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27-42절/나의 양식은(26.02.11)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28절)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목마름으로 시작된 대화가 남편 이야기로, 그리고 예배 이야기로, 결국 메시아, 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26절 “내가 그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이 말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신 겁니다. 이 사이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가까이서 지켜본 예수님은 이유없이 어떤 행동을 하시지 않으니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여인의 행동이 놀랍습니다.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물동이를 버려둡니다. 물을 길으러 나왔던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었다는 것은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물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시 목마르지 않는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모든 문제를 아시는 예수님, 그렇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주님을 만난 기쁨이 여인의 마음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향해 달려갑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사람들이 없는 뜨꺼운 한 낮에 물을 길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고 달려갑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두려운 존재가 아닌 참된 기쁨을 나누고 싶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29절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와서 보라”는 1장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초청이고(1:39),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했던 말입니다(1:46).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짧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많은 신앙의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얼마의 시간이었든지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는 겁니다. “와서 보라”고 초청하는 겁니다. 이 초청에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아마 여인의 달라진 모습에 놀라서였을 겁니다. 이전과 다른 여인의 기쁨과 확신의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달라진 여인의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나오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34절)

​여인이 동네에 들어간 사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권하자 예수님께서 의외의 답을 하십니다. 32절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은 누군가 예수님께 음식을 갖다 드렸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34절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정확한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요한복음은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들이 계속됩니다. 니고데모도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수가성 여인도 영적인 목마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양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영적인 진리를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실 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중요합니다. 영적 존재인 우리는 영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통해 영적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왜 양식이라고 하셨을까를 생각해보면 양식을 먹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양식이 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 목적과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 참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그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들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이를 위해 35-38절까지 길게 설명하시는데 내용이 쉽지 않습니다. 정리해서 설명하면 제자들은 이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인식했어도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5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고 하십니다. 시간이 많으니 서두를 필요 없다는 격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36절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보통은 일을 하고 삯을 받는데 이미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 복음 전파를 통해 영혼을 살리는 일이 중요성과 시급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5절 하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추수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뿌리고 거두는 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거둔다”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뿌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렇고 예수님 바로 앞에 등장했던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뿌린 이들이 전한 구약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이제는 거두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전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사마리아 땅에서 하셨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데 외면하고 배척해야 할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지역과 신분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시 여인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여인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기 원해서 이틀을 더 머무시길 요청합니다. 보통 유대인이라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머무시며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 결과 41절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처음에는 여인의 말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2절 하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와서 보라”는 여인의 초청을 따라 신앙이 시작되었지만, 친히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버리고 주님을 전해야 할 물동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 시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알고 온전히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4:15-26절/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26.02.10)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

​육신의 갈증을 느끼시는 예수님과, 영혼의 목마름을 가진 여인이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 중 예수님께서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자 여인은 그런 물을 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로 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물을 주시든지, 아니면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셔야 할텐데, 갑작스런 요청을 하십니다. 16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하지만 이 질문은 여인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직시해야 할 질문입니다. 그래서 던지십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낯선 남자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특히 처음 만난 유대인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사실이 드러납니다. 요한복음은 계속 예수님께서 사람을 잘 아신다고 하는데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16-18절까지 ‘남편’이라는 단어가 5번 반복됩니다. 여인이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한 인생의 ‘물’로 의지했던 것이 바로 남편입니다. 사람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생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처와 아픔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남편에 대한 질문은 여인이 지금까지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것을 의지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생수를 만나기 위해서 생수가 아닌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람, 물질, 명예와 지위 등을 의지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그것으로 인해 더 깊은 목마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 붙잡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

​여인이 숨기고 싶었던 남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꺼내셨다면 이어지는 대화는 왜 그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로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화의 방향이 갑자기 예배로 바뀝니다. 이제는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고 선지자처럼 느껴졌던 여인은 그동안 궁금해했던, 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어디에서 예배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이 각각 예배하는 장소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나온 것처럼 다윗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예배합니다. 이들은 구약성경 전체가 아닌 모세오경만을 인정했습니다. 그 가운데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산이 있습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입니다. 그 가운데 축복이 선포된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예배했습니다. 이 갈등이 심했습니다. 한번은 유대인들이 그리심산 성전을 파괴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을 때가 온다는 겁니다. 21절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님은 ‘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3절도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시면서 계속 ‘때’를 강조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때는 “십자가와 부활의 때”입니다. 그때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무엇으로 예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건물 성전은 신약의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이 참 성전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완성하십니다. 그렇다면 건물 성전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건물성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성전이시고 예수님을 모신 성도들이 성전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본문은 두 번이나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합니다. 여기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입니다. “영과 진리”는 곧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하신 일을 알며,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신분과 변화를 알고 감사함으로 예배하는 겁니다. 그런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예배하는 겁니다. 우리 예배의 태도가 바르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메시아를 생각합니다.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요한복음 흐름 속에서 점점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가 선명해집니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십니다. 여인은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밝히십니다. 26절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이처럼 여인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점점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이상한 유대인으로 알았습니다(9절). 그러다 12절 하에서는 “야곱보다 크신 분”으로, 19절에서는 ‘선지자’로, 그리고 25-26절은 메시야 그리스도로 압니다. 그리고 이 앎이 여인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을 알아가고 만난다는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대화 주제가 바뀌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수 이야기가 남편 이야기로, 그리고 예배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가장 먼저 무엇이 생수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사람, 물질, 자리와 명예라고 한다면 내려놓읍시다. 또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예수님 중심의 영과 진리로 예배합시다.

요한복음4:1-14절/하나님의 선물(26.02.09)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절)

​3장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최고의 사람인 니고데모를 만나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찾아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4장 예수님은 최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십니다. 이 여인은 문제가 있지만 예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여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인을 찾아오십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며 여인을 만나는 배경은 1절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시면서 세례를 베푸시고 제자를 삼으십니다. 그런데 2절은 세례를 예수님이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일보다는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을 전할 제자들을 만드시는 일에 집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 삼는 활동과 제자들이 세례 베푸는 일들을 바리새인들이 주목합니다. 자칫 충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예수님은 판단하시고 유대지역을 떠나 예수님 사역의 중심지인 갈릴리를 향해 가십니다. 그 과정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하는데 원어로 보면 “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나타내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마리아 통과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아신다고 강조했는데, 예수님께서 인생의 목마름으로 고통하는 한 여인을 아시고 만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사마리아로 향하고 계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부정한 지역이라고 생각해서 길이 좀 멀어도 우회해서 다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향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깜짝 놀랍니다. 9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의 관심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심지어 인생의 문제로 손가락질 당하던 사마리아 한 여인에게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당대 최고의 사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듯, 예수님께서 가만히 있어도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성을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듯 여인을 찾아오십니다. 저자 요한은 이런 순서의 기록을 통해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라는 지역에 도착하십니다. 그곳은 6절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도착하신 시간이 6절 하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고 하는데 우리 시간으로 하면 낮12시입니다. 이 시간은 중동지역의 뜨거운 햇빛 때문에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고 쉼의 시간을 갖습니다. 물을 길어도 오전이나 오후 선선한 시간에 나옵니다. 그런데 여인은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우물가를 찾은 겁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나왔습니다. 그 이유가 내일 본문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이 여인은 인생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예수님께서 첫마디를 던지십니다. 7절 “물을 좀 달라” 탁월한 선택입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공통점이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목마름입니다. 여인은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육신의 목마름은 물을 마시면 해결되지만 과연 영혼의 목마름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우물”, “물”, “생수”입니다. 다해서 14번 정도 나옵니다. 무엇을 보여주냐면 이 세상에는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주겠다는 것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것만 있으면 내가 만족하고 행복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 물질, 지위 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극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만족과 기쁨은 과연 어디에서 올까요?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생수’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생수’는 ‘영생’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존재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살아있으나 죽은 겁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만약 영생을 돈을 주고 사야한다면 얼마를 주어야 할까요?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 유한한 생명을 바쳐도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고, 지금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요 감사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장대에 놋뱀을 매달고 쳐다본 자들은 생명을 얻은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겁니다. 이것이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여인도 니고데모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13절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그렇습니다. 다시 목마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물을 찾습니다. 예수님은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영생의 샘물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찾아올 수 없는 목마른 한 여인을 찾아가셔서 만나주시고 생수를 주신 예수님, 과연 우리의 관심을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 낮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물은 많지만 생수가 없는 시대 생수되신 예수님을 전합시다.

요한복음3:1-15절/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26.02.06)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2절)

​예수님은 2장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정결 예식 중심의 죽은 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새로워져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전 중심 신앙 가운데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1절 보면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10절은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도 합니다. 바리새인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로 경건한 신앙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도자는 그냥 지도자가 아니라 로마가 인정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의미합니다. 70명으로 구성된 유대교 최고 의결 기구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인물입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밤에 찾아온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엎은 위험한 인물이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찾아온 것은 그의 마음에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숙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밤’은 그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니고네모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을 듣기도 전에 답을 하십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어제 말씀 2:24-25절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아신다고 반복했는데 니고데모의 문제를 정확하게 아시고 답을 주십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가?”였습니다. 이것을 15절은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절은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니고데모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지만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십니다. ‘거듭난다’는 헬라어로 ‘아노덴’인데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새로 태어남”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태어남”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두 번째입니다. 즉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것이 당시 종교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잘 알고 있는 구약의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전에는 물은 무엇을 의미하고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누었는데 매일성경은 ‘물과 성령’이 ‘물 곧 성령’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에스겔36:25-2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합니다. 에스겔 말씀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물로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새 영을 주어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즉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14절)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바람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람이 불면 느낄 수는 있지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에게도 느낌과 감동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여전히 믿지 못하는 니고네모에게 예수님은 11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증언’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증언은 알고 본 것입니다. 너무 확실합니다. 그런데 왜 믿지 못하는가? 예수님을 땅의 일만이 아닌 하늘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게 이 땅으로 오셨기에 하늘 일도 알고 보셨고 땅의 일도 아십니다. 그러나 땅의 일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늘 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시면서 거듭남의 핵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민수기 21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다가 험한 길로 인하여 불평을 합니다. 하나의 문제에서 시작된 불평이 시간이 흐르면서 봇물 터지듯 쏟아집니다. 음식도, 물도 모든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오래 참으셨던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십니다. 죽은 자들이 많아집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말씀하십니다. 민21: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장대에 불뱀 모양을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 산다고 합니다. 참 상식적이지 않는 방법입니다. 해독제를 맞든지 해야지… 그런데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 것이라 하셨고 민21:9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서 바라볼 때, 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말씀하는 겁니다.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기 위해 놋뱀을 장대에 달았듯,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십니다. 이 말씀이 전제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불뱀에 물려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의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기 은혜 감사하며 여전히 죄와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2:13-25절/유월절에 성전에서(26.02.0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15절)

​예수님은 갈리리 가나에서 첫 표적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의미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종교였습니다. 의미와 생명은 사라지고 습관과 형식만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가나 혼인잔치 기적을 행하신 진정한 의미가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즈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우리는 1장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1: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양이 유월절 어린양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일이 한번 기록되었지만, 요한복음에는 세 번 올라가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신 예수님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합니다. 14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성전 안”이라고 했는데 건물 안이 아니라 이방인의 뜰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성전 경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장사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이 이런 모습으로 변질되었는가? 성전에 올 때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드리는 제물의 기준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레22:20-22).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상인들과 결탁해서 상인들이 파는 제물만을 흠이 없는 제물로 인정을 해준 겁니다. 그리고 상인들이 주는 이익을 챙깁니다. 그러니 제물을 사는 사람들은 상인들이 가격을 높여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 년에 한 번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통되던 로마 화폐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상이 없는 두로 화폐로 환전해서 성전세를 냅니다 그래서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이익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가?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고 돈을 쏟고 상을 엎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16절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종교권력자들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도전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시지만 타락한 성전의 모습에 분노하십니다.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와 반대로 행동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눈치 보고 사람 중심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열심이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할 것은 구약 다윗이 이야기를 통해 설명합니다(시69:9절).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

​예수님의 행동에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18절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표적으로 입증하라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주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19절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십니다. 아마 듣는 모든 사람이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합니다. 20절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오래 전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지었던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증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46년 동안 진행 중이었고, 약 80년 만에 완공이 됩니다. 그런 성전을 3일 만에 일으킨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아마 함께 있던 제자들 역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21-22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깨달은 것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고,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성전을 헐라),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임을 깨달은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요 앞부분인 가나 혼인 잔치 기적을 행하신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성전이십니다. 구약시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므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완전한 제물이 되셔서 단 한 번의 십자가의 죽으심(제사)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성전이 되시고, 성전되신 예수님이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 또한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에게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24절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인기를 구하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2:4절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때, 목적 즉 십자가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만남과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한 신앙을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의 인기를 얻는 신앙이 아닌 오직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2:1-12절/물로 된 포도주(26.02.04)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1절)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십니다. 장소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라고 합니다. 혼인 잔치 집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참석합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 문제가 생깁니다. 3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결혼풍습은 7일간 진행이 되었고, 결혼식의 기쁨으로 유지하는데 포도주가 중요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신랑과 신부뿐만 아니라 가족의 불명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창세기와 연결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은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 됨을 깨뜨리고 이후 사람에게는 슬픔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3장부터는 그런 사람의 예를 하나씩 들어 설명합니다. 당시 최고의 석학인 니고데모, 4장은 당시 가장 낮은 지위의 여인인 수가성 우물가여인, 5장은 베데스다의 38년된 병자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져 슬픔의 장소가 된 곳을 기쁨으로 바꿔주십니다. 죄로 인해 절망에 빠진 모든 인생에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기쁨, 생명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표적이 혼인 잔치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3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 문제는 주최측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예수님의 어머니가 부탁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탁은 기적을 행하라는 요청이라기 보다는 방법을 찾아보라는 요구입니다. 어머니로서 자연스러운 부탁일 수 있지만, 마리아의 요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먹고사는 문제, 정치적인 억압 등을 해결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절처럼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중에 기적을 행하시지만 분명하게 자신이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내 때”를 위해 왔고, 그때는 인간의 일상적인 문제가 아닌 근본적인 문제,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그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을 선명하게 아시고 그때를 향해 나가십니다.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부르는데 헬라어로는 존칭으로 부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잉태하고 태어날 때 천사들이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이렇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데 방법이 6절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두세 통은 약 100리터의 양입니다. 이런 돌항아리가 여섯 개가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돌항아리의 용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정결 예식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돌항아리가 비어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시 이스라엘 종교가 내용과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겁니다. 그런 신앙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짐을 지우는 신앙일 뿐입니다. 그곳을 예수님은 물로 채우시고 포도주로 변화시키십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식만 남은 죽음의 종교를 생명과 기쁨의 종교로 바꾸실 것입니다.

하인들에게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하니 아귀까지 채웁니다. 그리고 8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라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물을 채우는 것까지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물을 떠서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는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는 것은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연회장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자칫 모욕과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인들은 순종해서 가져다줍니다. 그 결과 9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물로 된 포도주”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연회장이 놀랍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첫 표적의 목적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을 ‘영광의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부분인 1-12장까지는 이런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고, 13-21장까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영광스럽게 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집중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표적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알고 따르고 있지만 점점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합니다. 정결예식 돌항아리처럼 습관화 형식화되어 있지는 않는지 생각합니다. 물로 채워지고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듯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쁨과 생명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끊이지 않는 우리 삶의 문제들을 변화시키고 해결하시는 주님께 맡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