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5 | 매일성경
●“여호와의 말씀이 …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1절)
우리가 지금까지 묵상했던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박해 아래 믿음 때문에 고통 당하던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한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부터 묵상하는 스가랴는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리라 기대했는데 기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낙심하고 절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내용입니다.
1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페르시아 다리오 왕 제이년은 BC 520년 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온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스가랴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가 학개입니다. 학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건축에 나서도록 강하게 질타했던 선지자입니다. 학1:8절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개가 활동을 시작한 시점이 학1:1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라고 합니다. 스가랴는 같은 해 8월이고, 학개는 6월입니다. 학개의 독려로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는데 이때가 학1:15절을 보면 “그 때는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이었더라”고 합니다. 성전건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스가랴서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까지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할 때는 큰 기대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다윗이 누렸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우뚝 세워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성이었던 예루살렘은 황폐하였고 이미 다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짓는 일을 방해합니다.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을 뒤로하고 자기 살기 위한 일에 집중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점점 희미해져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것인가 회의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스가랴가 등장해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스가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3절)
스가랴가 선포한 첫 메시지는 위로와 격려가 아닌 “진노”에 관한 것입니다. 2절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래서 4절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받지 말아야 할까요? 4절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거 이스라엘 멸망 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악한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 세상과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의 길을 걷습니다. 탐욕을 위해 우상숭배하고 착취하는 길을 걷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셨습니다. 돌아오라고 외치셨습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멸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지금 스가랴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다시 기로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버리고 내 힘으로, 세상처럼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 조상들의 역사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실패와 멸망의 역사를 되풀이하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 3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만군의 여호와”가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3,4,6). 요한계시록에서 강조한 것처럼 보좌 위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능력과 권세의 하나님이십니다. 악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 불안과 두려움이 임합니다. 반드시 이루실 약속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오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힘들고 절망적인 현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돌아오십니다. 영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빛이신 하나님으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어둠이 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5-6절에서 말씀의 영원함을 설명하십니다. 과거 말씀을 들었던 조상들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6절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말씀하신 대로 임하고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불순종에 대해서 경고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져 멸망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순종과 그 결과를, 그리고 불순종과 그 결과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서 복된 결과 누리길 원하십니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배자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향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신실하게 일하십니다. 현실이 우리 기대처럼 되지 않을 때 낙심하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기억하고 기대와 소망으로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 확신하면서 매일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고 순종하는 복된 삶이 됩시다.
2025.08.04 | 매일성경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7절)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6-7절은 계시록의 서론인 1장과 비슷한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처럼 서론과 결론에 반복되는 내용이 계시록의 강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6절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라고 하는데 1:1절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입니다. 용과 짐승의 패배와 어린양의 승리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약속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내가 속히 오리라”로 이어집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에 세 번 반복됩니다(7,12,20). 이것을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이유는 당시 성도들의 기도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 주님 오셔서 완전한 승리를 주십니까?”라고 기도했는데 주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로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당시도 “속히”오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 주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는 언제든지 주님이 오실 수 있는 때입니다. 이것을 말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세지말, 즉 주님 오심이 더욱 가까워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근신함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7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서론인 1:3절에 나왔던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3절은 읽고, 듣고, 지키라고 했다면 22:7절은 “지킴”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진정한 복은 핍박이 없고 문제없는 삶이 아닌 고난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지키는 삶이라고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
8-15절은 계시록의 핵심을 정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만 경배하라”입니다(9절). 요한은 말씀을 전해주는 천사에게 경배하려 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만류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19:10절에도 나왔습니다. 당시 성도들에게 이 내용이 중요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대한 경배 위험이 있었습니다. 천사숭배 사상도 있었다고 하고, 황제숭배도 강요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오직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 한분 뿐이십니다. 지금 시대도 경배를 받으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돈이, 사람이, 과학 기술이 그렇습니다. 이런 시대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예배합시다.
두 번째는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십니다. 시작과 마침이라는 같은 내용을 세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불안하고 어두운 현실이지만 이것 역시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14절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면 여기는 옷을 빠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옷을 빤다는 것은 매일 자신을 말씀으로 돌아보며 죄를 고백하고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큰 성 바벨론 속에서 세상 정신을 따라 살지 않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16절에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합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라고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계시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이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것을 알겠는데, “다윗의 뿌리”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 다윗의 근원이 되십니다. 이 주님께서 교회를 위하십니다.
또한 “광명한 새벽별”입니다. 당시 어둠이 짙습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반드시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춰주시고 밝은 새벽이 오게 하십니다.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니 신부인 교회로 나오는 자들만이 목마른 영혼에 생명수를 공급받습니다.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며 경고의 말씀도 주십니다. 예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재앙을 더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계시록의 말씀에 내가 본 천국과 같은 신비한 이야기를 덧붙여서 말씀의 의미를 변질시켜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말씀을 이용해서도 안됩니다. 또한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서도 안됩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순종하기 힘든 내용은 외면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말씀을 우리 삶에 중심에 두고, 잘 읽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순종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20절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은 “속히 오신다”고 다시 한번 말씀하시며 위로하십니다. 성도들은 이 약속을 확신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화답합니다. “마라나타”입니다. 이 말이 당시 성도들의 인사였다고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오심을 확신하며 믿음과 인내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 오시지 않을 것처럼, 아니면 지금 말고 나중에 오셨으면하는 삶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매일 “마라나타”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시며, 예수님은 “광명한 새벽별”이 되십니다. 모든 것 주관하시며 반드시 찬란한 새벽을 열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삶이 됩시다.
2025.08.01 | 매일성경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2절)
요한의 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하는 이유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곳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대리 통치자로 다스리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혹이 넘어가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타락합니다. 그런 세상은 계시록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큰 성 바벨론이 중심되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전했습니다. 그런 악의 세력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1절 하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합니다. 바다는 짐승이 올라오는 악의 장소였습니다. 모든 것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5절 말씀처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요한은 바로 이어서 2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을 바로 이어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 성도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표현하냐면? 앞에서도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큰 성 바벨론이 통치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는 믿음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결과를 두고 봐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승리한 싸움을 싸운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고전3: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즉 성도는 큰 성 바벨론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대적이 사라지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2절 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신부로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거룩함”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요한은 이제 보좌에서 나는 음성을 듣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축복과 영광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3절은 “함께”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하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 같이 함께 하십니다. 3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합니다. “내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장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들로 만드셨다는 겁니다. 왕이신 하나님처럼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죄로 인해 아들됨과 특권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아들이기에 아버지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7절)
그때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합니다.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그리고 사망과 애통,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것들이 원래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죄의 열매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죄의 근원을 제거하셨기에 이제 사망이 왕노릇하지 못합니다. 애통과 아픔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셨던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5-6절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니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6절도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보좌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 되셔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절)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셨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를 위해 7절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첫째 사망은 우리 모두가 죽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자들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게 되는가? 목록이 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인가?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로마의 박해를 아래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순교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크면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황제를 숭배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포기하고 로마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면 결과는 둘째 사망이지요.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담대하고 당당하게 믿음을 지킨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들인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입니다. 즉 순교하지 않고 이 땅에서 몇 년 혹은 몇 십년 더 살겠다고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당당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 시대 성도인 우리가 어디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갑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완전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면서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2025.07.31 | 매일성경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2절)
19장 후반부는 백마 타신 예수님께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유황불 못에 던지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부리던 악의 우두머리인 용은 어떻게 될까요? 본문이 용과 그 추종자들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에 한 천사가 등장합니다.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와서 용을 결박합니다. 그런데 이 용의 정체가 2절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공격해서 믿음에서 떨어지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이 용이 결박되는데 그 기간이 천년이라고 합니다. 이제 용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3절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잠깐 놓이면 또 용의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 그 결과가 7-10절에 나옵니다. 잠깐 놓인 용이 이전에 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땅의 사방 백성들을 모아 대적합니다.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고 합니다. 성도들을 공격하려 합니다. 그런데 9절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들을 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10절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합니다. 이미 두 짐승이 들어가 있는 유황불 못에 최종적으로 용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모든 게임이 끝이 납니다. 사탄의 완전한 패배입니다.
1-3절에서 강조하는 내용은, 그렇게 천하를 호령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무섭게 공격했던 용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한 천사가 쇠사슬로 결박하니 천 년 동안 결박을 당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천 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요한계시록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보통 네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전천년설입니다. 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후천년설은 반대로 천년 후에 재림하십니다. 셋째, 무천년설은 계시록에 많은 상징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천년이라는 숫자도 하나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마지막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비성경적인 해석으로 역사를 7시대로 나누어 성경의 내용들을 조립해서 마지막 때 일어날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계시록의 잘못된 해석이 대부분 여기서 나왔고 시한분 종말론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설명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요한계시록은 당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20장 말씀도 천년왕국이 언제 올지 논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시록의 강조점처넘 “교회와 성도의 승리”에 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교회가 그런 승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6절)
그래서 용이 결박된 천년의 기간은 성도들에게는 왕노릇하는 기간입니다. 4절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번 보좌가 나옵니다. 4절의 “보좌”와 11절의 “흰 보좌”입니다. 완전히 반대입니다. 4절의 보좌는 승리한 성도들이 왕 노릇하는 곳이라면, 11절의 흰 보좌는 용과 짐승을 추종하던 자들이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는 장소입니다.
4절에서 천년 동안 왕노릇하는 자들은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단은 이 말씀으로 영사불사를 주장합니다.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과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만나 죽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과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을 구분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아 순교를 당했고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순교해서 하늘에 있든지, 아니면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셔서 사탄을 결박하셨습니다. 결박된 사탄은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미 성도는 승리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존재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성도는 이긴 싸움을 싸우는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과 짐승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아간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11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흰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 앞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수로 되어 있고 하나는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책들”은 12절 하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입니다. 이들은 기록된 행위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모든 행위가 기록되어 있기에 책들입니다.
하지만 다른 책은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는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검은 우리를 주님의 보혈의 흰 세마포 옷으로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광이며 특권입니다. 지금이 사탄이 결박된 천년의 기간이고 성도들이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기간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확신하고 승리의 삶을 살아갑시다.
2025.07.30 | 매일성경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절)
18장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특징은 크고 거대한 성이 한 시간에 망해 버립니다. 또한 결코 다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바벨론의 멸망은 교회와 성도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19장 앞부분은 할렐루야 찬양이 울려 퍼졌고 또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승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씀합니다. 바로 백마를 탄 자를 통해서입니다. 11절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흰색이 승리를 상징하는데 여기 백마 탄 자는 바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백마 탄 왕자처럼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6장에서도 인 재앙이 시작될 때 흰 말을 탄 자가 나왔는데, 이 분도 예수님일까? 6장은 흰 말만 나온 것이 아니라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나와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세상을 심판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6장의 흰 말 탄 자는 예수님은 아닙니다.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등장하시는 장면은 오늘 본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11절 하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주님은 타협하지 않으시고 말씀의 기준을 따라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12절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14절에서도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고 했는데, 불꽃 같은 눈으로 온 세상을 감찰하십니다. 본문은 심판과 관련되기에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피시기에 주님의 심판은 정확합니다. 많은 관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16절에도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십니다. 당시 로마 황제가 온 세상의 왕으로, 또 주인으로 경배를 받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왕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유일한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12절에 적혀 있는 이름은 예수님만 아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이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3절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예수님은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십니다. 15절을 보면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고 했는데 짐승과 추종자들을 심판하시면서 피가 옷에 뭍은 것입니다. 이런 묘사는 주님께서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14절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합니다. 백마를 탄 예수님을 따르는 하늘 군대가 있습니다. 이들은 피뭍은 옷이 아닌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주님을 따릅니다. “깨끗한 세마포 옷”은 8절에서 어린양의 신부가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바른 행실로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성도들이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승리의 전쟁에 함께 합니다. 싸움은 주님이 하시고 성도들은 그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영광과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3절 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지 만물이 창조될 때 말씀으로 함께 하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주님이시며, 말씀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15절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라고 하는데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은 말씀의 검입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은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라고 합니다. 말씀이 예리한 기준이 되어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17절)
이렇게 예수님께서 승리하시면 바벨론과 추종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17-21절입니다. 한 천사가 모든 새들을 향해 외치는데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고 합니다. 마치 전쟁이 끝난 후 승리자들이 떠나고 난 자리 죽은 자들의 시체를 새들과 짐승들이 먹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19장에는 두 개의 잔치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9절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와 17절의 “하나님의 큰 잔치”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따른 성도들은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외면하고 짐승을 따르며 풍요와 쾌락을 추구하던 자들은 새들에게 먹히는 심판의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은 두 잔치 중 하나에 반드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로마, 즉 세상의 신부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어린양의 신부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또한 무너질 바벨론 세상을 주도했던 짐승과 또 다른 짐승인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의 군대를 모아 백마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하는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과의 싸움은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패배하여 산 채로 유황불 못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시 설명하는 내용이 20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고 합니다. 이런 거짓 선지자의 심판은, 그 당시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며 세상으로 나가려는 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 결과가 이렇다는 겁니다.
최후 승리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와 교회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수고와 인내의 열매입니다. 십자가 뒤에 얻게 되는 영광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린양의 신부로서 주님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