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30 | 매일성경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2절)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납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1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를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돌보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십 평생 자녀가 없었던 사라를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행하시니 임신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시기, 하나님의 때가 되니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1-2절의 강조점은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시기에 반드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부분에서 실패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기가 아닌 자신들이 원하는 때에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처럼 가정에 갈등과 아픔이 발생합니다.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때를 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입니다.
낳은 아들 이름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후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합니다. 4절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여기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입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민족과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라함도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도록 언약 백성의 징표로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할례를 통해서 언약에 신실한 삶을 스스로 결단하며, 이삭의 몸에도 징표를 새기고 있습니다.
5절은 이삭이 태어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를 기록합니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100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2절은 “노년의 아브라함”, 7절도 “아브라함의 노경에”가 반복됩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인간이 끝났다고 절망하고 포기할 때 하나님은 시작하시고 소망을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슬픔 가운데 있던 사라를 웃게하셨습니다. 또한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도 웃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쓴웃음이 변하여 함박웃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시30: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다 보면 절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시는 때입니다. 다시 웃게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12절)
이삭의 태어남은 기쁨이지만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뒤를 이을 것인가입니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태어남으로 변화가 생깁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이삭이 젖을 떼고 잔치를 베푸는 날에 일어납니다. 보통 젖을 떼는 나이는 세 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이스라엘의 나이는 17살 정도 되었습니다. 상당히 장성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소망이요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갈등이 발생하는데 9절 하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여기 “놀리는지라”의 본 의미는 “웃었다”입니다. 비웃은 겁니다. 아이가 비웃은 것을 가지고 가족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내쫓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좀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 비웃음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가는 것에 대한 비웃음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거대한 세상을 만들고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그러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사라는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11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사랑하는 아들, 지금까지 큰 기쁨이었던 아들은 쫓아낸다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12절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라의 말처럼 내 보라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맺은 언약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도적으로 하갈의 아들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거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도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14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순종하기 쉽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순종합니다.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의 모습 가운데 이런 내용이 많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머뭇거리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따릅니다.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주고 하갈과 아들을 내보냅니다. 이들은 머지않아 죽을 위기를 만납니다. 그런데 17절에는 두 번이나 하나님께서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들으셨다”인데 이름처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리고 하갈을 위로하시며 아들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밝히니 샘이 보이고 물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마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때에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인내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 통해 순종을 요구하실 때 즉각 순종합시다.
2026.01.29 | 매일성경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2절)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구체화되었습니다. 18: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지 25년여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를 앞두고 있으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 가정이 지금 그래야하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수는 이미 12장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왔는데 기근을 만나자 애굽으로 내려가며 두려움에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합니다. 애굽 왕이 사라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위기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큰 재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1장은 드디어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브라함의 실수는 하나님의 약속이 시작된 직후에,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사실을 강조합니다. 15장 횃불 언약을 통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책임지시고 언약을 이루십니다. 사람은 위기를 만들지만 하나님은 위기를 해결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해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수합니다. 실패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붙잡으시고 이루어가십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갑니다. 지금 사라의 나이가 90인데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데려갔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어찌 되었든 위기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개입하십니다.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3절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아무것도 몰랐던 아비멜렉은 자신이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행한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비멜렉의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7절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비멜렉 집의 여인들을 치료하셔서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는 롯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9:2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로 롯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점점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땅에 살던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셔서 온 세상을 향한 스스로 꿈꿀 수 없는 비전을 주시고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며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부르신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10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책망했듯이 아브라함을 책망합니다. 이 일로 자칫 아비멜렉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까지 위기를 겪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묻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절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8절 하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신뢰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다면 어디에 있든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사람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아비멜렉의 책망에 아브라함의 대답이 계속되는데 13절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고 합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이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두 번 이상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12장에서 아브라함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케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방패와 상급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실수를 통해서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전과 다른 말과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문제의식 없이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들을 점검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제 신앙을 시작하신 분들이 세상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왔음에도 여전히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오늘 본문처럼 한 가정과 인생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12장에서도 실수를 통해 재물을 얻은 것처럼 아비멜렉도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또한 16절 “은 천 개”를 줍니다. 많은 액수입니다. 아비멜렉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물질로 보상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비멜렉을 위해 아브라함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 출산케 하십니다.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새로운 환경이나 두려운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고, 이전과 다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6.01.28 | 매일성경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26절)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십니다. 25절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고 합니다. “온 들”, “모든 백성”, “땅에 난 것을 다”라는 표현을 통해 죄악의 도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멸하십니다. 노아 홍수가 죄로 가득했던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죄로 가득한 도성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롯의 가정만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이미 17절에서 천사는 경고했습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뒤를 좀 돌아보았다고해서 이렇게 된다는 것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이유는 소돔 성에 대한 미련이요 집착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을 채우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녀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인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부와 명예와 자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것과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면 실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생명의 삶이요 복된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롯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 사이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어나 27절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 기도했던 자리에 서서 소돔과 고모라 쪽을 바라보니 거대한 연기가 솟아오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조카 롯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는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하나님 없는 죄악의 세상을 향하는 삶이 아닌, 더디지만 때론 힘도 들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삶을 결단했을 겁니다.
29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롯과 관련해서 여호와께서 자비를 더하셨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각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생각하시도록 그리고 일하시도록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우리 기도가 우리와 자녀들,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살립니다.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32절)
롯 가정의 비극은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롯은 소알 성읍에 거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산으로 도망해서 굴에 거주합니다. 그런데 큰딸과 작은딸이 하나의 계획을 세웁니다. 이 땅에 배필 될 남자들이 없으니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후손을 이어가자는 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을 딸들이 자연스럽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반대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하냐면 소돔의 가치관에 자녀들이 물들어 있습니다. 성에 들어온 나그네와 동성애를 하는 것이 일상인 도시에서 이런 딸들의 생각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성경적 가치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변하는 세상의 흐름에 따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기준으로 세상과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 딸들의 문제점은 31절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해서 남자가 없지만 온 세상 남자들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눈에 보기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질문이 잘못되니 답이 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대로만, 우리의 한계 안에서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래서 위험합니다.
사실 롯이 소돔 땅을 선택한 이유가 눈으로 보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물이 넉넉하고 푸른 초원이 있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것이지요.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생각이 전부입니다. 믿음의 눈을 뜨는 것, 영적인 지평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고 있습니다. 롯의 딸들처럼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32절부터는 “술을 마시게 하고”가 네 차례 반복됩니다(32,33,34,35). 노아는 스스로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결과 자식인 함을 저주하게 됩니다. 반면 롯은 자녀들이 술에 취하게 합니다. 죄와 술취함이 연결됩니다. 뿐만 아니라 33절과 35절은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롯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가장인 아버지가 깨어서 자녀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본을 보여야 하는데 영적으로 무감각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와의 동침 결과 두 딸이 임신합니다. 큰딸은 아들을 낳고 ‘모압’이라고 하는데 의미가 “아버지로부터 유래한 자”입니다. 둘째 딸도 아들을 낳고 ‘벤암미’라고 합니다. 의미가 “나의 친족의 아들”입니다. 이들이 ‘암몬’족속이 됩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들이 이렇게 생겨납니다.
세상을 향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 꿈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세상 가치관에 흔들리지 말고 말씀의 기준을 선명하게 붙잡읍시다. 이를 위해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적용하는 삶이 됩시다.
2026.01.27 | 매일성경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절)
소돔 성에서 롯이 영접한 두 명의 나그네를 사람들이 상관하겠다며 찾아와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롯의 권면도 듣지 않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합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두 천사가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하여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돔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의 도성인지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천사들이 롯에게 “성에 있는 사위나 자녀, 그리고 성 중에 롯에에 속한 사람들은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합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롯에게 속해있다면, 그리고 순종해서 함께 이 성을 떠난다면 구원을 베풀어줍니다. 이에 롯이 나가서 딸과 결혼을 앞둔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14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저녁때에 천사들이 소돔 성에 도착했고 심판은 해가 뜨면서 시작됩니다. 롯이 이 소식을 전한 시간은 늦은 밤이나 새벽녘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까지 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은 장인이 다급하게 이런 요청을 한다면 귀를 기울일 법도 한데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롯이 소돔 성에서 높은 자리에는 앉아 있지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살펴보았는데 사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위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늘 죄악 가운데서 살아왔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처럼 죄악의 일상화가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설명하시면서 마24: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당한다고 해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롯의 사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말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은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오직 이 땅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 날을 준비하며 깨어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들은 다시 한번 소돔 성의 멸망 이유를 설명합니다. 13절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앞에서도 계속 반복된 내용입니다. 소돔의 멸망은 죄악의 결과로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 때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상실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21절)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롯을 재촉합니다. 빨리 이 성에서 나아야 합니다. 그런데 롯은 지체합니다. 그러자 16절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지체하는 롯을 잡아 끌어 성 밖에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롯은 지체했을까요? 어쩌면 롯 역시 사위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더 큰 이유는 소돔 성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자리와 부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받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미련이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멸망 당하면 아무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사라져버릴 것들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며, 무엇을 쌓으며 살아가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천사들은 롯에게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면서 17절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합니다. 죄악의 도시에 대해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러해야 합니다. 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지체하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체하며 머뭇거리던 롯이 다급하게 말을 합니다. 그것도 길게 말합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에 대한 대답입니다. 산까지 갈 수 없다는 겁니다. 대신 근처 작은 성읍으로 도망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천사 입장에서 보면 자비를 베풀어서 롯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지체하지를 않나, 이제는 새로운 요구사항을 제시합니다. 그럼에도 21절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렇다면 원래 이 작은 성읍은 멸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롯 때문에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성의 이름이 ‘소알’입니다. 의미가 ‘하찮은’입니다.
왜 롯은 산이 아닌 성읍으로 도망하려 했을까요? 롯의 말처럼 산으로 가다가 죽을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까운 성읍이 사실은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19:30절을 보면 결국은 다시 산으로 도망합니다. 그렇다면 롯은 여전히 성읍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소돔이 멸망한다면 작은 성읍에서라도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인의 후예들이 계속 머무는 곳이 성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성은 하나님의 간섭없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스스로 보호하며 힘을 키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성읍의 결과가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롯은 여전히 그곳에 미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 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롯의 요청에 22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롯을 위하여 지체하십니다.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에서 지체하지 말고 떠납시다. 머물지 말고 돌아보지 맙시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입니다. 깨어 준비하며 사라져버릴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을 쌓아가는 믿음의 삶이 됩시다.
2026.01.26 | 매일성경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1절)
두 천사가 저녁 때에 소돔에 도착합니다. 18장에서 아브라함을 만난 나그네는 셋이었습니다. 한 분은 하나님이고 둘은 천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였고 천사 둘이 소돔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1절 “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롯이 성문에 앉아 있습니다. 구약시대 성문은 재판과 행정이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롯이 이곳에 앉아 있었다면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9절에서도 소돔 사람들이 롯을 공격하면서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롯은 죄악의 도시인 소돔 중심에 앉아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떠난 롯은 소돔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장막을 옮겨 소돔 중심으로, 그리고 이제는 한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한때 전쟁의 위기를 겪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롯의 삶을 보면 시편 1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시1: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죄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점점 깊어집니다. 악인들의 꾀에서 죄인들의 길로,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이런 삶을 결코 복된 삶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나가는 삶입니다. 안타깝게도 롯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심각한 문제를 만납니다.
나그네를 본 롯은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당시 문화는 이처럼 나그네를 환대하는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이 거절합니다. 그러자 다시 롯이 간청을 했고 천사들은 롯의 집에 들어갑니다. 롯은 무교병을 준비해서 대접합니다. 롯이 대접한 음식이 아브라함이 대접한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스아의 가루(30-40리터)로 떡을 만들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요리해서 대접했습니다(18:6-7절). 아마 롯은 시간상 저녁이었기 때문에 무교병으로 대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에 일어납니다. 나그네들이 잠자리에 들려는 시간에 소돔 성 사람들이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4절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라고 표현합니다. 젊고 나이 들고를 막론하고, 멀리 살고 가까이 살고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무엇을 위해 모였는가? 나그네를 환대해야 할 때는 외면했던 사람들이 죄를 짓기 위해, 그것도 흉악한 범죄를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5절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 “상관하리라”의 원어 의미는 “우리가 그들을 알 수 있으리라”입니다. 이 단어는 성적인 결합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계획하는 일은 동성과의 성관계입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에서는 일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돔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지경입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즐기는 죄의 일상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7절)
소돔 사람들의 요구에 롯이 나가 대화를 시도합니다. 7절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롯이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8절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당시 문화는 나그네가 일단 집에 들어오면 주인이 생명을 다해서 지켜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지키려는 롯의 노력이 귀합니다. 그런데 그의 제안은 충격적입니다. 자신의 두 딸을 대신 이 포악한 사람들에게 내어 놓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핵심은 롯의 제안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롯 역시 소돔의 가치관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더 심각한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롯의 제안이 소돔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롯은 자신이 이 땅에 들어와 성문에 앉는 위치에 오른 것을 자부심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영향력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롯의 제안이 오히려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나그네뿐 아니라 롯과 모든 가족들을 해치려합니다. 아브라함을 떠난 롯, 하나님을 떠난 롯의 삶이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가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롯이 대조됩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죄의 길로, 세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