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13:1-14절/궤를 옮겨오자(25.06.11)

역대상13:1-14절/궤를 옮겨오자(25.06.11)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3절)



역대상을 통해서 보면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된 후 처음으로 한 일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입니다. 이 내용은 삼하 6장에도 나오는데, 차이점은 사무엘하 내용은 다윗이 주도적으로 궤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윗이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온 회중”(1,4), 온 땅(2), 온 이스라엘(5,6)이 반복됩니다. 왕이지만 명령이 아닌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중요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2절 앞부분을 새번역으로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좋게 여기고 우리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입니다. 다윗은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리고 백성들이 좋게 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 두 가지는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멈추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사람들과의 의논과 동의를 얻어 진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물론 진리에 대해서는 타협과 양보가 있을 수 없지만, 많은 문제들은 진리가 아닌 문제를 일방적으로 진행할 때 일어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이유는 3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묻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지금 하나님의 궤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삼상 4-7장을 보면 길게 하나님의 법궤가 어떻게 블레셋 땅으로 가게 되었고, 또한 어떤 과정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와 기럇여야림에 오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법궤 사건이 이스라엘 신앙의 현주소를 알려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상징하는 법궤마저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법궤는 기럇여아림 아비다납의 집에 20년 동안 있게 됩니다(삼상7:2절). 문제는 사울이 법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윗은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대상10:14절은 사울의 죽음과 실패를 이야기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고 합니다. 사울의 실패 원인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으로 통치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통치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결과는 실패입니다. 비록 작은 일을 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사울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자 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자신이 왕이지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묻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14절)



궤 옮기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5절 “다윗이 …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절 “다윗이 …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함부로 만져서도 아무렇게나 옮겨서도 안 되고 반드시 레위 자손이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7절에 가면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그리고 수레에 실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서 웃사라는 사람이 죽게 됩니다.

수레에 싣고 가는데 소들이 뜁니다. 법궤가 넘어지려 합니다. 수레를 몰던 웃사가 자동적으로 손을 들어 궤를 붙잡았습니다. 궤를 넘어지지 않게하려는 좋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치시고 죽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일이어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수레에 궤를 싣고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수레에 옮겼을까요? 쉽게 설명하는 우리도 말씀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실용성과 편리함 때문입니다.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도보로 약 14km정도의 거리로 3-4시간을 이동해야 합니다. 궤를 어깨에 메고 가는데는 보통 수고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용적으로 수레가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편리하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법궤가 돌아올 때 블레셋 사람들이 암소 두 마리가 모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 보냈습니다. 지금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합니다. 즉 다윗과 이스라엘이 좋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기준이 섞여 있습니다. 자신들의 편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해서 적용합니다. 문제는 시작하고 있는 다윗 왕국에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다윗 역시 사울의 길을 가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깨닫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12절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뜻대로 법궤가 함께 한다면 그것을 복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예루살렘으로 옮겨가지 못한 법궤는 오벳에돔의 집에 머뭅니다. 그 결과는 14절 하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진노가 아닌 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관계, 즉 말씀과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크심과 두려우심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을 따라 행합시다.
[출처] 역대상13:1-14절/궤를 옮겨오자(25.06.11)|작성자 늘봄교회

역대상12:1-40절/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25.06.10)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2절)

다윗과 함께 했던 충성스런 용사들이 이야기가 11장에 이어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1-22절까지는 다윗이 사울에 의해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을 때 다윗에게 나온 용사들에 관한 내용이고, 23-40절까지는 유다를 다스리며 헤브론에게 있던 다윗에게 모든 이스라엘 용사들이 나와 통일왕국의 왕으로 세운 이야기입니다.

1절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역대기는 사울이 어떻게 해서 왕이 되었으며, 어떻게 통치를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죽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절은 사울로 인해서 다윗이 숨어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사울은 왕이고 다윗은 도망자입니다. 그런데 도망자로 숨어 있는 다윗에게 용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2절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입니다. 우리나라도 지역 성향이 강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자파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사울이 베냐민 지파이고, 그렇다면 베냐민 지파가 전폭적으로 사울을 지지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상당수가 다윗에게 나옵니다.

16절도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오매”라고 하면서 베냐민 지파가 다윗에게 나왔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윗이 속한 지파인 유다 지파와 함께 나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가 왕의 자리를 놓고 갈등 관계가 아니라 하나됨을 이루었음을 강조합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왔다는 것은 이들이 지역감정이나 혈연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를 깨닫고 순종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깨어있는 생각, 바른 생각들이 다윗이 통치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8절은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 용사들이 얼마나 용맹스러운지를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윗에게 나온 때는 다윗이 “광야 요새”에 있을 때입니다. 1절에 나온 용사들은 다윗이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였고, 16절도 “요새”에 있을 때이며, 20절도 “시글락”에 있을 때입니다. 즉 이들은 왕이 된 다윗이 아닌, 도망자였던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환경이요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마음을 다윗에게로 향하고 충성했던 용사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 나라로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용사들이 함께 다윗에게 나오자 다윗이 묻습니다. 17절 “만일 너희가 평화로이 내게 와서 나를 돕고자 하면 내 마음이 너희 마음과 하나가 되려니와” 도망자인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다윗은 이들이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배신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그러자 우두머리인 아마새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렇게 답합니다. 18절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알았고, 그런 다윗과 함께 하기를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나라를 이룬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22절)

대표적인 이야기가 19절에 나옵니다. 이 한 절은 삼상29장을 요약해 놓은 내용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으로 이스라엘에 남아 있을 수 없어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 이때 블레셋 왕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다윗이 함께 출정하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 다윗의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장수들이 거세게 반대합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에 함께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전쟁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왕으로서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22절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다윗과 함께 하시니, 비록 도망자의 신세이지만 돕는 용사들이 늘어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합니다.

23절부터는 헤브론에서 다윗을 통일왕국의 왕으로 추대할 때 나온 각 지파 용사들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의 숫자와, 다른 지파 특히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숫자를 비교하면 됩니다. 24절 유다 지파 용사 숫자는 6,800명입니다. 그런데 30-31절 에브라임 용사 숫자는 20,800명입니다. 므낫세는 18,000명입니다. 유다 지파에 비해서 아주 많은 숫자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유다 지파만의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왕이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38-40절은 사흘 동안 진행된 왕 즉위식 잔치를 설명하는데, 38절 “다 한 마음으로 다윗을 왕으로 삼고자 하여”라며 “한 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40절 하 “이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기쁨이 있음이었더라”로 마칩니다.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갑니다. 이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또한 다윗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좋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나온 용사들의 충성스러움,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충성이 모아져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갑니다.

빌립보서2:19-30절/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25.05.27)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19절)

사도 바울은 앞부분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기 위함입니다(14).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빌립보교회에 사역자를 보내기를 원하는데,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상당히 길게 설명합니다. 읽다 보면 에바브로디도로 인해 빌립보교회 안에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 같고, 그것을 염려한 바울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19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소식을 들은 것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를 25절 하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즉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동시에 빌립보교회 소식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빌립보교회를 향한 걱정이 생긴 듯 합니다. 그래서 “속히”(19,24)라는 단어를 사용해 디모데를 보내기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직접 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디모데를 선택했을까요? 20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합니다. 빌립보교회에 문제가 있는데, 교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유익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 처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핵심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자기 유익이나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일에 적임자가 디모데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 예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일, 즉 이익과 영광을 구합니다. 지금도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교회를 흔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들은 교회 문제에 개입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뜻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예수님의 일을 구하는 자요, 교회를 생각하는 자요, 특별히 바울과 뜻을 같이하는 자입니다. 디모데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이런 성숙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영적인 아들로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처럼 신실한 사역자 디모데를 빌립보교회로 보내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가서 사정을 듣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해결책도 제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지만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과 열정이 놀랍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29절)

바울은 장기적으로는 디모데를 보내려고 하지만, 지금 바울이 보내려는 사람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래서 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바울의 소개처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 즉 빌립보교회에서 모아진 선교헌금을 바울에게 전달하고 교회 소식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희 사자”라고 합니다. 여기 사자는 원어로 ‘사도’인데 한마디로 빌립보교회 사역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잘 알고, 교회로 돌아가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마땅한데 왜 여기서 이렇게 길게 소개를 하고 설명을 하는 것일까요?

본문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교회에 갈등이 생긴 듯 합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로 인한 갈등은 심각한 문제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문제점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26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었습니다. 27절을 보면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그것도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전달한 후 이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근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26절 하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면 교회가 근심하고 기도해주어야 할 것인데, 에바브로디도가 심히 근심합니다. 여기 “근심”이라는 단어는 심각한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근심의 이유가 자신이 병든 것을 교회가 알았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선교헌금을 가지고 멀리 있는 바울에게 간다고 했을 때 건강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연약한 상태였는지 알 수 없지만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사랑하고 섬기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는데, 긴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병들게 되었고 사경을 헤매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교회가 들었을 때 분명 두 가지 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거 봐라, 왜 우리 말 안듣고 고집을 피우더니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그런 것이냐? 바울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병에 걸린 것이니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그냥 예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서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특히 바울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서 고쳐주심으로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우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에바브로디도가 가면 기쁨으로 맞이해서 자신이 근심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책망이나 비난 대신 29절 하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0절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에바브로디도 질병에 대한 바울의 시각이고 해석입니다. 누군가는 문제라고 하지만, 사실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신을 섬긴 것이며,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 감당한 것이므로 오히려 감사하고 격려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 은혜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감당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2:1-20절/큰 기쁨의 좋은 소식(25.02.11)

누가복음2:1-20절/큰 기쁨의 좋은 소식(25.02.11)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7절)

 

1장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중심이었다면 2장은 드디어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천사는 이미 마리아에게 이렇게 알렸습니다. 1:31-32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그렇습니다. 태어나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주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십니다. 그렇다면 영원하신 성자는 어디에서 태어나셔야 하며, 누구의 환영을 받아야 할까요? 당연히 가장 좋은 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의 화려한 축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세상을 다스리던 자는 로마제국의 아구스도 황제입니다. 그가 내린 명령은 1절 “천하로 다 호적하라”입니다. 한마디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는 것인데, 목적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도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합니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기에 살던 곳인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을 향하여 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슬픔의 땅입니다. 창35:19절을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죽자 베들레헴에 묻었습니다. 삿19장에는 비극적인 사건인 레위인의 첩 사건이 나오는데,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여인의 고향이 베들레헴입니다. 이런 베들레헴이 미가5: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가장 작은 곳, 슬픔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예언이 성취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슬픔의 장소가 10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장소가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는 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 세상 황제의 통치 아래서 가장 보호를 받아야 할 산모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거기다 이 가정이 머물 객실이 없어서 아이를 낳았는데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나귀나 말을 키우는 공간과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세상 임금이 머무는 화려한 궁궐과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뉘이신 구유가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앞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을 이루어가실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가시고, 소외되고 버림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이 되실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14절)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자들도 밤중에 밖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누가복음은 당시 낮은 신분인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주의 영광을 비춥니다. 목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이때 천사가 말합니다. 10절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7절까지의 내용은 가장 슬픈 소식입니다. 산달이 임박했음에도 황제의 명령을 따라 호적을 하러 가야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출산을 하게 되며 좋은 방이 없어 짐승과 함께 머무는 곳에서 아이가 태어나 구유에 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천사는 이 일이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태어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합니다. 여기 “구주”, “주”라고 하는데 태어나신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당시는 당연히 황제를 ‘큐리오스’, 즉 ‘주’라고 고백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황제가 아닌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1:78-79의 말씀 처럼 돋는 해처럼 떠올라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출 것입니다. 빛으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평강으로 채워주십니다. 목자들이 경험한 것도 그렇습니다. 어둔 밤에 주의 영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무섭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보여줍니다. 목자들에게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이가 표적이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하고 수많은 천군 천사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장면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며,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모습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을 수많은 천군 천사가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고 찬양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 영광일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영원하신 주님이 인간의 유한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고, 한 여인의 배속에 머무시다고 갓난 아이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신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결국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실 것입니다. 이 일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큰 슬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종노릇하며 신음하는 백성들을 외면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구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정한 목자가 되십니다. 주인이 되십니다. 빛과 생명이 되시고 평화가 되십니다. 슬픔의 변하여 큰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주님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됩시다.
[출처] 누가복음2:1-20절/큰 기쁨의 좋은 소식(25.02.11)|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14:1-15절/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25.01.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2절)



14-19장까지는 요단 서편 땅 분배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장 먼저 14장에서 갈렙이 땅을 분배 받고, 이어 15장은 유다 지파가, 16-17장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그리고 18-19장은 나머지 일곱 지파가 분배받는 내용입니다.

요단 동편은 모세가 가족의 숫자를 따라서 분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요단 서편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눌까요? 1절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분배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 엘르아살와 여호수아 그리고 12지파 족장들이 함께 분배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제사장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보면 지금까지 땅을 차지하는 과정도 하나님의 전쟁이었던 것처럼, 땅을 분배하는 것도 신앙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땅입니다.

분배 기준은 “제비뽑기”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민34:13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는 너희가 제비 뽑아 받을 땅이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아홉 지파 반 쪽에게 주라고 명령하셨나니”라고 합니다. 5절도 다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고 합니다. 힘들게 차지한 땅입니다. 어떤 땅을 차지하느냐가 지파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비뽑기를 통해 모든 과정과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분배에 대한 설명 중에 다시 레위 지파와 관련된 내용이 두 번 반복됩니다. 강조점은 3절 하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에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절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입니다. 13장에서도 두 번이나 레위 지파 관련된 내용이 나왔습니다(13:14,33). 13장에서는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고 화제물이 기업이 되며, 하나님께서 기업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기업을 주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지금 땅을 분배받는 12지파가 레위 지파의 기업을 책임져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말씀 공동체입니다. 이 중요한 사명을 맡은 이들이 레위 지파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12지파가 레위 지파를 하나님께서 명령한 방법대로 기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채워주어야 합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복된 공동체로 세워지는 길입니다. 만약에 나만 잘 살겠다고, 풍요 누리겠다고 외면한다면 결국 이스라엘은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질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실패하는 길입니다. 이런 일들이 안타깝게도 말라기 시대에 일어납니다. 예배가 무너지고 신앙은 형식화되고, 영적인 어둠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만 편하고 잘 살겠다고 살아간다면 사실은 모두가 실패하는 길입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을 수고스럽지만 감당하며 서로를 세워줄 때 함께 복된 삶이 됩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과 희생을 통해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풍요를 누립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12절)



가장 먼저 땅을 분배받는 사람은 갈렙입니다. 한 지파가 아닌 한 사람이 먼저 분배받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갈렙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와 45년 전 모세가 했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12정탐꾼 사건입니다. 그때 갈렙의 나이 40세였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들이 선발되어 가나안 땅을 정탐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40일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보고 내용이 나뉩니다. 10명의 정탐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 차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14:8-9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본문 7절에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라고 합니다. 또한 8절은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갈렙은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45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10절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자신이 생명을 유지한 것 역시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4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85세가 되었습니다. 분명 육신의 노쇠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렙의 믿음은 더욱 견고합니다. 더 확신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이가 문제가 아니요 믿음이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청합니다. 12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갈렙이 요청한 땅을 헤브론입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차지하기 쉽지 않은 땅을 요청합니다. 12절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두려워했던 아낙 자손이 있는 땅, 크고 견고한 성읍입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물리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갈렙이 가장 먼저 기업을 차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14절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우리의 신앙이 갈렙과 같기를 소망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견고하고 확신 넘치는 신앙, 육신은 늙어가지만 영적으로는 더 생명력 넘치는 신앙, 언제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신앙이 됩시다.
[출처] 여호수아14:1-15절/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25.01.22)|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15:1-19절/내게 복을 주소서(25.01.23)

●“또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1절)



땅 분배가 시작된 13장은 요단 동편 땅이, 14장은 가장 먼저 갈렙이 땅을 분배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갈렙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갈렙의 신앙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어서 15장부터 본격적으로 각 지파에 대한 분배가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분배받는 지파는 누구일까요? 바로 유다 지파입니다. 첫 번째로 분배를 받는다는 것은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심 지파임을 알게 합니다. 광야를 행진할 때도 유다 지파가 앞장섰습니다.

이미 창49:8-12절에는 야곱이 유다에게 남긴 유언이자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창49:10절은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유다 지파에서 통치자가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처럼 유다 지파에서 위대한 왕인 다윗이 등장하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야곱의 아들 중 하나님께서 장자로 인정하신 아들은 “요셉”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한 지파씩을 차지합니다. 대신 중심이 되는 지파는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가 제비를 뽑아 분배받은 땅의 경계는 다른 어느 지파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쪽은 에돔에 이르고 동쪽은 염해입니다. 그런데 5-12절까지는 북쪽 경계에 대한 내용이 아주 길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염해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는 6절 “벧 호글라”에서부터 경계를 따라 왼쪽으로 예루살렘(8), 기럇여아림(9), 벧 세메스(10), 에그론(11), 얍느엘(11)입니다.

북쪽 경계를 상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다른 지파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한민족이니 적당히 서로 양보하면서 잘 살아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분명한 경계를 정해주십니다. 내 땅의 경계가 중요하다면 다른 지파의 경계도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됩니다. 잘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땅의 경계를 묵상하다 보니 사람 사이의 경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넘지 말아야 할, 지켜야 할 경계가 있습니다. 친하다고 함부로 경계를 넘나들고,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하게 되면 결국 관계는 깨지게 됩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 경계를 잘 알고 지켜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중요합니다.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19절)



13-19절까지는 다시 갈렙의 이야기입니다. 어제 본문 14:12절에서 이 산지를 달라고, 아낙 자손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쫓아낼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라고 합니다. 헤브론에 있었던 아낙의 세 아들 이름이 나옵니다. “세새, 아히만, 달매”. 이 이름은 민13:22절에도 나와있습니다.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민13장은 12정탐꾼이 가나안땅을 정탐한 내용인데 이 아낙자손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했고 보고하면서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10명의 정탐들은 가나안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왔습니다. 그때로부터 45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는 갈렙이 이들을 쫓아냅니다. 이렇게 쫓아낼 수 있는 대적들을 그때 두려워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 가나안땅을 차지하기까지도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갈렙은 이어 드빌을 점령하는데 자신이 직접 나가지 않고 드빌을 점령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합니다.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등장해서 드빌을 점령합니다. 옷니엘은 사사시대 첫 번째 사사로도 활동합니다. 약속대로 갈렙은 악사를 옷니엘에게 아내로 줍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인 18-19절 내용이 모호합니다. 악사가 출가하면서 남편에게 이야기해서 아버지 갈렙에게 “밭을 구하자”라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갈렙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19절 “내게 복을 주소서”라고 하면서 “샘물도 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15:1-12절까지는 유다 지파의 경계에 대한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63절은 유다 지파 성읍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 13-19절의 갈렙과 옷니엘 그리고 악사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분배받은 땅들을 어떻게 차지해야 하는가? 과연 어떤 사람이 복을 누리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앞으로 분배받은 땅을 정복해야 할 다른 지파들에 모범을 삼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갈렙은 14:12절에서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했고, 악사는 “밭을 주소서, 복을 주소서, 샘을 주소서”라고 합니다. 아버지 갈렙의 “이 산지를 주소서”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받아 누립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움 가운데 나를 작게 여기는 자가 아니라 어떤 장애물과 문제 앞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출처] 여호수아15:1-19절/내게 복을 주소서(25.01.23)|작성자 늘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