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12-19절 / 어찌하여 부활이 없다 하느냐(26.06.25)

●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13절)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전했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회상하며, 부활이 수많은 증인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 설명합니다. 15장은 고린도전서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장이 마지막 인사임을 생각하면, 바울이 마지막에 부활을 다룬다는 것은 곧 부활 신앙이 성도에게 가장 핵심적이며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바울이 그토록 분명히 전한 부활인데,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 복음을 전했고, 그것을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굳게 붙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철학과 잘못된 신앙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 자체를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헬라철학, 특히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사고입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꿔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은 거룩하게 여기면서 세상에 나가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 그 한 모습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이원론 때문에 육체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죽으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영적으로만 오시고 영적으로만 부활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은 온전한 육체로 오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가정을 거듭하며, 부활을 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13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고린도 성도들의 기준대로 육체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조차 부활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자기 주장이 얼마나 큰 모순을 품고 있는지 보지 못한 채, 자기 기준으로 신앙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복음도 헛되고, 그 복음 위에 세워진 믿음도 헛됩니다. 신앙의 기초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우리 생각이나 세상의 기준으로 신앙을 재단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부활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모든 신앙의 기초가 헛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셋째, 15절 만일 부활이 없다면 바울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마저 공격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지 못하신 것이 되고, 결국 하나님을 무능한 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 전체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능력까지 부정하는 일입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19절)

17절에서 바울은 한 가지를 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여기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죄 사함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됩니다. 죄가 인간에게 가져온 가장 심각한 결과가 죽음인데, 그 죽음을 이기고 정복한 것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이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는 여전히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죄 사함은 믿지만 부활은 못 믿겠다”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 역시 십자가의 은혜는 깊이 새기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사람이 죽으면 정말 다시 살아날까”라고 의심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몸의 부활, 곧 우리 몸이 새로운 몸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봐야 안다, 혹은 그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식으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18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잠자는 자’는 예수를 믿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믿고 죽은 이들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전 생애를 헌신했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건 그 모든 헌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가장 헌신한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논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은 분명히 있고, 그래서 이 땅에서의 수고와 헌신은 결국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어집니다. 죽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삶을 제대로 살듯, 부활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이 땅의 삶을 제대로 살아갑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매 순간 십자가 앞에 나를 죽이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부활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부활을 머리로만 아는지, 삶으로 살아가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을 압니다. 그러나 핍박의 자리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위협 앞에 설 때, 부활 신앙이 없으면 믿음을 끝까지 고백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장담했지만 그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부활을 믿기에 죽음이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부활 신앙이 주는 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이 확실하다면 이 땅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이 고백했듯, 부활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을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주님이 주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부활의 삶의 열매를 맺어가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1-11절 /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26.06.24)

●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1절)

15장에서 바울은 새로운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부활입니다. 13장이 ‘사랑장’이라면 15장은 ‘부활장’입니다. 바울이 부활을 다루는 이유는,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영적인 부활만 생각하고 육체의 부활은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본격적인 가르침에 앞서, 복음의 기초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설명합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울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들은 복음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며 자기 생각과 세상의 기준대로 왜곡한 데 있었습니다. 복음의 변질입니다. 이처럼 교회 문제의 뿌리는 복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2절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은 곧 고린도 성도들이 지금 그 말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두려운 것은, 부활을 잘못 이해하면 그것이 구원의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복음을 오해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기초, 특히 복음의 중심 위에 바르게 서 있는가 하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가 변질된 이유는 세상의 가치관이 하루아침이 아니라 하나둘씩 서서히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과 다르지 않은 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에도 그대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가 복음 위에 제대로 서 있는지 늘 말씀을 통해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했습니다. 그 내용이 3-4절입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바울이 두 번 강조하는 말은 ‘성경대로’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두 절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는데, 그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확증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함께 가야 합니다. 십자가만 있고 부활이 없으면 반쪽이고, 부활만 있고 십자가가 없어도 반쪽입니다. 십자가로 죄가 해결되고, 그 결과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음이 부활로 확정되는 것, 이것이 온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3-4절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죽으셨고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해 보이는 이 사실을 바울이 굳이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육체로 와서 비참하게 죽을 수 있느냐며, 예수님이 영적으로 오시고 영적으로 죽으셨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못박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육체로 죽으셨고, 온전한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부활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셨고, 우리도 육체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지금의 병들고 연약한 몸 그대로가 아니라, 완전하고 새로운 몸, 곧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 “내게도 보이셨느니라”(8절)

5절부터 바울은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셔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셨음을 강조합니다.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시고 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습니다. 6절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일시에’입니다. 오백 명이 각자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증인들 대다수가 편지를 쓰는 지금도 살아 있다고 덧붙입니다. 곧 누구든 직접 물어 확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7절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가족을 전도하기가 가장 어렵듯, 동생 야고보도 형님이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고도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어, 후에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만났고, 바울은 승천 이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기에 형태는 조금 다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래서 사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5-8절까지 ‘보이셨다’는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부활의 증인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바울은 본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핍박자였던 자신을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 은혜이고, 그 은혜가 그를 헌신적인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 모든 것이 이해되었습니다. 부끄럽게만 여겼던 십자가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도 주님과 같은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미래를 바라보았기에 바울은 그토록 헌신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기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11절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수많은 증인이 함께 증거한 것이며, 고린도 성도들도 그 복음을 받아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 복음을 바르게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신앙의 기초인 복음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초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바른 복음인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향으로 변질된 복음이 아니라,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살아나신 그 복음 위에 날마다 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를 받은 바울이 누구보다 헌신했듯, 그 은혜를 경험한 우리도 감사함으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활의 분명한 소망을 품고 주님 다시 오실 때를 바라보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4:20-40절 / 품위 있고 질서 있게(26.06.23)

●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바울은 계속해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지만, 함께 모인 자리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면 공동체의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일 때는 방언보다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렇다면 은사를 교회 안에서 어떻게 질서 있게 사용할지를 아주 자세하게 가르칩니다.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바울은 ‘악’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도리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성도에게 상처를 준다면, 잘못된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지혜에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사28:11-12절).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먼저 자기 백성의 선지자를 보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듣지 않자, 마침내 앗수르에 포로로 보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언어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곧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부르심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임하는 메시지는 돌이킬 시간이 지나고 심판이 임박했다는 신호였습니다.

이 배경에서 22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심판의 표적과 같다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은 그럼에도 돌이키게 하는 부르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실제 상황을 통해 설명합니다. 23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처음 교회를 찾은 사람이 모두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 자리에 정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예언을 하면, 곧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 전해지면, 들어온 사람이 그 말씀을 통해 자기 마음의 숨은 것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전에는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말씀을 들으니 자기 문제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새벽에 말씀을 듣다가 한 번씩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절)

그래서 바울은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26절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세우려 하면 문제가 되고, 교회를 세우려 하면 바른 사용입니다.

방언을 하려거든 두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반드시 통역하는 사람을 두어야 합니다.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만 말하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방언을 사용하는 것은 막지 않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29절, 예언하는 자도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하라고 합니다. 여기 ‘분별’은 원어로 ‘디아크리노’인데 의미가 “신중하게 따져보다, 무게를 달아 가늠하다”입니다. 즉 말씀을 따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곁에 있는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말하던 자는 잠잠하고, 한 사람씩 차례로 하여 모든 사람이 배우고 권면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예언이라도 여럿이 한꺼번에 하면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30절에서 말하는 ‘계시’는 그 당시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때는 기록된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라, 하나님이 때로 직접적인 계시로 말씀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지금은 하나님이 완성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 완성 이전과 이후는 다르기에, 이 부분에서 혼란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34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배경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앞서 11장에서 여성이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이미 인정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잠잠하라’는 것은 여성이 교회에서 무조건 입을 다물라는 뜻은 아닙니다. 34절과 35절을 보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복종과 남편이라는 배경 안에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상황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교회에서 예언을 하는데, 아내가 그 자리에서 남편의 예언을 가로막고 공개적으로 평가하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내가 회중 앞에서 남편을 그렇게 한다면, 그 당시 사회에서는 남편에게 수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정의 질서 안에서 권면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아내가 남편을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논쟁하지 말고, 배울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묻고 남편의 권위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곧 무조건 침묵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면 성도들은 방언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예언을 해야 할지 망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히 정리합니다.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둘 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니 사용하되, 잘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0절이 은사에 대한 결론이자 신앙생활 전체의 결론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내 생각대로 가볍게 행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여, 이것이 성도와 교회 공동체에 유익이 될지를 헤아려 질서 있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의 중심은 이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에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익숙하게 하던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것이 교회의 유익이 되는지 걸림돌이 되는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누가 우리 공동체를 보더라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고 본이 되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1-19절 / 교회의 덕을 세우라(26.06.22)

●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절)

12-14장까지 바울은 은사를 다룹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필요를 따라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며, 그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은사를 말하는 12장과 14장 사이, ‘사랑’장인 13장이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회 은사 문제의 진짜 핵심이 드러납니다.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사랑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앞서 말한 대로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사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은사를 통해 사랑이 나타나고 있는가가 은사 자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사랑 없이 은사를 자랑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먼저 예언이 무엇인지 짚어야 합니다. 은사의 종류를 설명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예언은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설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나누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런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왜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방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곁에 있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반면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기에 사람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합니다. 그래서 4절이 핵심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 단어는 원어로 ‘오이코도메’인데, ‘집을 짓다’라는 뜻입니다. 건물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듯, 사람을 세워가고 공동체를 건축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언은 자기 자신을 세우지만, 예언은 교회라는 집을 함께 지어 올립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데 있다면, 공동체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예언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세움(오이코도메)’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거듭 등장합니다. 3절 “덕을 세우며”, 4절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절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12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17절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이 단어의 반복은 곧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를 세우지 않고, 자기만 세우는 방식으로 은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더구나 18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했습니다. 방언을 못해서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5절 뒷부분에서 조건을 답니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방언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도록 통역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유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무리 유창한 방언이라도 공동체 안의 성도들이 알아 들을 수 없다면 무익하다는 겁니다.

●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15절)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자신이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7-8절에서는 악기를 예로 듭니다. 피리나 거문고도 분명한 음을 내지 않으면 무슨 곡인지 알 수 없고,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나팔로 전쟁의 신호를 보냈는데, 그 소리가 분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9절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또한 11절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면 서로에게 외국인처럼 되고 만다고 합니다.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내용이 중요하기에 13절부터 예배의 실제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대표 기도를 하러 나온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회중은 당황할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여기 ‘마음’은 ‘나의 생각’, 이성적 사고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그 내용을 자기 머리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말로 기도하면 그 내용을 알기에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데, 방언은 그 이해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런 의미입니다. 기도도 찬송도 영으로 하되 마음으로, 곧 그 뜻을 이해하며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송도 가사의 의미를 묵상하며 부를 때 은혜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축복하고 감사하면, 곁에 있는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아멘’ 할 수 없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면 그 감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19절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개인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바울은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신비한 은사라며 자랑하여 시도때도없이 떠들어대는 것보다 공동체의 성도들을 생각하며 유익이 되도록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바울의 권면을 통해 고린도교회를 보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로 교회가 오히려 혼란과 상처 가운데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은사의 기초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섬김이 사랑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은사는 나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의 덕을 세우는가, 아니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를 물으며,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2:1-11절 /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26.06.19)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4절)

11장에서 예배의 질서를 다룬 바울은, 12장부터 14장까지 은사를 다룹니다. 그 유명한 사랑장인 13장이 바로 이 은사 이야기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은사를 길게 다룬다는 것은 곧 고린도 교회가 은사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의 중심에는 방언이 있었습니다.

1절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여기 ‘신령한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은사에 대해 바르게 알기를 원합니다. 먼저 성도들의 이전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2절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우상을 숭배했다고 하면 될 텐데, 굳이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이방 신전에서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 신비한 말과 행동을 쏟아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예수 믿기 전에는 그렇게 우상에 휘둘려 끌려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른 일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람의 특징은 신비한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율법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 내 생명과 시간과 소유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주로 인정하던 시대에, “내 주는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때론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면, 그것 자체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4-6절을 보면 바울이 같은 내용을 세 번에 걸쳐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4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절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은사가 원어로 ‘카리스마’입니다. 이 단어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에서 나왔습니다. 곧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은사를 ‘은사’, ‘직분’, ‘사역’으로 부르며, 그 주체를 각각 성령, 주(예수님),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곧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굳이 삼위 하나님을 다 언급할까요? 삼위 하나님은 서로 경쟁하지 않으십니다. 완전한 신뢰 가운데 하나를 이루십니다. 그런 삼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면, 그 은사는 마땅히 교회의 하나 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사 때문에 경쟁과 분쟁이 생긴다면 그것은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11절)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유익은 내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입니다. 이것이 은사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은사는 내 자랑이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자기 자랑과 영광을 구하느라 은사가 분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11절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받고 싶은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주권대로 각 사람에게 알맞게 나누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는 반드시 은사가 있습니다. 다만 자기 은사를 스스로 잘 모를 때가 있는데, 오히려 곁에 있는 이들이 정확히 알아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나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8-10절에서 바울은 은사의 종류를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입니다.

몇 가지는 오해를 풀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는 세상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다 혼란에 빠졌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은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겸손히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도 특별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확신을 뜻합니다. 보통 사람은 작은 문제에도 흔들리는데, 강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가장 많이 오해받습니다. 흔히 미래를 내다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예언자라고 하고, 이들이 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들을 말하며 바울이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7절 “성령을 나타내심”, 8절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9절 “같은 성령으로”,“한 성령으로”, 그리고 11절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입니다. 다양한 은사가 있어도 그것을 주시는 분은 한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은사를 두고 누가 낫고 못하다며 경쟁하고 다투는 것은,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본래 뜻을 놓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받으면 특별히 은혜받은 것이라 여겨 절제 없이 예배를 어지럽힌 것이 잘못된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공동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으니, 내 은사가 무엇인지 기도하며 찾고, 모르겠다면 주변에 물어 발견하여, 그것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 섬길 때, 다른 사람은 힘들어하는 일도 기쁨과 감사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알맞게 선물로 주셨으니, 그것을 두고 자랑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본래 하나 됨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1:17-34절 / 자기를 살피라(26.06.18)

●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22절)

11장 앞부분에서 예배의 질서를 다룬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성찬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며 그 십자가를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칭찬했습니다(2절). 그러나 오늘은 정반대입니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22절 끝에서도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거듭 말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심각했을까요? 17절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성도들의 모임이 유익이 아니라 해로움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일 때마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 차라리 모이지 않는 편이 나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모임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배도 소그룹도 함께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런 모임이 은혜와 기쁨, 격려와 위로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상처와 갈등이 된다면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우리 자신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속한 모임이 유익이 되고 있는가, 해로움이 되고 있는가. 나는 유익이 되는 모임을 이루고 있는가?”

18절에서 바울은 다시 분쟁을 언급합니다. 1장부터 다룬 분쟁이 성찬 자리에서도 드러난 것입니다. 20-21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이 내용은 당시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예배당 건물이 없어, 큰 집을 가진 부유한 성도의 집에 모였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시간이 여유로워 일찍 와서 주인과 친한 이들끼리 안쪽의 좋은 자리에 앉아, 다른 성도들이 오기도 전에 떡을 배불리 먹고 잔을 마음껏 마셨습니다. 심지어 취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취하도록 마신 것입니다.

반면 가난한 성도, 노예 신분의 성도는 늦게까지 일하다가 뒤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음식이 없어, 주님의 떡과 잔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이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가요? 당시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세상에서 함께할 수 없던 주인과 노예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한 식탁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의 벽이 복음으로 깨진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는 먼저 먹고 취하고, 없는 자는 소외되어 굶주린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이라고 책망합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성찬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때, 마음으로 차별하고 소외시킨다면 역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를 일입니다. 오히려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삶이 회복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방향입니다.

●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절)

바울은 성찬이 무엇인지 다시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찬을 시행하신 시점이 중요합니다. 23절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24-25절에서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고,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새 언약’이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통해, 죄로 깨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세로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했다면, 가로로는 성도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성도가 지체를 이루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성찬식을 하면서 빵 한 덩어리를 함께 떼어 먹었는데, 이는 “우리가 한 몸”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찬을 나누면서 차별하고 분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찬식이 죄를 짓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를 살피라”는 말을 “내가 죄지은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바울이 말하는 ‘자기 살핌’은 내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성도를 소외시키거나 차별하지 않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온전히 실현하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29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서 ‘주의 몸’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하나 된 몸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분쟁을 일으키며 참여하면,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30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으니라” 여기서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로 약해지고 병들고 죽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심판이 아니라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함을 일깨우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권면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잠깐을 기다리지 못해 늦게 온 성도를 소외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나의 권리와 자유를 조금 내려놓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계속되는 문제의 밑바탕에는 자유와 권리의 남용이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바울은 자유와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내려놓고 절제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 모임이 유익이 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임 공동체입니다. 그 모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도록 세워가는 것, 때로 힘들어도 소그룹에 참여해 함께 나누며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찬에 참여할 때 공동체의 하나 됨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지체들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지,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