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1:1-17절/지혜와 지식을 주소서(25.09.15)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1절)

​역대하 묵상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는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 사무엘하는 왕으로서 다윗의 통치, 그리고 열왕기상하는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의 통치와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열왕국의 이야기, 왕국의 멸망 이야기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왕들의 이야기인 역대상하가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록 시점의 차이입니다. 삼상하와 왕상하는 그 당시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했다면, 역대상하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역사를 회고하며 기록한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 의해서 멸망했으면, 그렇다면 회복을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징이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그것도 남유다 역사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통치부터 시작합니다. 1절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하게 하시니라”고 합니다. 왕위가 견고하며 심히 창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역대기 저자의 관점이 부각됩니다. 사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과정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다윗이 늙자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겠다고 먼저 움직입니다. 그와 동조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고 반대자들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그런 내용을 생략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솔로몬이 왕이 되고 처음을 한 일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2절부터의 내용입니다.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기브온 산당에 여호와의 회막이 있습니다.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성막을 만들어 성막을 중심으로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와 정착하면서부터는 성막이 이동하지 않고 정해진 곳에 머뭅니다. 길갈, 실로에 있다가 지금은 기브온 산당에 있습니다. 성막에 대한 관심은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은 법궤로 향합니다. 법궤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메어 올려 보관 중입니다. 그리고 놋제단은 기브온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습니다.

그 제단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데 6절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일천 번의 제사가 아니라, 천 마리의 번제를 드린 겁니다. 하루에 이 많은 양의 제물을 잡아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솔로몬은 열 마리, 백 마리가 아닌 천 마리의 번제를 드렸을까요? 백 마리만 해도 많은 숫자입니다. 솔로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온전한 신뢰가 외적으로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직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예배의 실패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솔로몬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돌아봅니다. 내면이 형식으로 드러납니다. 예배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예배하는 우리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그것이 우리의 모습에도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것, 시간을 잘 지키는 것,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 전심으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 말씀에 집중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10절)

​하나님께서 그 날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물으십니다. 7절 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솔로몬은 과거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기억하면서 다윗과의 언약을 굳게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 바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이어지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지혜와 지식”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세 번 반복됩니다(10,11,12). 왕상3:9절에서는 “듣는 마음”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지식이 머리가 비상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지혜와 지식을 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들 때문입니다. 9절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사오니”, 10절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이런 솔로몬의 기도에 하나님은 11절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마음은 백성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르게 재판해서 억울한 사람이 없게하고 공의의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지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간구에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지혜와 지식을 주시면서 그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 허락하십니다.

기브온에서 예배하고 예루살렘으로 내려온 솔로몬의 통치가 어떠했는지를 14-17절에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견고하고 부강했습니다. 그것을 15절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고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열왕기상은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말을 사들인 것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는 자들에게 금지하신 일을 한 것입니다. 신17:16절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이것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도 저자의 관심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지혜와 지식으로 복된 삶을 살아갑시다.

스바냐2:4-15절/남은 자들(25.09.12)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5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열방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나 악을 행할 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온 땅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서쪽 블레셋, 동쪽 모압과 암몬, 남쪽은 구스 마지막으로 북쪽은 앗수르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블레셋은 다섯 도시가 연합해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4절 “가사는 버림을 당하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에그론은 뽑히리라” 가드를 제외한 네 도시가 버림을 당하고 폐허가 되며 쫓겨나고 뽑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우시기도 하시며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학자들은 여기 사용된 단어들이 버림받은 여인을 표현하는 단어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표현은 남편인 하나님을 떠난 아내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왜 심판을 당하는지 다른 나라들처럼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5절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라는 말씀을 통해서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이 진멸했던 가나안 사람들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이들이 멸하여 주님이 없게 할 것이며 해변은 풀밭아 되고 양을 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블레셋 땅이 누구에게 주어진다고 하냐면? 7절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고 합니다. “남은 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기만 아니라 9절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에서도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 백성의 남은 자”, “나의 남은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2:3절에서 말씀하셨던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정신을 따라 포악과 거짓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갈 때,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시면서 회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분명합니다. 다수의 길, 넓은 길이 아닌 소수의 길,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15절)

​이어 모압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심판의 이유는 8절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하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교만하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이것을 10절 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고 교만하여 졌음이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무시하고 비난했습니다. 거만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조롱과 비난의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훼방과 교만을 보셨습니다. 갚아주십니다.

성도는 누군가를 함부로 조롱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교만하고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내가 소중하듯 그들 역시 소중합니다. 비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조롱과 비난 대신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해야 합니다. 훼방 대신 하나됨을 이루어야 하며 교만 대신 겸손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모압과 암몬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받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만드시겠다고 합니다. 황폐하게 됩니다.

남쪽으로는 구스를 심판하십니다. 가까이 있는 나라들보다 멀리 있는 구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2절 “구스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북쪽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화려하고 번성했던 도시는 사막같이 메마르고 짐승들의 소굴로 변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앗수르가 심판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5절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기쁨의 성이요 염려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과 염려 없음이 힘으로 다른 나라들을 짓누르고 탈취해서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쁨과 염려 없음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이들의 문제는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파괴했습니다. 나만, 우리 가정만,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앗수르를 하나님은 황폐하게 하며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결국 나를 황폐하게하고 공동체를 황폐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참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갈 때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점점 자기 중심성이 강화되는 세상에서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섬기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스바냐1:14-2:3절/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5.09.11)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14절)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희생제물로 준비하는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서는 이 날을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하고, 세 번이나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라고 합니다(18,2:2,3).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컸던 만큼, 그들을 향한 진노 역시 큽니다. 어쩌면 진노의 뿌리 역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4절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고 합니다. 새번역은 “득달같이 다가온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포악과 거짓 속에서 안일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앞에서 묵상한 살후 2장은 주님의 재림을 너무 고대해서 혼란이 생긴 것이라면,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쩌면 본문의 백성들처럼,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에도 오시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 날은 용사마저 심히 슬피 우는 날이 될 것입니다. 15-16절은 그 날이 어떤 날이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패망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특히 15절은 어둠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어둔 세상에 빛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빛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빛을 잃어버리고 어둠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내리는 심판이 어둠입니다. 16절은 전쟁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 나팔이 울리고 견고한 성읍과 높은 망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상대로 전쟁을 하십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대적이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면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십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7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디로 가며,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망각하고 세상을 따라 살았습니다. 선택된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가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맹인이 되게 하시며 티끌과 분토가 되게 하십니다.

이런 진노의 날에 18절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그렇습니다. 은과 금이 건지지 못합니다. 그동안 포악과 거짓으로 은과 금을 모았습니다. 그것이 안전과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무용지물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우리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은과 금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2:3)

​이렇게 무서운 여호와의 날을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있다고 하십니다. 2: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모이라고 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의 의미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백성“입니다. 모이라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함입니다. 기회는 여호와의 진노가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입니다. 기회가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모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3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이들은 1:17절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는 세상에서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입니다. 다수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하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먼저 여호와를 찾습니다. 하나님만 예배합니다. 풍요를 위해 우상을 숭배하고 은금에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에서 하나님만 경배합니다. 또한 공의와 겸손을 행합니다. 포악과 거짓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다스리심을 믿고, 악과 불의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바로 이들이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습니까? ”가깝고도 빠르도다“라는 선지자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소수의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스바냐1:1-13절/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25.0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2절)

​지난 8월 우리는 스가랴서를 묵상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하여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현실을 보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회복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부터 묵상할 스바냐의 배경은 남유다가 멸망하기 전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라가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악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한 시기는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입니다. 스바냐를 소개하면서 “히스기야의 현손”이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했던 왕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위기를 극복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이후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는데, 남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입니다. 그는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았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숭배하는 제단을 만들었으며, 가장 악한 일은 인신 제사를 받는 몰렉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바쳤습니다. 이 므낫세로 인해서 남유다의 멸망이 확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므낫세를 이어 아몬이 왕이 되었지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반역이 일어나 아몬이 죽고 그의 아들 요시야가 8살의 나이에 왕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우상숭배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바냐서가 시작되자마자 진멸을 선언하십니다. 2-6절까지 “진멸”과 “멸절”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2,3,4,6). 진멸의 대상은 3절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입니다. 사람이 가장 먼저 나오고 이어 짐승과 공중의 새 그리고 바다의 고기입니다. 이것은 창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와 반대되는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새와 물고기에 이어 땅의 짐승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경배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멸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거치게하는 자가 되었으며 악인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라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손을 펴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심판하시기 위해 손을 펴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풍요를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만 예배해야 할 이스라엘이 ‘그마림’이라는 이방신에게 제사드리는 제사장들을 임명하였습니다. 지붕 위에서 하늘의 뭇별에게 경배하며, 하나님도 섬기고 말감도 섬겼습니다. 여기 말감이 바로 인신 제사를 원하는 몰렉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동시에 행하였습니다. 가장 큰 죄악은 6절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무관심하고 우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일들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서서히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점점 심각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경고하시지만 자신들에게는 상관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잘 돌아보고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7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보통 구약의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여호와의 날”은 반대로 이스라엘에 심판을 행하시는 날입니다. 7절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희생제물입니다.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은 외면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친히 희생제물을 준비하시는데, 제물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 죄악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까요? 8절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지도자들, 권세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은 주변 강대국의 문화와 정신 수용해서 부와 권력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행했던 일이 “포악과 거짓”입니다. 힘으로 사람들을 짓누르고 거짓으로 속여 자신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악은 결국 모든 백성들의 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대 기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포악과 거짓에 휘말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 시대의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곳곳에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모든 곳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은 어느 곳 하나 바른 곳이 없다는 슬픔입니다. 특히 상업지역인 막데스가 거론된 것을 보면 이곳이 포악과 거짓의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13절은 그렇게 모든 재물이나 세운 집들이 노략 당하고 무너질 것을 경고하십니다. 포악과 거짓으로 쌓고 세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람같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절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혹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인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하나하나 등불을 들고 찾아내셔서 벌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사람이 누군인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심판과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감각한 시대를 향해 경고하십니다. 우리 역시 습관적이고 오래된 우상숭배로 무뎌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모든 것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3:1-18절/힘써 일하라(25.09.09)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5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도를 부탁합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대사도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주고 또한 기도를 부탁하는 관계가 좋은 관계입니다.

바울의 기도 제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절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곳곳에 전파되어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요 말씀의 영광입니다. 두 번째는 2절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입니다. 가는 곳마다 반대자들을 만납니다. 바울 일행을 부당하게 대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심판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건져달라고 합니다. 그들 역시 언젠가는 주님을 만나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입니다.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믿음이 누군가는 받아들일 수 없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인을 바꾸는 일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주님께서 굳건하게 하시고 지켜주시길, 바울이 전한 것을 신실하게 행하기를, 그리고 5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인도해주셔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사랑과 인내”인데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난무하는 시대에 성도가 기억하고 행동해야 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또한 인내가 필요한데 그리스도의 인내로, 죽기까지 참으시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신 인내입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12절)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편지를 보낸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2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로 혼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나오는 게으른 자들에 관한 문제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6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떠나라”는 명령이 무섭습니다. 14절도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부끄럽게 하라는 겁니다. 그만큼 이 문제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혼란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자신들이 본을 보였던 것을 먼저 설명합니다. 7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절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가르치는 지도자로 성도들의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주야로 수고하면서 생활을 감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9절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건강한 신앙은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일하여 가정을 섬기며,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 바울이 보여준 본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으르게 행하여 일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합니다. 이들로 인해서 공동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다른 성도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왜 이들은 이처럼 게으른 삶을 살아갈까요?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님의 재림 문제로 혼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고, 심지어는 이미 재림하셨다는데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는 육체적인 노동을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생각해서 일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울은 12절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 권면은 살전4:11절에도 나왔습니다.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자기 일을 묵묵히 감당하라는 겁니다. 손으로 수고해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겁니다.

기억합시다.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거나, 내 기준으로 함부로 판단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묵묵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일을 감당하며, 자기 신앙을 잘 세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13절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게으른 자들로 인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성도들, 그것을 통해 누군가를 섬기는 자들이 상처받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평강과 은혜가 있기를 원하는데, 근원이 16절 “평강의 주께서”,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평강과 은혜가 풍성한 삶이 됩니다.

우리도 우리 통해 말씀이 곳곳에 전파되어 영광스럽게 되길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인내로 인내합시다.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수고하며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맙시다.

데살로니가후서2:1-17절/진리를 붙잡으라(25.09.08)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3절)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교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보면 예수님의 재림 때문입니다. 이것을 1절 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라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2절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아마 “성령께서 이렇게 말했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현대의 시한부종말론자들처럼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바울의 편지를 거짓으로 이용해서 재림이 임박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혼란과 두려움을 겪습니다.

바울은 2절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3절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도 누가 어떻게 주장해도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주장들에 미혹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재림 전에는 반드시 징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성전 파괴와 예수님 재림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마24:15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시면서 다니엘이 말한 것처럼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세워지는 것을 보면 이것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임할 징조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 재림 전에도 징조가 나타날 것인데 배교하는 일이 있고, 특히 불법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불법의 사람을 본문은 3절 “멸망의 아들”, 4절 “대적하는 자”, 8절 “불법한 자”, 9절 “악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불법의 사람 특징은 4절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들이 혼란스럽지만 5절을 보면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런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법의 사람을 막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온 세상이 용과 짐승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결박하고 다스리시는 것처럼 막으십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8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승리하시고 불법한 자를 폐하십니다.

그런데 이 악한 자의 배후가 등장하는데 바로 사탄입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9절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며, 10절 “불의의 모든 속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영과 말과 편지 내용을 악용해서 재림에 대한 거짓 내용을 전하고, 거기다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니 흔들리고 미혹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합니다. 즉 진리가 아닌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이 미혹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걷게 된다는 겁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와 불의를 따르는 자가 이 과정에서 분리됩니다. 생명과 사망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15절)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미혹과 혼란의 시대에 성도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진리”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10,11,13). 14절에서는 진리를 “우리의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15절에서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전통’은 사도의 모든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는 2절의 거짓된 “영과 말과 편지”가 있고, 15절에는 바른 “말과 편지”가 대조를 이룹니다. 사도가 가르쳐준 진리의 말씀 말고 새롭고 이상한 가르침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관심을 끕니다.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단들이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기존 교회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자신들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미혹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가르침이나 신비한 능력에 현혹되지 말고,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66권을 붙잡고 매일 묵상하며 진리 안에서 걸어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서기를 바라면서, 성도들이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신다, 누가 그렇게 꿈을 꾸고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등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말고, 13절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즉 택하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구원받게 하심에 집중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재림의 때에 관심 기울이지 말고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것이 살전5:5절처럼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인 성도들의 삶이라는 겁니다. 살전5:8절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렇게 믿음과 사랑, 소망으로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바른 삶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셔도 기쁨으로 맞이하는 삶입니다.

특히 본문 16-17절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어쩌면 재림에 대한 관심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위로를 얻고자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로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 마음을 위로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고난 가운데 있다하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충분합니다.

여전히 거짓된 가르침이 많은 혼란한 시대에 진리의 말씀을 굳건하게 붙잡고, 그 말씀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