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0 | 매일성경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제물로 삼고”(21절)
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닫혔던 성전 문을 열고 우상으로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하게 하였습니다. 그 일이 마무리되자 이제는 성결케 된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또한 25절부터는 악기를 불고 찬양합니다. 즉 히스기야는 성전을 청소하고 성결하게 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전을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으로 가득 채웁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전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습니까? 우상이나 더러운 것들로 채워서는 안 됩니다.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안 되고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으로, 말씀과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가장 먼저 드린 제사는 속죄제입니다. 수송아지와 숫양, 어린 양과 숫 염소 각 일곱 마리씩 끌어와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해 속죄 제물로 삼아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바로 ‘죄’입니다.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이 일을 21절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명령”합니다. 웃시야 왕처럼 자신이 주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이들은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죄로 오염되어 있는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숫염소는 왕과 회중 앞으로 끌고 와 안수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숫염소에게 전가하는 행동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 숫염소가 제물되어 희생됨으로 백성들의 죄가 사해집니다.
우리가 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죄의 짐을 우리 각자가 지고 징벌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로 인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생명과 자유를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가장 귀한 복,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고, 살 수 없는 복은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평생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어 히스기야는 레위 사람들을 성전에 두고 악기를 연주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25절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이 명령한 대로” 진행합니다. 25절 하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령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시고, 선지자들이 다윗에게 명령해서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한 찬양단이 조직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앞선다고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모든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35절 하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전에서 섬기는 일이 순서대로 갖추어지니라”고 합니다. 열정이 클수록, 받은 은혜와 감격이 넘칠수록 말씀을 기준으로, 질서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다시 조직된 악기 연주자와 찬양하는 자들이 하나되어 찬양합니다. 이것이 27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면서부터 해서 28절 “번제를 마치기까지” 계속됩니다. 이 광경을 상상해보면 닫혔던 성전 문이 열리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회복됩니다. 그 가운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은혜와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9절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제사는 마쳤지만 하나님을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30절은 “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고 합니다.
이 예배의 은혜와 감격이 이 시대에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을 예배와 찬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찬양도 전심으로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회중이 제물과 감사제물을 가져오되”(31절)
히스기야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백성들에게 31절 “마땅히 나아와 제물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전으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감사제물을 드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통해 회복의 은혜를 받았다면 받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드리라는 겁니다. 그랬더니 백성들 가운데 “마음에 원하는 자”들이 자원해서 제물을 가져옵니다. 가져온 제물은 번제물과 화목제물인데요, 번제물보다 화목제물의 숫자가 많습니다. 33절 “또 구별하여 드린 소가 육백 마리요 양이 삼천 마리라” 이는 백성들의 감사가 넘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많은 제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짐승을 잡아 가죽을 벗기는 제사장이 부족합니다. 예배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할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자칫 기쁨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들이 나서서 부족한 부분을 채웁니다. 또한 다른 제사장들이 성결하게 하기까기 기다려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34절 하 “이는 레위 사람들의 성결하게 함이 제사장들보다 성심이 있었음이라”
역대기 저자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레위인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포로에서 돌아온 역대기 독자들에게도 레위인들이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들이 예배를 회복하는 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하는 일을 해야 하기에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레위인들이 사명을 잘 감당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 신앙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이들은 큰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지적하거나 다툼으로 이어지지 않고 부족함을 채워주고 기다려주는 성숙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공동체가 작은 문제가 큰 문제로 이어져 어려움을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 크기가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입니다. 부족을 채우며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36절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모두가 기쁨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가 성전입니다. 성결하게 하고 다른 헛된 것으로 채우지 말고 예배와 찬양,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풍성히 채워야 하겠습니다. 또한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에 반응해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드리는 삶이 더 복된 삶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며, 몸을 드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됩시다.
2025.10.17 | 매일성경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2절)
웃시야에 이어 요담이 25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통치합니다. 요담에 대한 평가는 2절입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웃시야의 전반기 통치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웃시야가 하나님의 기준을 어기고 함부로 분향하려 하다 나병이 걸려 격리된 삶을 지켜보았던 요담은 성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성전을 두려워해서 출입을 하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백성들이 부패했다고 보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성전 안에서의 봉사는 제사장의 역할이기에 제사장에게 맡기고 아버지처럼 정해진 기준을 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부패는 열왕기를 보면 요담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여전히 산당에서의 우상숭배가 진행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견해가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요담은 계속해서 바른 길을 걸은 왕으로 소개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요담의 업적 가운데 건축이 반복됩니다(3-4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요담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5절은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결과 암몬이 여러 해 조공을 바칩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암몬은 26:8절에서 이미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웃시야가 교만해서 나병에 걸린 사이 암몬이 유다의 손에서 벗어났고 요담이 다시 승리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요담의 삶을 6절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고 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바른 길을 걸었더니 하나님께서 점점 강하게 하셨습니다. 28장에 나오는 요담의 아들인 아하스는 스스로 강하고 부요하기 위해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점점 약해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강해지려고 우상숭배하거나 내가 앞서지 않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우리로 점점 강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야 할 바른 길은 본문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요담은 앞선 왕들처럼 통치 후반에 변질되지 않고 바른 길을 걷습니다. 요담은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16년의 통치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28:11절)
이어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그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습니다. 2절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본받아야 할 아버지는 본받지 않고 본받지 말아야 할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 바알을 만들어 섬깁니다. 그만큼 강하고 부하려는 욕망이 컸음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힌놈의 골짜기에서 자녀들을 불살라 제물로 드리는 일까지 행합니다. 몰렉이라는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온 나라 곳곳에 우상숭배가 만연하도록 했습니다.
5절의 시작은 “그러므로”입니다. 27:6절은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로 했는데, 아하스는 악한 길을 걸으므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갑니다. 5절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하나님이 이방인의 손에 넘기십니다.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또한 이스라엘 왕 베가의 손에 넘기십니다. 아이러니 한 것이 이스라엘 왕들의 우상을 섬겼는데(2절) 이스라엘 왕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이 전쟁으로 하루 아침에 군사 12만 명이 죽고 유력한 지도자들도 죽습니다. 또한 20만 명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사마리아로 향합니다. 이들을 노예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북이스라엘에 오뎃이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군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잘못 때문에 깨닫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는데, 과거 동족이었던 백성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포로로 끌고 오는 일은 잘못된 일이라는 겁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으니 사로잡은 유다 포로들을 놓아주라고 합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하나님을 외면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는 오뎃 선지자, 승리한 군사들에게 전리품을 포기하라는 것은 위험한 선포인데 오뎃은 하나님의 뜻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놀라운 것은 북이스라엘 군사들이 선지자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남유다 요아스 왕 때 하나님께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서 요아스의 우상숭배 잘못을 지적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때 요아스는 하나님의 사람인 스가랴를 죽입니다(24:20-22절). 또한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도 전쟁 승리 후 우상 숭배할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 돌아오라고 할 때 입을 다물라며 위협했습니다(25:15-16절). 그런데 놀랍게도 북이스라엘 군사들은 오뎃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를 통해 역대기 저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북이스라엘 군사들은 15절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고 합니다. 포로들은 선대하고 돌려보냅니다.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점점 강하고 형통하게 하십니다. 우리 삶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갈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됩시다.
2025.10.16 | 매일성경
●“웃시야가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4절)
아마샤에 이어 웃시야가 왕이 됩니다. 아버지 아마샤가 반역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에 웃시야는 어린 나이인 16세에 왕이 됩니다. 그리고 52년간을 통치합니다. 웃시야에 대한 이야기는 왕하14:21-22절과 15:1-7절에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에는 웃시야의 이름이 ‘아샤라’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등장하는 제사장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역대기는 웃시야라고 부릅니다.
웃시야에 대한 평가는 4절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입니다. 이 평가는 전체적인 평가가 아닌 아마샤와 웃시야의 통치 초반에 대한 평가입니다. 아마샤도 신실하게 시작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우상을 숭배하고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웃시야 역시 아버지의 길을 걷습니다.
웃시야가 정직하게 행한 이유를 5절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스가랴가 웃시야 곁에서 말씀으로 지도했습니다. 이때 웃시야는 하나님을 찾았고 그런 웃시야를 하나님은 형통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24:2절에도 나왔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웃시야의 할아버지인 요아스 왕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요아스가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요아스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실제로 여호야다 죽은 후 요아스는 급속하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합니다. 웃시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실패를 보면서 말씀을 밝히 아는 신실한 사람의 지도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말씀 붙들고 순종하는 삶으로 성숙하기 위함입니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형통함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6-15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먼저 유다의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서쪽으로는 블레셋을 점령하고 성읍을 건축합니다. 남쪽으로도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십니다. 동쪽으로는 암몬 사람들이 조공을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웃시야는 아마샤때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심지어는 광야에 망대와 물웅덩이를 만들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기릅니다. 산과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둡니다. 나라가 심히 부강했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져서 곳곳에 새로운 성읍을 만들고 거주합니다. 풍성하고 강성한 삶입니다.
군사력도 대단합니다. 큰 용사인 족장들을 중심으로 건장하고 싸움에 능한 군사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15절은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합니다. 새로운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어 나라를 견고하게 세웁니다.
이렇게 보면 웃시야 시대 부강함이 솔로몬 시대와 같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형통함이 웃시야의 능력이 아닌 7절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웃시야를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8절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15절 하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형통함과 강성함을 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25:8절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는 말씀처럼 아마샤도 군사력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히 도우셨는데, 웃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16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강성함이 웃시야에게 문제가 됩니다. 16절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계속해서 잘 될 때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까지 반복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통과 강성함이 교만을 가져오고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형통함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형통과 강성함을 겸손하게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의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만이 하도록 되어 있는 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하려 합니다. 왕으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리는데 제사장이 하는 일만 금지되어 있으니 그 일까지 행하려 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진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려 합니다. 심각한 죄악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사랴가 80명의 용맹한 제사장을 데리고 들어가 막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18절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이 내용이 역대기 저자가 당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 제사를 회복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욕심과 편리를 따라 행한다면 하나님 앞에 죄악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을 잘 지키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아사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향을 강행하려 하다 웃시야는 화를 냅니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깁니다. 나병은 부정한 질병으로 성전에 머물 수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성전에서 쫓겨납니다. 뿐만 아니라 21절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죽을 때까지 성전에서 끊어진 삶을 삽니다. 그리고 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고 조상들의 땅에 묻힙니다. 웃시야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만의 결과가 무섭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십니다. 그러나 형통함은 교만으로 이어져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형통함과 강성함 이전에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5.10.15 | 매일성경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14절)
아마샤는 모세의 율법을 기준으로 행동했던 왕입니다(4절). 또한 전쟁을 앞두고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능기 돕기도 하시고 능기 패하게도 하시는 하나님, 내려 놓은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런 아마샤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승리 이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14절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고 합니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승리한 왕은 패전국의 신상을 전리품으로 가져오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요소를 없애기 위해 신상을 가져오지 말고 깨뜨리고 불사르라고 하셨습니다(신7:5절). 그런데 아마샤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상을 가져와 자기 신으로 경배하며 섬깁니다.
아마샤가 왜 이렇게 어리석은 결정을 했는지 이유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에돔 사람들의 우상이 보기만 해도 아름답고 탐스러웠으며, 복을 줄 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은 전쟁에서는 승리는 주시는 분이지만, 물질적 풍요를 위해서는 다른 신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나라의 부강과 풍요를 위해서 우상을 가져와 섬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이유든 심각한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십니다. 곧바로 징계하지 않으시고 바른 길을 알려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선지자의 설명은 극히 상식적입니다. 이방의 신이 그들의 백성을 아마샤의 손에서 구원하지도 못한 무능한 신인데, 그런 신을 섬기며 우상에게 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맞아 죽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라고 협박합니다. 얼마 전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에 순종했던 아마샤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왜 아마샤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19절은 이스라엘 왕인 요아스의 입을 통해 알려줍니다. “네가 에돔 사람들을 쳤다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교만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잘 될 때가 더 위험합니다. 교만한 자들의 특징은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16절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20절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도 듣지 않고, 이스라엘 왕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조언도 듣지 않습니다.
아마샤의 아버지 요아스도 그랬습니다. 대제사장인 여호야다가 죽고 나서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은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감동시켜 생명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요아스는 듣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죽입니다. 그런 요아스를 하나님은 감찰하시고 신원하셔서 반역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마샤도 동일한 길을 걷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생명의 길, 형통의 길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복된 일입니다. 잘 듣고 순종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19절)
교만한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요아스 왕에게 사람을 보내 전쟁을 선포합니다. 아마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서, 신하들하고는 상의해서 전쟁을 결정했습니다. 어제 본문에 나왔듯 북이스라엘 용병들이 돌아가면서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한 것에 대한 보복 전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니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북이스라엘이 훨씬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결과가 뻔한 싸움입니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예화를 들어 전쟁을 만류합니다. 남유다를 가시나무에, 북이스라엘을 백향목에 비유하면서 가시나무가 백향목에서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는 어이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레바논 들짐승들이 가시나무를 짓밟을 것이라고 합니다. 말도 안 되고, 상대도 안 되는 싸움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만한 아마샤는 듣지 않고 전쟁을 실행합니다. 그 이유를 20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들이 에돔 신들에게 구하였으므로 그 대적의 손에 넘기려 하심이더라”고 합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아마샤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상을 숭배하는 아마샤를 대적의 손에 넘기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마샤는 8절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유다는 패배하여 도망하고 아마샤는 사로잡힙니다. 북이스라엘 군대는 예루살렘까지 진격해서 성벽 400규빗을 헐어버립니다. 200m의 성벽이 사라진 것은 안전을 위한 최후의 보루가 사라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의 기물과 왕궁의 재물을 빼앗기고 사람들로 포로로 끌려갑니다. 교만한 왕이 벌인 무모한 전쟁의 결과입니다.
25-28절은 아마샤의 마지막을 기록합니다. 특이한 내용은 북이스라엘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아마샤는 15년을 생존합니다. 이것은 은혜이며 하나님이 주신 회복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샤로 돌이켰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 아마샤는 27절 “아마샤가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로부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였으므로” 아버지처럼 반역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반역이 일어난 시점을 “아마샤로 돌아서서 여호와를 버린 후”라고 합니다. 24:20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마샤는 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고 유다 성읍에 묻힙니다. 그의 죽음이 영광스럽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끝이 납니다.
잘 될 때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안 될 때도 함께 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의 조언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특히 매일 묵상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2025.10.14 | 매일성경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2절)
요아스에 이어 아마샤가 왕이 됩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29년간을 통치합니다. 아마샤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2절입니다.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긍정적인 평가는 정직하게 행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마샤가 시작은 좋았지만 지속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일 본문인 14절부터 보면 우상을 숭배하고 아버지 요아스처럼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 않습니다.
여러 왕들의 모습에서 시작은 하나님과 함께 했지만, 지속하지 못하므로 문제가 됩니다. 바른 시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변함없는 꾸준한 신앙입니다. 이 말씀이 역대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방의 포로가 되었는가? 한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흔들리는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한 사람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온전케 하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걸었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이전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신실하게!’입니다.
아마샤가 정직하게 행하였을 때 하나님은 나라를 굳건하게 해주셨습니다. 아마샤는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을 처리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4절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함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반역자들은 7족을 멸한다고 합니다. 다시 반역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반역자들만 죽이고 자녀들은 죽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24:16절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까지 연좌제라는 제도가 있어서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잘못된 일에 연루되었다면 자녀들이 공직에 오르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래 전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의 죄 때문에 자녀가, 자녀의 죄 때문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에게서 끝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아마샤는 모세의 율법책대로 행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과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씀대로 조언하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말씀보다 분노와 감정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알지만 말씀과 상관없는 결정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샤는 관습이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동합니다. 이것이 견고한 나라, 견고한 인생의 길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시다.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9절)
아마샤는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집합니다. 남유다에서 20세 이상으로 전장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니 30만 명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돈을 주고 용병을 사들입니다. 은 100달란트를 주고 북이스라엘에서 큰 용사 10만 명을 고용합니다. 은 100달란트는 지금으로하면 약 40-50억의 거액에 해당합니다. 그만큼 전쟁에서의 승리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용병들과 함께 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도모하는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용병 데리고 전쟁에 나가면 아무리 힘써 싸워도 패배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8절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작은 군대로도 승리하지만,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아무리 큰 군대일지라도 패배합니다. 어제 본문은 요아스가 순종하지 않을 때 아람의 적은 군대를 유다의 심히 큰 군대가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였다고 합니다(24:24절). 그러니 용병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왕인 아마샤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이미 100달란트를 지불했는데 그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돈도 잃고, 전쟁 능력도 잃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손해가 뻔합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이때 다시 하나님의 사람이 말합니다. 9절 “여호와께서 능히 이보다 많은 것을 왕에게 주실 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마샤가 포기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아마샤는 용병들을 돌려보냅니다. 눈에 보이는 용병보다 보이지 않지만 도우시는 하나님, 더 많은 것으로 채우실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용병들은 심히 분노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한 13절을 보면 돌아가면서 유다 성읍들을 약탈하고 백성 3000명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합니다. 아마샤의 결정으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용병들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전쟁에 참가해서 얻을 전리품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로 보입니다. 이런 문제가 예상되었지만 아마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 아마샤에게 하나님은 적은 숫자로도 완전한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 신앙도 변함없이 신실합시다. 문제를 만나고 시험에 드는 일들을 만나지만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합시다. 때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손해인 것처럼 보이지만 도우시는 하나님, 더 많은 것으로 채우실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2025.10.13 | 매일성경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17절)
요아스 왕에게 대제사장인 여호야다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어린 요아스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냈으며 6년 동안 성전에서 안전하게 성장하게 했습니다. 요아스가 7살이 되던 해, 아달랴의 통치에 반역을 일으켜 요아스를 왕의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어린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지도 아래 바알 산당을 타파하고 성전 제사를 회복합니다. 특히 요아스는 오늘 본문 27절에서도 언급하는 것과 같이 성전을 보수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24:2절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라고 합니다. 14절도 그렇습니다.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에는 바른 길을 걸었는데, 죽은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17절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로 시작합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유다 방백들이 왕을 유혹해서 자신들의 말을 듣게 합니다. 그 내용이 18절인데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우상을 숭배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전 아달랴의 통치 아래서 우상 숭배하며 정치권력을 잡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요아스가 왕이 되고 여호야다가 실권을 행사하자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이제 여호야다가 죽자 세력을 모아 이전의 영광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전에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요아스가 우상숭배가 하나님 앞에 죄악인 줄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쉽게 방백들의 유혹에 넘어갔을까입니다. 어렸던 요아스는 당연히 여호야다의 지도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6절은 여호야다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이런 여호야다를 따라 요아스는 하나님과 성전을 사랑하는 통치를 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자신이 실권을 행사하기를 원했을 것이고, 실권을 잡았던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들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아스의 신앙은 스스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바른 기준을 세우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될 사람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전에는 여호야다를 따르는 것이 유익이었고, 이제는 우상 숭배하는 방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누군가의 말을 통해서만 신앙 생활하는 것의 위험성이 여기 있습니다. 기준이 분명하지 않으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지 못하고, 내 이익과 편리를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이것은 심각한 죄로 이어집니다.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22절)
하나님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해 유다에 진노를 쏟으십니다. 또한 선지자를 보내사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이들은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 중 하나가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입니다. 스가랴가 전한 말씀은 이렇습니다. 20절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유다가 형통하지 못한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다를 하나님도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버리심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이어지는 요아스의 죽음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가랴를 이들은 죽입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허락한 사람이 요아스 왕입니다. 스가랴를 죽은 장소가 21절 “여호와의 전 뜰 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여호야다의 아들을 죽인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입니다. 요아스는 함께 해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고,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또한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결과가 실패입니다. 스가랴는 죽으면서 22절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감찰하시고 신원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우상숭배의 결과 아람 군대가 유다를 쳐들어옵니다. 가장 먼저 23절 “모든 방백들을 다 죽이고”라고 하는데, 17절은 요아스를 우상숭배로 이끈 자들이 유다의 방백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합니다. 24절은 전쟁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라고 합니다. 아람 군대는 적고, 유다 군대는 심히 큰 군대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에 부강함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야다의 종교개혁에 대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아람의 적은 무리에게 패배를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넘기신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아무리 이스라엘 군대가 적어도 수많은 적군들을 하나님과 함께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수많은 군사로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전쟁에서 요아스는 크게 부상을 당합니다. 그런 요아스를 신하들이 반역하여 죽입니다. 그 이유를 25절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 스가랴를 죽였는데, 그 대가로 죽임을 당합니다. 또한 25절 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왕이지만 왕들의 묘실에 묻히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16절에서 여호야다를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라는 말씀과 대조를 이룹니다. 신실했던 여호야다는 왕이 아니었지만 왕의 묘실에 묻히고, 요아스는 왕이지만 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합니다. 요아스의 신실하지 않음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아스의 시작과 끝이 다릅니다. 스스로 말씀을 통해 신앙의 기준을 바르게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요아스와 유다를 실패로 이끈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형통하지 못한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는 삶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한 변하지 않는 신실함이 필요합니다.