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7 | 매일성경
●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3절)
8장부터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룬 바울은, 11:2절부터 새로운 주제로 넘어갑니다. 예배에 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현대의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여자가 머리를 가리느냐 마느냐, 남자가 무엇을 쓰느냐는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알면 바울이 진짜 다루는 문제가 무엇인지 보입니다.
본문을 풀어가는 열쇠는 13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곧 고린도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그것도 조용히가 아니라 과격하게 기도하고 예언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의 도시였고, 이방 신전에서 여자 사제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광적으로 예언하곤 했습니다. 그 모습이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예배 중에 누군가 갑자기 일어나 머리를 풀고 소리치며 기도한다면 예배가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를 괴롭혀온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배 중에도 “나는 은혜받아서 하는 것인데 무엇이 문제냐”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내가 은혜받았다 해도 다른 사람의 신앙에 걸림돌이 된다면 옳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전제 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2절에서 바울은 모처럼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문제가 많은 교회였지만, 잘하는 부분은 분명히 칭찬합니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책망할 것은 책망하는 균형은 우리도 배울 점입니다.
그러나 3절에서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예배의 혼란을 질서와 권위의 문제로 정리해 갑니다. 여기서 ‘머리’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서가 3절 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동등하지만 질서 안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남성과 여성을 똑같이 존귀하게 지으셨지만, 가정과 예배의 질서 안에서는 권위의 자리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질서를 가정에 적용해 설명합니다. 아내에게는 복종을, 남편에게는 사랑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 같은 사랑입니다. 생명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복종이 어려워 보이지만,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이야말로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질서는 한쪽의 일방적 희생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책임 위에 세워집니다.
이 질서 위에서 바울은 머리 문제를 다룹니다. 4-5절,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고, 여자는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방 신전에서 남자 제사장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예배를 집례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교회 남자들이 그것을 따라 한다면 우상숭배와 교회 예배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둘째, 여자 사제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예언하던 모습이 교회 여성들에게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오히려 영광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5절의 표현은 충격적입니다. 머리를 가리지 않고 예언하는 것은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합니다. 당시 머리를 미는 것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강제로 가하던 수치의 표시였습니다. 바울은 그만큼 강한 표현으로 이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6절에서 바울이 권하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예배드릴 때 단정하게 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13절)
14절의 ‘본성’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본성’은 당시 사회가 남녀를 구별하던 보편적 관습을 가리킵니다. 그 시대 문화에서 남성은 머리에 무언가를 쓰지 않고 여성은 단정히 가리는 것이 통념이었는데, 고린도 교회 여성들이 이를 거부하며 “우리는 자유롭다”고 한 것이 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바울의 설명을 듣다 보면 여성에게 불리하게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균형을 잡아줍니다. 11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처음 창조 때는 아담에게서 하와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모든 남자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속해 있고,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핵심은 분명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주 안에서 똑같이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가정과 예배에는 질서와 권위가 있고,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6절 “그러나 누구든지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누가 따지고 논쟁하려 해도, 바울은 담대하게 교회의 질서를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본문대로 여성이 머리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핵심은 머리를 가리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두 가지 원리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의 복장이나 태도, 예배에서의 자세가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한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둘째는 성도의 유익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새로 온 사람이 우리 모습을 보고 은혜받을 수도,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내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보편적인 관습을 존중하며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절제하고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 그것이 복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2026.06.16 | 매일성경
●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절)
8장부터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며 우상의 신전에까지 들어가 담대하게 그 음식을 먹었고,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9장에서 바울은 사도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자신을 예로 들었고, 10장에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거울 삼아 우상숭배를 경고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 제물에 대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바울의 권면이 강하고 거칠수록, 그 밑바닥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고 부릅니다. 여기서 ‘피하라’는 의미는 ‘도망치듯 달아나라’입니다. 음행을 피하듯 우상숭배도 피해 달아나야합니다. 15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늘 지혜를 자부하던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 지혜로 분별해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작정 “하지 말라” 하지 않고, 왜 안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풀어갑니다. 그 출발이 성찬입니다. 16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성찬에서 잔을 마시고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여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코이노니아’로, 단순한 동참을 넘어 깊은 사귐과 연합을 뜻합니다. 또한 17절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이 구절에 ‘하나’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곧 성찬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참여한 성도들끼리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18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제사를 예로 듭니다.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의식과 하나가 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냥 몸만 참여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참여하다’가 많이 반복됩니다(16,17,18,21). 그런데 바울은 ‘참여’를 뜻하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를 의도적으로 함께 씁니다. 16, 18, 20절의 ‘참여’는 깊은 내적 연합을 뜻하는 ‘코이노니아’이고, 17절과 21절의 ‘참여’는 겉으로 함께하는 동참을 뜻하는 ‘메테코’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저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메테코) 이미 깊은 연합인 ‘코이노니아’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으로 동참하는 것조차 금합니다. 그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식탁과 하나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바울은 앞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꺼냅니다. 20절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우상 자체는 헛것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우상으로 향하게 하고 그 숭배를 조종하는 영적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이 귀신의 일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배후에서 일하는 어둠의 세력은 실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신전의 자리에 참여해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어둠을 주관하는 귀신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21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예수님과 하나 된 성도가 귀신의 자리와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보았듯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합이 되기에,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을 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권면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자유를 내세워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4절)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6장에도 나왔던 것처럼 “모든 것이 가하다”는 고린도 성도들의 구호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두 가지 잣대를 댑니다. 이것이 유익한가,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이어 본문의 핵심이 나옵니다.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신앙생활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다 말하고 다 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실제 상황에 적용해서 우상 제물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25-26절,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라 해도,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이 초대해 음식을 차려주면 그것도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은 제물입니다”라고 알려주면 그때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 말을 꺼낸 사람의 마음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먹어도 죄가 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입니다.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이 말씀이 바로 이 긴 이갸기의 결론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를 두고, 결국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32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다른 성도가 시험에 들고 흔들린다면 옳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보고 은혜받고 도전받아 더 신실하게 살고 싶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섬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분을 본받아, 바울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것은 곧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 참여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인지, 아닌지를 잘 살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것이 지혜롭고 성숙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성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가 하나로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2026.06.15 | 매일성경
●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25절)
8장에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다루며, 자유가 있더라도 연약한 성도를 위해 절제할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9장 앞부분은 바울 자신이 사도로서 마땅히 누릴 권리를 어떻게 절제했는지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절제의 이야기를 운동 경기에 빗대어 이어갑니다. 이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울 삼아 고린도 성도들에게 경고를 전합니다.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바울은 신앙생활을 달리기에 비유합니다. 고린도에는 유명한 운동 경기가 있었기에, 성도들은 이 비유를 곧바로 알아들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은 ‘절제’입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는 4년 만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피땀 흘려 절제하고 훈련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신앙이 성장하는 일은 없습니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운동 경기의 우승자가 쓰는 월계관은 곧 시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사라질 관을 위해서도 사람들은 그토록 절제하는데, 우리에게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더더욱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저마다 하고 싶은 대로, 절제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절제가 있어야 개인 신앙도 공동체도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26절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아무리 잘 달려도 결승점과 반대로 달리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신앙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듯, 우리 신앙의 초점은 주님이어야 합니다. 만일 신앙의 목표가 나 자신, 내 영광, 내 성공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향방 없이 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그 밑바닥의 동기가 무엇인지 살피고, 오직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7절에서 바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바울만큼 헌신한 사람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정작 자신이 절제하지 못해 버림받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깨어 있음입니다. 앞장서서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특히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6절)
10장에서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져와서 고린도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1-2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출애굽 후 광야를 지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구약 백성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홍해를 통과한 사건을 세례로 본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먹고 마셨다고 하는데, 신령한 음식은 만나, 신령한 음료는 반석에서 난 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광야의 은혜를 성찬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구약 백성도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고린도 성도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5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 큰 은혜를 받고도 광야에서 멸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고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삼아 네 가지를 경고합니다.
첫째, 우상숭배입니다. 7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사이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뛰고 놀았던 사건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첫 번째로 지적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다룬 우상의 제물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전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도시 유력자들이 모이는 사교의 중심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신분이나 이익을 지키는 길이 되기도 했기에, 성도들이 “나는 괜찮다”며 참석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둘째, 음행입니다. 광야에서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은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셋째,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입니다. 넷째, 원망입니다.
11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이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신전에 들어가 우상을 섬기지는 않지만,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우상인 줄도 모르고 붙들고 사는 것들이 많습니다. 돈, 자녀,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살피는 일이 필요합니다.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 성도들은 자기들이 잘 서있 다고 자랑하며 아무 문제 없다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러다 넘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깨어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은 시험에 대해 말합니다.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앞의 경고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시험하고 원망한 것은, 대부분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것을 시험거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험과 문제를 만날 때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만나면 이것이 우리를 삼키고 끝장낼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고,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십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이건 못 이기겠다” 싶던 문제들이 결국 지나갔습니다. 이 말씀이 이미 우리 삶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절제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내 삶에서 절제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살피며, 신앙의 경주를 잘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 서 있다고 교만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늘 깨어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시험을 만나도 감당할 길과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2026.06.12 | 매일성경
●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28절)
계속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질문에 답을 합니다. 앞부분이 부부 관계에 대한 답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특히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그 권면의 바탕에는 세상을 보는 바울의 시각이 담겨 있습니다.
25절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바울의 태도가 인상적입니다. 7장 내내 그는 자신의 권면과 주님의 명령을 신중하게 구분합니다. 앞서 이혼 문제는 “주의 명령”(10절)이라 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주께 받은 계명이 없다”며 자신의 의견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귀한 자세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지만, 인생의 모든 문제에 정답이 일일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성경이 말하는 큰 원리를 붙들되, 그 원리 위에서 자신이 판단한 것은 ‘내 의견’이라고 정직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40절 끝에서도 그는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한 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자기 의견조차 성령의 인도 안에서 신중하게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당시에는 “내가 하나님께 특별한 영을 받았으니 내 말이 곧 정답이다”라며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입니다. 성경에 분명하지 않은 것을 마치 정답인 양 단정하는 가르침은 편할 수는 있어도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며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기준이 분명해야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 바울이 자꾸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라고 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창조 질서로 세우셨는데, 왜 바울은 독신을 권할까요? 그 이유가 26절에 있습니다.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바울은 머지않아 닥칠 고난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환난인지 본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초대교회가 겪은 박해와 재난의 배경을 떠올리면 이해됩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나 큰 어려움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자녀의 결혼을 서두르라고 권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겠지요. 바울의 마음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27절은 환난을 앞두고 굳이 환경을 바꾸지 말라고 합니다. 결혼했으면 그대로, 혼자면 그대로,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28절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의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결혼이 죄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다만 환난의 때에 새로 가정을 이루면 챙겨야 할 사람이 늘고 고난이 더해질 수 있기에,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권면한 것입니다. 바울의 모든 권면 밑바닥에는 “나는 너희를 아낀다”(28절),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32절)는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32절)
29절부터 바울의 시야가 결혼을 넘어 인생 전체로 확장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여기서 ‘그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늘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의식 속에 살았습니다.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마음으로 깨어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29-31절에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없는 자 같이 하라”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같이,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자같이, 사고파는 자는 가진 것 없는 자같이, 세상 물건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 합니다. 가정도, 감정도, 소유도 그 자체가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31절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여기서 ‘외형’으로 번역된 단어는 ‘스케마’로, 무대 위의 한 장면이나 겉으로 드러난 형체를 뜻합니다. 연극의 한 장면이 막이 내리면 사라지듯, 우리가 보고 붙드는 세상의 모든 것은 지나가는 장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가정도 감정도 소유도 언젠가 지나가고,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눈길을 자기에게 붙들어 두려 합니다. 광고는 “이것이 없으면 당신은 행복할 수 없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것이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주님 앞에 설 그날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32절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세상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면 염려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결혼한 자와 결혼하지 않은 자를 비교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는 “어찌하여 주를 기쁘시게 할까”하며 주의 일에 집중할 수 있지만, 결혼한 자는 “어찌하여 아내를(남편을) 기쁘게 할까”하며 마음이 나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내나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성도의 궁극적 목적임을 말하는 겁니다.
이 권면에는 바울 자신의 삶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고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위험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그런 삶에서는 자유로운 몸으로 오직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합당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35절 “내가 이것을 말함은 …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결국 바울의 모든 권면이 향하는 곳은 하나,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는 삶’입니다.
36-38절에서 바울은 약혼한 이들에게 답합니다. 약혼했으니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결혼하기를 원하고 그것이 합당하다면 결혼하라,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37절은 마음을 굳게 정하고 결혼하지 않기로 했어도 잘하는 것이라 합니다. 둘 다 선한 길이되, 임박한 환난과 주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바울의 배경에서는 독신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을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독신을 권한 것은 임박한 환난과 복음 사역의 위험이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나온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모든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결혼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다만 바울이 분명히 말했듯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독신으로 산다면, 그 핵심은 ‘나를 위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혼자 사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가정도 감정도 소유도 모두 지나가는 한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속에서 영원한 것을 붙잡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결혼했든 독신이든,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환경과 물질을 나의 유익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만족을 누릴까”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하나님이 그 삶에 풍성한 은혜를 더하실 줄 믿습니다.
2026.06.11 | 매일성경
●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10절)
1-6장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분열, 음행, 소송 문제를 강하게 지적했습니다. 7장부터는 분위기가 바뀝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신앙생활 중에 궁금했던 것들을 바울에게 물었고, 바울이 그 질문에 하나씩 답합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이 가정과 부부 관계입니다.
1절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이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하던 말입니다. 부부 관계가 영적인 삶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답은 달랐습니다. 2절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부부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핵심은 서로에게 신실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4절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말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여성은 남성의 도구처럼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남편도 아내에게 속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부부는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자기 욕심만 채우지 않고 함께 아름답게 가정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얼마 동안은 분방할 수 있지만 다시 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제하지 못함으로 사탄이 공격하여 넘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잘 알았습니다. 자칫 사탄이 우리의 약점을 공격할 수 있기에, 서로 배려하며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신앙의 문제는 이처럼 작고 사소하게 보이는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정과 부부 관계를 성경적으로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7절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바울은 독신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독신을 권한 이유는 결혼이 귀찮고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창조 원리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독신의 은사가 있습니다. 혼자 살아도 정욕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집중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런 은사가 있는 사람은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젊은 사람들에게 결혼에 대해 조언할 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내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고 “결혼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조언해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니 가정을 이루도록 권면하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합니다.
가정에는 갈등과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마다 이 사람과 살아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바울은 여기에 답합니다. 10-11절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이번에는 자신의 권면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결혼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믿는 배우자와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사는 경우는 어떨까요? 12-13절에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어떤 믿는 성도들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 살면 자신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14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오히려 믿는 배우자의 영향으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예수를 믿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믿는 부모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됩니다. 힘들지만 인내하며 가정을 이끌어온 결과입니다.
다만 예외가 있습니다. 15절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특히 함께 사는 것이 위협과 고통이 되는 상황이라면 갈라서는 것도 허용됩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화평을 이루며 인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인내를 통해 배우자를 구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절)
17-24절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17절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20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4절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겁니다.
바울은 두 가지 예를 듭니다. 첫째는 할례입니다(18-19절), 할례자로 부름받았으면 그대로, 무할례자로 부름받았으면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할례였고, 일부는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신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19절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중요한 것은 육신의 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종과 자유인입니다. 21절에서 종으로 부름받았어도 염려하지 말고, 자유롭게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놀랍습니다. 22절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이와 같이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외적인 신분이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이고, 자유인이라도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세상의 신분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예수님이 십자가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기에, 우리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 받은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놀라운 것은 주인과 노예가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말씀의 원리를 따라 가정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말씀이 이 시대 흐름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원리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정을 잘 세워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르심의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현재의 자리를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값으로 사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부르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가기를 원합니다.
2026.06.10 | 매일성경
●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13절)
4장까지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다룬 바울은, 5장에서 음행한 자를 교회가 처리하지 않은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6장 앞부분에서 소송 문제를 다루었고, 오늘 다시 음행 문제로 돌아옵니다. 왜 갑자기 소송 문제에서 음행 문제로 이어지는가? 6장의 소송 문제와 음행 문제는 뿌리가 비슷합니다. 힘있는 자들의 욕망의 문제입니다. 돈과 힘이 있다고 약한 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육신의 욕망도 제어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모든 것이 가하다”는 말은 고린도 성도들이 자주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합리화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가 주어진 것은 맞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내 마음대로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어떤 욕망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가면 안 됩니다. 자유를 핑계 삼아 다시 죄의 종노릇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며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3절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이 말도 고린도 성도들이 자주 하던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육신으로 끝나는 것처럼, 몸으로 하는 일도 죽으면 다 끝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영적인 것만 중요하고 몸으로 나타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단호히 반박합니다. 13절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오늘 본문에 ‘몸’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많이 등장합니다(13,15,16,18,19,20). 신앙은 영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몸으로 그 신앙이 어떻게 드러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우리 몸으로 사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당시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의 영향 때문입니다.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고 영적인 것만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생각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스며들어 몸으로 짓는 죄를 가볍게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바울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부활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몸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으로 죄를 짓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20절)
● “너희 몸은 …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9절)
15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우리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의 연합입니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창녀와 몸을 섞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무역으로 부유했고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을 일상적으로 행했고, 그 영향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몸으로 하는 게 무슨 죄냐, 죽으면 다 없어질 텐데”라는 생각이 이런 행동을 합리화했습니다.
바울은 심각하게 지적합니다. 15절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절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 성도들은 그것을 순간의 쾌락으로 끝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한 몸이 되는 것, 새로운 실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합한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그렇습니다. 강력접착제로 붙이는 것, 용접으로 금속을 연결하여 절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몸을 섞어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육체적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 안에서 부부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입니다. 그것을 떠나 육신의 쾌락을 위해 행하는 음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여기서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라는 말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로 보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단호히 아니라고 합니다. “음행은 자기 몸에 짓는 죄”라고 합니다. 음행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다른 죄와는 차원이 다른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한 신학자의 표현처럼, 두 사람이 연합하는 순간 하나가 되어 새로운 실체가 됩니다. 결코 “몸 밖의 일”로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앞서 3장에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면(3:16절), 오늘은 우리 각 사람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전에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가,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인지, 공동체와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인지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나는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존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할 때,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해지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거룩함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함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