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3 | 매일성경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2절)
2-3장은 편지를 받는 일곱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지도를 보면 1:11절에 나오는 일곱 교회 순서가 에베소교회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편지를 전달받는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말씀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편지하라”는 명령이 나오고, 두 번째는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1:12-20절에 나왔던 내용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에 대한 칭찬입니다. 네 번째는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리고 이어 회개에 대한 촉구가 나오고 회개하지 않을 때의 경고가 이어집니다. 다섯 번째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지막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 순입니다.
먼저 에베소교회입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풍요의 여신인 아데미를 숭배했으며, 황제 숭배 사상도 번성했던 지역입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마술과 마법에도 관심이 많은 지역입니다. 에베소 유적으로 유명한 것이 셀수스도서관입니다. 두란노서원으로도 알려져있는데요, 그렇다면 에베소 사람들은 부와 명예 그리고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런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1절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등장하십니다. 1:13,16절에 나타난 인자같은 이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붙잡고 계시며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만 읽어도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박해 아래 풍전등화와 같은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붙잡고 계십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습니다. 교회 사이를 거니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누리는 주님의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롬8: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합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붙잡아 주시고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2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3절 끝에도 “아노라”고 하십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다 아십니다. 특히 수고와 헌신, 인내를 아십니다. 에베소 교회가 잘한 일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자칭 사도라고 하면서 거짓 복음을 들고 교회로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던 자들입니다. 당시 이런 유혹에 흔들리던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냈습니다.
6절에도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반대로 2:15절을 보면 버가모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14절을 통해 보면 우상숭배와 행음을 같이 하게 해서 성도들을 유혹하는 당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이런 유혹을 분별해서 물리쳤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에베소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분별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이단들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때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우리로 분별력있는 진리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특히 강조하는 것이 2절 “인내”, 3절 “참고”, “견디고”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내했습니다.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하지만 책망할 것도 있습니다. 4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가 잃어버린 사랑이 하나님 사랑인지 아니면 성도들을 향한 사람인지가 궁금합니다. 본문의 칭찬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뜨겁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고 드러내고 용납하지 않다보니, 이들의 시각이 누군가를 대할 때에도 자칫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지적하게 됩니다. 그러다 사랑이 점점 식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교회는 냉랭해지고 생명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사람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에베소교회는 사랑의 위기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5절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돌아봐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사랑이 식었는지 확인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잃어버린 성도들이 많습니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때문일 수도 혹은 교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회개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기에 이런 경고를 하십니다. 대신 생각하고 회개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정리해보면, 먼저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더불어 사람을 향한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2025.07.02 | 매일성경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11절)
요한은 계시록을 쓰게 된 동기를 설명합니다.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라고 합니다. 신앙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성도들과 같은 형제요, 같은 고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전하므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누군가 조언을 하면 “당신은 이런 고난을 당해봤어?”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한은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고난 당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하는데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9절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합니다. “나라”를 중심으로 “환난”과 “참음”이 나열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 정의와 공의가 중심인 예수님의 나라를 이루려면 반드시 환난이 있습니다. 세상이 가만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참고 인내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환난을 만나고 참고 있다면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런 고난이나 문제가 없다면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렇게 환난 가운데 있는 요한, 또한 많은 성도들이 박해로 인해서 생과 사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요한의 마음에 질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알고 계시는지, 역사하실 것인지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응답이 임합니다. 10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하는데, 주일에 예배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때 성령에 감동되어 음성을 듣게 됩니다.
10절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입니다. 큰 나팔 소리가 울릴 때는 전쟁에서 왕이 등장할 때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큰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왕으로 전쟁에 등장하시는 겁니다. 세상 왕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미 승리하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반드시 성도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그 내용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십니다. 계시록에는 숫자가 많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7’이 자주 등장합니다. 완전수입니다. 일곱교회에 보낸다는 것은 모든 교회가 읽고 듣고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요한은 뒤에서 들리는 큰 음성이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켰는데, “일곱 금 촛대”를 보게 됩니다. 계시록에는 이처럼 상징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20절 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일곱 교회라고 하면 되지 왜 혼란스럽게 촛대를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앞으로 계시록에 많은 환상과 상징들이 등장할 것인데 그렇게 보여주는 것이 더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를 보여준다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데, 교회를 촛대로 보여주면 선명합니다. 성막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창문이 없다는 겁니다.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캄캄합니다. 유일하게 빛을 비추는 것이 바로 가지가 일곱으로 뻗어 있는 금촛대입니다. 교회가 촛대라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어둔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당시 교회는 핍박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어둔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자 같은 이”이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누구도 건들 수 없습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16절)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13절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흰 머리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불꽃 같은 눈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불꽃 같은 눈으로 돌아보십니다. 하지만 교회를 조롱하고 박해하는 자들은 불꽃 같은 눈으로 기억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16절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일곱 별”은 20절 하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능력의 오른 손으로 교회의 사자들을 붙잡고 계십니다. 좌우에 날선 검 역시 말씀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심판의 검이 될 것입니다. 말씀이 기준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어떤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이 예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성도들의 얼굴 역시 해가 힘있게 비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만난 후 요한은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됩니다. 주님의 영광 앞에 죄인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오른손을 얹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17-18절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처음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아시고 주관하십니다.
특히 “살아 있는 자”이십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또한 이것이 성도들의 정체성입니다. 죽지만 살아납니다. 세세토록 살아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박해 앞에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순교의 길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반대로 목숨을 위해 신앙을 저버린다면 그것이 사망의 길입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주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이 영광의 주님을 알고, 이 주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심을 알고, 성도들이 믿음을 지켰을 때 주어는 결과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압시다. 승리의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에 해가 힘있게 비치게 하십니다.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2025.07.01 | 매일성경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3절)
요한계시록 묵상이 시작됩니다. 요한계시록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어렵다”와 “두렵다”입니다. 혹은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성경이라고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당시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다른 어떤 성경보다 성도들에게 위로와 확신과 기쁨을 주는 성경입니다.
계시록을 묵상하면서 계속 기억해야 할 것은 계시록이 ‘편지’로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편지는 받는 사람의 형편을 잘 알고 그 사람의 상황에 합당하게 보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편지를 읽는 사람이 그 내용을 다 이해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상징이나 환상들이 등장하지만, 그 당시 성도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오히려 말로 전달되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이해하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문화의 차이로 인해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절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입니다. 제일 중요한 말씀입니다. 계시록 이해의 방향지시등과 같습니다. 계시록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심판이나 재앙 그리고 사탄이나 종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계시’(아포칼립시스)는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시록을 통해 예수님이 더 선명하고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이 계시를 주시는 이유는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입니다.
계시록을 읽는 성도들의 상황은 로마 황제의 극심한 핍박 아래 있습니다. 순교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박해가 계속될지 알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믿음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살기 위해 예수님과 신앙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들의 의미와 결과를 알려 주시기 위해 이 편지를 쓰게 합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8절에 나오는 “알파와 오메가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입니다. 그러니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서 성도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그 당시처럼 박해가 있는 시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들을 흔들고 무너뜨리려는 유혹들이 넘쳐납니다. 이때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도 말씀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8절)
요한은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은 고난과 박해가 사라지는데서, 문제가 해결되어야 온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요한은 은혜와 평강은 그런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강조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4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부르짖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신다고 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장차오셔서 악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승리를 반드시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십니다. 슥4:6절을 보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지만 성령께서 이루십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또한 성자 예수님은 5절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여기 “증인”은 순교자를 의미하는데, 순교의 길을 걷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충성된 순교자셨음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셔서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계시록은 신과 같이 높임을 받는 로마 황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성도는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함께 하시는 존재요, 성령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존재이며,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존재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이 부분에서 요한은 감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하신 일을 열거합니다. 6절 끝과 7절 끝에 나오는 ‘아멘’은 편지에는 일반적이지 않는 형식이라고 합니다. 요한이 감격해서 형식을 무시하고 ‘아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요한을 감동하게 했을까요? 5-6절을 보면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납니다. 노예였던 그들을 해방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신분을 부여하시는데 출19:6절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노예에서 해방된 보잘것없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당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볼품없습니다. 힘도 없고 가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을 구원하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게 됩니다. 특히 7절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라고 하는데, 진짜 예수님을 찌른 사람들이 아닌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하나님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성도들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주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애곡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8절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2025.06.30 | 매일성경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20절)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하나님을 송축했습니다. 10절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기서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왜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15절은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원래 조상들은 이방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그림자 같이 희망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18절 “우리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주의 백성의 심중에 영원히 두어 생각하게 하시고”라고 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함께 해주셨습니다. 인도해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 부강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조상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 중요하며, 성전을 통해 영광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송축한 다윗은 백성들에게도 권면합니다. 20절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랬더니 회중이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립니다. 그 숫자가 21절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천 마리요 숫양이 천 마리요 어린 양이 천 마리요 또 그 전제라” 모두 3,000마리의 번제를 드립니다. 놀라운 숫자입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도 놀라운 일인데 여기는 세 배나 되는 3,000마리의 번제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크다는 겁니다. 즉 감사의 크기가 제물의 숫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드리고도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 모든 일의 기초입니다. 예배할 때도, 봉사할 때도 그렇습니다. 특히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기대하고 바랐지만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구원을 우리는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합당한 삶을 살아갑시다.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28절)
22절에서 특이한 내용은 “무리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다시 왕으로 삼아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 돌려 주권자가 되게 하고”입니다. 솔로몬을 다시 왕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8절에 “그가 …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하는데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아마 다윗과 솔로몬이 일정 기간 공동통치를 한듯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이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어지는 사독에 대한 내용입니다. 왕을 기름부어 세운 이야기 뒤에 제사장 사독을 기름부어 세운 일을 같은 선상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역대기 저자의 제사장과 레위인 중심의 관점을 보게 됩니다.
23-25절까지는 솔로몬이 누린 영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조하는 것이 23절 “형통하니”, “온 이스라엘이 순종”, 24절 “왕에게 복종”, 25절 “여호와께서 솔로몬을 심히 크게 하시고, 왕의 위엄을 그에게 주사, 모든 왕보다 뛰어나게 하셨더라”고 합니다. 사실 열왕기상을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왕의 자리를 탐내기도 하였습니다. 안정을 위해 반대자들을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은 이런 내용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형통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강조합니다.
저자가 이렇게 솔로몬의 형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역대기의 시각으로 보면,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왕과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들이 왕의 명령에 순종해야 큰 역사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내용은 다윗에 관해서입니다. 40년을 통치했는데 28절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부와 존귀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와 존귀를 목표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을 향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부와 존귀를 주십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한 것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무엇을 회복해야 할 일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중요하게 붙잡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2025.06.27 | 매일성경
●“일 년 동안 달마다 들어가며 나왔으니”(1절)
23-26장까지 레위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8-29장은 성전 건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 27장이 들어 있는데 내용이 군대 조직에 관한 내용입니다.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성전 건축은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신앙만을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나라의 안정과 풍요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대의 조직과 왕의 곳간에 대한 이야기가 27장에 나옵니다.
우리 신앙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매일매일 교회에서 기도만하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로 일에만 집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하는 신앙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가정과 일터라는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균형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군대 조직은 1절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가문의 우두머리와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을 섬기는 관원들이 그들의 숫자대로 반이 나누이니 각 반열이 이만 사천 명씩이라 일 년 동안 달마다 들어가며 나왔으니”라고 합니다. 한 조직이 지휘관을 중심으로 24,000명씩 구성되어 있고 이런 조직이 12조직입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직무를 감당합니다.
이런 군대 운영은 평상시에 이루어진 것이고 전시가 되면 모든 군인들이 동원되었을 것입니다. 2-15절까지는 각 조직(반)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를 기록합니다. 눈에 띄는 인물이 둘인데, 하나는 5-6절에 나오는 브나야입니다. 그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면서 6절 “이 브나야는 삼십 명 중에 용사요 삼십 명 위에 있으며”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의 아들이면서 다윗의 30용사 중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7절에 나오는 ‘아사헬’입니다. 아사헬은 이미 죽은 인물입니다. 삼하2장을 보면 아사헬은 아브넬을 뒤쫓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때가 다윗왕 초기입니다. 그런 아사헬이 여기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12조직이 한 달씩 돌아가면서 나라를 지키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24장을 보면 레위인 찬양대도 24반차로 조직되어 돌아가면서 직무를 감당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공동체는 서로 임무를 나누어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 시대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조직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다윗의 숙부 요나단은 지혜가 있어서 모사가 되며”(32절)
16-22절은 각 지파의 지도자 이름이 나옵니다. 르우벤을 시작으로 단까지 이어지는데, 우리가 아는 12지파와 차이가 있습니다. 17절에는 아론 자손이 한 지파처럼 등장합니다. 아론도 레위 지파에 속하는데, 둘을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기 저자는 계속 레위인과 제사장을 강조합니다. 또한 므낫세지파를 요단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서 둘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절 “길르앗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입니다. 대신에 아셀지파와 갓지파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당시 이 지파들이 미약한 상태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3-24절은 21장에 있었던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합니다. 다윗이 해서는 안되는 인구조사를 시행해서 하나님의 진노로 70,000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23절은 “이스라엘 사람의 이십 세 이하의 수효는 다윗이 조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사람을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음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20세 이상 군대에 나갈 사람들의 숫자는 계수했지만, 20세 이하는 계수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을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숫자가 기록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이곳에서 다윗의 잘못을 기록하면서도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5-31절은 왕의 곳간을 맡은 자들입니다. 상당히 길게 다양하게 열거되는 것을 보면 당시가 번성의 시대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 토대 위에 성전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내용은 다윗 곁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새 정부가 들어서고 중요한 인사가 단행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주변에 누가 세워지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윗 왕 곁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2절 “다윗의 숙부 요나단은 지혜가 있어서 모사가 되며” 지혜로운 모사입니다. 33절 아히도벨도 모사입니다. 또한 왕자들을 돌보고 교육시키는 수종자도 있고, 33절 하 후새는 왕의 벗으로 나옵니다. 군대 지휘관들도 있습니다. 다윗 혼자가 아닌 함께 이스라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내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수고가 모아져서 공동체가 아름답고 든든하게 세워집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좋은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누군가의 좋은 동역자가 되고, 또한 사람들을 세워 사명을 위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