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4:13-5:11절/깨어 정신을 차릴지라(25.09.05)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14절)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궁금해하는 문제에 답을 줍니다. 첫 번째는 먼저 죽은 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15절 하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는 말을 하는데 의미가 지금 살아있는 성도들이 이미 죽은 성도들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런 설명을 한다는 것은 성도들은 반대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에 이미 죽은 성도는 불쌍한 자들이고, 살아서 주님을 만나는 성도가 복된 성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강하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철학이 “소망은 산 자의 것이지 죽은 자는 소망이 없다”고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다가 박해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성도가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먼저 죽은 자들의 문제가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답을 줍니다. 14절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먼저 죽은 자들 역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말합니다. 즉 먼저 죽은 자들이 이미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육체는 죽어서 사라지고 없지만 영혼은 주님 품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죽은 자들 때문에 걱정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오실 때 그들을 데리고 오십니다.

이어 바울은 주님 오심의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합니다.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호령”,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이라고 세 번이나 주님 강림의 날 울려퍼질 큰 소리를 강조합니다. 이 날은 위대한 날입니다. 하나님의 날입니다. 승리의 날이며 역전의 날입니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성도가 죽으면 곧바로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바울은 그 이전에 어떤 과정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공중으로 내려오시면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일어나서 공중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이후 살아있는 성도들이 들어올려져 함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단어가 “함께”입니다. 17절 “그들과 함께”, “항상 주와 함께 있으니라”고 합니다. 함께 주님의 일에 헌신했던 성도들을 만나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역시 죽음 이후에 대한 많은 궁금증들이 있습니다. 다 알수 없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신한면서 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갑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5절)

​두 번째 질문은 “때와 시기”에 관한 것입니다. 즉 주님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입니다. 바울은 이미 성도들이 알고 있음을 전제하면서 두 가지 예를 듭니다. 하나는 밤에 도둑같이 오십니다. 두 번째는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르는 것처럼 오십니다. 공통점은 갑자기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 오십니다. 그러니 결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용은 믿지 않는 성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둠속에 있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4절은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합니다.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도둑같이 오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본문에서 대조되는 것이 “밤과 어둠”, “빛과 낮”입니다. 성도는 빛과 낮에 속한 자들입니다. 빛과 낮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도둑같이 오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고 합니다. 8절에도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를 반복합니다.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밤에 속한 세상 사람들이 잠을 자고 취해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지 않고 이들과 함께 세상 정신에 취해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지 않고 깨어 있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10절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이를 위해 8절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합니다. 1:3절에 이어 다시 “믿음과 사랑, 소망”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호심경(갑옷)과 투구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지 못하도록, 세상에 취하도록 유혹합니다. 이런 때 영적으로 무장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더욱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질문해 봅니다. 우리는 이 땅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주님 오신다면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가? 빛의 자녀들로서 깨어 있어 언제 주님 오셔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도록 늘 준비된 삶을 살아갑시다.

데살로니가전서 4:1-12절/더욱 힘쓰라(25.09.04)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1절)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교회이지만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복음 중심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좋은 교회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시작은 열정으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방향을 잃고 열정이 식어 세상과 다르지 않은 공동체를 이루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합니다.

1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바울은 우리 인생의 목적, 신앙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는 모두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는 그런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기쁨이 될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은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지만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가 기쁨을 누립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크고 놀랍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다. 전부를 주신 사랑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복된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바울은 1절 하 “더욱 많이 힘쓰라”, 10절 하 “더욱 그렇게 행하고”라고 하면서 잘 하고 있는 부분 더 잘 감당하도록 격려합니다. 자칫 우리는 열심을 내다가 멈추고 안주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기도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할 이유가 있는지 갈등하고, 혹은 대중 속에 묻혀 쉽고 편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멈추고 안주하면 우리는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더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바울의 권면 “더 많이 힘쓰라”를 기억해야 합니다. 장애물을 넘고, 안주하려는 마음을 이기고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의 수고 이상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함께 나누는 일을 강조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말고,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3절)

​3절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많은 봉사와 헌금, 열심히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거룩”을 강조합니다. 거룩함 중에서도 음란을 버리고 세상처럼 잘못된 욕망을 추구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를 위해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여기 ‘아내’로 번역된 단어는 ‘몸 혹은 그릇’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통제하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런 강조는 당시 문화가 성적으로 문란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욕망 추구를 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시대에 이방인과 다른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음란의 문제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 방향과 달라야 함을 말해줍니다. 음란은 형제를 해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가정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악에 대해 징벌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다시 한번 거룩을 강조하면서 8절 하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거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런 성도가 어떻게 음란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 역시 성적으로 혼란한 시대입니다. 성도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가정을 세워가야 합니다.

형제 사랑에 대해서는 너무 잘 하고 있다고 격려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내용은 9절 하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입니다. 1절도 배운대로 행하고, 사랑도 가르침을 받아 행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행동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사랑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해 사랑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1:3절에서 “사랑의 수고”가 있다고 했는데 아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 누군가 방문하면 최선을 다해 섬긴 듯합니다.

끝으로 11절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조용히 자기 일을 하라”는 의미는 시끄럽게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신의 일은 잘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덕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너희 손을 일하기를 힘쓰라”고 하는데 게을러 일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정말 도와야 할 사람을 돕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이 외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게 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합시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이 됩시다. 서로 사랑합시다. 묵묵히 우리 일을 잘 감당합시다.

데살로니가전서2:17-3:13절/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25.09.03)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19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7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는 표현을 보면 바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10절에서도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라고 합니다. 바울이 짧은 기간 사역하다 갑자기 밤 중에 떠난 것에 대한 의심과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3:6절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바울 일행을 간절히 보고자 합니다. 믿음 안에서 바울은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양육하고 가르쳤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바울의 사랑과 가르침에 믿음의 순종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보고 싶고 격려하고 싶은 관계입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의 관계도 이러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주님 앞에 보여드릴 것이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소망과 기쁨, 자랑의 면류관입니다. 3:13절에서도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라는 말로 성도들을 권면하는데,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초점이 바로 주님의 강림하심, 주님 앞에 설 날을 기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때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주신 주님 앞에 무엇을 보여드려야 할지를 준비하면서 사역했습니다. 주님께 보여드릴 것은 이 땅의 것들이 아닙니다. 소유, 지위, 업적이 아닙니다. 바로 고난 속에서도 복음으로 양육한 성도들입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어떤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다못해 디모데를 보냅니다.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2절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입니다. 두 번째는 2-3절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내용이 “굳건하게”입니다(2,3,8,13). 바을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바울은 환난이 있을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대로 환난이 찾아왔습니다. 환난과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만났을 때는 다릅니다. 막상 내가 고난을 만나면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시험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만나면 무너집니다. 바울의 염려가 이것입니다. 만약 환난과 시험을 만나 이들이 신앙에서 떠난다면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 대해 위로하고 또한 믿음을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8절)

​그런데 디모데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6절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입니다. 믿음으로 환난을 흔들림 없이 이겨내고 있습니다. 1:3절처럼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과 일행을 잘 생각하여 간절히 보고자 합니다. 이 소식이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7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2절에서 디모데를 보내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하려 했는데,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바울이 1절을 보면 ‘아덴’에 머물고 있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아덴에서의 사역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낙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의 소식이 큰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8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굳건한 믿음,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식이 살아나게 합니다. 생명력 넘치게 합니다. 소망과 기쁨이 가득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믿음의 이야기가 가득할 때입니다. 믿음으로 시험을 이긴 이야기, 믿음으로 고난을 극복한 이야기, 믿음으로 절망에서 일어난 이야기, 믿음으로 인내하는 이야기가 성도들을 살아나게 하고 공동체를 힘있게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10절은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 소식이 바울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믿음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환난은 극복했지만, 더 큰 문제와 환난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은 계속 성장해 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정도면 되었다,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성장을 멈춥니다. 그러다 흔들리고 넘어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굳건한 신앙을 위해서는 믿음과 더불어 사랑이 필요합니다. 12절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이런 믿음과 사랑이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흔들림없이 굳게 서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 앞에 설 날을 늘 준비하며 거룩함에 흠이 없는 삶이 됩시다.

데살로니가전서2:1-16절/하나님을 기쁘시게(25.09.02)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3절)

​바울은 짧은 기간(세 안식일)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일행을 공격하려는 유대인들 때문에 더 머물 수가 없어 밤중에 베뢰아로 이동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이 어떻게 데살로니가로 들어가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해를 부탁하는 내용이면서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앞으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어떤 마음과 태도로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순회전도자로서 방문해야 할 곳이 많은데 데살로니가를 방문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과 사랑, 소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외면을 받지만 새 생명을 얻어 소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과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연이 아니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만난 사람, 우리가 경험한 사건들로 예수님을 만나고 새 소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오기 전 빌립보에서 만났던 고난과 능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주어 고발을 당하고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잘 아는 찬송과 기도 가운데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고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빌립보 사역 이후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은 3절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5절도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결코 간사함이나 부정, 속임수, 아첨, 탐심으로 성도들을 대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시 순회전도자들이 있었는데 잘못된 목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서 속이고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전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4절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맡기셨습니다. 핍박자였던 바울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이 아니라면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반복되는 말이 4절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4절 하 “하나님을 기쁘시게”, 5절 하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10절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즉 바울은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이었습니다. ‘Coram Deo’의 삶입니다.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13절)

​그러기에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7절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11절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습니다. 즉 부모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했습니다. 그랬기에 8절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성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 위해 생명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설명을 길게 하는 이유는 12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본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바울은 말이 아닌 삶으로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13절입니다. 본문의 다른 구절은 잘 몰라도 13절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이 구절이 본문의 흐름 속에서 등장하고 있는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짧은 기간 복음을 전했지만 좋은 교회, 소문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1:6절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였습니다. 말씀을 받고 본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관계를 통해 전달됩니다.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신뢰하고 수고를 존중할 때 말씀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고, 본을 받게 됩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은 사역자들의 순수한 마음과 복음의 열정을 성도들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그 말씀의 풍성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어떤 마음과 태도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풍성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이 관계가 아름답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고난에 대해 설명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주는 사람들이 동족이라고 합니다. 같은 민족, 가까운 사람이 고난을 줍니다. 이때 고난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흔들림없이 우리 가야할 길을 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1:1-10절/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25.09.01)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2절)

​9월을 시작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묵상합니다. 데살로니가서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성령의 강권적인 인도로 유럽을 향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빌립보에 복음을 전했고 행17장을 보면 그 다음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행17:2절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고 합니다. 3주라는 짧은 기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선동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지역에 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17:10절 보면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냅니다. 이렇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염려가 있습니다. 짧은 기간 복음을 들은 성도들이 과연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갑자기 떠난 바울에 대해서 오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를 통해 전해 들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바울에게 감동이었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기쁨의 마음을 담아서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의 발신인을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라고 합니다. ‘실루아노’는 ‘실라’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이처럼 많은 이들과 함께 동역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그 앞에 교회는 어떤 곳인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교회,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이요 세상 그 어떤 공동체와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이 아니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너무 중요한 은혜와 평강도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집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항상 감사하며 항상 기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떠나가야 하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멀리서 기도합니다. 몸으로 함께 할 수 없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와 교회, 일터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온전하게 함께 하십니다.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5절)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은 감동입니다. 왜냐하면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과 사랑, 소망이 등장하는데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믿음, 사랑, 소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나타나 눈에 보이는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사람의 생각과 경험, 계산으로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을 위해 수고합니다. 입술로만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합니다. 품을 수 없는 사람을 품고,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기다려줍니다. 또한 소망으로 인내합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 향한 핍박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손해와 고통을 인내하면서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3주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런 열매가 맺어질 수 있을까요? 5절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합니다.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강조합니다. 6절에서도 성도들 역시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라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전하는 자들도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받는 성도들도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복음에 집중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은 내용을 듣고 알고 있느냐보다, 또한 얼마나 오랫동안 전하고 받았는지보다, 성령과 능력으로 전하고 성령의 기쁨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시대 우리가 기도하며 회복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아가지만, 반면 말씀의 기갈을 경험하는 시대입니다. 그만큼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기 보다는 생명과 능력을 상실하고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때 모든 교회에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들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데살로니가교회의 이야기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작은 교회요 이제 시작하는 교회이지만 이들의 삶의 열매들, 복음 안에서 이루어진 변화들이 좋은 소문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9-10절에서 참된 신앙은 무엇인지를 다시 정리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진노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의 요소들이 보이는 열매로 나타나길 기도합시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룹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선포되고, 듣는 이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받아 생명과 능력의 신앙이 됩시다.

스가랴14:12-21절/그 왕 만군의 여호와(25.08.22)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13절)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쉽지 않은 말씀을 묵상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회복과 또한 회복된 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4:2절에서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정결케 되고 예루살렘은 새롭게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며 생수가 흘러 넘쳐 온 세상으로 향하는 곳이 됩니다.

예루살렘 회복의 날은 이방 나라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12절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이라고 시작됩니다.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방 나라 사용해서 예루살렘 공격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이방 나라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 옳은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14장은 여러 번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합니다.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16,17절은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가 반복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들이 왕이 되어 거대한 세상을 만들고 주도했습니다. 그들이 만든 세상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12절의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의 결과로 반복되는 말이 “썩는다”입니다. 범죄한 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아담에게 하나님은 창3:19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고 거대해도 그곳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또한 13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기도 하지만 자신들끼리 피차 죽고 죽이는 정글의 세상입니다. 스스로 파멸을 길을 걷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이 가득한 도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14절 보면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이방 나라들과 전쟁하는 가운데 많은 전리품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많은 재물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1절에서는 죄악된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의해 재물이 약탈되고 나누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회복과 승리가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이런 역전의 날이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20절)

​이렇게 이방 나라가 심판을 당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16절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처럼 돌아오는 소수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은 재앙을 한꺼번에 쏟지 않으시고 서서히 강도를 높이십니다. 믿지 않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의 은혜를 누리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방 나라 중에 소수의 남은 자들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경배의 대상이 “그 왕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면서 초막, 즉 텐트에서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초막절을 지키는 때는 가을 추수하고 감사하는 때로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들 가운데 가장 성대한 절기입니다. 이처럼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반면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으시고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어떤 마음과 자세이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 힘으로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데 광야 같은 세상 하나님께서 늘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20절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은 대제사장이 머리에 쓰는 관에 새겨진 글씨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봉사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글귀가 이제는 “말 방울”에까지 기록될 것이라고 합니다. 말은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런 말의 방울에 까지 기록된다는 의미는 이제 성전만이 아닌 모든 곳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곳이요, 그러기에 모든 곳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시 솥 이야기를 통해 설명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구별된 솥으로만 제물을 삶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여호와의 성물이 되어 고기를 삶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성과 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곳에서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21절 하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는데 “가나안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고, 성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아닌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채우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종교지도자들의 허락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성전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뒤집어 엎으시고 정결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성전이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이십니다. 이 생명에서 떠나면 화려하고 거대해도 죽음입니다. 하나님만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하나님만 경배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을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