬은 40년을 통치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균형을 위해 열왕기서에서 말하는 솔로몬의 마지막을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왕상11장에 나옵니다.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나라의 안정과 부강을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왔고, 우상을 위한 산당을 지었으며 분향하고 제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왕상11:9절은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고 합니다. 그 결과 나라가 둘로 나누어지는데, 신실했던 다윗을 생각해서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는 나뉘지 않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통치할 때 나라가 나뉘어집니다.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우상숭배의 결과로 나라가 멸망하여 대가를 치르고 돌아온 시점입니다. 그래서 회복과 소망에 초점을 맞추고 솔로몬의 지혜와 부, 영광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말씀을 묵상하므로 얻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영적인 풍요를 누리며 폭풍 가운데서도 삶의 평안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런 지혜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삶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