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5:1-12절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리라(26.08.13)

●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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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24장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해와 달이 부끄러워할 만큼 영광스러운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오늘 25장은 그 승리를 바라보며 부르는 기쁨의 찬양입니다.

찬양은 1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절망의 시간을 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보면, 그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1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창세 전에 이미 정하신 뜻대로 이루십니다. 그것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십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 같고 때로 실패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성실과 진실함으로 일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찬양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견고한 성읍을 허무는 것’입니다. 2절, 하나님이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고 견고한 성을 황폐하게 하십니다. 12절도 “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리라”로 다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왜 잘 지어진 성을 자꾸 무너뜨리실까요. 사람들은 견고한 성읍과 높은 요새를 지으며 “이것이 나의 안전을 지켜 주리라” 여깁니다. 교만하고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아무리 튼튼한 성이라도 하나님이 흔드시면 흔들릴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을 허무시는 것은, 안전을 엉뚱한 데 두는 그 착각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성읍이 무너지자 나타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3절에서 강한 민족과 포악한 나라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자기 성이 자기를 지켜 주리라 믿었던 자들이, 그 성보다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리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았다면 은혜와 복을 받았을 텐데, 자기 힘으로 쌓은 것이 무너진 다음에야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구나”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4절입니다. 그렇게 견고한 성을 쌓고 약한 자를 학대하던 포학자들의 기세가 폭풍처럼 몰려올 때,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서시는가입니다. “주는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힘없이 당하던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이 친히 요새와 피난처와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사막의 뜨거운 폭양 같은 공격이 몰려와도,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 그 열기를 구름으로 가려 주십니다. 무너지는 것은 사람이 쌓은 견고한 성이고, 무너지지 않는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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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리 위에서 하나님이 잔치를 베푸십니다. 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최고의 음식과 가장 잘 익은 포도주로 차린 풍성한 잔치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이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7절 보면 하나님이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십니다. 여기 ‘가리개’와 ‘덮개’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표시였습니다. 곧 이 가리개는 온 세상을 뒤덮은 죽음의 ‘수의’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고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죽음인데, 온 열방을 덮은 그 죽음의 천을 하나님이 벗겨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이 그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고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덮은 사망을, 하나님이 영원히 삼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선언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신약이 증언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말하며 이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15:54절)고 외쳤고,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며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계21:4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8절의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사망이 삼켜지니 그 사망의 그림자 아래서 흘리던 눈물이 씻기고, 믿음을 지키다 수치와 고난을 당한 백성이 부활의 영광으로 들려 올려집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이 구원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9절에 두 번 반복되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기다리던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기다렸다’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잠시 믿다가 어려움이 오면 돌아서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붙들며 인내한 사람들입니다. 일이 잘될 때 기다리기는 쉽지만, 힘들 때 기다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기다림 끝에 하나님은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기쁨의 노래 끝에 한 가지 경고를 말합니다. 10-12절 모압의 심판입니다. 왜 하필 여기서 모압일까요. 11절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의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모압을 하나님이 누르십니다. 모압은 제 손으로 이루는 일에 능하고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능함이 교만을 낳았습니다. 잘하는 것으로 도리어 남을 무시하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교만을 헤엄치는 자를 물속에 누르듯 낮추십니다.

이 경고가 기쁨의 노래 끝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며 구원의 승리를 바라보는 성도가 마지막까지 조심해야 할 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린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기쁨이라면, 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낮아짐입니다. 교만을 내려놓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 그것이 기쁨의 잔치에 초대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성실하게 이루어 가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정하신 뜻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시는 분이고, 그 안에 우리 삶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 같고 실패 같아도, 그것은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다른 하나는 사망을 삼키시고 눈물을 씻으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을, 하나님이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이 시대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에게 예비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기대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24:14-23절 /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고(26.08.12)

●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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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본문은 슬프게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땅에서 기쁨이 그치고 탄식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4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뒤바뀝니다. 심판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처럼 심판과 찬양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묵상해 봅시다.

14절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어제까지 그쳤던 소리가 새로운 소리로 바뀝니다. 세상의 흥청거리던 즐거운 소리는 사라지고, 이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찬양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한곳에서만 울리지 않습니다. 15절은 동방에서, 바다 모든 섬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고, 16절은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라고 합니다. 동쪽에서 서쪽 섬까지, 땅 끝에서까지, 사방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렇게 찬양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이사야가 계속 말해 온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자리에서도,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합니다. 여기에 심판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같은 심판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 하나님을 기다리던 자에게는 구원과 회복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내용이 14절 ‘여호와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강대국과 왕들이 다스리는 것 같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이 임하자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온 땅을 다스리시고 남은 자를 위해 일하고 계셨구나. 그 통치의 위엄을 깨닫고 찬양합니다. 또한 16절은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도 왜 내 삶은 이토록 힘들고, 그렇게 살지 않는 이들은 왜 잘되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인가. 이런 오랜 질문을 품고 살아온 성도가, 이제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구나. 모르셨던 것이 아니라 다 아시고 그 때를 기다리고 계셨구나.

그런데 16절 중간에서 분위기가 또 한 번 바뀝니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찬양이 울리던 자리에서 갑자기 선지자의 탄식이 터집니다. 심판이 임하고 또 찬양이 울리다가 다시 심판으로 넘어가는 이 흐름이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묵시의 특징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떠올리면 이해가 됩니다. 위에서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하십니다. 그런데 아래에서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면서도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지나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합니다.

선지자를 지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16절 하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은 크게 배신하였도다” 여기서 ‘배신’이라는 말이 네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이 이렇게 임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돌아설 것 같은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제 길을 갑니다. 배신하고 또 배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능력으로 보여 주시면 잘 믿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눈앞에 보여도 배신하는 자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기적과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 백성을 책망하신 것도 “기적을 못 보았다”가 아니라 “율법을 범하고 율례를 어기고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 백성과 관계 맺으시고 그들을 이끄십니다.

●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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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끝까지 제 길을 가는 자들을 향해 “땅의 주민들아”라고 부르십니다. 24장에 ‘땅’이 거듭 나오는데, 이는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이 땅이 전부인 듯,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듯 살아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17절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임하였나니.” 이 세 가지의 나열은 의미가 있습니다. 심판이 점점 좁혀 들어오는 형식입니다. 곧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심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이 그렇죠. 두려운 소리에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립니다.

그리고 18절 뒤가 그 심판의 근원을 밝힙니다.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위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창세기 7장 노아 홍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물이 쏟아질 때 하늘의 창이 열렸습니다. 곧 하늘의 심판의 문이 열려 온 땅이 진동한다는 것입니다.

19-20절은 그 진동을 반복되는 말로 설명합니다.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절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며 원두막같이 흔들린다.” 이 ‘원두막같이’라는 비유가 인상적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빌딩을 지어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것이 원두막처럼 힘없이 흔들리고 주저앉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20절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모든 무너짐의 원인이 죄악입니다. 그 죄악의 핵심은 어제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저버린 데 있습니다.

21절에서 심판의 시야가 한층 넓어집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하나님의 심판이 두 부분으로 임합니다. ‘높은 데의 높은 군대’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도 나오는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적 세력을 가리킵니다. 세상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하나님께 도전하게 하는 사탄의 세력입니다. ‘땅의 왕들’은 그 세력의 도구가 되어 세상에서 전쟁과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적 세력과 그 하수인인 왕들을 함께 심판하시고,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셨다가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 결과가 23절입니다. “그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해와 달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찬란한 영광 앞에서, 해와 달마저 빛을 잃고 부끄러워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시대에 남은 자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는 그 사이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땅이 전부인 듯 배신하며 제 길을 가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남은 자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남은 자는 소수이기에 때로 갈등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하시고 영광 중에 통치하심을 기억하며, 의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견고히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고도 배신하는 자가 있듯, 기적은 우리를 견고하게 하지 못합니다. 깨지고 갈라지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내 삶의 방향을 내려놓고 말씀을 묵상하며, 서로를 말씀으로 격려하고 세워 가는 성도가 됩시다.

이사야 24:1-13절 / 공허와 혼돈의 땅(26.08.11)

●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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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이사야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4-27장까지를 흔히 ‘이사야의 묵시록’이라 부릅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다른 말로 묵시록이라 하는데, 감추어져 있던 것을 하나님이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이 핍박 가운데 “이 고통이 언제 끝납니까”라고 부르짖던 성도에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며 반드시 승리를 주신다”고 보여 주었듯, 이사야 24-27장도 혼란한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회복하실지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잠깐 정리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1-6장은 유다를 향한 서론적 예언이었습니다. 7-12장은 아하스 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유다를 향한 구체적 말씀, 13-23장은 유다를 둘러싼 열방을 향한 심판(바벨론에서 두로까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24-27장은 특정 나라가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향해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1절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이 ‘공허’와 ‘황폐’라는 말이 3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공허’입니다. 하나님이 그 공허와 혼돈과 어둠에 손을 대시자, 공허가 채워지고 혼돈에 질서가 생기고 어둠이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지어진 세상 한가운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두셨습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세상이 다시 공허와 혼돈으로 돌아갑니다.

1절 중간 ‘지면을 뒤집어엎으신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질서 있게 세워졌던 세상이 다시 무질서로 뒤집히는 것,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창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앞선 열방 심판이 개별 나라의 몰락이었다면, 여기서는 창조 질서 자체가 풀리는 우주적 심판이 일어납니다.

2절은 그 심판이 누구에게 임하는지 여섯 쌍의 대조로 보여 줍니다. 백성과 제사장, 종과 상전, 여종과 여주인, 사는 자와 파는 자, 빌려주는 자와 빌리는 자,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입니다. 종교적 지위든, 사회적 신분이든, 경제의 처지든,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같은 상태에 놓입니다. 심판 앞에서는 누구도 자기 자리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땅이 왜 이렇게 쇠하게 되었을까요? 4절에 ‘쇠잔’과 ‘쇠약’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받았던 땅과 사람이 도리어 시들어 갑니다. 5절에 이유가 나옵니다.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땅이 더럽혀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영적·도덕적으로 오염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쓰레기가 아니라 사람 마음속의 죄악의 쓰레기입니다.

그 죄악의 뿌리를 5절 중간이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율법을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기준대로 살지 않았다는 겁니다, 율례를 어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할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웠다는 것이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은 그 모든 불순종의 뿌리입니다. 세 표현이 결국 한 가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 사이에 잘못한 것을 죄라 여기지만, 죄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특히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이 요청해서 맺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택하시어 먼저 맺어 주신 것입니다. “너는 내 백성이니 이 말씀대로 살라, 그러면 내가 너를 책임지고 열방 가운데 우뚝 세우겠다”는 은혜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감사한 언약을 백성이 스스로 깨뜨린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성도인 우리는 더 확실한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언약입니다. 먼저 찾아와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약을 깨뜨린 결과가 6절입니다.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언약을 지키면 복인데, 깨뜨리니 저주가 임합니다. 다만 ‘남은 자가 적다’는 말에서, 하나님이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남은 자를 두신다는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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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절까지는 그 심판의 구체적 모습인데, 반복되는 것이 ‘기쁨의 그침’입니다. 7절 마음이 즐겁던 자가 탄식하고, 8절 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며 수금 타는 기쁨이 그칩니다. 11절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기쁨과 탄식이 뚜렷이 대조됩니다. 이 대조에 담긴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언약 백성으로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바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깨뜨리니 그 기쁨이 탄식으로 바뀝니다. 7절, 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합니다. 포도 열매가 맺혀야 즙을 짜는데, 나무가 말라 열매가 없으니 즐거움도 마르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약탈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 들어가는 자가 없습니다. 안으로는 소출이 마르고 밖으로는 약탈당하여, 안팎으로 기쁨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13절이 그 심판의 강력함을 비유로 말합니다. “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으리라” 감람나무를 세게 흔들면 열매가 다 떨어지듯, 포도를 거둔 뒤 이삭줍기하듯 몇 알만 남듯, 하나님이 세상을 흔드시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이 떨어지고 남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남은 것’이라는 표현이 완전한 소멸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을 공허하게 하는 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의 세상을 채우시고 질서와 빛으로 만드셨는데, 그 세상이 다시 공허와 혼돈으로 돌아가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저지르는 크고 작은 죄악이 우리를 혼란스럽고 공허하게 하며 하나님의 복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니 복을 구하기 전에, 삶의 작은 일에서부터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정한 기쁨이 말씀 안에 있음을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원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율례를 지키며 영원한 언약을 붙들고 살아갈 때 참된 기쁨이 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뿐이지만, 말씀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마르지 않는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먼저 붙들고, 서로 그 말씀 안으로 이끄는 공동체로 세워져 가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23:1-18절 /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26.08.10)

● “두로에 관한 경고라”(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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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3장부터 오늘 본문까지, 하나님은 여러 나라를 향한 심판을 이어 오셨습니다. 그 첫 나라가 바벨론이었고, 오늘 두로가 그 열방 심판의 마지막입니다. 이런 구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론은 세상 나라의 대표로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 곧 세상의 ‘힘’을 상징했습니다. 두로는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쌓은 나라, 곧 세상의 ‘풍요’를 대표합니다. 열방 심판이 힘으로 시작해 풍요로 끝납니다. 세상이 의지하는 두 가지, 힘과 풍요가 다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1절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다시스의 배는 먼 거리를 오가며 무역하던 큰 상선을 가리킵니다. 그 무역의 중심에 두로가 있었습니다. 두로는 바로 옆 시돈과 함께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 성경에 두 이름이 짝을 이루어 자주 등장합니다.

두로는 이스라엘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다윗과 우호를 맺었던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기술자와 백향목을 보내 도왔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을 도왔던 그 두로가 이제 심판을 받습니다. 1절 중간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다” 풍요의 상징이던 도시가 순식간에 폐허가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깃딤, 곧 지중해 건너 먼 섬에까지 전해집니다. 그토록 견고하던 무역 도시의 몰락이 온 바다에 충격으로 퍼집니다.

두로가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 3절에 나타납니다.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시홀과 나일은 애굽의 강입니다. 애굽에서 나는 곡물을 배로 실어 날라 여러 나라에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두로는 ‘열국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곡식이 필요한 나라들이 다 두로를 거쳐야 했으니, 그 부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그 풍요가 무너지자, 4절에서 두로는 자식을 낳지도 기르지도 못한 여인에 비유됩니다. 번성의 상징이던 도시가 생산이 끊긴 불모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5절, 이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애굽도 고통받습니다. 곡물을 실어 나르던 판로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몰락이 무역으로 얽힌 이웃 나라에까지 파장을 미치는 것입니다.

7절은 두로의 옛 영광를 회고합니다.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무역으로 풍요와 향락을 누리며, 먼 곳까지 다니며 식민지를 세우던 그 도시가 이렇게 무너졌느냐는 탄식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도시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몰락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8절 “면류관을 씌우던 두로, 그 상인들은 고관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라 이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면류관을 씌우던’이라는 표현이 두로의 위세를 보여줍니다. 두로는 여러 지역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고 거기에 왕을 세워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왕을 세우고 폐하는 권세를 부리던 나라입니다. 그 상인들은 한 나라의 고관에 견줄 만한 존귀한 자들이었습니다.

이토록 위세 등등하던 두로를 누가 무너뜨렸습니까. 9절이 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두로의 몰락은 우연이나 국제 정세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없이 쌓은 영화를 욕되게 하시고, 스스로 주인 되어 교만하던 자를 낮추시려는 것입니다.

11절은 하나님의 열방 다스리심을 다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서 열방을 흔드시며” 사람의 눈에는 강대국이 세상을 이끌고 그 질서가 영원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바다 위에까지 손을 펴서 열방을 흔드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무역 제국도, 하나님이 손을 펴시면 흔들립니다. 결국 무너집니다. 우리 의지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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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학대받는 처녀 딸 시돈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갈지라도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앞서 두로의 몰락 소식이 전해졌던 그 먼 섬 깃딤으로 피신해 가도, 거기서 평안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안전해 보이는 장소에 머문다고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이 없는 곳으로 몸을 옮긴다고 평안이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러니 좋은 장소 혹은 좋은 상황이 아닌 좋으신 하나님을 구하고 함께 합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15절부터 ‘칠십 년’이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두로가 칠십 년 동안 잊힌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칠십 년은 사람들이 두로를 완전히 잊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정하신 기한이 차자 두로를 다시 돌보십니다.

16-17절은 그 회복을 잊혔던 기생이 다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기억에 오르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는 두로의 무역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그린 것입니다. 무역하는 도시가 이익만 좇아 어디든 오가는 모습, 기준 없이 값을 받는 기생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회복된 두로의 무역 소득이 예전처럼 쌓이고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히 여호와께 구별되어 그분 앞에서 섬기는 자들의 양식과 옷감이 됩니다. 세상의 풍요를 상징하던 두로의 부가,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 소득이 어떤 경로로 하나님께 바쳐지는지 본문이 자세히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풍요마저 결국 당신의 뜻과 백성을 위해 돌리시는 주권자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마지막 모습은 두로를 향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남유다를 향한 말씀입니다. 두로가 겪은 칠십 년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시간을 지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회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남유다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남유다도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겪겠지만, 그 고통의 끝에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두로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그 길을 미리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의 힘과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열방 심판의 처음은 힘의 나라 바벨론이었고 마지막은 풍요의 나라 두로였습니다. 세상은 힘과 풍요를 따라 움직이고, 우리 마음도 그리로 쏠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힘과 풍요를 손 안에 쥐고 흔드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무너짐을 통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두로조차 칠십 년 후에 돌보시고, 마침내 그 소득을 하나님께 돌리는 나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19:16-20:6절 / 애굽을 고치시리라(26.08.07)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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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나님은 애굽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심판이 끝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시는 것은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을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는지, 그리고 이 이야기가 사실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날에’라는 말이 여섯 번 반복됩니다(16,18,19,21,23,24절). 이사야에서 ‘그날’은 때로 심판의 날이지만, 오늘은 회복의 날입니다. 16-17절이 그 회복의 첫 장면입니다. “그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강대국 애굽이 연약한 여인처럼 떤다는 것인데, 무엇을 보고 떨까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애굽을 떨게 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군대가 아니라 그 위에 얹힌 하나님의 손입니다. 더 니아가 17절은 유다의 땅이 도리어 애굽에 두려움이 된다고 합니다. 국력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 두 나라인데 그 관계가 뒤집히는 것은, 유다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이라고 합니다.

18절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이 가나안 방언, 곧 하나님 백성의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 강대국의 언어를 약소국이 배우는 것이 상식인데, 도리어 애굽이 하나님 백성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중심지가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19절 “그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제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이고, 기둥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표시하는 표지입니다. 이 두 단어는 창세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불렀고,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며 기둥을 세웠습니다. 곧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며 제단과 기둥을 세웠던 그 일이, 이제 애굽 땅에서 재현됩니다. 이사야는 창세기의 언어를 빌려, 이방 애굽이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날을 그리고 있습니다.

20-21절은 또 다른 성경의 그림을 가져옵니다. 애굽이 압박하는 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 건지시고, 마침내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로 경배합니다. 이것은 사사기의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이방의 압제를 받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 곧 구원자를 보내 건지시던 그 패턴이, 이제 애굽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제단과 기둥이 창세기의 그림이라면, 구원자의 부르심은 사사기의 그림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애굽에서 되풀이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22절이 이 단락의 핵심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치심(마카)과 고침(라파)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기록됩니다. 하나님의 치심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고침이 목적입니다. 우리 향한 하나님의 손길도 동일합니다.

●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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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5절에서 하나님의 회복은 상상을 넘어섭니다.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놓이고, 서로 대적하던 두 나라가 그 길로 오가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첫 범죄 이후 가장 먼저 깨진 것이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남편과 아내, 그리고 형제의 관계가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회복은 그 깨진 관계를 회복하여 원수 되었던 나라들을 한 예배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25절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이 선언은 파격적입니다. ‘내 백성’과 ‘내 기업’은 본래 이스라엘에게만 쓰이던 칭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 삼았던 애굽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잔인한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것’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한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온 열방을 향한다는 것, 훗날 신약에서 이방인이 ‘내 백성’이라 불리는 그 복음이 여기 이미 씨앗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선포의 진정한 방향은 애굽이 아니라 유다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 된 애굽조차 치시고 고쳐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라면, 자기 백성을 치실 때의 마음은 얼마나 더 간절하겠습니까.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 역시, 무너뜨림이 아니라 돌이켜 고치시려는 사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20장에 오면 그 영광스러운 미래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납니다. 앗수르 사르곤 왕이 블레셋의 아스돗을 점령하던 때(주전 711년경), 앗수르의 세력이 한창 뻗어 가던 시절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이 아니라 몸으로 예언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행위 예언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베옷과 신을 벗고 삼 년을 다니게 하시는데, 벗은 몸은 포로로 끌려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사로잡혀 벗은 몸으로 끌려가 수치를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말로 해도 듣지 않는 백성에게, 이사야가 자기 몸으로 삼 년을 그 경고를 새겨 보인 것입니다.

5-6절이 그 경고의 초점을 드러냅니다.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던 자들이 그 몰락을 보고 “우리가 믿던 나라,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피하리요” 하며 부끄러워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바라고 의지한 자의 끝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열방 이야기가 결국 유다를 향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흔들리지 않는 인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강대국 애굽이 흔들린다는 것은 세상의 부한 자도 강한 자도 다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약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인생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애굽이 마침내 흔들림을 멈추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것처럼, 참된 견고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애굽조차 치시고 고쳐 돌아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백성을 향한 마음은 얼마나 더 간절하겠습니까.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길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18:1-19:15절 / 조용히 감찰하리라(26.08.06)

●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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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유다를 둘러싼 나라들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계속 말씀하십니다. 어제는 북쪽의 아람과 북이스라엘이었다면, 오늘은 남쪽의 나라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노예 생활하던 애굽, 그리고 그 너머 구스, 오늘날의 에디오피아입니다.

1절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그 당시 구스는 애굽을 정복해 왕조를 이룰 만큼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은 무역선들이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 나라가 강하고 무역이 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구스 사람들이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민첩한 사절들을 여러 나라로 보냅니다. 이유는 앗수르가 점점 부강해지자 자기 힘으로는 안 되니 여러 나라와 손잡으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절들을 향해 “너희 백성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2절이 복잡해 보이지만 의미가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사14:32절과 같습니다. 거기서도 블레셋이 사신을 보내 “서로 손잡고 앗수르를 대적하자”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고 답하게 하셨습니다. 앗수르를 이기는 것은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온을 견고케 하심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돌려보내라 하신 그 구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2절에 나옵니다. “장대하고 준수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강성한 백성”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손잡고 의지하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돌려보내라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강한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손잡고 싶어 하는, 든든해 보이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으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3절은 하나님이 산들 위에 깃발을 세우시고 나팔을 부시는 날이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승리의 나팔을 부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승리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4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하리니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세상은 어디를 의지할지 몰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하나님은 그 처소에서 조용히 세상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경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 같고 잠잠히 감찰만 하시는 것 같은데, 그 잠잠함 속에서 하나님의 일은 놀랍게 이루어집니다. 5절 보면 추수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익어갈 때 하나님이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고 퍼진 가지를 찍어 버리십니다. 누구도 물리치지 못할 것 같던 앗수르를, 하나님이 이렇게 순식간에 찍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2절에 나왔던 그 장대하고 준수하고 강성한 백성이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산에 이르리라” 처음 남유다에 올 때는 “손잡고 앗수르를 대적하자”며 왔던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앗수르를 심판하시고 뜻을 이루시니, 이제 예물을 들고 하나님을 경배하러 시온에 오는 것입니다. 유다가 의지하려던 그 나라가, 도리어 하나님 앞에 경배하러 옵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만나면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의지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것 의지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를 주시겠다고. 앗수르처럼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문제도, 하나님이 손대시면 하루아침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해결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19: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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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절부터는 애굽에 대한 내용입니다. 1절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애굽은 우상을 숭배했고, 특히 왕인 바로를 신의 아들로 여겨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임하시니 그 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고, 자기들이 대단하다 여기던 애굽인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앞에 엎드리고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2절은 그렇게 든든하던 애굽이 무너져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성읍이 성읍을, 나라가 나라를 치는 내분에 빠집니다. 3절 애굽인의 정신이 쇠약해지고 하나님이 그 계획을 깨뜨리시니, 그들은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묻습니다. 애굽이 그 큰 나라를 이룬 기초가 이런 미신과 우상이었는데, 하나님이 임하시니 그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실 때 가장 먼저 어디를 치십니까. 5-10절까지 반복되는 말이 바닷물, 강, 나일입니다. 애굽의 부강을 이룬 것이 나일강이었는데, 하나님이 그 강을 가장 먼저 치십니다. 바닷물이 없어지고 강이 잦아 마릅니다. 강에서 악취가 나고 강물이 줄어듭니다. 경제가 통째로 무너집니다. 어부들이 탄식하고, 그물 던지는 자들이 슬퍼하며, 세마포 만드는 자들까지 낙심합니다. 애굽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11-15절은 애굽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애굽은 부강하면서 자기 지혜를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지혜자들이 있으니 우리나라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혜’라는 말이 이 단락에 반복됩니다. 그러나 13절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로 세운 나라가, 하나님이 한 번 손대시니 와르르 무너집니다.

특히 14절이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을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애굽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고의 지혜로 곧바로 잘 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지혜를 도리어 사용하셔서, 그들이 그 지혜 때문에 엉뚱한 길로 가고 결국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무너지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결과가 이렇습니다. 지혜라 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우리의 일상이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 나는 내 생각대로 합니까, 말씀대로 합니까. 말씀을 알면서도 자기 생각대로 가곤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곧 비틀거리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말씀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장대하고 준수하고 강성한 것을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안과 두려움에 이리저리 요동할 때, 하나님은 그 처소에서 조용히 모든 것을 감찰하시며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 삶에도 여러 일이 밀려오지만, 우리도 하나님처럼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반드시 능력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해결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