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1:1-11절/종의 기도를 들으소서(25.11.20)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4절)

​에스라 묵상 후 학개서를 마치고 느헤미야서를 묵상합니다. 원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권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이렇게 진행됩니다. 에스라서 전반부는 1차 귀환과 성전 재건을, 후반부는 2차 귀환과 공동체 신앙 재건을, 그리고 느헤미야서는 3차 귀환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즉 다시 세우는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느헤미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시다”입니다. 1절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라고 하면서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를 알려줍니다. 이때는 BC444년으로 에스라 2차 귀환 후 14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입니다. 수산궁은 페르시아 왕들이 계절마다 돌아가며 머무는 별장으로 겨울 별장입니다. 느헤미야가 왕궁에 있는 이유는 11절 하 “왕의 술 관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많았기에 왕의 음식과 음료를 담당하는 자들은 신임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왕의 가장 가까이에서 국정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리입니다.

유대인으로 포로 생활하던 느헤미야가 그런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성전이 무너진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은 약14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할아버지가 포로로 끌려와서 아버지를 낳고, 느헤미야가 태어났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느헤미야는 이방 땅에서 태어나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예루살렘의 형편과 그곳 백성들의 삶이었습니다. 마침 형제 하나니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왔기에 그곳 형편을 물어보니 3절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고 합니다. 지금 상황은 1차 귀환과 2차 귀환이 이루어졌고 이미 성전도 완공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성벽과 성문들이 허물어지고 불에 타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주변 기득권 세력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능욕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예루살렘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는 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도의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기도”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현재 비록 이방 땅이지만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고국의 소식이 안타깝지만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몇 번 기도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붙잡고 기도하며,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됩니다. 어떤 문제를 들었을 때 판단하고 정죄하기가 쉽습니다. 냉정한 분석에 근거해서 해결책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됩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11절)

​4-11절까지가 느헤미야 기도 내용입니다. 여기에 느헤미야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어떤 언약 관계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회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5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라고 합니다. 학개서에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하늘의 하나님”이 반복됩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느헤미야는 비록 대제국 페르시아 왕의 관원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어 느헤미야는 에스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자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조건 문제만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 안에서 발견하고 기도합니다.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간구하게 됩니다.

이어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회복을 간구합니다. 9절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던 느헤미야의 기도가 11절 끝에서는 특이한 간구를 합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여기 “이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입니다. 왜 갑자기 아닥사스다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느헤미야는 긴 시간 기도했습니다. 1:1절 기슬르월에 시작해서 2:1절 니산월까지 약 4개월간 기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으로 시작된 기도가 계속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고국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눈물로 기도하던 느헤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꿈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왕의 술관원이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는데 왕이 싫어하면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가 왕비임에도 왕 앞에 함부로 나가지 못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느헤미야의 사명은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거절하거나 핑계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고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바로 왕에게 은혜를 입게하셔서 허락을 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울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의 아픔과 문제, 공동체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가운데 내가 해야 바른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학개2:10-23절/그러나 오늘부터는(25.11.1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14절)

​학개서는 선지자에게 말씀이 임한 날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인 임한 날은 다리오 왕 제이년 6월1일입니다(1:1절). 중단된 성전 건축을 시작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였습니다. 선지자의 권면을 통해 6월 24일에 성전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1:15절). 그리고 2:1절에서는 7월21일인 초막절 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작고 초라한 성전을 보면서 실망한 백성들을 에게 “힘을 내라,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이 임한 날이 9월24일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공사가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때가 어떤 날인지를 18절은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날 백성들을 독려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거룩한 고기를 옷자락에 쌌다면 그 거룩한 고기가 닿는 곳이 거룩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제사장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맞는 대답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반대로 시체를 만져 부정하여진 사람이 물건을 만지면 부정하여지겠는가입니다.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부정한 것이 접촉하면 당연히 부정해집니다.

이 대답 끝에 하나님은 14절 말씀을 하십니다. “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핵심은 부정함입니다.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드리는 예물과 행위가 부정하다는 겁니다. 성전의 기능이 죄를 정결케하는 것인데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성전의 중요성과 우선성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결과가 16-17절입니다. 열심히 농사하여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였지만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손으로 수고한 곡식들에 재앙과 우박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5-9절에서도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우선되지 않을 때 백성들의 삶에는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오늘”이라는 단어의 반복으로 강조합니다(15,18,19). 오늘을 기점으로 이전과 앞으로는 비교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이 어떤 날이기에 분기점이 되는 것일까요? 18절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입니다. 성전의 기초를 놓는 날입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3장에서 성전 기초를 놓았다고 했습니다(스3:10절). 하지만 오랜 시간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 이년 6월24일에 공사가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난 9월24일, 바로 오늘에 그동안 진행된 공사를 공식적으로 인준하는 기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날이 기점이 됩니다. 19절 하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복의 중심에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과 바른 관계, 죄의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오늘 바로 복된 날이며, 복된 삶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 성전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은혜를 기억하게 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부정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어주시므로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풍성히 받은 자들입니다(엡1:3절).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19절)

​9월 24일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대상은 총독인 스룹바벨입니다. 21절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6-7절에서도 하나님은 온 세상과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흔드셔서 모든 나라의 보배가 성전에 가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하늘과 땅을 흔드시는 이유는 스룹바벨을 우뚝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뜻을 이루시기 위해 흔들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흔드시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와 사람일지라도. 반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아무리 연약하여도 굳건하게 우뚝 서게 됩니다.

스룹바벨을 어떻게 세우시는가? 23절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스룹바벨 세우시고 ‘인장’ 즉 왕의 도장으로 삼으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성전 건축의 책임을 지고 외부적, 내부적 어려움 속에서 감당하는 지도자 스룹바벨에게 힘과 소망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예수님께서 성취하실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 해결하시고,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이 분기점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오늘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학개2:1-9절/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25.11.18)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3절)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이때가 1절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리오 왕 2년(BC520년) 6월1일에 학개 선지자 통해 오랫 동안 멈추었던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1:1절). 이 말씀을 듣고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가 1:15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입니다. 그리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난 7월 21일에 하나님은 다시 말씀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성전 건축을 시작하고 백성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7월 21일은 초막절 절기를 지키는 때입니다. 7월은 유대인 달력으로 한해를 시작하는 달이고 15-21일에는 초막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막절 절기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초막절은 에스라 3장에서도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7월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여 지켰던 절기입니다. 말 그대로 ‘초막’, 즉 풀로 만든 텐트에서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요, 출애굽하고 광야 40년을 초막에서 생활하였습니다. 황량하고 위험이 가득한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다는 것을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도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과 머무시며 동행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 백성으로 여기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과거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건축하면서 발생 된 문제가 무엇이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3절에서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전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을 찾으십니다. 아마 포로에서 귀환한 소수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과거 솔로몬 성전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신 것은 지금 짓고 있는 스룹바벨 성전이 이전 성전과 비교하면 작고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물음이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입니다.

이전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의 눈에 지금 성전은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에스라3:12절에서도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 첫 성전을 보았던 나이 많은 족장들이 대성통곡을 했는데 그 이유가 감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전의 규모를 비교하면서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말이 백성들 사이에 퍼져가면서 많은 백성들의 마음에 기대가 사라지고 실망감이 자리 잡았습니다.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외부 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면 이제는 내부의 절망으로 멈출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전의 규모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이전에 하나님은 광야에서 성막이라는 이동식 텐트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이 작은 성막에 기쁨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규모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백성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전 성전과 현재 성전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비교의식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 건물의 크기로, 사람들의 많고 적음으로, 뿐만 아니라 비록 연약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도의 영광을 기억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면서 실망하고 패배 의식에 빠지지 않습니까? 비교의식을 버리고 영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4절)

​이런 문제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4절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한마디로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1:14절에서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수아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4절 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젠 본문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반복되었는데,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4,6,7,8,9). 능력의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니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 앞에 멈추지 말고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내어 전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백성들의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스룹바벨 성전을 어떻게 회복시키실까요? 6-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진동시키시고,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시겠다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흔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흔들면 아무리 대제국이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면 아무리 작은 나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온 세상과 나라는 흔드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보배를 충만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에는 나라가 부강하므로 많은 보물들로 가득했습니다. 그것이 성전의 영광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 성전도 그렇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8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9절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하십니다. 또한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혹시 내 인생,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가 보잘것없다고 생각이 되시나요?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게 하실 것입니다. 평강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굳세게 나아갑시다.

학개1:1-15절/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25.11.1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2절)

​우리는 에스라 4장을 통해 1차 귀환했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대적들의 방해로 중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스4:4-5). 그 기간이 약15년 정도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성들은 귀환 목적을 상실하고 각각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분주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귀환 목적인 하나님의 성전 건축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등장한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오늘부터 묵상하는 학개서는 당시 학개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기는 1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라고 합니다. BC520년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를 통해 지도자인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전달됩니다. 백성들이 협력하지 않자 지도자들 역시 동력을 상실하고 주저앉아 있는 상황입니다. 선포의 시작은 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만군의 여호와”가 자주 반복됩니다(2,5,7,9,14).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군대의 하나님으로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백성들은 말합니다. 2절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아직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백성들의 핑계였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들의 관심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자신들의 집이었고, 풍성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 “판벽한 집”, 즉 잘 꾸며진 집에 거주합니다. 6절 많이 뿌립니다. 많이 수확하기 위함입니다. 9절도 많은 것을 바라고 소망합니다. 이제 자신들의 삶이 우선이 되었고 귀환 목적이었던 하나님의 성전은 나중이 되었습니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성전 건축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건물이 세워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우리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말씀은 5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입니다. 7절도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고 하십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요,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환경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살펴보아야 할까요? 6절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주소입니다. 한마디로 많은 수고는 하지만 만족과 기쁨이 없는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9절도 많은 것을 바라지만 수확은 적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지만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십니다. 하늘에서 이슬이 그치고 가뭄이 듭니다.

현대인들이 그렇지 않나 생각됩니다. 열심히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공허하고 불안하고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먼저 “자기 행위를 살필지니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이루어가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하나님이 멈추시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위해 일하시면 풍성한 삶이 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8절)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중해야 할 일은 귀환 목적인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8절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즉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과 영광이 되어 주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와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통해 원하시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아닌 ‘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결과는 허무함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하나님의 기쁨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롬12: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인생, 기쁨 넘치는 인생의 길입니다.

감사하게도 학개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백성들이 순종합니다. 12절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3절 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14절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에스라 1장에서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를 잘 살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삽시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책임져주시고 기쁨과 영광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에스라9:9-15절/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25.11.14)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9절)

​에스라의 회개 기도가 계속됩니다. 9절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라고 하는데 노예가 된 이유는 7절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합당한 징벌이 따릅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롬6:23절).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이런 징계는 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이 과정이 있어야만 새로운 회복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간도 70년이라는 시간을 정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대제국 왕들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입니다. 사람이 움직일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고 움직이셨습니다.

왕들 앞에서 긍휼을 입어 고국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무너진 것을 수리하였습니다. 9절 하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보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울타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입니다. 마땅히 은혜에 감사하며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와 사랑받고도 계명을 저버렸습니다. 특히 절대 반복해서는 안 되는 과거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왔는데, 포로로 끌려간 원인이 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11절부터 설명합니다. 과거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입성하던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더러운 땅”이라고 정의하십니다. 11절에 세 번이나 ‘더러운’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러운 죄악의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용하셔서 심판하셨습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죄악은 땅을 오염시킵니다. 그래서 땅이 죄악된 백성들을 토해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가나안 백성들과 같은 죄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 땅이 토해 낼 것이라고, 그래서 이방에 포로로 끌려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가혹한 명령을 내리신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다시 성장해서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백성들과 통혼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 이스라엘은 왕성하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되고, 영원히 약속의 땅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성함과 안정됨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이 섬기던 우상을 숭배함으로 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신6:10-15절).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9절)

​그런데 안타깝게도 과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풍요를 위해 가나안 풍속을 따랐습니다. 그들과 동화되어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라는 멸망하고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셨습니다. 상당수의 백성들을 남겨두시고 포로에서 귀환하게 하셨습니다.

에스라는 율법 학자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볼 때 범죄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이 진멸됨과 같이 진멸됨이 어쩌면 마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죄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사랑하셔서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셨습니다. 남겨두시고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에스라가 생각하기에 기가 막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고도 다시 계명을 거역하고 이방인과 통혼하는 과거의 죄악을 반복하니 이제는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래서 10절 하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5절 하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또한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구체적으로 죄악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저지른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고 회개하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이 시대를 회개가 사라진 시대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대신 회개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할 것이 많아서 달라는 기도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회개를 통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풍성한 삶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회개는 말씀을 기준으로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며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는 과거 죄로 인해 죽었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벧전2: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죄의 종노릇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와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