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23:1-32절/레위 사람의 계수(25.06.23)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니”(3절)

​다윗은 21장에서 잘못된 인구조사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장소임을 발견하고 22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위한 재료을 준비하고, 솔로몬과 방백들의 마음을 준비시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성전이 지어지면 그곳에서 봉사할 레위인들입니다. 그래서 23-26장까지 레위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절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으매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왕상1장을 보면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 왕이 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과정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다윗을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절부터는 레위인을 계수하는 내용이 길게 이어집니다. 역대기 저자가 생각하기에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어떤 왕이 세워지느냐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광 돌리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반복되는 말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입니다(4,13,24,28,30,31,32). 예배하며 감사하고 찬송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어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도 바로 이것입니다. 좋은 정치 지도자를 세우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영광돌리는 삶입니다.

3절 “레위 사람은 삼십 세 이상으로 계수하니 모든 남자의 수가 삼만 팔천 명인데” 레위 사람을 계수합니다. 21장에서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가 무서운 징계를 받았는데, 레위인을 계수하는데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인구조사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과 목적으로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21장의 인구조사는 다윗이 자신의 영광과 자랑을 위한 인구조사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레위인을 계수하는 목적을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함입니다. 겉으로는 동일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동기와 목적을 아십니다.

본문 보면서 혼란스러운 것은 3절은 30세 이상으로 계수하는데, 24절과 27절은 20세 이상으로 계수를 합니다. 원래 기준은 30세 이상입니다. 민4:2-3절 “레위 자손 중에서 … 곧 삼십 세 이상으로 오십 세까지 회막의 일을 하기 위하여”라고 합니다. 보통 군인으로 동원되는 나이가 20세 이상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은 30세 이상이 기준입니다.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은 영광이면서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함부로 미숙하게 감당하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숙함이 요구되기에 레위인은 30세 이상이 기준입니다. 그런데 20세 이상으로 기준을 낮춘 것은 다윗이 이전과 다른 규모의 성전에서 봉사할 영역들을 생각해 볼 때 레위인의 숫자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20세 이상으로 계수합니다.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하게 하여”(13절)

​6-23절까지는 계수된 레위인들이 가문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6절 “다윗이 레위의 아들들을 게르손과 그핫과 므라리”로 레위의 세 아들이 게르손, 그핫, 므라리라는 사실입니다. 성막 시대에는 이들이 성막 탠트와 기물들을 나누어서 이동하는 일을 했습니다.

또 하나는 12-13절을 보면 그핫 자손 중 아므람의 아들이 아론과 모세라고 하는데, 아론에 대해서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절 “아론은 그 자손들과 함께 구별되어 몸을 성결하게 하여 영원토록 심히 거룩한 자가 되어 여호와 앞에 분향하고 섬기며 영원토록 그 이름으로 축복하게 되었느니라” 이런 기록은 아론의 뒤를 잇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반복되는 말이 “구별”, “성결”, “심히 거룩”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을 세워가야 하는지 말씀해줍니다. 이 시대 우리 모두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우리 역시 “구별, 성결, 거룩”이라는 정체성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25-26절은 이제 레위인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임무를 감당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광야를 이동하였습니다. 성막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니 레위인들의 주된 임무가 성막과 기물들을 이동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평강을 주십니다. 다윗 성인 예루살렘에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26절 “레위 사람이 다시는 성막과 그 가운데에서 쓰는 모든 기구를 멜 필요가 없다 한지라” 이제 고정된 성전이 지어질 것이고, 이전 성막에 비해 규모도 큽니다. 그러니 이전과 다른 직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 내용을 교회에 적용해보면,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지만 우리 신앙의 환경은 늘 변합니다. 이때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내게 익숙한 것만 붙잡지 않고, 새롭게 감당하고 변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묻고 감당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8절부터는 레위인들이 감당해야 할 다양한 일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27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다윗의 유언대로”입니다. 1절은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으매”로 시작했는데 레위인에 관한 내용을 유언으로도 남깁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다윗이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득했습니다. 실제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고, 성전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이루어지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미 다윗은 마음과 생각으로 수없이 보고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도록 사람을 세웁니다.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열심이 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무엇보다 사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사람, 하나님만 예배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구별됨과 성결함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역대상21:1-17절/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25.06.20)

●“사탄이 …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1절)

​20장까지는 다윗과 이스라엘의 승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21장은 다윗의 심각한 죄악에 관한 내용입니다. 역대기 저자가 다윗의 실수를 잘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 실패를 통해 성전이 지어질 장소가 결정이 됩니다.

다윗의 문제는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1절은 사탄이 다윗을 충동해서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삼하24:1절은 “여호와께서 … 다윗을 격동시키사 …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승리로 교만해진 다윗의 마음을 사탄이 충동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고 하나님은 그것을 묵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인구조사를 하려 했을까요? 그리고 왜 인구조사가 이렇게 심각한 죄가 되는 것일까요? 민수기에는 두 번의 인구조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필요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인구조사는 목적이 5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입니다. 한마디로 군인들의 숫자를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인구조사도 요압 장군이 맡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신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강력한 나라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실시한 것이기에 문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18:6절처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하십니다. 때론 적군의 숫자가 심히 많고 이스라엘 숫자가 적을지라도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구조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려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심각한 잘못입니다. 요압 장군도 인구조사가 하나님 앞에 범죄임을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듣지 않고 재촉합니다. 조사 결과 5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입니다.

다윗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도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특히 모든 일이 잘될 때 큰 승리와 성공을 거두었을 때 무너질 위험이 큽니다. 숱한 고난 속에는 오히려 하나님만 의지하고 인내했던 다윗이 승리를 거둔 후 교만이 자리잡게 되고,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잘 될 때, 성공의 삶을 살아갈 때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잘못에 대해 징계하시자 다윗은 즉시 회개합니다. 8절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고 합니다. 사울 왕은 잘못을 지적할 때 핑계하고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즉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15절)

​하지만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갓 선지자를 통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잘못을 징계하시면서 이처럼 선택권을 주시는 것은 특이합니다. 어쩌면 이 과정을 통해 다윗의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도록 하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 가지는 12절 “혹 삼년 기근이든지 혹 네가 석 달을 적군에게 패하여 적군의 칼에 쫓길 일이든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전염병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천사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이든지”입니다. 다윗은 세 번째를 선택합니다. 그 결과 전염병으로 14절 보면 칠만 명의 백성들이 죽습니다. 다윗의 잘못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죽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다윗도 17절을 보면 자신이 잘못했는데 많은 백성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나와 내 아버지 집을 치시고 백성들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두 번째 징계를 선택하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자신이 잘못했으니 자신이 적군의 칼에 쫓기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왕이 석 달간 적에게 쫓기는 상황은 전쟁의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적들이 다윗 왕만 잡으려 할까요?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을 것입니다. 삼 년의 기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를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13절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다가 15절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하십니다. 여기 “뉘우치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다윗의 고백처럼 긍휼을 베푸셔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구약에 하나님의 심판이 많이 나오기에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데, 그 아래 크게 흐르는 물줄기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천사가 서 있던 장소가 15절 하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곳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다윗이 짓고자 소망했던 성전이 지어지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다윗의 실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윗이 실패한 자리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성전이 지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십니다. 소망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하시며 소망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늘 자랑과 교만의 위험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니 늘 말씀으로 깨어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징계하시지만 반드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 소망으로 나갑시다.

역대상19:1-20:8절/너는 힘을 내라(25.06.19)

역대상19:1-20:8절/너는 힘을 내라(25.06.19)

●“내가 그의 아들 하눈에게 호의를 베풀리라”(2절)

​역대상 17장은 하나님과 다윗의 맺은 언약이고, 18장은 하나님께서 언약 맺은 다윗을 어떻게 강하게 하시는지로 이어집니다. 다윗이 동서남북에 있는 나라들을 종으로 삼고 조공을 바치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다윗과 이스라엘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주변 나라들에는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다윗도 여느 정복자들처럼 자신의 야망을 가지고 세상을 정복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19장은 왜 다윗이 전쟁을 하게 되는지 이유를 알게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상대 나라에서 전쟁의 빌미를 줍니다. 그들이 전쟁을 시작합니다.

먼저 암몬 자손과의 전쟁입니다.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 나하스가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다윗의 사울을 피해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런 호의를 경험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한 다윗은 나하스의 장례식에 조문 사절단을 보냅니다.

그런데 암몬의 신하들이 왕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절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말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절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존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의 신하들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정탐하여 전복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하는지라” 다윗의 순수한 호의를 의심의 눈으로 보라 봅니다. 이 땅을 염탐하고 정복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다윗의 영향력이 막강해지니 위협을 느끼고 피해의식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례식에 한 나라를 대표해서 조문 온 사람들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문제지만, 왕인 하눈은 신하들의 말을 믿고 조문단을 잡아 수염을 깎고 옷을 수치스럽게 잘라버립니다. 충격적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다윗이 듣습니다. 5절 하 “왕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합니다. 다윗이 이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18:14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라고 했는데 그런 모습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3절)

​암몬 자손들은 이 사건으로 다윗과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을 직감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은 천달란트를 아람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받습니다. 7절 “곧 병거 삼만 이천 대”라고 합니다. 18:4절 보면 다윗이 소바왕 하닷에셀을 치고 얻은 전리품이 “다윗이 그에게서 병거 천 대와 기병 칠천 명과 보병 이만 명을 빼앗고”라고 합니다. 병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병과 보병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병거 천 대도 작지 않은데, 병거가 “삼만 이천 대”라고 하니 규모가 엄청납니다. 거기다 분명 더 많은 숫자의 기병과 보병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도 작전을 짜서 암몬은 성 앞에 진을 치고 아람 군대는 들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 용맹을 떨친 다윗의 장수가 있으니 요압입니다.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지혜로운 작전을 세웁니다. 숫자적으로 불리하니 전면전을 피합니다. 대신에 10절 “이스라엘에서 뽑은 자 중에서 또 뽑아 아람 사람을 대하여 진을 치고” 최고의 정예 용사를 선발합니다. 기습작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생 아비새와 협력하여 작전을 진행합니다. 요압이 행한 두 번째 일은 13절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성읍을 위한 싸움이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싸움이니 힘을 내자고 합니다. 군사작전만이 아니라 군사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킵니다. 그 결과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16-19절은 패배한 아람 군대가 다시 연합군을 형성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 전쟁도 다윗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람이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모아 싸웁니다. 결과 다윗이 승리합니다.

20:1-3절은 요압이 암몬을 격파한 내용입니다. 이미 암몬과 전쟁에서 이겼지만 완전히 정복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왕이 전쟁에 나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요압이 나가고 20:1절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하11장을 보면 이때 밧세바와의 간음사건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이 내용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숨기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저자는 다윗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승리 주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언약을 맺으시고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4-8절은 블레셋 거인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장수들이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20:4절 “십브개가 키가 큰 자의 아들 중에 십배를 쳐죽이매”, 5절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6-7절에서는 큰 키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여섯 개씩 있는 괴물같은 거인도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죽였습니다. 결론은 8절 “가드의 키 큰 자의 소생이라도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다 죽었더라”고 합니다.

18-20장이 다윗의 전쟁과 승리에 관한 내용인데 시작이 블레셋이고(18:1), 마침 역시 블레셋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대적이 블레셋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된 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대적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다윗이 해냈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인들의 이야기를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수들이 용맹하게 거인들을 제거했습니다. 저자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고, 다윗의 장수들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요압의 고백처럼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힘을 내고 하루를 살아갑시다.

역대상18:1-17절/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25.06.18)

●“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1절)

​본문은 1절 “그 후에”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13장부터 시작된 법궤를 옮기는 일이 16장까지 이어졌고, 17장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영원히 견고하게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이 이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한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종됨을 고백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가시는지를 본문은 보여줍니다.

본문의 핵심은 두 번 반복되는 6절과 13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어디로 가든지, 어떤 대적을 만나든지 하나님은 다윗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다윗이 정복한 나라들이 등장하는데, 가장 먼저 “블레셋”입니다. 다윗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게 한 나라입니다. 대상10장에서 우리는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게 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블레셋이 다윗의 손에 정복을 당합니다. 블레셋은 지도상으로 이스라엘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은 “또 모압을 치매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인데, 모압은 이스라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압이 다윗의 종이 되었습니다. 3절에는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브라데 강 가에서 자기 세력을 펴고자 하매 다윗이 그를 쳐서 하맛까지 이르고”라고 합니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세력을 넓히고자 했던 곳은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입니다. 그곳까지 다윗의 영향력이 미칩니다. 5절 “다메섹 아람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이스라엘 위 북쪽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12절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쳐죽인지라”고 합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모든 지역을 다스렸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말이 “다윗의 종이 되니라”입니다(2,6,13). 어제 본문인 17장 후반부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반복적으로 고백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왕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종됨을 고백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많은 나라를 종 삼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세상은 어떻게든지 자신을 높이려 합니다. 자랑하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십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는 내가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13절)

다윗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얻는 것들이 본문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7절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8절 “심히 많은 놋을 빼앗았더니”, 10절 “하도람이 금과 은과 놋의 여러 가지 그릇을 가져온지라”, 11절 “모든 이방 민족에게서 빼앗아 온 은금과 함께 하여 드리니라”고 합니다. 많은 금과 은, 그리고 놋을 전리품으로 혹은 선물로 얻었습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렇게 모아진 금은동이 8절 하 “솔로몬이 그것으로 놋대야와 기둥과 놋그릇들을 만들었더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사용됩니다. 그래서 11절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라고 합니다. 당시 전리품은 승리한 사람의 몫입니다. 다윗이 가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드립니다. 승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은 성전을 지을 수 없지만 다윗의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자신을 이어 왕위에 오를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것인데 이 때를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성전이 빠른 시간 안에 건축됩니다.

14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라고 합니다. 다윗은 정의와 공의로 백성을 다스립니다. 다윗은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다윗의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일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다윗 자신이 하나님 나라 정신으로 이스라엘을 잘 다스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통치자의 방식인 억압과 착취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 정신인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 가득한 인생,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어디를 가든지 승리케해주셨습니다.

역대상17:16-27절/이 복을 영원히(25.06.17)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18절)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거절하십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 나라를 어떻게 세워주셨으며, 또한 앞으로 다윗 왕조를 어떻게 견고히 세우실 것인지를 말씀하시며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다윗의 집을 세워주십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이 마음에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감격의 기도를 올립니다. 16절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목동이었던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7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사오니” 먼 미래의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나 다 자신의 후손들이 계속 왕위를 이어가길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계획과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십니다. 그러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말 문이 막힙니다. 18절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주께서는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아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 놀라운 계획과 약속으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들이 많지만, “종”이라는 단어가 10회 반복됩니다(17,18,19,23,24,25,26,27).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당시 왕은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높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종”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십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높여주시고 견고한 왕조를 영원히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람들은 없는 것도 찾아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려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높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랑할 것이 많지만, 주장할 것이 많지만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로 여기까지 왔고 은혜로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종 됨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을 존귀케 하시고 책임져주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도 그렇습니다. 죽을 인생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연약한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책임져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은혜입니다.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20절)

다윗은 감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하신 일로 이어집니다. 이 세상에 이스라엘과 같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위대한 능력을 경험한 나라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크고 두려운 일을 애굽과 바로 앞에서 행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어제 하나님의 말씀처럼 성막에 거하시면서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게 하시고 나라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 역시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22절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백성들입니다.

어쩌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정체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실패와 절망인 것 같지만,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유일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현실과 그로 인한 내 마음의 생각을 붙잡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바라보아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고, 붙잡아야 할 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23-27절 말씀입니다. 반복해서 강조하는 내용이 23절 “여호와여 이제 주의 종과 그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입니다. 다윗의 왕조가 영원히 견고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는데 다윗은 왜 이렇게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일까요?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감격해서 그렇습니다. 놀라워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다시 필요한 사람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듯 보입니다. 다윗의 왕조가 이어지다가 남유다가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왕조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주시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이런 다윗의 기도를 통해 여전히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이 절망적인 현실 가운데서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이루어가십니다.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게 성취하십니다. 이를 통해 27절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다윗을 세우시고 다윗과 함께 하시며 다윗에게 영원한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까지의 은혜에 감사하고 앞으로 베푸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의 말씀 붙잡고 살아갑시다.

역대상17:1-15절/여호와가 너를 위하여(25.06.16)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1절)

13장부터 시작해서 16장까지 법궤를 옮기는 내용이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한 번의 실패 뒤에 점검하고 말씀을 따라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왕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17장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계획을 세웁니다. 성경 저자가 무엇을 중심으로 역대기를 기록하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누구보다 중요한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1절에 다윗은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습니다.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주하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14:1절을 보면 두로 왕 히람이 배향목을 보내고 기술자들을 보내 다윗 왕궁을 건축해주었습니다. 외교적인 목적을 위해 지어주었기 때문에 분명 크고 화려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16:39절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는 “기브온 산당 여호와의 성막”에 놓여져 있습니다. 성막을 이동식 텐트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귀합니다. 자신이 크고 화려한 집에 거주한다면 자랑할 만도 하고 편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인데, 하나님의 성막과 그 곳에 놓인 언약궤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갖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들은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당연히 좋게 여기고 2절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3절 “그 밤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4절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건축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본문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5-10절까지 내용을 보면 지금은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 다윗의 왕위와 이를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견고히 세워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상22:8절을 보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을 굳건히 세우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렀고 당연히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 다윗이 평화의 상징인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한 왕조를 세울지라”(10절)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또한 앞으로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셔서 광야를 지나 지금까지 인도하시면서 집에 거하지 않으시고 5절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크고 화려한 집이 아닌 이동식 텐트인 성막에 거하셨습니다. 이유는 이동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역대하6:18절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성막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성전을 지었지만 이 성전도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장소라는 겁니다. 심지어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하나님을 모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기꺼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작은 성막에 함께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하나님을 위해 백향목 집을 건축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양을 치던 다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주권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셔서 8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고 하십니다. 다윗을 높여주시고, 그 이유는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10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한 왕조를 세울지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은 “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찌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 집을 세우겠다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집을 세워주신다는 말씀이 12절 하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입니다. 누구도 빼앗거나 흔들 수 없도록 견고한 나라, 왕위가 이어지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십니다. 다윗 이후 남유다는 위기 속에서도 다윗의 후손을 통해 왕위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나라가 멸망하였지만, 이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려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집을 세워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