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31 | 매일성경
●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2절)
오늘 39장은 이사야 전반부의 마지막입니다. 이사야는 크게 두 부분, 1-39장까지와 40-66장까지로 나뉩니다. 오늘은 전반부의 마지막 장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36-38장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을 이기고, 죽을 병에서 생명을 15년 연장받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좋은 결말이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전반부의 마지막 39장은 정반대의 실패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왜 하필 이 실패의 이야기로 전반부가 닫히는지,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은 것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당시 최강대국은 여전히 앗수르였고, 바벨론은 아직 힘을 키워 가던 신흥 세력이었습니다. 그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의 쾌유를 축하한다며 글과 예물을 보내왔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오가는 예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선물은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함께 손잡고 강대국 앗수르에 맞서자는 정치적 제안이 담긴 것입니다. 이전의 히스기야였다면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반응이 문제입니다. 2절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병에서 나은 자기를 축하해 주니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보물 창고를 다 열어 보여주고, 심지어 무기고까지 전부 보여 주었습니다. 작은 나라 유다가 이 모든 것을 열어 보인 이유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약소국이지만 아직 너희와 손잡을 만한 쓸모가 있다”는 것을 과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유다는 히스기야가 무기고까지 열어 보인 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히스기야가 무너진 시점입니다. 그는 앗수르가 쳐들어와 그토록 조롱하고 위협했을 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위기에서 성전으로 나아가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을 때에도 벽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여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엄청난 위기 속에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무너진 때는, 누군가가 자기를 인정해 주고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였습니다. 평안할 때였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위기가 아니라 형통과 인정 앞에서 무너지는 존재입니다. 연약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아셨고, 이사야 선지자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십니다. 3절 이사야가 두 가지를 묻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어디서 왔는지만 대답합니다.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그리고 첫 번째 질문인 ‘무슨 말을 하였느냐’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나라가 은밀히 나눈 것은 “손잡고 앗수르에 맞서자”는 정치적 밀약이었고, 그 대가로 예물이 오간 것입니다. 이어 4절에서 이사야가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묻자, 히스기야는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답합니다.
●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6절)
이제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5-6절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히스기야가 자랑삼아 보여 준 그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벨론으로 옮겨진다’는 것은 전시하러 간다는 말이 아니라,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고 재물은 약탈당한다는 뜻입니다.
7절은 더 충격입니다.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히스기야에게서 날 자손은 왕이 될 왕족들입니다. 그 왕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환관이 된다는 것은, 다윗 왕조의 왕위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앗수르에서 구원받고 생명까지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그 은혜를 자랑하는 대신 자기 영광을 드러내다가 이런 심판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바벨론 사절 앞에서 자랑했어야 할 것은 자기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민족의 위기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내 생명을 연장하셨다”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당황하게 하는 구절은 8절입니다. 이런 심판을 들었다면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처럼 다시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며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으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자기의 잘못으로 미래 세대와 후손에게 이토록 심각한 재앙이 예고되었는데, 히스기야는 “그것은 내 생전의 일이 아니니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후손이 겪을 일이니 나는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한때는 그토록 경건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때 경건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다른 이의 아픔이나 미래 세대는 안중에 없이 “나만 평안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스기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사야 전반부가 이 실패의 이야기로 끝날까요? 39장 앞까지만 보면 히스기야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을 등졌던 아버지 아하스와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39장에 이르러 보니, 그 히스기야마저 무너집니다. 결국 인간은,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사야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40장부터는 인간 왕이 아니라 참된 통치자, 곧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히스기야의 실패가 전반부의 마지막에 놓인 것은, 가장 훌륭한 인간 왕조차 실패하기에 우리에게 참된 왕이 필요함을 드러내어, 40장의 메시아를 향해 길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은 흔들리고 변하지만 하나님은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으시며,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는, 무너지는 인간 왕과 달리 영원히 견고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잘될 때, 인정받을 때 더욱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무너진 자리는 위기가 아니라 형통과 자랑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때도 종종 힘들 때가 아니라, 잘되고 누군가 인정하고 칭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람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며, 형통할 때일수록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나를 넘어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보다 앞세웠고, 자기 생전의 평안만 생각하며 후손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사람과의 연결은 소중하지만, 사람이 하나님보다 앞선 의지의 대상이 되면 위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세우고, 나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미래 세대까지 생각하며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6.08.28 | 매일성경
●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2절)
어제 36장에서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벽에서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조롱했습니다. 그 말을 온 백성이 들었습니다. 왕은 이방 장군 앞에서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를 어찌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 절망적인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가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우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설 때가 있는데, 히스기야의 모습에서 길을 찾아봅시다.
1절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는 것은 애통과 슬픔의 표시이자 회개와 겸비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 가운데 히스기야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이 ‘여호와의 전’입니다. 이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는 표현이 14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두 번 모두 그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았고, 군사력이 강한 다른 나라에 도움을 구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누구를 찾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누구를 찾습니까?
어제 본문에서도 설명했듯, 36장의 위기는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가 겪은 7장의 위기와 대조를 이룹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그에게 직접 보내셨음에도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반대입니다. 그는 왕궁 맡은 자와 서기관과 제사장의 어른들에게 굵은 베 옷을 입혀 선지자 이사야에게 먼저 보냅니다. 선지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왕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 함께 기도하기를 구한 것입니다. 같은 위협 앞에서 아버지 아하스는 하나님을 외면했고, 아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시합니다. 3절,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새 생명이 태어나야 할 순간에 해산할 힘이 없어 산모와 아이가 함께 위기에 빠진 것, 그것이 지금 유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4절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2번이나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선지자의 직무를 담당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가장 마음 아파한 것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단지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가 아니었습니다. 대적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함부로 조롱하고 모욕했다는 사실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멸망시킨 이방 나라의 신들과 똑같이 취급했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은 그런 신들과 전혀 다른 살아 계신 분이시니, 그들의 모욕에 능력으로 역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신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자, 하나님은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6절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 조롱을 다 듣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7절 “보라 내가 그의 마음을 움직여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고국에서 그를 칼에 죽게 하리라” 기세등등한 산헤립이 소문 하나를 듣고 물러가며, 결국 자기 땅에서 칼에 맞아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강대국을 이룬 최고의 왕이지만 정작 자기 앞날 한 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16절)
이렇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면, 상황이 나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현실은 더 심각해집니다. 8절부터 보면, 산헤립은 물러가기는커녕 다시 사신을 보내 더 강하게 위협합니다. 10절 “너희는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네가 신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이번에는 말에 그치지 않고 편지까지 써서 왕을 직접 협박합니다. 기도하기 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일이 곧 풀리리라 기대하는데, 도리어 상황이 더 복잡하고 심각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시나,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응답하셨어도, 그 응답이 이루어지기까지 시련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절, 이 위협 앞에서 히스기야는 다시 그 편지를 들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펴 놓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가 어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했는가입니다. 16절입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이 한 절에 히스기야가 붙든 하나님이 세 부분으로 담겨 있습니다. 첫째, ‘그룹 사이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성전 언약궤 위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는데, 그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상황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그때에도,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며 함께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둘째,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앗수르는 열방의 신들을 다 멸했으니 하나님도 마찬가지라 했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임을 확신했습니다. 다른 신들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우상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홀로 살아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셋째,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라면 저 앗수르의 대적들조차 그분의 손안에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기도의 핵심이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임재하시고 유일하시며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신뢰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기도의 절정은 20절입니다. 그의 기도는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 홀로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구원을 구하되, 그 구원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조롱하던 저들의 눈앞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의 유일하신 살아 계신 분이심을 이 일을 통해 드러내 달라는 것입니다. 곧 히스기야는 자기 문제의 해결을 넘어,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높임과 영광을 받으시고 온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기를 구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문제를 만날 때 가장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수치와 절망의 위기에서 사람이나 강대국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위협이 거듭될 때마다 다시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펴 놓았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다른 데로 가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 뒤에 상황이 더 어려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룹 사이에 임재하시고,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분이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목적을 자기 문제의 해결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확신하고, 그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만이 높임 받으시기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8.27 | 매일성경
●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2절)
이사야를 읽다 보면 심판과 회복의 이야기가 반복되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36장부터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일어난 앗수르의 침략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사야가 여러 역사 가운데 이 사건을 택해 자세히 기록한 것은, 이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절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쳐서 취하니라.” 남유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앗수르가 마침내 쳐들어온 것입니다. ‘모든 견고한 성읍을 취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나머지 지역이 이미 앗수르의 손에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하나만 남은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굴복시키려 랍사게라는 장군을 보냅니다. 그가 라기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와 2절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길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이사야서에 이미 나왔던 장소입니다. 오래전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만났던 곳입니다(7:3). 이사야는 여기서 아하스에게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권면했습니다. 그러면서 7:9절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굳게 설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끝내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같은 장소에서 이번에는 앗수르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 같은 위협 앞에서 아버지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무너졌는데, 과연 아들 히스기야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것이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대부분은 랍사게의 말입니다. 그의 조롱의 중심에는 ‘믿음’과 ‘신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믿고 신뢰할 것인가? 4절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5절 “네가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무엇을 붙들고 버티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신뢰의 대상을 공격합니다.
먼저 애굽입니다. 6절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부러진 갈대를 지팡이 삼아 짚으면 도리어 손을 찌르듯, 애굽을 의지하면 해만 입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30-31장에서 하나님이 유다에게 하셨던 경고를, 아이러니하게도 적인 랍사게가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입니다. 7절에서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마저 조롱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여 버리고 예루살렘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했는데, 그 하나님을 어찌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랍사게의 무지가 드러납니다. 히스기야가 산당을 없앤 것은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예배받기를 명하셨는데, 유다 백성은 여기저기 산당을 두고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며 신앙을 병들게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헐어 예배를 바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의 눈으로 보는 랍사게에게는, 여러 곳에서 제사하던 것을 한 곳으로 줄인 히스기야가 신을 노엽게 한 어리석은 왕으로 보인 것입니다. 여기에 참 신앙과 우상 숭배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우상 숭배는 아무 데서나 정성만 바치면 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이 정하신 자리에서 정하신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랍사게의 조롱은 더 노골적으로 이어집니다. 8절에서 그는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고 비웃습니다. 싸울 사람조차 없는 유다의 처지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이 땅을 멸하러 올라온 것이 여호와의 뜻 없이 된 줄 아느냐, 여호와께서 나더러 치라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끌어다, 이 침공마저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합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서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21절)
이런 상황에서 유다의 신하들이 요청합니다. 11절, 아람 방언으로 말하고, 성벽 위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백성이 이 조롱을 다 들으면 사기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랍사게는 바로 그것을 노렸습니다. 그는 도리어 더 크게 유다 방언으로 외치며, 항복하지 않으면 성이 포위되어 백성이 제 배설물을 먹고 마시게 되리라 위협합니다. 이 심리전의 표적은 처음부터 왕이 아니라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고 합니다. 14절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15절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말을 따르지 말라”, 18절 “여호와께서 건지시리라 해도 속지 말라” 왕과 백성 사이를, 그리고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대신 16-17절에서는 항복하면 각자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평안히 살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행복한 일상을 살게 해준다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열방의 신들을 열거하며 “어느 신이 앗수르 손에서 자기 나라를 건졌느냐, 하물며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건지겠느냐”(18-20절)고, 하나님을 이방의 무력한 신들과 나란히 놓고 모독합니다.
이 정도면 유다는 무너져 항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21절이 뜻밖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히스기야가 백성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말라 명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잠잠함’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이 명령은 30:15절에서 이어진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으리라”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이 모든 것을 듣고 계시며 반드시 앗수르 문제를 해결하시리라 믿고,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조롱에 말로 맞서는 대신, 인간적인 방법을 찾는 대신에 하나님께 이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아하스는 위협 앞에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택했지만, 히스기야는 더 극심한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잠잠히 신뢰했습니다. 같은 문제를 만나도 어떤 이는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사야는 이 두 왕의 대조를 통해, 참된 신뢰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리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랍사게는 유다가 신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지 말라, 그가 너를 건지겠느냐”고 외쳤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믿어 봐야 소용없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라”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립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도 그런 의심과 회의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아무리 크고 그럴듯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흔들려는 조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면초가의 위기에서 말로 맞서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께 그 일을 맡겼습니다. 우리는 작은 문제 하나에도 불안과 두려움에 흔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며 신뢰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일하십니다.
2026.08.21 | 매일성경
●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18절)
어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에게 “화 있을진저”라 책망하시며, 애굽을 의지한 결과가 무너지는 담과 깨진 토기 같으리라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살 길을 일러 주셨습니다.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고, 잠잠히 신뢰해야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배은망덕한 자식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인데, 놀랍게도 반전이 일어납니다.
18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유다가 하나님을 저버렸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를 기다리십니다. 벌하려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려 기다리시고, 긍휼히 여기려 일어나십니다.
어제 하나님이 유다를 ‘패역한 자식’이라 부르셨습니다(1절).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제멋대로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아버지는 패역한 자식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며 일어나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8절 하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여기 ‘정의의 하나님’은 상황이나 문제에 따라 흔들리거나 변하는 분이 아니라,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유다가 아무리 하나님을 저버려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래서 18절은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로 맺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니, 우리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 ‘은혜’가 18절과 19절에 반복됩니다. 18절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라 했고, 19절 뒤에서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라 합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며,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이 다시는 통곡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회복은 어떤 모습입니까요? 20절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회복이라 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을 떠올리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앗수르의 위협과 포위 같은 고난이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없으면 진정한 돌이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 속에 은혜가 있습니다. 20절 중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보리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스승을 거두지 않으시고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스승은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래서 21절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스승이 함께하시며 “그 길이 아니다, 이 길이 바른 길이다” 하고 뒤에서 인도합니다.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해 헤매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친히 스승 되어 그 길을 일러 주십니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유다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가볍게 여기며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은 말씀으로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이 스승이 22절에서는 우상을 제거합니다. 은을 입힌 조각한 우상과 금을 올린 부어 만든 우상을, 백성이 이제 부정한 물건처럼 던지며 “나가라” 합니다. 유다가 그토록 우상을 섬긴 이유는 풍요를 위해서였습니다. 주변 나라가 다 우상을 섬기며 잘되는 듯 보이니, 우리도 그러면 잘되리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버리면 도리어 풍요를 잃을까요. 정반대입니다. 우상이 풍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26절)
그 풍요가 23-2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씨 뿌린 땅에 비를 주시니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며, 가축은 광활한 목장에서 먹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까지 풍요를 누립니다. 이 모습은 에덴동산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람과 짐승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풍요와 안식을 누렸습니다. 이처럼 에덴은 죽음이 없고 완전한 풍요와 행복을 누리던 곳인데, 에덴을 잃은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에덴의 풍요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은, 그 풍요의 뿌리인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이 회복은 단순히 물질이 넉넉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 잃어버린 창조의 질서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문제가 신약에서 해결되었습니다. 18절에서 기다리시고 일어나 일하시는 그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으로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풍요를 다 누리지 못할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 사함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회복, 곧 신령한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26절이 그 회복의 절정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 달빛이 햇빛 같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임합니다. 완전한 회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회복하시는 그 손으로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유다가 얼마나 앗수르를 두려워했으면 벌벌 떨며 애굽을 의지하려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앗수르를 친히, 그것도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의 그림을 통해 하나님은 유다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 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나만 의지하면 앗수르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7-28절이 그 심판을 하나님의 임재로 그립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먼 곳에서 오는데 그 진노가 불붙듯 하고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며, 입술에는 분노가, 혀는 맹렬한 불 같습니다. 불과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앗수르 가운데 임하셔서 순식간에 무너뜨리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심판받는 그 밤에, 유다는 29절에서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처럼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마음으로 즐거워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백성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시니 기쁨으로 바뀝니다. 30절은 하나님이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치신다고 합니다. 자기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향해 이토록 무섭게 싸우시는 것은,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승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의 절정이 33절입니다. “대저 도벳은 이미 세워졌고.” 도벳은 시체를 태우는 곳입니다. 전쟁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태우는 그곳이, 이미 앗수르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완전한 패배가 곧 유다의 구원과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18절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해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이 오면 하나님보다 먼저 다른 것을 의지해 달려가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머물러 기다릴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을 이루십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다리시고, 일어나 일하시며, 그 백성을 공격하는 앗수르를 친히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일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지, 내 기도를 들으시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그 때가 되면 대적을 물리치고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이 사실을 붙들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2026.08.20 | 매일성경
●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1절)
이사야 28-33장은 여섯 번 반복되는 ‘화 있을진저’의 경고입니다. 오늘 30장은 네 번째로, 하나님이 남유다를 향해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부르시며 시작합니다.
이사야서는 처음 1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소도 나귀도 자기 주인을 아는데, 이 백성은 자기를 기르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30장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서로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패역한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패역한 자식입니까? 1절 “그들이 계획을 세우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여 죄에 죄를 더하도다” 계획을 세우되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다른 나라와 언약을 맺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합니다. 2절 끝도 그렇습니다.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이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일을 결정하고 진행합니다.
그렇게 결정한 일은 2절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게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합니다. 당시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유다를 위협하자, 유다는 두려움에 떨며 남쪽의 애굽을 의지해 앗수르에 맞서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으면 하나님이 분명히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애굽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아예 묻지 않고 제 뜻대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곧 죄입니다. 어떤 일을 하며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 생각과 욕심대로 결정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강해지리라 여긴 그 애굽이 도리어 수치가 됩니다. 3-5절에 ‘수치’와 ‘수욕’이 반복됩니다. 바로의 세력이 수치가 되고, 애굽의 그늘이 수욕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5절보면 그 민족은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도와줄 것 같고 힘이 될 것 같지만, 그 강대국이 실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6-7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한 편의 시로 설명하십니다. “네겝 짐승들에 관한 경고라” 네겝은 유다 남쪽의 사막 지역입니다. 그 광야를 배경으로, 애굽과 맹약을 맺으려는 사신단이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보물을 낙타 안장에 싣고 애굽을 향해 내려가는 모습이 펼쳐집니다. 그 길은 암사자와 수사자,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뱀이 도사린 위험한 사막 길입니다. 그 뙤약볕과 맹수의 길을 뚫고, 선물을 잔뜩 실은 채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길은 과거 이스라엘이 거꾸로 걸어온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열 가지 재앙의 능력으로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났고, 이 광야 길을 지나 약속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는 자기들이 구원받고 자유를 얻었던 그 길을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애굽을 의지하고 그 속박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시고 지금까지 함께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버리고 옛 종살이의 땅을 다시 붙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이 역출애굽의 그림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은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라합은 신화 속 바다 괴물의 이름입니다. 괴물이니 겉으로는 무섭고 위력적일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 곧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만 있는 괴물이라 부르십니다. 이름값은 사나운 괴물이나 실상은 무력한 존재라는 조롱입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15절)
그러면 유다는 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애굽으로 달려갑니까. 28장부터 반복되는 남유다의 근본 죄가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들어도 그대로 살지 않습니다. 9절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10-11절에는 이들이 선견자에게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으면 마음이 찔리고 거북하니,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부드러운 말을 하며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합니다. 여기 ‘부드러운 말’은 듣기 좋고 매끄러운 말, 마음을 찌르지 않는 말입니다. 그리고 11절,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앞에 계신 것 자체가 부담스러우니, 아예 하나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8-30장에 반복되는 유다의 핵심 문제입니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말씀 들어서 뭐 하나, 그대로 산다고 삶이 달라지겠나”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이 백성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갈림길이 됩니다.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순종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말씀을 업신여긴 결과를 13-14절이 두 개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12절에서 백성이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의지했다고 하는데, 13절은 그 결과를 높은 담이 제 무게를 못 이겨 갑자기 불룩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에 비유합니다. 스스로 견디지 못해 무너지는 것입니다. 14절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사정없이 깨뜨려 아궁이의 불을 옮길 조각 하나, 물을 뜰 조각 하나 남지 않는 것에 비유합니다. 무너짐과 깨어짐,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자가 겪을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15절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말씀을 외면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진지하게 그들의 살 길을 일러 주십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세상을 의지하고 애굽으로 달려가던 데서 ‘돌이키라’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조용해도 마음이 조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조용히 있으려면,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오는데 어떻게 조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앗수르보다 훨씬 크고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도우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내 삶을 어떻게 책임지시는지를 신뢰할 때, 그 내면에서 힘이 솟아 요동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5절과 16절이 대조됩니다. 조용히 머물기를 거부한 유다가 택한 것은 16절,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잠잠히 하나님 앞에 머무는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하니, 결국 도망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16절에 ‘빠르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는데, 빠른 말을 타고 분주히 내달리지만 그 분주함은 쫓기며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돌이켜 조용히 머무는 자는 구원과 힘을 얻고, 돌이키지 않고 내달리는 자는 도망자의 삶을 산다는 대조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묻고 그 말씀을 듣는 자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제 뜻대로 애굽을 의지한 데서, 그리고 말씀 듣기를 싫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그 말씀 앞에 나를 세우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돌이켜 조용히,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를 요동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때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에서 돌이켜,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물고 잠잠히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구원과 힘을 얻는 길입니다.
2026.08.14 | 매일성경
●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3절)
24장부터 이어지는 이사야 묵시록은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와 성도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어제 25장이 사망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오늘 26장은 그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 유다 땅에서 부를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완성될 승리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아직 고통이 남은 이 땅의 현실과, 그 너머의 부활 소망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1절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여기 ‘견고한 성읍’이 나옵니다. 어제 25: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쌓은 견고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26:5절에서도 하나님은 “높은 데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신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쌓은 성은 아무리 높고 견고해도 다 무너지는데, 성도에게는 무너지지 않는 다른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친히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신” 성입니다. 눈에 보이는 요새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가 성벽이 되니, 누구도 흔들거나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쌓은 성과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성이 대조됩니다.
이 견고한 성 안에서 누리는 것이 3-4절의 평강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여기 ‘심지가 견고한 자’는 원문으로 그 마음(생각)이 하나님께 굳게 붙들려 기대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른 데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고정된 마음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평강, 평강’이라 거듭 이르시는 완전한 평강을 주십니다. 그 근거가 4절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여기 ‘영원한 반석’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평강의 유일한 기초가 이 변치 않는 반석입니다.
7절부터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의인의 길과, 은총을 받고도 돌이키지 않는 악인의 길이 대조됩니다. 7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의인의 길은 정직이고, 그 길을 하나님이 평탄케 하십니다. 의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8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영혼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가장 절박하고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때,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반드시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9절은 그 사모함이 밤에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고” 깊은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반면 악인은 10절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악인이 은총을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데도 의를 배우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고,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으며, 도리어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합니다. 곧 악인의 멸망은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셔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결과입니다. 10절 끝의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1절,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높이 들려도 그들은 보지 못한 채 멸망의 길을 갑니다.
반면 13절은 하나님 백성의 신실함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른 나라가 다스린다는 것은 그 나라의 우상을 강요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백성은 그 이방의 신들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불렀다는 것입니다. 14절은 그 지배하던 자들, 곧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못하리라 하는데, 이는 뒤에 나올 하나님 백성의 부활과 정면으로 대조됩니다. 압제자들은 죽어 일어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19절)
16절부터는 이 땅의 냉정한 현실이 펼쳐집니다. 묵시는 하늘의 승리와 땅의 현실을 번갈아 보여 주는데, 1-15절이 하나님이 주실 궁극의 승리라면, 16절부터는 아직 그 승리에 이르지 못한 성도의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16-17절, 환난 중에 백성이 하나님을 찾아, 마치 해산이 임박한 여인이 산고 중에 부르짖듯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으면 좋은 응답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18절이 뜻밖입니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그 극심한 산고 끝에 낳은 것이 아기가 아니라 바람이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부르짖고 애썼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헛된 수고로 끝난 것 같은 절망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겪는 현실이 종종 이렇습니다. 기도하고 몸부림쳐도 현실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완전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바람만 낳은 것 같던 그 헛됨의 자리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선언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가장 분명한 부활의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통 속에 죽어 간 성도들을,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라는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이슬이 마른 땅을 적셔 생명을 살리듯, 하나님의 생명의 이슬이 티끌에 누운 자들을 살려 낸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 선언은 어제 25장에서 이어집니다. 25:7-8절에서 하나님은 온 세상을 덮은 죽음의 수의를 벗기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26:19절에서는 그 사망을 멸하시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고 하십니다. 죽음을 없애실 뿐 아니라, 죽음에 삼켜진 자들을 도로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신약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사망은 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의 문제를 담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곧 죽음이 해결되었습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첫 열매로 이루어진 확실한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27:1절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리워야단은 고대에 혼돈과 악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 곧 사탄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용이 이 이미지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 악의 세력을 견고한 칼로 완전히 죽이시고, 성도에게 최종 승리를 주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심지를 하나님께 고정하여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굳게 붙들린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우리 삶에 평강이 없다면, 내 시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흩어져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반석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마음을 고정하는 것이 평강의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의 수고가 바람을 낳은 것처럼 헛되어 보일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 사망을 멸하실 뿐 아니라 죽음에 삼켜진 자를 도로 일으키시며, 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확증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삶의 모습은 같아도, 성도는 죽음이 가둘 수 없는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