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7:1-14절 /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26.08.05)

●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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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을 향한 심판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앗수르, 블레셋, 모압을 다루셨다면, 오늘은 유다 북쪽에 있는 다메섹, 곧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 뜻대로 운행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1절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입니다. 3절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리라”고 나오는데,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이 아람과 북이스라엘 두 나라를 함께 책망하십니다.

이 두 나라는 앞서 7장에서 서로 동맹을 맺고 남유다를 공격했던 나라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치려고 연합했던 그 두 나라를, 이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다메섹은 그 당시 무역의 중심으로 부강하고 견고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메섹이 성읍조차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된다고 하십니다. 어제 모압도 그랬듯이, 지금 보기에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것도 하나님이 손대시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4절부터 북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그날에’라는 말이 반복됩니다(4,7,9). 세상이 하나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손대시는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4절 “그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완전히 쇠하고, 살진 몸이 파리하게 마른다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다 멸망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아세라 상과 태양상을 만들어 숭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풍요롭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풍요를 원했던 그들의 몸이 도리어 파리하게 말라 갑니다. 하나님 없는 풍요는 잠깐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6절 말씀이 놀랍습니다. 완전히 말라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북이스라엘에도 무엇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남아 있다’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감람나무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열매 두세 개가 남고, 무성한 나무의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토록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북이스라엘인데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 남은 자를 남겨두십니다. 그 남은 자를 통해 회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서도 반드시 긍휼을 베푸시고 남겨두시는 분입니다.

7절 “그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심판이 임하자 그제야 북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토록 많은 선지자를 보내 “그렇게 살면 안된다, 어서 돌아오라” 하셨는데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선지자들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 나라가 멸망한 뒤에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돌이켰다면 어떠했을까요.

지금 우리가 새벽마다 말씀을 듣고 매일 묵상하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지자를 보내 외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7절과 8절에 대조가 나타납니다. 7절은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8절은 정반대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과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 목상과 태양상”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보다, 자기 손으로 짓고 만든 우상을 더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심판과 멸망의 길입니다.

지금 우리는 손으로 아세라 상을 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들지 않았어도,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더 가득한 것이 있다면, 성경은 그것을 우상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내 손으로 만든 우상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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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 보면 북이스라엘도 한때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부강함은 잠깐이었습니다. 결국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림받은 수풀 속 처소처럼 황폐하게 됩니다. 여기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림받은”이라는 말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곳은 견고하며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죄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도 이 땅에서 죄악 가운데 거하면, 내 백성이라도 가나안처럼 무너뜨리겠다고.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이 지금 그대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10절이 그 이유입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경제나 군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반석’이라는 말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붙드시는 그 하나님을 두고, 다른 것을 의지하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능력의 반석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12절부터 보여줍니다. 12, 13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소동’과 ‘충돌’입니다.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려고 얼마나 소동하고 충돌하는지 모릅니다. 12절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남유다를 공격하는 열방의 위세가, 거대한 파도가 남유다를 집어삼킬 듯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밀려오는 문제의 파도와도 같습니다.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집채만 한 파도로 달려들면, 우리는 너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열방이 많은 물이 몰려오듯 쳐들어올 때 누가 개입하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13절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하나님이 그 거대한 파도를 한마디로 꾸짖으십니다. 그 한마디에 그들이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처럼 흩어져 사라집니다. 그토록 우리를 삼킬 것 같던 것이, 하나님의 한마디에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능력의 반석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14절이 답합니다.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훗날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와 남유다를 포위하고 위협했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고,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를 치셨습니다. 성경은 그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밤사이 죽어 아침에 다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저녁의 두려움이 아침이 오기 전에 티끌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능력의 반석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손으로 만든 우상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풍요를 좇아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을 의지하다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손으로 깎지는 않았어도,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주관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 하나님을 마음의 첫자리에 두고 신뢰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의 파도가 한꺼번에 달려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대한 파도를 말씀 한마디로 겨처럼, 티끌처럼 흩으시는 능력의 반석이십니다. 저녁의 두려움을 아침이 오기 전에 사라지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사야 16:1-14절 / 다윗의 장막 왕위가 굳게 서리라(26.08.04)

●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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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오늘도 모압을 향한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압이 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무너지는 세상 한복판에서 무엇이 홀로 굳게 서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산으로 보낼지니라” 이사야가 하는 말이니 ‘이 땅 통치자’는 유다의 통치자입니다. 이것은 모압이 유다의 통치자에게 어린 양을 조공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모압의 양들을 셀라에서 광야를 지나 시온산으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왜 모압이 시온산으로 양을 바칩니까. 어제 14:32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의 때가 되면 온 세상이 무너지는데, 오직 시온만이 굳게 서서 피난처가 됩니다. 그러니 모압 사람들이 곡물과 양을 바치며 “제발 피난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2절은 그 피난의 다급함을 보여줍니다.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여인들이 배를 타고 도망가야 하는데, 사람이 많으니 나루터가 혼란에 빠집니다. 보금자리에서 쫓겨나 흩어진 새 새끼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떠도는 모습입니다. 한때 부강하고 번성했던 모압이 순식간에 무너지니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3-4절 앞부분에서 모압은 유다에게 간절히 청합니다.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겨 달라”는 것은, 지금 대낮 같은 죽음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으니 그늘진 피난처로 숨겨 우리를 살려 달라는 절박한 호소입니다. 그런데 4절 중간부터 상황이 바뀝니다.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토색하는 자가 망하고, 멸망시키는 자가 그치고, 압제하는 자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머지않아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세상 곳곳이 다 무너집니다. 한때 강하고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나라들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그런데 무너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던 다윗의 장막이 굳건히 세워집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다윗의 장막이야말로 연약하고, 다른 나라들의 왕위가 굳건해 보이는데, 정반대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 나라가 강한가요 아니면 하나님 나라인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세상 나라가 강해 보이고 영원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힘들고 어렵고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그것이 진정한 견고함이고 흔들리지 않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견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때로 흔들리고 연약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나라가 견고함을 믿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고 말씀을 붙드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점점 더 견고케 하십니다.

이 다윗의 장막에 앉은 이가 “충실함으로 판결한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익에 따라 움직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세워지는 왕위는 메시아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는 충실함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십니다. 곧 모압이 흔들리는 이 심판의 한복판에서 다윗의 장막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결국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그것이 진정한 안정과 행복이며, 하나님 없는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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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모압은 왜 멸망합니까. 6절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한 절 안에 교만, 거만, 교만, 분노, 자랑이 이어집니다. 모압이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교만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7절부터의 모압 이야기에는 통곡과 눈물이 계속 반복됩니다. 한때 영광스럽던 나라가 완전히 무너진 것을 본문은 ‘포도’로 설명합니다.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고, 세상 곳곳으로 뻗어 나가던 그 좋은 가지가 꺾였습니다. 포도가 모압의 영광이었는데, 그것이 사라진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이렇습니다. 순식간에 있다가도 사라집니다.

그런 모압을 향해 9절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누가 우냐면 하나님이 우십니다. 또한 9절 하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라” 모압을 위하여 우시는 하나님, 모압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나라를 심판하시면서도 하나님이 이토록 애통하며 우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는 어떠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애끓는 마음으로 자기 백성이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 우리를 보며 애통해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야,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문제 앞에서 그렇게 두려워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는데,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닌데 왜 그렇게 주저앉아 있느냐” 하시며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도 눈물 흘리시고 아파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또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9절 끝 “즐거운 소리가 그치고”, 10절 “즐거움과 기쁨이 떠나고”,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고”,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한때 모압은 하나님 없이도 너무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억압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허탄한 것에 얽매여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기기에, 어떤 것에도 얽매이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없는 기쁨은 영원하지 않아 순간 있다가 사라지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붙들고 누리는 기쁨은 어느 쪽입니까. 사라질 순간의 기쁨입니까, 영원한 기쁨입니까.

12절이 다시 우상의 헛됨을 보여줍니다.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으리로다” 모압이 어려움을 만나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자기 신을 향해 울부짖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비록 피곤하여 부르짖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약속하신 것이 있어 반드시 이루시고 회복시키시며, 영원하고 굳건한 왕위를 세워 정의와 공의로 통치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때 즐겁고 기쁘며 영원할 것 같지만,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굳건히 세워지고 메시아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우리도 세상 나라 속에 살지만,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붙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시다.

다른 하나는 교만이 아니라 겸손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모압이 무너진 것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겸손하게,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처럼 견고케 하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이사야 14:24-15:9절 / 내가 반드시 이루리라(26.08.03)

●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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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까지 하나님은 아하스 왕 시대를 배경으로 남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3장부터는 세상 여러 나라를 향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남유다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은 앗수르와 블레셋과 모압을 향한 심판을 통해, 그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2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사람들은 강대국에 의해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남유다의 왕들도 그랬습니다. 어떤 강대국을 의지해야 우리가 안전하고 미래가 보장될까?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강대국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경영하고 계획하며, 하나님 뜻대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말이 거듭 강조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은 반드시 되고, 경영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6절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27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것을 꺾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강한 나라를, 힘 있는 사람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26절과 27절 끝에 같은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향해 손을 펴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온 열방 위에 펴신 그 손이, 우리 교회 위에도 있습니까. 우리 가정 위에도, 우리 자녀 위에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의 편 손이 지금 우리 위에도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생각과 다르게 어떤 일이 이루어질 때 요동하거나 흔들릴 것이 아니라,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며 여전히 우리 위에 손을 펴고 계신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25절 “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나의 땅’은 하나님의 땅, 곧 이스라엘입니다. 앗수르가 그 땅을 짓밟고 지배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 앗수르를 몰아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때입니다. 앗수르 때문에 지고 있던 멍에와 짐을 하나님이 벗기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십니다.

●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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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부터는 블레셋을 향한 경고입니다. 28절에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이 경고가 임하니라” 블레셋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29절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블레셋을 치던 막대기는 앗수르의 강한 왕입니다. 그 왕이 부러졌다, 곧 죽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저 왕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는 평안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뻐하지 말라 하십니다.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고, 그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왕이 죽었으니 해방이라 여겼는데, 더 악독한 왕이 나타나 블레셋을 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어떤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계속되는 평안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환경에 기대어 문제 하나가 해결되어도, 또 다른 문제가 다가옵니다. 사람 때문에 내 삶이 좌우되면, 결국 또 다른 사람과 문제 때문에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2절이 그 결론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블레셋 사신들에게 무엇이라 답하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세우셨고, 그 백성이 그 안에서 피난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자 사람들이 조롱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던 성읍이 멸망했으니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바벨론은 성전 기구를 가져가며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강대한 나라들을 하나하나 심판하시니, 그토록 강하던 나라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온이 견고히 세워지고, 그곳에 많은 사람이 피난합니다. 이를 통해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15장은 모압을 향한 심판입니다. 그런데 모압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슬퍼한다, 부르짖는다, 운다’입니다. 산당에 올라가 울고, 애통하여 심히 울며, 크게 부르짖고, 울부짖습니다. 8절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렀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모압 전체가 통곡으로 뒤덮입니다.

이 가운데 5절은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이 ‘내 마음’은 선지자의 마음이고,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지금 애통하며 부르짖는 것은 심판받는 모압만이 아니라, 그 모압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며 “하나님은 무자비하신 분이다, 한 나라를 이렇게 쉽게 멸망시키시다니”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압은 교만 때문에 무너지는데, 하나님도 애통하는 마음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통해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세우시고, 교만한 세상이 겸손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이끄십니다.

1절에 반복단어는 ‘하룻밤에’입니다.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알과 기르는 모압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들이 하룻밤 사이에 황폐해집니다. 한 도시를 세우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과 수고가 듭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손대시면 하룻밤 사이에 다 무너집니다.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쌓아 올리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모든 것이 하룻밤 사이에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함으로 우리 인생을 채워 주십니다. 하룻밤에 무너진 모압 사람들은 2절에서 산당에 올라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살려 달라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 외에 세상의 모든 것은 우상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그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세상은 거대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것 같으며, 그 속에서 우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한순간도 놓지 않고 주목하시며,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우리 위에 펴신 그 손을 기억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하나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그것을 피난처로 삼으십니다. 하룻밤에 무너진 모압이 아무리 다른 곳에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듯, 우상과 사람과 환경은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합니다. 우리 삶은 결국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야 하고, 하나님이 견고케 하셔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견고한 삶을 살아갑시다.

이사야 12:1-6절 / 하나님은 구원이시라(26.07.31)

●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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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7-11장까지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남유다를 향해 거듭 심판을 경고하시고 회복에 대한 메시지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2장에 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회복입니다. 그러나 죄를 그대로 둔 채 복을 주는 것은 참된 회복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백성을 정화하시고 그다음에 이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그 구원의 날에 부를 노래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날에’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절 “그날에 네가 말하기를”, 4절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입니다. 그날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한숨과 탄식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날’은 하나님이 구원을 행하시는 날입니다. 어두운 심판의 과정이 지나고 구원의 빛이 임합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 언제까지 이 어려움을 견뎌야 합니까, 이것이 끝나기는 합니까”하고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과정이 끝나야 진정한 구원과 회복이 있다 하십니다. 그러니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 때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과 회복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며 그 날에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왜 이렇게 이끌어 오셨는지를 이해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1-3절은 개인의 찬양입니다. 1절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여기서 ‘전에는’과 ‘이제는’이 대비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진노하셨는데, 이제는 그 진노가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진노가 돌아선 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안위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품에 안아 주시고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찬양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다수는 징계를 받았고, 지금 이 노래는 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부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다수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그 가운데 신실한 소수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함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 구절은 출15장,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뒤 모세와 백성이 부른 그 노래에 나오고, 시118편에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새로운 출애굽의 노래입니다. 특히 2절 앞부분을 보면, “내가 신뢰하고 두려워함이 없으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대개 문제를 만났을 때입니다. 그런데 왜 두렵습니까. 하나님보다 문제가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깊이 생각할 때,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계속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 문제를 이겨내는 길은, 이 모든 문제보다 하나님이 훨씬 크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지금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두려울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인가.

3절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 구절에도 출애굽의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통당하던 백성에게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목마르고 메마른 삶을 생수로 채워 만족시키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목마른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소망은, 크신 일을 행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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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부터 찬양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확대됩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 모두 함께 찬양하며 온 세상에 그 이름을 선포하자는 것입니다. 4절 “그날에 …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절 끝에는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너무 크고 놀라워 우리 안에만 담아 둘 수 없기에, 만국 중에 선포하고 온 땅에 알리자고 합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찬양의 이유는 5절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음이니” 하나님이 극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는데, 그 ‘아름다운 일’은 절망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시고, 진노를 돌이켜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어 찬양하고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다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더니 너무 좋아서,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혼자 담아 둘 수 없어, 온 세상에 선포해 그들도 이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게 하자는 것입니다. 다만 순서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이 은혜를 경험하고, 먼저 하나님을 아름답게 예배하여 그 은혜로 충만해진 다음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내 안에 은혜와 기쁨이 있어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가 도리어 은혜를 받습니다. 전하면서 내 안의 은혜와 기쁨이 다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6절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우리가 소리 높여 선포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크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시며,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구원과 회복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질병으로 긴 터널을 지나며, 언제 끝날지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어 불안이 마음에 자리 잡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이 두려울 때, 내가 아는 하나님이 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신뢰합시다.

다른 하나는 먼저 예배하고, 그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삶이 먼저입니다. 그 예배를 통해 은혜로 충만해지고, 그 충만함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을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 그것이 복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충만한 은혜를 기쁨으로 전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11:1-16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즐거움(26.07.30)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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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사야는 앗수르의 심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끝내 돌아오지 않아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다 멸망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도 다 끝나 버린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 11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니, ‘이새의 줄기’는 다윗 왕조를 가리킵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크고 부강한 나라, 나무로 치면 거대한 나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끝에 와서 완전히 잘려, 이제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길 그때, 하나님은 그 그루터기에서 연한 싹 하나가 돋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싹을 통해 다윗 왕조보다 더 완전하고 위대한 나라, 진정한 통치를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시작하십니다. 이 싹은 앞서 이사야가 예고해 온 그분, 곧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삶을 살다 보면 “이제 끝이구나, 절망이다”라는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끝이 없고 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새롭게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싹, 곧 새로운 통치자는 무엇으로 나라를 이끄실까요. 2절 “그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통치합니다. 여기 여러 영이 나열되는데, 지혜와 총명과 모략, 그리고 거기에 ‘지식’이 더해집니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본문은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 바르게 섬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어떻게 됩니까. 2절 끝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안다면, 경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경외가 3절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데 어쩔 수 없어서, 매 맞을까 봐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니까 그 하나님이 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워서,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래 신앙생활한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예배하러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옵니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옵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나옵니까. 만약 예배가, 신앙이 부담으로 느껴진다면 문제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즐거움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만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때, 신앙은 자칫 무거운 짐이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 섬김이 기쁨과 감격이 되는데, 누군가에게는 갈수록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런 자리에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다시 알아가는 것, 그 회복을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3절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어떻게 판단합니까. 4절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특히 4절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이 사람의 입에 막대기가 있다는 것은, 그 입술에서 하나님의 바른 기준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기준을 바르게 짚어 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서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오늘 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세상의 기준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입니까.

●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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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부터는 이 메시아가 다스리시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이끌립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해도 해를 입지 않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은 본래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함께 삽니다.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이 함께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을 때의 본래 모습입니다.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세상이 약육강식의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은 이 깨어진 세상을 본래의 화평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세상은 정치를 잘하면, 경제가 발전하면 억울한 사람 없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치가 그런 세상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공약과 계획을 세워도, 모든 문제의 뿌리인 인간의 죄성을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9절이 답합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름다운 세상은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질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인정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당히 알아서는 안 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적당히 안는데 있습니다. 적당히 알고 적당히 삽니다. 그런데 적당히 알고 적당히 살면,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을 택하게 됩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적당함’때문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아는 지식은 지금 어느 깊이에 있습니까.

10절부터 이 회복이 한 나라를 넘어섭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 만민의 기치로 서고,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옵니다. ‘기치’는 깃발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깃발로 높이 세우셔서 온 열방이 그리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면 13절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유다는 남유다를 대표합니다. 본래 한 동족인 두 나라가 갈라진 뒤 서로 질투하고 잡아먹을 듯 다투었는데, 메시아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그 질투와 다툼이 끊어지고 하나 되어 화평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백성에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우리 안에 맺혀야 할 열매도 이것입니다. 질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괴롭히고 다투고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즐거움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기쁨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회복된 세상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충만해질 때 이루어집니다. 적당히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생각하면 감사와 감격이 넘치도록 그 지식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이사야 10:20-34절 /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26.07.29)

●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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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였던 앗수르가 교만하여 심판받는다고 했습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이제 남유다까지 삼키려 진격해 오는데, 하나님은 그 앗수르를 반드시 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거기에 소망이 있다”입니다.

20절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하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의지하리니” 본문에 ‘남은 자’가 반복됩니다. 심판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이제는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진실하게 의지하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특히 22절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을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백성 가운데 정작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남은 자’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숫자의 많음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고, 도리어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드는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많은 무리가 아니라,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24절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남유다를 향하여 ‘내 백성아’라고 부르십니다. 비록 죄악 가운데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깨닫게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앗수르가 아무리 강하게 공격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가 앗수르에게로 옮겨져 그들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옛날 출애굽과 사사기 시대의 사건을 통해 확증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을 치셨던 것처럼, 그리고 애굽에서 홍해를 가르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그 구원이, 지금 이 백성에게도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27절 “그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앗수르의 공격은 남유다에게 무거운 짐이자 목을 짓누르는 멍에였습니다. 왕과 백성이 그 앞에서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짐을 어깨에서 벗기시고 멍에를 목에서 부러뜨리십니다. 그 이유가 ‘기름진 까닭’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기에, 그 풍성함으로 멍에가 부러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름짐’이라는 말에 이사야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기름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앗수르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이 더 든든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도리어 목에 멍에를 진 삭막하고 메마른 삶이었습니다. 기름진 삶을 좇아 하나님을 버렸는데, 얻은 것은 빼빼 마른 삶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더 나은 삶,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을 뒷전에 두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붙드는 편이 더 안전하고 더 기름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기름지고 복된 삶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 참된 풍요입니다.

●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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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2절까지는 여러 지명이 이어집니다. 이 지명들은, 앗수르 군대가 북쪽에서부터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해 오는 경로입니다. 한 성읍 한 성읍 무너뜨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와 예루살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32절 “그날에 그가 놉에 서서 딸 시온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놉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앗수르가 거기까지 진격해 와,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공격하려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수도가 함락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이 장면을 이토록 생생하게 설명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니, 남유다 백성은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위기가 이르기 전에 돌이키라는 간절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향해 위협하며 손을 흔들던 그 앗수르는 어떻게 됩니까. 33-34절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예루살렘을 두렵게 하던 앗수르를 하나님이 혁혁한 위력으로 꺾으십니다. 울창한 삼림 같던 앗수르의 군대가 도끼에 찍히듯 쓰러지고, 그 높은 것이 낮아집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를 치셨습니다. 아무도 무너지리라 상상하지 못한 그 최강대국이, 하나님의 손에서는 한순간에 베이는 나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결국 남유다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남유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내가 예언한 대로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쳤고, 또 내가 예언한 대로 그 앗수르가 멸망한다. 그러니 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니, 남유다야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남유다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돌아오라, 거기에 소망이 있다!”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남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무리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많은 백성이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 때 하나님은 징계하시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드는 남은 자를 통해 뜻을 이루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께 영광 돌리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한 사람으로 서 있는지, 오늘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다른 하나는 혁혁한 위력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문턱까지 이른 최강대국조차 한순간에 꺾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혁혁한 위력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어깨의 짐을 벗기시며, 대신 싸우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