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14:1-11절/여호와께서 왕이 되시리니(25.08.21)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4절)

​슥 14장은 스가랴서의 결론입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내용이 새 예루살렘의 회복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회복을 위해서는 과거 예루살렘의 죄악들이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13:2절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또한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현혹되어 삶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먼저 예루살렘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1절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악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오히려 예루살렘이 약탈당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동원해서 행하십니다. 성읍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13:9절의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여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는 말씀처럼, 그동안 잘못된 것을 붙잡고 살았던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허탄한 것들을 쌓았던 것들이 무너지게 하십니다. 정결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강한 이방 나라들이 모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결론이 날 것 같은데 3절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과 싸우십니다. 그래야 예루살렘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은 하나님의 임하심으로부터입니다. 4절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하나님의 발이 감람산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그래서 5절 하 “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마치 이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돌아오신 것과 같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있을 수 없는 죄악이 만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난 건물 성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다시 예루살렘 위에 임하십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임하신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 우레와 번개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임하심으로 감람산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집니다. 큰 골짜기가 만들어집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가나안 땅 들어갈 때 요단강 물이 멈춘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골짜기를 통해 5절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고 합니다. 여기 도망은 남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골짜기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위기 속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면, 함께 하시면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9절)

​6절부터는 회복된 예루살렘의 모습이 나옵니다. 6-7절 새번역 “그 날이 오면, 햇빛도 차가운 달빛도 없어진다. 낮이 따로 없고 밤도 없는 대낮만이 이어진다. 그 때가 언제 올지는 주님께서만 아신다. 저녁때가 되어도, 여전히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빛이 필요없는 밝음이 계속됩니다. 마치 계21:22-23절 말씀과 같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늘 함께 하기에 해와 달이 소용없습니다. 모든 어둠이 떠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8절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 동해와 서해, 즉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죽었던 것들이 살아납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말씀 역시 계22:1-2절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와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스가랴서는 당시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전달하면서 사실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홀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원래 하나님만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홀로 한분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지면서 결국 이스라엘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주일 말씀이 사무엘상을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과 사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혼란과 연약함입니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회복은 환경이 변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왕되심, 다스리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 경배해야 합니다.

이런 예루살렘을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10절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는 평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 예루살렘만 우뚝 솟아오릅니다. 다시 저주가 있지 않고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게 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회복의 은혜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함께 하십니다. 빛과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매 순간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며 말씀의 통치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빛과 생명을 누리며 어둔 세상을 빛으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스가랴13:1-9절/내 백성이라(25.08.20)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2절)

​어제 말씀은 하나님을 찌른 자들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철저하게 애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각각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가?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 열리리라” 용서의 샘이 열립니다. 죄악을 씻어주시며 심령을 정결케 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 군사적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했습니다. 죄와 더러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시고 애통할 때 깨끗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문제는 내면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와 환경에 관심이 많습니다. 나를 바라보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티를 보며 정죄합니다. 내게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에게 없는 것에 대해 불평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찌른 이스라엘의 죄악은 어떤 것들일까요? 2절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상의 풍요를 주리라 기대했는데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거짓 선지자로 인한 것입니다. 2절 하-6절까지 길게 이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3절은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예언하는 자는 낳은 부모가 칼로 찌른다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꿔말하면 그 정도로 심각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참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거짓 예언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거짓 예언이 가득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새번역은 “네가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상대방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특히 왕과 같은 지도자 옆에서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전합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라가 불순종으로 인해 멸망하기 전, 참된 선지자들은 회개해고 돌이켜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나라가 멸망해서 포로로 끌려가는데 하나님은 70년 포로생활을 말씀하시는데, 거짓 예언자들은 곧 돌아올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래서 낳은 부모가 이들을 칼로 찌를 것이라고까지 경고하시는 겁니다.

결국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거짓 환상을 부끄러워 할 것이며, 선지자처럼 위장하기 위해 입었던 털옷을 벗게 될 것입니다. 자신은 선지자가 아니고 농부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의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에 대해 묻습니다. 이 상처는 우상에게 간구하다 생긴 상처입니다. 왕상18장에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대결할 때 바알이 응답하지 않자 바알 선지자들이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런 상처들입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친구 집에서 난 상처라고 둘러댑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지금도 거짓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맹종하게 합니다. 이들로 인해서 한국교회가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잘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9절)

​하나님은 언약을 회복하시는데,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과정에 목자를 치자 양들이 흩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목자를 “내 짝 된 자”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이 목자는 선한 목자입니다. 이 목자가 공격을 받자 양들은 흩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2/3은 멸망하고 1/3만 남게 됩니다. 이 남은 자들을 9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하나님은 이들을 “내 백성”이라 하시며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찾아오는 시련은 우리를 연단합니다. 금 같은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니 인내하고 잘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내적인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거울로 늘 점검합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내 뜻과 생각을 말하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시련을 통해 금 같은 믿음으로 성숙하는 소수의 사람이 됩시다.

스가랴12:1-14절/은총과 간구하는 심령(25.08.19)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4절)

​하나님께서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은 1절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특히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분이라고 하십니다.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10절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셔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심령을 지으신 분이시며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새 마음을 주십니다. 진정한 변화는 심령의 변화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필요한 것이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현실은 미약합니다. 주변 이방 나라들의 거침없이 공격 대상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 가지의 그림 언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알게 하십니다. 첫째는 2절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한 잔의 술처럼 꿀꺽 삼켜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공격하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넘어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3절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십니다. 이 무거운 돌을 함부로 건드는 모든 자가 크게 상처를 입게 됩니다. 세 번째는 6절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같게 하십니다. 이방 나라들이 공격하기 위해 가까이하면 오히려 이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

이 모든 일들이 연약한 예루살렘과 유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4절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5절 “유다의 우두머리들이 마음속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주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고 고백합니다.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세상 나라들을 열심히 따라가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것 무너진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회복하신다고 말씀하시냐면 7절 “다윗의 집의 영광”보다 더 영광스럽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8절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백성 중 약한 자가 다윗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동경하며 기대하는 왕이 다윗입니다. 이때도 메시아가 오시면 다윗 왕국과 같은 나라를 회복시켜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도 다윗과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더 나가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 수행한 것처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놀랍습니다. 연약한 가운데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허황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의 강하고 부요한 나라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세상 나라들을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우시고 함께 하십니다. 이 시대 성도인 우리가 늘 기억하며 선포해야 할 내용이 이것입니다. 돌보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 힘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10절)

​그런데 이런 회복을 위해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10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십니다. 한마디로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그들이 찔렀던 자, 나를 바라보고 애통하기를”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여기 “나”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찌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공격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찔렀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들이기에 이들에 대한 찌름은 곳 하나님에 대한 찌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찔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찌름에 대한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애통해야 할까요?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으로 애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11절에서는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이라고 합니다. 므깃도는 유다 요시야왕이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전사한 장소입니다. 요시야는 왕이 되어 쓰러져가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개혁을 단행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깝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모든 백성들이 탄식했습니다. 그런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12절 “온 땅 각 족속이 따라 애통하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따로”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는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에서 홀로 서서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찌른 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를 회개가 사라진 시대라고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신앙은 혼란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애통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찌른 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므로, 여전히 세상 정신을 따라 살므로, 여전히 누군가를 찌름으로 하나님을 찌르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며 애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스가랴11:1-17절/어리석은 목자들(25.08.18)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4절)

​어제 본문인 10:2-3절은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와 구름을 주관하셔서 풍요를 주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목자인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 목자들의 모습이 어떠하였으며, 그런 목자의 인도를 받는 백성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은 목자들의 모습을 나무에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레바논 백향목, 바산의 상수리나무 등입니다. 그런데 반복되는 말이 “곡하다”와 “쓰러졌다”입니다. 곡하는 소리의 정체는 3절 “목자들의 곡하는 소리”이며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목자들이 곡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나무들을 수식하는 단어들을 보면 “아름다운”, “무성함”, “영화로움”, “자랑”입니다. 목자의 사명은 양 떼를 돌보는 것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영광, 자랑을 추구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양 떼를 희생시켰습니다. 우리 위해 생명을 주신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절에 스가랴 선지자에게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이 잡혀 죽을 양 떼와 같습니다. 거짓 목자들은 양 떼를 사고 팝니다. 사는 자들은 착취하면서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 파는 자들은 돈을 벌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들의 안중에 백성들은 없습니다.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들이 이처럼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이용하는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욕망은 지도자들에게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과 정의는 사라지고 불법과 욕망이 난무한 동물의 세상이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이 이런 나라를 만든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들어 이스라엘을 치게 하십니다. 목자들의 죄악에 대해 징벌하시는 겁니다. 또한 이렇게 해야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잡혀 죽을 양떼를 돌보는 과정에서 막대기 둘을 취합니다. 7절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양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고, 또한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 명의 거짓 목자를 제거합니다. 이유는 8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의 사명을 맡기셨는데, 하나님의 성품대로 양들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짓 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마음껏 채우는데 하나님이 걸림돌입니다. 말씀이 부담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러니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12절)

​9절에 선지자는 충격 선언을 합니다. 새번역 “그런 다음에 나는 양 떼에게 말하였다. “나는 더 이상, 너희를 돌보는 목자 노릇을 하지 않겠다. 죽을 놈은 죽고, 망할 놈은 망하여라. 그러고도 남는 것들은 서로 잡아먹어라.”” 목자들만 문제가 아닙니다. 양들도 문제입니다. 목자의 사명을 선지자가 더 이상 참고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꺾어 버립니다. 이는 언약이 폐하여진 것입니다. 분명 언약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향한 보호와 사랑을 담고 있을 것인데, 이것이 폐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은 보호가 사라진 것입니다.

선지자는 양들에게 품삯을 요구합니다. 돈을 요구함이 아니라 목자의 사명을 이들이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은 삼십 개를 지불합니다. 이 값은 노예의 몸값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목자의 직무를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3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토이장이에게 은 삼십을 던집니다. 이 말씀은 마27:5-8절에서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의 죽음에 다시 등장합니다. 이때 선지자는 연합이라는 두 번째 막대기를 꺾습니다. 이렇게 은총도 연합도 깨어집니다.

하나님은 다시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15절 새번역 “주님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번에는 쓸모 없는 목자로 분장하고, 그 구실을 하여라.” 이를 통해 거짓 목자들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않고, 흩어진 자를 찾지 않습니다. 상한 자를 고치지 않고,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않습니다. 대신 살진 자의 고기를 먹고 굽을 찢어 버립니다. 목자의 사명을 망각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십니다. 17절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내리리니 그의 팔이 아주 마르고 그의 오른쪽 눈이 아주 멀어 버릴 것이라 하시니라”

목자가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이처럼 혼란이 찾아옵니다. 우리도 각자 리더의 자리에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맡기셨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잘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스가랴서는 참된 목자이신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세상에 우리를 인도하려는 것들이 많은데 참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라가므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매일 경험합시다.

스가랴8:14-23절/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25.08.14)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16절)

​7-8장이 스가랴 전반부 마지막 내용입니다. 그 시작은 금식에 대한 질문입니다. 성전이 건축되고 있는데 계속 금식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은 7장에서는 과거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8장에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회복을 금식에 대한 질문과 연결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격노하셨고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셨습니다. 여기 “뜻하다”의 원어가 ‘자맘’인데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성전에 무너졌습니다. 그것을 슬퍼해서 금식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5절에 “이제 내가 다시”라고 말씀하시면서 과거에 재앙 내리시고 뜻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셨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작정이기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회복하십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이제는 은혜를 베푸시는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변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계속하시는 것을 보면, 여전히 이스라엘은 과거 조상들의 모습을 따라갈 위험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70년이라는 징계의 시간을 거쳤기에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내용이 16절입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고 합니다.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은혜를 베푸신 후, 은혜에 합당한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행위가 먼저가 아니고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자 답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니 그 큰 사랑을 알고, 은혜를 기억하며 이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6-17절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미 7:9-10절에 나왔던 말씀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았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신비한 능력을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고,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하며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않는 겁니다. “이웃”과 “서로”라는 단어를 통해 하나님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원하십니다. 서로 해하지 않고 사랑하며 은혜를 나누길 원하십니다.

또한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맹세에 사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은 바른 관계입니다. 위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옆으로 내 곁의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드시 “진리”가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8장은 “진리”를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3,8,16,19).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21절)

​금식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7장에는 5월과 7월, 두 번 금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 19절을 보면 네 번의 금식이 나옵니다. 4월, 5월, 7월, 10월입니다. 모두 예루살렘과 성전의 무너짐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슬픔의 금식 절기가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무너졌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다시 세우십니다. 성전도, 예루살렘도 그리고 성벽도 세우실 것입니다. 거리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시가 될 것입니다. “기쁨, 즐거움, 희락”이라는 같은 의미의 단어를 세 번 반복하시면서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19절 하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고 하십니다. 그런 기쁨이 회복되면 이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진리와 화평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많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21절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서로 예루살렘으로 먼저 가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찾고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이 내용이 22절에도 반복됩니다. 과거 주변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금식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자 예루살렘을 찾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은 과거 하나님께서 처음 선택하셨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출19:6절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복됨을 보고 주변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요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며,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아닌 세상 나라를 닮아 살았습니다. 그 결과가 금식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많은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게 될 것입니다.

23절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과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이 시대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사랑을 알고, 진리의 말씀 안에서 위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옆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쁨을 누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함께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그런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스가랴8:1-13절/전에는 그러나 이제는(25.08.13)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3절)

​7장에서 백성들 가운데 금식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며 포로 생활 70년 동안 금식했는데 이제 성전이 새롭게 지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계속 금식을 해야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이 질문에 하나님은 금식이 과연 누구를 위한 금식이었는지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러시면서 과거 선지자들의 외침을 듣지 않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오늘 본문도 그런 책망의 메시지가 이어질 것 같은데 완전히 분위기 반전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새번역이 이해가 쉽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나는 시온을 열렬히 사랑한다. 누구라도 시온을 대적하면 용서하지 못할 만큼 나는 시온을 열렬히 사랑한다”입니다. ‘질투’의 원어는 ‘헤마’인데 의미가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힘, 뜨거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뜨겁게,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반드시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의아합니다. 왜 하나님은 바로 앞 7장에서는 그렇게 책망을 하시더니 갑자기 8장에서는 이렇게 뜨거운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8절도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깨닫게 하시기 위해 잠시 고통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뜨겁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멈추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사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회복의 시작은 하나님의 돌아오심입니다. 3절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과거 이스라엘은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있었고 풍요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나십니다. 하나님께서 떠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멸망 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반대입니다. 화려한 성전도 없습니다. 작은 성전이 지어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은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하나님께서 돌아오십니다. 함께 거하십니다. 그리고 진리의 성읍으로 거룩한 성산으로 예루살렘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리 초라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며 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회복의 그림을 보여주시는데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고,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뛰놀게 될 것입니다. 과거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설명하면서 거리에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렘33:10절).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며 활기찬 성읍이 됩니다. 특히 약자들인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행복을 누리는 복된 성읍이 될 것입니다. 남녀노소,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차별없이 함께 어우러지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 아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현실이 어떤데 과연 그런 날이 온다는 말인가? 그래서 6절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고 하십니다. 백성들은 과연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라고 생각하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인도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하십니다.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9절)

​이런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9-13절 앞과 뒤에 반복되는 말이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입니다(9,13). 이 말씀은 과거 전쟁을 앞둔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겁니다. 과거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지금도 함께 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신뢰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 건축을 앞두고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눈에 보이는 문제를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손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와 함께 거하시니 하나님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10절 “전에는”과 11절 “이제는”이 대조를 이룹니다. 전에는 너무 어려워서 삯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변 원수들로 인해서 평안히 출입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평강의 씨앗을 얻을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하늘은 이슬을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임할 축복을 농사의 이미지로 보여주십니다. 그 결과 12절 하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또한 13절은 이전에는 저주가 되었지만 이제는 복이 되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 이전과 이후의 삶을 다르게 하실 것입니다. 회복과 평안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힘들어도 빛을 비춰주시고 소망의 미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손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두려움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진리를 따라 공의의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