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5:1-19절/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25.11.24)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1절)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는데 4장에서는 외부적, 내부적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대적들이 조롱하며 비웃더니 이제는 직접 공격해서 공사를 멈추게 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두려움 속에서 공사를 더 진행하기 힘들 것 같다고 낙심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당하자고 독려했습니다(4:14절). 이를 힘입어 백성들이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일을하며 성벽 공사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더 심각한 내부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문제는 자칫 어렵게 이끌어오던 성벽 재건 공사를 멈추게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 넣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처럼 삶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어떻게 해결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백성들이 누군가를 원망하며 크게 부르짖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입니다. 이들의 원망 대상은 이방인들이 아닌 형제 유다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요? 백성들은 울며 자신들의 형편을 이야기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먹고사는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핵심은 7절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라고 느헤미야가 지적합니다. 양식을 빌려주며 높은 이자를 받고 심지어는 자녀들을 종으로 삼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레25:35-36절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라고 합니다. 레25:39절도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동족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지 않고, 종으로 부려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 문제의 뿌리에는 신앙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기득권 세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자녀가 많은데 먹을 것이 없어 양식을 빌어 먹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흉년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또는 세금을 바치기 위해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힙니다. 자녀들을 종으로 파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할 힘이 이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되어 공사를 감당해도 쉽지 않은데 큰 문제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요? 6절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분노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7절 “깊이 생각”합니다. 흥분해서 백성들의 이야기만 듣고, 혹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만 보고 결정해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멈춰서서 기도하며 생각합니다. 근본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찾습니다. 느헤미야는 신중하고 지혜로운 지도자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7절)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부르짖게 한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대회를 열고 그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합니다. 이것은 위험부담이 있는 일입니다. 기득권 세력이 반기를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단호하게 처리합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잘못을 몇 가지로 지적합니다. 9절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방인들이 조롱하고 있는데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백성들이 나누어지고 공사가 중단된다면 이방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세상과 다름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9절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라고 합니다. 이것은 돈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라는 겁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이자 받기를 그치고, 받은 이자를 돌려주자고 합니다. 그러자 감사하게도 12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들을 불러 맹세를 하게 하고 옷자락을 털며 경고합니다. 이 말대로 행하지 않는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과 산업 모두를 털어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이 경고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큰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자기 이득을 채운 귀족과 민장들과 다른 느헤미야의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 12년 동안 총독의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전 총독들의 모습과는 완전 다른 것입니다. 총독들은 백성들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은 40세겔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빼앗았다는 표현을 통해서 보면 세금을 많이 거두어 일부는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한 것입니다. 아랫사람들 역시 백성들을 압제하였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오히려 희생하며 섬깁니다. 백성들과 함께 먹고 나눕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5절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하는 형제와 지체들을 이익의 도구로 생각할 때 공동체는 위기를 맞습니다. 하나님 나라 정신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욕심이 앞설 때도 그렇습니다. 느헤미야가 아름다운 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체들을 섬김과 사랑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2:1-20절/하나님의 선한 손이(25.11.21)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4절)

​예루살렘의 환난과 능욕에 대한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기슬르월(1:1)에서 니산월(2:1)까지 4개월을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중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느헤미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려면 왕의 허락해야 하기에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1:11절).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왕에게 포도주를 드리는데 왕이 묻습니다. 2절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느헤미야는 비록 이방 땅에서 이방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일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로 생각하고 기쁨으로 감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수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기쁨으로 감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얼굴에 근심 빛이 보이니 왕이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일터에서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는 그 자리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기쁨과 감사함으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당시 왕 앞에서 얼굴에 근심 빛을 띠는 일은 자칫 죽음을 초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두려워하면서도 이유를 대답합니다. 3절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느헤미야의 대답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왕을 섬기는 자가 이전에 멸망한 조국을 걱정하면서 재건을 꿈꾸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은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4절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합니다. 지금까지 성경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지만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사실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근심어린 얼굴에 왕이 분노대신 걱정하며 이유를 묻고,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느헤미야의 대답에 흔쾌히 도움의 손을 내밉니다. 8절 하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라는 말씀처럼 이 모든 과정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선한 손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는 단어는 없지만 고레스를 감동하시고, 다리오를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도 감동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의 물음에 4절 하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 앞에서, 짧은 순간에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미 그의 생각 속에는 모든 계획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지혜와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세 가지를 요청합니다. 첫 번째는 5절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자신이 직접 가서 성을 재건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7절 “조서를 내게 주사 그들이 나를 용납하여 유다에 들어가기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가는 길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요청합니다. 세 번째는 삼림 감독에게 조서를 내려 재건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해주기를 요청합니다. 이 과정에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십니다. 왕이 허락합니다. 뿐만 아니라 왕은 군사를 동원해서 느헤미야가 가는 길을 보호해줍니다. 1차와 2차 귀환은 몇 명이 돌아왔는지 구체적인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만 3차 귀환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황상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위해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소수의 사람이 귀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반드시 도우십니다.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18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3일을 쉰 후 예루살렘을 돌아봅니다. 이때 12절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느헤미야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16절 하 “…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라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말하지 않고 신중하게 일을 진행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것과 예루살렘 현장을 돌아보면서 계획을 구체화해서 시작하려 합니다. 아마 이때도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는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느헤미야의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본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말이 앞서고, 말이 많아지다 보면 혼란과 오해가 발생합니다. 말보다는 먼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가장 합당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드디어 때가 되자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독려합니다. 17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또한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신 일과 왕의 허락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힘을 내어 일어나 건축하자고 합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일들이 새로 시작됩니다. 문제 앞에서 누구를 탓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한 사람을 통해 무너졌던 곳이 다시 세워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과거 성전을 건축할 때도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중심이 되어 방해합니다. 이들이 느헤미야와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이들의 방해에 대처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방해가 있습니다. 일이 중대하면 중대할수록 방해도 거셉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사탄이 사람을 통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만나면 올 것이 왔다는 마음으로 잘 해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도우십니다.

문제를 지적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고, 혹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느헤미야는 자신이 짊어지고 수고와 희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한 손으로 도우십니다.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느헤미야1:1-11절/종의 기도를 들으소서(25.11.20)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4절)

​에스라 묵상 후 학개서를 마치고 느헤미야서를 묵상합니다. 원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권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이렇게 진행됩니다. 에스라서 전반부는 1차 귀환과 성전 재건을, 후반부는 2차 귀환과 공동체 신앙 재건을, 그리고 느헤미야서는 3차 귀환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즉 다시 세우는 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느헤미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시다”입니다. 1절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라고 하면서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를 알려줍니다. 이때는 BC444년으로 에스라 2차 귀환 후 14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입니다. 수산궁은 페르시아 왕들이 계절마다 돌아가며 머무는 별장으로 겨울 별장입니다. 느헤미야가 왕궁에 있는 이유는 11절 하 “왕의 술 관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많았기에 왕의 음식과 음료를 담당하는 자들은 신임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왕의 가장 가까이에서 국정도 의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리입니다.

유대인으로 포로 생활하던 느헤미야가 그런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성전이 무너진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은 약14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할아버지가 포로로 끌려와서 아버지를 낳고, 느헤미야가 태어났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느헤미야는 이방 땅에서 태어나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예루살렘의 형편과 그곳 백성들의 삶이었습니다. 마침 형제 하나니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왔기에 그곳 형편을 물어보니 3절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고 합니다. 지금 상황은 1차 귀환과 2차 귀환이 이루어졌고 이미 성전도 완공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성벽과 성문들이 허물어지고 불에 타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주변 기득권 세력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능욕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예루살렘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는 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도의 모습이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기도”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현재 비록 이방 땅이지만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고국의 소식이 안타깝지만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몇 번 기도해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붙잡고 기도하며,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됩니다. 어떤 문제를 들었을 때 판단하고 정죄하기가 쉽습니다. 냉정한 분석에 근거해서 해결책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됩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11절)

​4-11절까지가 느헤미야 기도 내용입니다. 여기에 느헤미야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어떤 언약 관계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회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5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라고 합니다. 학개서에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하늘의 하나님”이 반복됩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느헤미야는 비록 대제국 페르시아 왕의 관원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어 느헤미야는 에스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자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조건 문제만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 안에서 발견하고 기도합니다.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간구하게 됩니다.

이어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회복을 간구합니다. 9절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던 느헤미야의 기도가 11절 끝에서는 특이한 간구를 합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여기 “이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입니다. 왜 갑자기 아닥사스다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느헤미야는 긴 시간 기도했습니다. 1:1절 기슬르월에 시작해서 2:1절 니산월까지 약 4개월간 기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으로 시작된 기도가 계속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고국 백성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눈물로 기도하던 느헤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꿈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왕의 술관원이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는데 왕이 싫어하면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가 왕비임에도 왕 앞에 함부로 나가지 못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느헤미야의 사명은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거절하거나 핑계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고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바로 왕에게 은혜를 입게하셔서 허락을 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울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의 아픔과 문제, 공동체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 가운데 내가 해야 바른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학개2:10-23절/그러나 오늘부터는(25.11.1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14절)

​학개서는 선지자에게 말씀이 임한 날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인 임한 날은 다리오 왕 제이년 6월1일입니다(1:1절). 중단된 성전 건축을 시작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였습니다. 선지자의 권면을 통해 6월 24일에 성전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1:15절). 그리고 2:1절에서는 7월21일인 초막절 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작고 초라한 성전을 보면서 실망한 백성들을 에게 “힘을 내라,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이 임한 날이 9월24일입니다. 그렇다면 성전 공사가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때가 어떤 날인지를 18절은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날 백성들을 독려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거룩한 고기를 옷자락에 쌌다면 그 거룩한 고기가 닿는 곳이 거룩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제사장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맞는 대답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반대로 시체를 만져 부정하여진 사람이 물건을 만지면 부정하여지겠는가입니다.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부정한 것이 접촉하면 당연히 부정해집니다.

이 대답 끝에 하나님은 14절 말씀을 하십니다. “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핵심은 부정함입니다.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이 드리는 예물과 행위가 부정하다는 겁니다. 성전의 기능이 죄를 정결케하는 것인데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성전의 중요성과 우선성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결과가 16-17절입니다. 열심히 농사하여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였지만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손으로 수고한 곡식들에 재앙과 우박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1:5-9절에서도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우선되지 않을 때 백성들의 삶에는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제부터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오늘”이라는 단어의 반복으로 강조합니다(15,18,19). 오늘을 기점으로 이전과 앞으로는 비교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이 어떤 날이기에 분기점이 되는 것일까요? 18절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입니다. 성전의 기초를 놓는 날입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3장에서 성전 기초를 놓았다고 했습니다(스3:10절). 하지만 오랜 시간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 이년 6월24일에 공사가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난 9월24일, 바로 오늘에 그동안 진행된 공사를 공식적으로 인준하는 기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날이 기점이 됩니다. 19절 하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복의 중심에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과 바른 관계, 죄의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오늘 바로 복된 날이며, 복된 삶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 성전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은혜를 기억하게 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부정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어주시므로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풍성히 받은 자들입니다(엡1:3절).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19절)

​9월 24일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대상은 총독인 스룹바벨입니다. 21절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6-7절에서도 하나님은 온 세상과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흔드셔서 모든 나라의 보배가 성전에 가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하늘과 땅을 흔드시는 이유는 스룹바벨을 우뚝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뜻을 이루시기 위해 흔들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흔드시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와 사람일지라도. 반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아무리 연약하여도 굳건하게 우뚝 서게 됩니다.

스룹바벨을 어떻게 세우시는가? 23절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스룹바벨 세우시고 ‘인장’ 즉 왕의 도장으로 삼으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성전 건축의 책임을 지고 외부적, 내부적 어려움 속에서 감당하는 지도자 스룹바벨에게 힘과 소망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예수님께서 성취하실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 해결하시고,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이 분기점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바로 오늘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학개2:1-9절/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25.11.18)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3절)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이때가 1절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리오 왕 2년(BC520년) 6월1일에 학개 선지자 통해 오랫 동안 멈추었던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1:1절). 이 말씀을 듣고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가 1:15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이십사일”입니다. 그리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난 7월 21일에 하나님은 다시 말씀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성전 건축을 시작하고 백성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7월 21일은 초막절 절기를 지키는 때입니다. 7월은 유대인 달력으로 한해를 시작하는 달이고 15-21일에는 초막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막절 절기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초막절은 에스라 3장에서도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7월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여 지켰던 절기입니다. 말 그대로 ‘초막’, 즉 풀로 만든 텐트에서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요, 출애굽하고 광야 40년을 초막에서 생활하였습니다. 황량하고 위험이 가득한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다는 것을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도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과 머무시며 동행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 백성으로 여기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과거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을 건축하면서 발생 된 문제가 무엇이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3절에서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전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을 찾으십니다. 아마 포로에서 귀환한 소수의 나이 많은 사람들이 과거 솔로몬 성전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신 것은 지금 짓고 있는 스룹바벨 성전이 이전 성전과 비교하면 작고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물음이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입니다.

이전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의 눈에 지금 성전은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에스라3:12절에서도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 첫 성전을 보았던 나이 많은 족장들이 대성통곡을 했는데 그 이유가 감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전의 규모를 비교하면서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말이 백성들 사이에 퍼져가면서 많은 백성들의 마음에 기대가 사라지고 실망감이 자리 잡았습니다.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외부 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면 이제는 내부의 절망으로 멈출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전의 규모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 이전에 하나님은 광야에서 성막이라는 이동식 텐트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이 작은 성막에 기쁨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규모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백성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전 성전과 현재 성전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비교의식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 건물의 크기로, 사람들의 많고 적음으로, 뿐만 아니라 비록 연약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도의 영광을 기억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면서 실망하고 패배 의식에 빠지지 않습니까? 비교의식을 버리고 영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4절)

​이런 문제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4절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한마디로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1:14절에서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수아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힘을 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4절 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젠 본문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반복되었는데,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4,6,7,8,9). 능력의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니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 앞에 멈추지 말고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내어 전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백성들의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스룹바벨 성전을 어떻게 회복시키실까요? 6-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진동시키시고,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시겠다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흔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흔들면 아무리 대제국이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면 아무리 작은 나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온 세상과 나라는 흔드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보배를 충만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과거 솔로몬 성전에는 나라가 부강하므로 많은 보물들로 가득했습니다. 그것이 성전의 영광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 성전도 그렇게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8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9절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하십니다. 또한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혹시 내 인생,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가 보잘것없다고 생각이 되시나요?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게 하실 것입니다. 평강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굳세게 나아갑시다.

학개1:1-15절/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25.11.1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2절)

​우리는 에스라 4장을 통해 1차 귀환했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대적들의 방해로 중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스4:4-5). 그 기간이 약15년 정도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백성들은 귀환 목적을 상실하고 각각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분주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귀환 목적인 하나님의 성전 건축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등장한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오늘부터 묵상하는 학개서는 당시 학개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기는 1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라고 합니다. BC520년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를 통해 지도자인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전달됩니다. 백성들이 협력하지 않자 지도자들 역시 동력을 상실하고 주저앉아 있는 상황입니다. 선포의 시작은 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만군의 여호와”가 자주 반복됩니다(2,5,7,9,14). ‘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군대의 하나님으로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백성들은 말합니다. 2절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아직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백성들의 핑계였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들의 관심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자신들의 집이었고, 풍성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 “판벽한 집”, 즉 잘 꾸며진 집에 거주합니다. 6절 많이 뿌립니다. 많이 수확하기 위함입니다. 9절도 많은 것을 바라고 소망합니다. 이제 자신들의 삶이 우선이 되었고 귀환 목적이었던 하나님의 성전은 나중이 되었습니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성전 건축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건물이 세워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우리 힘으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말씀은 5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입니다. 7절도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고 하십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요,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환경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살펴보아야 할까요? 6절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주소입니다. 한마디로 많은 수고는 하지만 만족과 기쁨이 없는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9절도 많은 것을 바라지만 수확은 적고,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지만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십니다. 하늘에서 이슬이 그치고 가뭄이 듭니다.

현대인들이 그렇지 않나 생각됩니다. 열심히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공허하고 불안하고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먼저 “자기 행위를 살필지니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이루어가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하나님이 멈추시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위해 일하시면 풍성한 삶이 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8절)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중해야 할 일은 귀환 목적인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8절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즉 자신의 기쁨과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과 영광이 되어 주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와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통해 원하시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아닌 ‘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결과는 허무함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하나님의 기쁨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롬12: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의미 있는 인생, 기쁨 넘치는 인생의 길입니다.

감사하게도 학개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백성들이 순종합니다. 12절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3절 하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14절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에스라 1장에서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를 잘 살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삽시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책임져주시고 기쁨과 영광으로 채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